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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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제3대 황제.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태무제(太武帝)였으며, 휘는 도(燾)였다. 북쪽의 유연, 동쪽의 북연, 서쪽의 북량과 북하, 남쪽의 유송 등 사방의 적대국들을 정복하거나, 혹은 전쟁에서 이기고 439년 화북을 통일하여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열었던 북위 역사상 최고, 최강의 정복자 황제였다.
불교의 삼무일종법난이라 불리는 4대 법난 중에 자랑스러운(?) 선봉이자 필두, 대장으로 불린다. 성격이 용무엄혹(勇武嚴酷), 한마디로 용맹하면서도 엄청 칼날처럼 날카롭고, 혹독한 전형적인 군인같은 성격을 가진 참군인이었다.
2. 생애[편집]
태무제 탁발도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바로 군대를 이끌고 현 외몽골 일대의 유연을 침공하여 큰 타격을 가한 뒤, 이어 쉬지않고 서쪽의 북하(431년 멸망)와 동쪽의 북연(436년 멸망)까지 침공하여 정복하는 데 성공하면서 화북을 통일했다. 게다가 북량의 영토까지 차지하고(439), 서역 20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446년에는 불교 폐지, 즉 폐불의 조서를 발표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승려들은 모조리 군인들의 칼에 학살되거나, 갱살되었다. 배후에는 유교와 도교가 불교를 지구상에서 제거하려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도교가 이때 세계적으로 번성했다. 다만 크게 번성한 도교 종파인 '신천사도'의 창시자 구겸지는 북위의 불교 탄압에 오히려 반대했다."후한의 명제가 사악한 거짓에 빠져 오랑캐 귀신을 믿고 천도를 어지럽히니 이때부터 예의가 허물어지고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 이에 오랑캐 귀신을 소탕 박멸하여 옛날의 태평시대를 회복하려고 한다. 지금부터 감히 오랑캐 신을 믿거나 흙이나 나무로 사람 모양을 하여 섬기는 자는 가족을 모두 죽인다. 불교 형상과 경전은 모두 불태우고 승려는 늙고 젊음에 상관없이 다 죽이고, 묻어버린다."
하지만 모든 계책을 성공시켰으며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듯이 상황을 다 맞히던 당대 최고의 전략가인 최호를 살해하고 나서[3][5] 유송을 정벌하러 갔으나 군량 부족으로 후퇴했고, 도중에 유송의 대신 장질이 지키고 있었던 우이성을 침략했으나 끝내 정복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의 남정에서 군대의 절반을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다.
태무제는 북쪽 기병대와 가병들의 장강 도하를 위한 땟목 제조를 위해 갈대밭을 베어버리라고 명령했지만, 현명하게도 위험한 도하를 강행하는 대신, 다른 군사작전으로 공격하는 쪽을 선택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남조가 보여준 우월한 해전 지휘 능력과 선박제조술은 막대한 해전의 강점을 선사해주었다. 반면 북조 정권들은 기병술에 더 강했고, 상시적인 해군 전력을 유지하는데 익숙치 않았다. 북중국의 날카롭고 추운 기후는 적은 수의 조선공만을 배출했고, 그나마도 북쪽 조선공들은 상대적으로 얕은 북쪽 강들의 항행에 익숙한 소형 선박의 함대 제조에만 힘쓰는 경향이 있었다. 광활한 남쪽 강을 항행하는 남조 정권들의 함대와 교전하게 될 경우, 북조의 수군 함대는 침몰하게 될 가능성만 높을 뿐이었다.
이후 남정을 떠났을 때 황태자 탁발황에게 감국[6] 을 맡겼는데 탁발황은 휘하의 도성 등의 가신을 신임했다. 종애라는 태감(환관)과 도성은 자주 싸웠는데 태무제 탁발도가 남정을 끝내고 귀국하자 종애는 도성 등의 탁발황 휘하 군인들의 죄를 날조해서 보고했고, 태무제는 이들을 전부 죽였다. 자신의 군인들을 아버지인 황제가 죽이는 걸 본 태자 탁발황은 분노했는지 바로 병사했고, 태무제는 태자의 죽음에 괴로워했다. 452년, 환관 종애는 태무제의 군인들이 자신을 죽일까봐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고, 이에 그의 지지자들을 동원해 태무제를 독살했다. 태무제의 다음으로 즉위한 고종 문성제(제5대)때 불교 탄압 정책인 폐불 정책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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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윈강 석굴의 대불이 그의 얼굴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국교도 불교였고, 남북조 시대 내에서도 가장 불교를 숭배한 국가가 북위였으니 그럴 법하다.[2] 왕즉불(=왕이 곧 부처) 사상에 의거하여 불상의 얼굴 모델을 당대 통치자에서 따오는 것은 이 시대의 트렌드였다. 이와 비슷하게 룽먼 석굴의 노사나불은 무측천의 얼굴을 따왔다는 설이 있다.[3]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공식적인 원인은 국사를 편찬할 때 가감없이 기록해서 북위 제국의 잔혹하고 악마적인 역사를 다 적었고, 이걸 대로에 비석으로 바로 새겼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태자와 군 관원 문제로 다투기도 하는 등 가신으로서는 위험한 행동을 했다. 또한 유송을 정복하는 걸 반대하고 오로지 북하와 유연 등 오랑캐 제국들만 정복하길 주장한 것 등 한족으로서 그가 냈던 계략들이 전부 한족의 영광만을 위한 계책이었다는 점이다.[4] 아무리 감춰도 재위기간이나 생몰년은 숨기지 않았는지 북위의 황제들은 그래도 재위기간과 생몰년은 제대로 남아있는데 하나같이 단명한데다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후한 중기에서 말기까지와 동진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거기다가 북위 말기의 경우에는 막장 기록이 여러 건 등장한다.[5] 사실 이 국사 필화 사건으로 인하여 이후 북위의 사관을 포함한 관료들이 북위 탁발씨 황실에서 발생하는 잔인한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남조의 유송과 남제의 황실에서 벌어진 온갖 잔인한 사건들은 기록으로 남아서 훗날까지 전해진 것과 달리 북위 황실의 경우에는 당시 한족 관료들이 보기에 황음무도라고 볼 수 있는 선비족의 풍습이 상당히 남아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실 내부의 이야기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내전이 가득한 황족"이라는 등의 비난이 얼핏얼핏 훗날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북위 황족 내부의 비사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4] 하긴 위진남북조시대의 사회상과 정치 체제 자체가 폭군을 만들어낼 소지가 다분했고, 이런 분위기는 통일 왕조라고 하지만 사실상 마지막 남북조시대의 대제국이기도 한 수나라까지 이어진다.[6] 조선의 '대리청정'과 같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