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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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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후삼국시대~고려 초 현재의 순천인 승평군(昇平郡)을 기반으로 하는 호족이자 순천 박씨의 시조다.
박씨 성을 가지고 있으니 신라의 귀족으로서 순천에 지방관으로 부임했다가 난세를 맞아 호족화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후백제에서는 부마, 고려에서는 국구(國舅),[7] 견훤의 사위이면서 태조의 장인이 됐고 그의 아들 정종의 장인까지 되었다.
기록에 남은 견훤의 사위는 그와 지훤 2명인데 이 두 사람은 동일인이고 이름이 다르게 표기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견훤은 자식이 아주 많았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사위가 여러 명인 쪽이 더 자연스럽다. 박영규는 전남 동부인 순천쪽의 호족이고 지훤은 전남 서부인 광주쪽의 호족으로 지역부터가 다르다.
2. 생애[편집]
전라남도 승주(昇州)[8] 출신의 대호족이었다. 신라 왕조가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해룡산성(오늘날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에 할거했다고 한다. 후삼국시대 초중반 동안 후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대이자 대야성이 가까운 지리상의 요충지에 자리잡은 대호족이다보니 견훤이 사위로 삼았다. 박영규 역시 충성심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후백제 건국 이후에도 근거지인 승주에 주둔하며 928년 1월, 강주를 공격했다. 928년 5월에도 강주를 기습 공격했는데, 이에 강주 도독 최유문[9] 이 고자군으로 곡식을 운반하다 급히 돌아온 진경과 함께 박영규에 맞서 싸웠지만 삼백 여 명이 전사하였고 끝내 항복했다. 이후 강주는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후백제 땅으로 있었다.
견신검이 쿠데타로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지만 견훤이 고려로 탈출하자 박영규는 견신검에게 복속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견훤과 은밀히 연락했다. 결국 936년 1월 왕건에게 귀부 의사를 밝히는데 이 때 밀서에 왕건이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는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마침내 왕건이 견훤을 대동하고 일리천 전투에 나타났는데 이 때 견훤은 좌군에 진을 쳤고 전투는 고려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견훤은 얼마 안 가 등창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박영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인정받은 것은 물론 승주의 호족으로서 자연스레 고려 지배층으로 편입되었다. 일리천 전투에서의 공으로 벼슬이 삼중대광에 이르렀으며 많은 토지를 하사받았고 두 아들들도 공신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 왕건에게 딸인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을 시집보내 군 작위를 받았는데 동산원부인은 견훤의 외손녀이기도 했다. 이후 왕건의 아들 정종에게도 동산원부인의 친동생들인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를 시집보내 국구로서 매우 큰 권력을 누렸다.
3. 대중매체[편집]
후삼국시대~광종 시기까지 왕실의 외척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드러내서 그 시기를 다룬 사극에서도 꽤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온다. 생몰년도가 불명이지만 견훤의 망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왕건이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는 내용이 담긴 밀서를 보낸 역사적 사실 때문에 왕건 역의 배우보다 연상으로 나오는 편이다.
견훤의 사위라는 점 때문에 고려사를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학습만화 일부에서도 동명이인의 배우의 인생 대사인 "아..! 장인어른 왜 그러세요"를 시전하면서 나온다.
3.1. 태조 왕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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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제국의 아침[편집]
원로배우였던 김상순이 열연했다. 혜종대 초반부에 왕규와 왕식렴이 대립할 때는 왕요(정종)의 장인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왕식렴 파의 일원으로서 활동했으며, 정종대에는 김긍률과 같이 나라를 걱정하는 입장이였다가 광종대 이후에는 '무시 못할 세력을 가지고 있는 호족 A' 정도로 묘사되는데 노비 안검법이나 과거제 등에 반대하는 모습이 그려지나 그리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혜종과 정종의 장인인 김긍률과 자주 붙어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며, 극 후반에 평주 박씨 일족이 효은태자를 옹립하는 반란을 도모할 때 이들로부터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받은 것이 빌미가 되어 김긍률과 나란히 유배형에 처해진다. 최종화 직전 결국 광종이 독주를 보내면서 김긍률과 같이 사사되는 것으로 극에서 퇴장한다.[10]
3.3.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편집]
배우 최병모가 출연했다. 자신의 권력을 불리는데 혈안이 된 모습으로 나오며 금강[11] 의 딸이었던 우희의 정체를 알고 그녀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를 또 다시 협박하던 중 역관광당해 목숨을 잃고 만다.
[1] 전주 견씨[2] 태조 왕건의 제17비[3] 정종의 제1비[4] 정종의 제2비[5] 왕건이 박영규를 형님처럼 모시고 싶다는 기록으로 보아, 877년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867년생인 견훤의 사위였던 점을 고려하면 870년대생일 가능성이 있다.[6] 순천문화원의 "지명을 찾아서(1998년)" 27쪽에 의하면, 박영규의 묘가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박장골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묘지석에서는 박영규가 970년 6월 사망했고 부인은 견(甄)씨로 되어있다.[7] 국구는 왕의 장인을 말하는 것으로 박영규는 세 딸을 각각 태조와 정종에게 시집보냈다.[8] 오늘날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9] 1년 전 왕봉규를 무너뜨린 소격달의 고숙(姑叔)이다.[10] 하지만 드라마 흐름과 다르게 가문 전체를 멸족당한 건 아니라, 순천 박씨의 계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11] 견훤의 넷째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