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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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싱어송라이터,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7] , 편곡가, 프로듀서 및 음악 프로듀서, 비트메이커, DJ, 배우, 문필가, 라디오 진행자, 방송인.
배우와 음악, 집필, 이 모든 분야에서 인디 및 무명 생활을 다 거쳐 당시 대중가요 및 연예계를 꽉 잡고 있던 일본 아이돌 시장의 튼튼함 속에 파죽지세로 올라와[8] 음악, 배우, 방송인, 작가 이 모든 부분에서 상을 타고 메가히트친 대표작들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대중적으로 모두 다 성공해본 입지전적형 멀티 엔터테이너[9] 이다.
상당히 암흑기였던 2010년대 일본 대중음악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주는 국민적 팝 아이콘 중 한 명이었고, 그 당시를 이야기할 때 호시노 겐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력이 상당했었던 인물이라 여러 아티스트들에게 샤라웃 및 큰 선배취급을 받고 있으며, 요네즈 켄시와 함께 일본 솔로 싱어송라이터 입지 확립의 재시작을 열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2019년 역대 일본 남성 솔로로서는 5번째로 '5대 돔 투어'를 실시하고, 예매 당일 모든 돔의 좌석을 전석 매진시키며 일본 내에서 대중적으로 유명하고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 중 한 명[10] 으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코로나 사태 이후부터는 음악 및 배우 활동에 이전과 다른 다양한 변화를 주고 있으며, 2021년 아라가키 유이와의 결혼을 발표해 큰 화제가 되었고, 2023년 현재도 메이저 멀티 엔터테이너 중 한 명의 입지[11] 를 가지고 있다. 호시노 겐의 라디오 청취자가 10대부터 60대까지 있을 정도로 청년층부터 중장년층까지 고루고루 팬이 많은 연예인이기도 하다.
2. 데뷔 전[편집]
'호시노 겐(星野源)'이라는 이름은 출생명[12] 인데, 부모님은 '한자 한 글자', '외국인도 부르기 쉽다', '비 오는 수요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물에 관계가 있는 한자'라는 이유로 '겐(源)'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원래부터 부모님이 굉장한 음악 애호가였다. 생계 때문에 사이타마현의 어느 한 시골 동네에서 청과물 가게를 운영했던 서민 집안이었으나 부친은 재즈 피아노가 취미였고, 모친은 과거에 재즈 보컬리스트가 꿈이었던지라 산처럼 쌓인 재즈 레코드와 음악이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재즈와 소울 음악이 완전히 그의 생활 속에 있었다. 그렇게 어릴 때는 뭔지도 모른 채 재즈 뿐만 아니라 여러 블랙 뮤직(토미 플래너건, 니나 시몬, 마이클 잭슨, 아이즐리 브라더스, 마빈 게이, 등)의 노래 등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가장 처음 좋아하게 된 아티스트는 토미 플래너건이었다고.[13] 부친은 'SIGNAL' 이라는 동네의 재즈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었고, 부모님이랑 재즈 바나 조그만 라이브 공간에도 자주 갔었다.
유어릴 때 식탁에서 밥을 기다릴 때 젓가락을 양손에 하나씩 갖고 기다릴 수 없어서 식기를 젓가락으로 두드리고,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많아 이에 부모님이 '그렇게 식기를 두드리고 싶다면 드럼을 두드려라'는 말에 드럼을 초등학생 때 배우기 시작했다고 하며 # 통지표에 '독특하지만 침착성이 없습니다'라고 계속 받은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집에는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었고 피아노를 간간히 쳐보기는 했으나, 호시노 겐은 중학교 때 다들 기타를 치기 시작하여 본인도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음악한다니까 부친이 쓰던 기타를 내주는 등 남들보다 시작하기 쉬운 환경이었던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계속 들어왔던 재즈와 소울 음악을 듣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에, 학창 시절 재즈와 소울을 듣기는 했으나, 자신의 취향을 공유하지 못하고 당시 거의 모두가 들었던 록 음악을 연주하며 연습했다. 유니콘, B'z, KIRINJI 등의 록 밴드들을 좋아했고, 집에서 혼자 블루 하츠의 곡들이나 익스트림(Extreme)의 「More Than Words」 같은 곡을 듣고 카피하면서 놀았다고 한다.그때 저는 아무 꿈도 없고, 맨날 일단 그냥 살았던 것 같은데 재즈 뮤지션의 영상이 나오거나 해외 R&B/소울 뮤지션의 곡을 들으면 막 춤을 추고 그랬어요. 저는 그때 그 음악들 때문에 너무 구원을 많이 받아서. (앞으로의 꿈은) 제 음악으로 말하면, 어디 가 본 적이 없는 나라의 가정에 있는 아이가 제 곡으로 춤을 추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싶습니다. 뭔가 그때의 보답을 하고 싶어요.
그러나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는데, 호시노 겐은 소학교 및 중학교 시절 대인 관계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었고, 엄청나게 내성적이었으며, 따돌림과 망신을 계속 당하며 공황장애를 겪은 적이 있고, 학업측면에서도 거의 꼴지였을 정도로 다른 학생들보다 많이 부족했으며, 위축되거나 맨날 땅만 보고 걸었던 시절이 많았다. 학교를 빠지는 날도 많이 생겨 그렇게 그는 일반 학교에 익숙해지지 못했고 점점 더 고독하고 어두운 성격으로 고립하게 된다.
그렇게 부모님의 교육관에 따라 일반 학교랑은 다른 사립 대안학교인 지유노모리가쿠엔고등학교[14] 에 입학한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장애적인 증세가 있어 학교를 빠지고 집에서 못 나가는 날도 많았었다고 한다. 자유로운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기분은 초졸인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작곡은 14살 때 집에 있던 낡은 거트 기타로 단순한 노래를 가장 처음 만들어봤으며, 고등학생 때 반에서 인기 많은 친구가 "겐, 기타 치는 거면 내 가사에 곡 좀 붙여줘"(源君、ギター弾けるんだったら、僕の詞で曲を作ってよ)라고 부탁해서 곡을 본격적으로 쓴 것이 최초. 이후 자기 곡도 여러 개 썼지만 부끄러워서 발표 같은 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라이브도 고3 때까지 부끄러워서 못 했다고. 중학교 시절에 음악 뿐만 아니라 연극에도 관심을 가졌어서 연기 연습도 했는데, 고등학생 때 극단 오토나케이카쿠의 연극을 보고, 당시 내성적이었던 호시노 겐은 감동과 충격을 받아 이 극단의 워크숍에 참석하고, 연기에 대한 꿈을 강하게 가지게 된다.
고등학생 때부터 호시노 겐은 독립하여 자취를 시작하고, 여러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지유노모리가쿠엔고교를 다니고 연기 연습과 음악 연습을 계속한다. 이 당시에는 핫피 엔도, 호소노 하루오미, 오오타키 에이이치, 넘버 걸 등의 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가장 처음 살았던 방이 바퀴벌레랑 곱등이가 나오는 3평짜리, 월세 3.8만엔의 단칸방이었다고 한다.[15]
음악을 본격적으로 한 건 20세 때 자신이 리더가 되어 고등학교 동급생을 모아 인스트루멘탈 밴드 SAKEROCK을 2000년에 결성했을 때부터다. 처음부터 인스트루멘탈 밴드를 하려고 한 건 아니고, 원래는 오히려 유니콘처럼 시원시원하게 지르는 걸 좋아해서 곡도 그런 걸 썼지만 테이프에 녹음된 자기 노랫소리를 들은 후 급좌절해 본인의 목소리가 싫었고 노래하고 싶다고 말을 못했다고 한다. 또한 클리퍼드 브라운&맥스 로치의 앨범「Study In Brown(1955)」에 수록되어 있는 곡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고 인스트루멘탈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어린 나이에 독립하고 생계를 꾸리던 그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음악이었다. 궁핍하던 시절에도 앨범을 구매해 들었던, YMO의 멤버이자 히피 감성과 Exotica(이국적인 느낌의 이지 리스닝 음악)의 대가였던 호소노 하루오미의 오르가닉 스타일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열심히 돈을 모아 마림바를 구매하여 자신의 작은 방 안에 (식탁 대용으로) 넣어둔 것도 이 덕분이다. 현재(2018)의 호시노 겐을 대표하는 트랙 중 하나인 恋(사랑)과 時よ(시간이여), 'Continues' 모두 Exotica를 대중 친화적으로 녹여낸 곡들이다. #
외적인 체형을 포함해 뭐 하나 특출난 게 없었던 호시노 겐 특성상 스카우트 제의는 전혀 오지 않았고, 그렇게 여러 아르바이트는 물론이고 밴드 활동을 병행하면서 프리랜서로서 여러 연기 오디션을 보고 일부 연극에 참여하게 되며 잡지의 난외에 노게런티로 잡문을 쓰는 일을 계속 찾아다니며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