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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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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의 제6대 국왕이다. 만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아 비운의 소년 군주라고도 불린다. 묘호는 단종(端宗), 시호는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10] , 휘는 홍위(弘暐).
세종의 적장손이자 문종과 현덕왕후의 적장남으로 태어나[11]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며 세종이 사망한 뒤 문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왕세자로 개봉(改封)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현덕왕후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고 할아버지 세종과 할머니 소헌왕후도 단종이 어렸을 때 사망했으며 마지막 남은 직계 존속인 부왕 문종마저 지병 등창의 재발과 악화로 승하하면서[12]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혈혈단신의 어린 나이(11~12세)로 보위에 올라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 고명대신들의 보좌를 받게 되었다.
즉위한 뒤 1년 후 숙부 수양대군이 반란(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자 반강제적으로 실권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왕위를 빼앗겼다. 상왕 재위기에 일어난 단종복위운동의 여파로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느낀 숙부 세조에 의해 폐위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하고 17살이 되던 해에는 끝내 그 곳에서 살해되었다.
2. 휘[편집]
본명은 이홍위(李弘暐)로 특이하게도 이름이 두 글자이다. 조선의 임금들 중 이름이 두 글자인 사람은 단종과 태종 둘뿐이고, 다른 왕들은 원래부터 외자였거나 외자로 개명했다.[13]
한국에서는 고려 때부터 피휘 때문에 임금이나 왕자군은 죄다 외자 이름을 써 왔고, 그 한 글자를 택할 때도 일상생활에 잘 사용하지 않는 글자를 엄선했다. 태종 이방원은 이름에 흔한 한자인 '꽃다울 방(芳)'과 '멀 원(遠)'을 썼지만 피휘를 신경쓰지 않았다.[14] 영조는 이름에 비교적 흔한 글자인 금(昑)이 들어갔기 때문에 자신의 본명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숨겼다고 한다. 자기 이름이 금(昑)이라고 하는데, 임금의 휘를 알게 된 신하가 글을 낭독하다가 금(昑)자가 나와 피휘 문제로 글을 계속 읽지를 못하자 영조는 그 사실을 알고 그냥 읽으라 직접 하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다만 조선 초기 임금(이성계, 이방과, 이방원)들은 고려 말기 때 태어난 사람으로 이름을 지을 때는 왕이 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자일 이유가 없었다. 철종 또한 그의 할아버지인 은언군[15] 이 천주학에 엮이고 역모로 몰려 서인(평민)으로 강등된 후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대부터는 군호조차 받지 못한, 왕위와는 거리가 매우 먼 상태였는지라 이름이 외자일 필요가 없었다. 고종은 아예 상태가 더 안 좋아, 전임인 철종과 무려 17촌이나 차이가 나는, 인조로부터 갈라져 나온 남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즉 태어날 때부터 임금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굳이 두 글자 이름을 지어 가진 사람은 단종이 유일하다. 다만 예전에는 태어날 때 짓는 이름과 족보에 올리는 이름이 달랐는데, 단종의 경우 태어날 때의 이름을 왕이 된 뒤 미처 바꾸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마 정국이 불안정하여 이름을 미처 바꾸지 못한 상태에서 바로 양위해 개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3. 정통성[편집]
먼저 조선사 27명의 임금을 거치며 적장자 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별탈 없이 왕위에 오른 임금은 오직 7명(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뿐이다. 그 중 단종은 유일하게 적장자 출신 왕세자의 아들로 태어난 적장자, 즉 적장손 출신 국왕으로,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 중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국왕이다. 아버지 문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장남이었고, 단종 본인 또한 문종이 세자 시절에 본 유일한 아들이다. 그리고 아버지 문종은 적장자이긴 했으나 문종이 태어난 1414년(태종 14년)에는 아직 큰아버지인 양녕대군이 세자였고 아버지인 충녕대군, 즉 세종은 아직 세자가 아닌 상태였다. 즉, 태어날 때는 원손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종이 태어난 1441년(세종 23년)에는 아버지인 문종이 세자였고, 할아버지인 세종이 왕이었다. 또한 할머니인 소헌왕후는 중전이었으며 어머니인 현덕왕후 또한 세자의 정실인 세자빈이었다.[16] 따라서 단종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원손(1441~1448)으로 시작하여 이후로 세손(1448~1450) - 세자(1450~1452) - 왕(1452~1455)을 모두 차례대로 거친 조선 유일의 국왕이다.[17]
이런 어마어마한 적통 케이스는 조선엔 당연히 단종 말고는 없고, 왕조 국가 사례를 통틀어도 이 정도 적통은 매우 드물다.[18]
단종 외에도 세손 시절을 거친 왕이 몇 명 있기는 한데, 현종의 경우 원손 - 세손 테크를 타긴 했지만 아버지인 효종이 아직 봉림대군일 때 태어났으며, 봉림대군의 형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엄연히 있기에 인조의 적장손도 아니었다.[19] 정조나 헌종의 경우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효명세자가 먼저 죽어 '원손 → 세손 → 바로 왕'의 테크를 탔다.[20] 게다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실부인이 아닌 후궁 영빈 이씨의 몸에서 난 서자였고 자신도 사도세자의 차남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도세자가 역적까진 아니어도 반쯤 죄인으로 죽은 상황이었다. 헌종 역시 아버지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죽어버려 세자 테크 트리를 밟지 못했다. 거기다가 정조나 헌종은 아버지(사도 세자)나 할아버지(영조, 순조)가 서출이라는 아쉬움이 있어서 단종과는 처첩제 기반 신분제적 측면에서 수준이 다르다. 장자가 일찍 죽는 경우야 흔하던 시대이니 장자가 아닌 것은 문제가 없으나, 적자가 아닌 것은 보이지 않는 미세한 차별 대우가 있었다.[21] 단종과 마찬가지로 정통성을 지닌 국왕이 숙종인데 숙종은 태어났을 때 아버지 현종이 세자가 아닌 왕이었기 때문에 원손 - 세손시절이 없이 원자 - 왕세자 - 왕 단계를 거쳤다.
단종의 할아버지 세종은 장자(양녕대군)[22] 는 아니나 어머니가 왕비인 적자[23] 였고, 세종의 아버지 태종도 장자는 아니나 역시 적자[24] 였다.
그러니 단종은 그야말로 고조할아버지이자 초대 군주인 태조의, 그 정실 소생 적자인 태종의, 그 정실 소생 적자인 세종의, 그 정실 소생 적장자인 문종의, 그 정실 소생 적장자(단종 본인)인 완벽한 적손이다. 이른바 '적통 OF THE 대통'인 셈.[25] 이 적통의 피는 13대 명종 대에서 끊긴다.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열네 살에 요절하고 다른 후사를 보지 못하자, 명종의 아버지인 중종의 서7남인 덕흥군의 적3남인 하성군(짧게 말해서 명종의 조카)이 방계로 왕위를 이으니 이가 바로 선조다.
그야말로 적자&적손+장자&장손+원손+세손+세자+왕이라는, 조선 역대 왕들 중 절대최강의 순도 100% 정통성을 자랑한다. 쉽게 말하면 왕의 큰 아들의 큰 아들(단종)인 셈. 이런 케이스는 조선 역사에서 단종 단 한명 밖에 없고, 중국 역사를 아무리 뒤지고 찾아봐도 흔치 않은 케이스다. 게다가 계유정난 이후 실권을 다 뺏겼지만 상왕까지 거쳤고, 이후 강등된 탓에 노산군이라는 팔자에도 없던 군호까지 받았다. 더불어 사후 숙종대의 단종 복위 과정에서 노산대군이라는 대군의 호도 받았다. 그야말로 왕족 남성이 파 볼 수 있는 모든 명함을 다 파 본 정말 유일한 왕인 셈이다.[26]
원래 세손, 세자, 왕 등은 따로 군호를 주지 않는다.[27] 우리가 아는 효명세자나 사도세자 같은 호칭은 죽고 난 다음 붙은 시호로, 원래 세손이나 세자는 동시대에 무조건 단 한 명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직위를 유지하거나 계승받는다면 본래 이름과 자기 혹은 타인이 별명처럼 붙여주는 이름 말고는 다른 호칭이 없다. 일례로 양녕대군으로 알려진, 태종의 첫 세자인 이제도 본래 이름 말고는 따로 호칭이 없었고[28] 이제가 폐세자되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고 나서야 양녕대군이란 대군의 호가 내려졌다. 그 유명한 연산군도 당시 성종의 적장자이기 때문에 본래는 세자로만 불렸으며 반정으로 폐위된 후 연산군으로 봉해진 것이다. 광해군은 다르다. 광해군은 선조의 서차남으로, 광해군에 먼저 봉해졌고, 임진왜란 발발한 다음 피난길에 긴급으로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608년(선조 41년) 선조 사후 왕이 되었으나 쿠데타로 폐위되는 바람에 묘호를 받지 못해 지금까지 왕자시절 군호인 광해군으로 불린다.
4. 비운의 소년 군주, 단종[편집]
태어나는 날부터 그의 앞날을 보여주는 듯한 불길한 일이 있었다. 단종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기쁨에 겨워 2급 이하의 죄수를 모두 사면하는 대사면 교지를 발표했는데, 이 교지를 다 읽기도 전에 용상 근처의 큰 초가 땅에 떨어져 버렸다. 세종 역시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지 그 초를 당장 치워 버리도록 명했다.
(전략) 교지를 읽기를 끝마치기 전에 전상(殿上)의 대촉(大燭)이 갑자기 땅에 떨어졌으므로, 빨리 철거하도록 명하였다.
이것이 불행의 전조였는지, 결국 다음날에 단종의 생모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고 얼마 안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것.
이 세자빈 권씨는 이후 현덕왕후로 사후 추존되어 소릉에 매장되는데,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한 화가 여기까지 미쳐 소릉이 강가로 이장된다. 이걸 다시 원래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 생육신 중의 남효온.
일각에서는 어머니 현덕왕후가 단종 출산 후 사망하지 않아 훗날 왕대비가 되었거나 혹은 할머니인 소헌왕후[29] 라도 세종, 문종 사후까지 살아서 대왕대비가 되었더라면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된 아들/손자인 단종을 수렴청정하여 보호했을 것이고,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어머니와 할머니 두 분 다 살아계셨거나 아버지 문종이 더 살아 주는 경우라면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최고의 시나리오였겠고.[30]
문종은 단종 이전에 2명의 아들을 보았으나, 이 두 아들도 어렸을 때 죽어[31] 단종이 문종의 유일한 아들이 되었다. 세종은 당시 세자(문종)가 어머니 소헌왕후의 3년상과 지나친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는 것을 알았지만, 만일의 경우 수렴청정을 할 왕실 최고 웃어른(대왕대비나 대비)이 없는 상태가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죽기 전 여러 신하들에게 이를 부탁했고,[32] 심지어 죽기 직전에는 김종서에게 군사를 이끌고 수도(한성(한양))로 돌아오라는 명까지 내렸다. 문종 역시 원로대신인 김종서 등에게 세자(단종)를 부탁했을 정도로 너무 약한 왕실의 기반을 염려하고 있었다.
단종을 직접 키운 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였다. 단종이 막 태어났을 때 단종이 태어나기 얼마 전에 혜빈이 아이를 낳은 상태라 혜빈 양씨가 단종의 유모가 되었다. 혜빈 양씨는 얼마 전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직접 단종에게 젖을 물렸다고 한다. 그리고 혜빈 양씨는 소헌왕후 사망 후 단종의 보호자로서 왕실에서의 힘이 상당히 강해졌다고 한다.
단종은 어릴 때 무척이나 총명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세종대왕이 실로 감탄했을 정도였다. 물론 세자나 세손에 대해서 총명하고 영특하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징그럽게 많이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언플일 수도 있으나, 황표정치 시절에도 할 말은 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는 모습을 보아[33] 세간에서 말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하고 어린 왕"의 이미지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리고 세조 정권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단종의 총기를 최대한 가리는 편이 유리함에도 불구하고 그 편린을 엿볼만한 장면들이 꽤 많이 남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장 비슷한 연배였던 이방석에 대해 실록에서의 취급이 어떤지만 봐도 차이가 확연하다.
단종의 영특함에 대한 세종의 인정이 단순히 손주를 향한 할아버지의 콩깍지가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증거는 계유정난 이후의 단종의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양대군 본인을 포함한 수양대군 일파는 '수양대군=주공단' 프레임을 씌웠는데, 단종은 직접 반포한 교서를 통해 이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주공은 형 주무왕의 승하 이후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조카 주성왕을 보좌한 섭정이자 당대의 명재상이었는데, 왕위에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성왕이 장성하자 겸허히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서 누대에 걸쳐 추앙을 받았을 뿐 아니라 공자가 가장 존경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주공과 수양대군을 동일시해버림으로써 주공이라는 울타리 안에 수양을 가둬버리려는 고도의 책략이었던 것.[34] 또한 수양대군에 대해 떠도는 유언비어를 공식 포고문을 통해 공론화한 것도 수양대군의 운신의 폭을 좁히려는 계산이었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수양 주공설'도 해당 포고문에서 나온 것. 좌우지간 허수아비로 전락한 10대 중반의 소년 왕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고급진 정치적 한 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상술하였듯 성년이 될 때까지 통치를 해 줄 왕실의 확고한 후견인(웃어른)이 없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왕들은 모두 즉위할 때 왕실의 어른인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이 살아 있었고, 그 중 숙종을 제외한 네 왕은 그 당시 제일 서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다. 아무리 가까운 왕족이라도, 어린 왕이 즉위했다고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역모죄로 역관광을 당하기 십상이다.[35]
하지만 단종의 할머니 소헌왕후는 할아버지 세종과 아버지 문종보다 먼저 사망했고, 어머니 현덕왕후도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해, 수렴청정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세종의 후궁들 중에선 가장 큰어른이었던 혜빈 양씨[36] 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려 했지만, 수양대군이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이면서 수렴청정의 명분도 잃었다.[37] 혜빈 양씨는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자식들과 함께 유배된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탓에 세종과 문종의 어린 단종을 보호, 보필해달라는 고명 유지를 받은 신하들의 힘이 강해지고 왕권은 약해졌다는 상투적인 서술이 등장하는데, 현실은 왕권vs신권의 이분법적 구도로 설명될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일단 김종서와 황보인은 신하들을 휘어잡는 막강한 세도가문 출신이 아니라, 국왕의 신임을 받아 정무적인 판단을 내리는 정승이 된 전형적인 행정관료들이었다. 오히려 젊은 관료들과 이들 고명 대신들과의 헤게모니 싸움이 눈에 띄는데, 이것부터가 '신권'이라는 단순한 개념이 오류임을 보여준다. 어쨌든 이는 김종서 등이 왕권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수양대군을 제대로 견제를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의 세력이 확장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8]
문종이 수양대군의 (쿠데타 조짐)행위를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고 하나,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했다. 심복대신들을 키워서 왕족을 견제하는 한편,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신하들을 고명대신으로 특별히 임명하여 어린 단종의 보좌를 간곡히 부탁했다.
다만 새 왕비를 들이지 않아 사후 단종에게 든든한 후원세력을 만들어주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정말 아쉽다는 평. 하지만 문정왕후의 경우를 보면, 계비를 들인다고 해서 꼭 후견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39] 그것도 문정왕후라는 특이한 케이스의 결과론일 뿐, 정희왕후 윤씨, 정순왕후 김씨[40] 등 수렴청정을 잘 해 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정희왕후는 자기 친손자의 후견인이었고, 정순왕후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경우가 다르다. 새로 들인 왕비가 아들을 낳는다면, 이래저래 위험부담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41] 어쨌든, 김종서 등 고명대신을 제외하면 고립무원인 단종에게 왕실 후견의 부재는 악재일 수밖에 없었다.
보다 확실한 솔루션이라면 문종의 계비보다도, 단종의 세자빈을 들이는 쪽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학자들은 문종이 세자빈 간택을 서둘렀다면, 특히 빵빵한 가문에서 골랐다면 수양대군의 쿠데타가 쉽지 않았으리라 보고 있다.[42] 문종도 이 점을 염려했는지, 본인의 재위 2년차에 단종을 위한 세자빈 간택령을 내리기는 했다. 문제는 이 때가 하필이면 문종 본인의 지병이 가장 악화되었을 때였다는 것. 결국 문종의 지병악화로 인해 세자빈 간택은 유야무야되어 버리고, 얼마 후 문종은 급사해 버린다.
할아버지인 세종대왕, 숙부인 수양대군, 사촌동생(!)인 예종[43] 은 11세, 사촌형인 의경세자가 12세에 장가를 갔고, 특히 예종은 11살에 바로 애아버지가 되어 버린 사례들이 많다. 문종도 마음만 먹었으면 어떻게든 세자빈까지 들일 수 있는 타이밍이 존재했다.
문종이 생전에 수양대군을 좀 더 견제했어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상술하였듯 문종이 아무것도 안 한 것도 아니며, 변명의 여지도 충분히 많다.
애초에 문종 본인의 왕권이 워낙 막강했다. 단명했다는 이미지와 달리, 문종은 아버지 세종대왕의 조력자로서 일찍부터 국정경험을 쌓기 시작했고, 특히 세종 후반 7년은 건강이 쇠약해진 세종을 대신해 국왕 노릇을 했다. 정통성, 풍부한 국정경험, 화려한 실적에서 오는 자신감, 그리고 문무대신들의 당연하고도 절대적인 충성을 받는 문종이 동생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왕과 비, 인수대비, 관상(영화) 등 사극, 영화 등의 매체에서 하나같이 문종을 병약하고 힘없는 임금으로 그리고, 수양대군이 대놓고 설치고 다니는 것으로 왜곡한 탓이 크다. 문종 생전에 수양대군은 큰형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존버만 탔을 뿐이다. 문종실록을 보면 수양은 전횡을 일삼기는커녕, 온갖 아부와 정성으로 열심히 문종의 비위를 짝짝꿍 맞추고 다녔으며, 문종 즉위 전부터 두 사람의 형제애가 매우 두터웠다는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성품이 인자한 문종의 입장에선 모든 것이 완벽한 자신을 깍듯이 모시며, 한없이 정겹게 구는 친동생을 무작정 의심하고 견제할 생각이 들 리가 없다.[44]
또한 수양대군의 세력은 문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단종 때도 경쟁세력들 중 가장 약한 축[45] 이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무척 안정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즉 여말선초나 무인정사 때처럼 대소신료들이 수시로 떼죽음을 당하는 막장상황이라 '생존'이 쿠데타의 가능성이 될 수 없는[46] , 태종~문종의 치세를 거치며 조선초기의 관학정치 시스템이 세련되게 정착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병혁파' 같은 살벌한 떡밥도 딱히 없었다. 때문에 당시 3당(김종서/황보인 등 고명대신파, 안평대군파, 수양대군파)은 조선의 다른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온건한[47] 정치적 경쟁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설마 누군가가, 그것도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심지어 수양대군의 세력 내에서조차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에 주저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래서 수양이 직접 선두에 서서 독려해야만 했다. 계유정난이 성공한 건 이런 시대배경 탓에 다들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덕이 컸다. 수양이 세종 재위시절부터 왕위를 노리는 듯한 발언을 몇 번 하기는 했지만, 세종과 문종은 그저 패기있는 둘째의 가벼운 호기 정도로만 여기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이 안정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유정난은 애초에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심지어 핑계조차 없는[48] ,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날벼락이자 역대급 양아치 짓이었다. 문종으로서는 자기에게 그토록 우애깊고 살갑게 구는 동생이 언제일지도 모르는 미래에 이런 정신나간 짓까지 할 수 있다고 예상하는 게 더 정신나간(?) 노릇이 아닐까.[49]
여하튼, 조선 27명 임금들 중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지니고 태어난 단종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불운한 임금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렇게까지 지독한 불운의 결과로 단종 1년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날 단종의 보호자, 지지자 대부분이 살해 당하거나[50] 유배를 당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것이다. 그 자리를 고스란히 차지한 수양대군의 세력은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후 수양에게 양위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하기 시작하였고, 오래지 않아 단종 3년인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밀려나고야 만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도 숙부 수양대군이 전권을 행사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는지 경복궁 자미당 난간을 보더니 서서 "할바마마께서 살아 계셨다면 나에 대한 사랑이 어찌 적겠는가?"라며 탄식하자 단종을 따르던 시종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 자미당에서 할아버지 세종을 떠올린 이유는, 세종이 말년에 자미당에서 거처했었기 때문.
이를 전해들은 수양대군과 그 부인 윤씨도 울었다고 실록의 이 날(1454년 11월 25일)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단종이 세종을 떠올리고 울었던 것은 수양에게 핍박받는 자신의 처지 때문인데, 정작 그 가해자이자 앞으로의 계획을 이미 다 짜 놓은 수양과 그 부인이 피해자인 단종을 순수하게 동정하여 눈물을 흘릴 리가 없다. 그저 가증스러운 악어의 눈물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년 후인 1456년(세조 2년), 그를 복위시키려는 사육신[51] 사건이 일어난다. 단종은 복위를 꾀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성삼문에게 칼을 하사하며 지지를 표명했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국문장에서 성삼문이 자신에게 단종이 칼을 주었다는 말을 한 순간, 단종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금성대군 등 계유정난의 화를 피해 살아 남은 몇 안 되는 지지자들도 이 일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상왕 단종은 팔자에도 없었던 군호인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머나먼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다. 두물머리를 비롯한 단종의 영월행 유배길 곳곳에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 온통 눈물바다였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는 영월 장릉(영월)에 꾸며진 단종기념관 등에도 잘 전시되어 있다. 영월로의 압송 임무를 수행한 금부도사 왕방연이 이때의 심정을 남긴 시조도 유명하다.
귀양지인 영월 청령포는 영월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육지의 섬'인 곳이다. 남한강의 지류인 영월 서강이 삼면을 둘러싸고, 유일한 육지에 접한 남쪽은 가파른 절벽이어서 도주가 거의 불가능한 곳이다. 현대에도 청령포에 들어가려면 나루터에서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연려실기술에는 단종을 영월로 압송한 금부도사가 왕방연으로 나오는데, 숙종실록에는 바로 이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는 임무 역시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그 때문인지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할 때는 차마 올리지 못하고, 그저 단종 앞에 엎드려 통곡하기만 하였다는 일화가 숙종실록과 야사에 함께 전해져 내려온다.
一自寃禽出帝宮 한 마리 슬픈 새 궁전을 나와
孤身隻影碧山中 외로운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이네
假眠夜夜眠無假 밤이 오고가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 1년이 오고가나 이 원한을 다하지 못하네
聲斷曉岑殘月白 새 지저귐 끊긴 새벽 남은 달빛은 흰데
血流春谷落花紅 봄 계곡에 핀 꽃은 피 같이 붉더라
天聾尙未聞哀訴 하늘은 귀가 멀었는가, 슬픈 기도는 듣지 못하고
何乃愁人耳獨聽 어찌 수심 깊은 내 귀에만 들려오는가
단종이 유배길에 잠시 들린 자규루[52]
에서 지은 시.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간)다
단종에겐 장자 계승의 원칙에 기인한 강력한 정통성, 그리고 세종과 문종이 여기저기 신경을 많이 쓴 덕분에 지지하는 이들은 많았다. 혜빈 양씨와 그녀의 아들들의 세력, 그 유명한 김종서, 황보인 등 세종의 고명대신들이 있었고 그 밖의 세종의 아들들 중 단종을 지지하는 이는 많았다. 큰 실정을 한 적도 없고 광해군이나 연산군처럼 적이 많았던 것도 아니라서 사육신, 생육신 같은 이도 있다. 거꾸로 수양을 지지하는 세종의 자식들도 적지 않았지만[54] 그러나 수양의 무자비한 칼날 앞에서 단종의 지지자들과 조력자들은 거의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발각되었고, 귀양을 간 후 사사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단종이 총애하던 문종의 부마 전 형조판서 영양위 정종(鄭悰)(경혜공주의 남편)도 마찬가지로 귀양보냈다가 역모가 들통나 능지처참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세조 이후의 조선은 연달아 어린 임금들이 즉위하게 되었다.[55] 예종이 18세에 즉위하였으며, 성종은 단종보다 약간 많은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만약 단종이 성종이 즉위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28세가 되는데,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유배 등의 사건이 없이 그가 계속 왕실에 남아 있었다면 그 이후의 왕위 승계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56] 참고로 그 뒤를 이은 연산군, 중종 역시 10대 나이에 즉위하였다.
한편, 정통성도 뛰어나고 지지기반도 분명 좋았지만 단지 왕실어른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게 명분이 되어 왕위도 찬탈당하고, 결국 종친에 불과한 세조의 세력이 지지를 받았던 것이기에 이를 멀리서나마 지켜본 조선왕실은 정비가 죽더라도 훗날 왕실어른, 즉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될 수 있는 계비를 무조건 맞이하는 것을 암묵적인 예법으로 삼기 시작했다. 훗날 인목왕후와 장렬왕후가 어린 나이에 당시 기준 자기 할아버지 뻘인 선조와 인조와 결혼한 것도, 숙종이 계비 인현왕후까지 사망한 뒤에도 또 계비 인원왕후를 맞이한것도, 영조가 나이 다 들어서 자식도 사실상 못 보는데도 본인의 증손자 뻘이기도 한 정순왕후를 맞이한것도 이 계유정난의 나비효과인 셈이다.
실제로 단종 다음으로 정통성이 무지막지한 숙종은 되려 할아버지인 효종의 정통성에 큰 흠집이 있었던 점, 큰 할아버지인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여전히 살아있었고, 그들이 더 왕위 계승에 적합 및 정통성이 있다는 인식이 아직도 남아있었던걸 감안하면 친어머니 명성왕후, 법적 증조모인 장렬왕후가 본인이 즉위 이후 및 성년이 될때까지도 살다가 승하한 것은 매우 큰 행운이었던 셈이다. 만약 이 두 여인이 숙종 즉위 전에 현종 대에 일찌감치 다 사망했다면 숙종은 오히려 명분적으로도 단종 대에 비해 본인부터 크게 밀렸기에 왕위에 어떤 위협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57]
5. 비극적인 죽음과 그 후[편집]
1457년 11월 16일(음력 세조 3년 10월 21일)에 금성대군의 사사와 장인 송현수(宋玹壽)의 교형이 결정되자, 단종은 나중에 영월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사사 역시 이때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고달픈 유배 생활의 최후였다.
흔히 영월 청령포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청령포에는 몇 달 머물지 않았고, 여름이라서 홍수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곧 영월 관아 내의 객사로 옮겨 졌으며 단종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5.1. 죽음[편집]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이 장인 송현수와 숙부 금성대군의 죽음을 듣자 슬픔을 못 이겨 목을 매고 자살하였고, 후에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승정원일기나 이후 무덤을 방치해 둔 것, 그리고 후대 왕들의 기록을 보면 타살이 확실해 보이고, 아마도 사약을 거부한 후 타살로 추측된다. 선조실록에 기대승이 경연 때 단종 사망 당시 영의정이던 정인지를 비판하면서 금부도사가 사약을 주었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 사약기록이 의금부에 남아 있고 당시 사형장면을 현지인이 기록하였고 이것을 관찰사가 보았다는 것 등을 내세운 것으로 보아, 사약을 받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실제로 사약을 받은 사람이 약발이 잘 받지 않거나 반항하거나 하여 참살이나 교살로 직접 죽이는 경우가 적지는 않았지만, 단종의 경우에는 스스로의 의지로 사약을 거부하다가 끝내 타살을 당한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사약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 사약은 문자 그대로(賜, 줄 사) 임금이 신체를 온전히 보존하는 죽음을 내리는 은사의 개념이었는데, 단종은 세조의 이런 '하사품'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했다는 이야기이다.
숙종실록 및 야사에서는, 사약을 들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도 단종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의 발앞에 꿇어 엎드려 울기만 하자, 옆에 있던 노비가 제 딴에는 공을 세워 보겠답시고 활줄을 풀어 들어 나와 단종을 직접 교살하겠다고 했다가 그 직후 칠공(七孔, 눈, 코, 귀, 입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는 이야기도 숙종의 언급 중에 나온다.실록 유명 만화인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다.
참고로 이 교살설에 따르면 한 가지 버전이 더 있다. 정당한 왕인 단종이 사약을 마실 수는 없어 거부하고, 그 대신 자신은 방에 들어가 앉아 있고, 활줄을 자신의 목에 감고 밖으로 내어 당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뜻을 몰랐던 하인이 아무 생각없이 있는 힘껏 당겨 사망했다는 이야기이다. 후일담으로 이걸 알게 된 하인이 죄책감을 이기지 못 하고 자살했다고 한다. 물론 이때는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고 죽는 건 덤이다.
5.2. 시신[편집]
단종이 죽은 뒤에는 그 시신을 영월의 호방(지방 아전)인 엄흥도(嚴興道)가 남몰래 거두어 매장했다. 이에 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다.
우승지 신상(申鏛)을 보내 노산군(魯山君)의 묘에 치제(致祭)[58]
하였다.사신은 논한다. 이미 수호군(守護軍)을 정했고 또 내신(內臣)을 보내 치제하였으니, 이는 어진 덕으로서 또한 족히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일이나, 유독 후사(後嗣) 세우는 일을 빼놓으니 사림(士林)들의 애통이 심했는데, 간사한 의논이 김응기(金應箕)에게서 발단되고 이맥에게서 확대되었던 것이다.
또 논한다. 신상(申鏛)이 와서 복명하고, 김안국과 함께 말하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묘는 영월군 서쪽 5리 길 곁에 있는데 높이가 겨우 두 자쯤 되고, 여러 무덤이 곁에 총총했으나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능이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嚴興道)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 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哀傷)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실록 27권, 중종 11년 12월 10일 병진 2번째기사, 우승지 신상을 보내어 노산군의 묘에 치제하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 영월부사가 부임하는 날에 급사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때문에 영월로 부임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영월은 폐읍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한 대담한 사람이 영월부사를 자청하여 부임하였다.
부임 첫 날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더니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소년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신임 부사가 곧 단종임을 직감하고 부복하니 단종은 "내가 죽을 때 목을 조른 활줄이 아직 남아있어 목이 갑갑해 그것을 풀어달라고 하려고 왔는데 지금까지의 영월부사들은 겁이 많아서 나를 보자마자 급사했다"는 것이다.
신임 영월부사가 단종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를 묻자 단종은 "엄흥도 호장이 알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은 홀연히 사라졌다. 다음 날 영월부사가 엄흥도 호장을 불러 전날의 이야기를 해주자 엄흥도는 자신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밝힌다.
역사 기록이나 설화 양쪽 다 엄흥도가 단종을 장사지낸 후 자취를 감췄다고 하므로 이건 말이 맞지 않는데 설화의 다른 버전 중에는 꿈에서 단종이 영월부사에게 엄흥도를 찾아가라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는 내용도 있다. 단종의 무덤을 파보니 과연 활줄이 목에 얽혀 있어 활줄을 푼 뒤 다시 묻고 정중히 제사 올렸다고 한다. 그 후 영월부사가 급사하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월의 관리들이 여럿 죽는 일이 벌어졌는데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영월 군수로 부임한 뒤 제문을 지어 단종의 넋을 위로했고 그 뒤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선조수정실록 14년 2월 1일 7번째 기사)[59]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걸 보면 장화홍련전이나 박문수 전설 같은 것에서 종종 나오는 애꿎은 사또 쇼크사시키는 귀신의 원조인 듯.
다른 이야기도 있다. 엄흥도와 그의 아들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매장할 곳을 찾아 헤맸으나 눈보라가 내리치는 엄중설한이라 땅이 모두 얼어 붙어 무덤을 파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 때 어디선가 노루 1마리가 홀연히 나타나 눈밭에 앉아 잠시 쉬고 가니 그 눈 녹은 자리를 파 단종의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노루가 눈밭에서 쉬고 갔을 리 없겠으나 약관도 채 되지 않아 권력다툼에 의해 짧은 생을 마감한 소년 왕과 눈보라 치는 설원의 가냘픈 노루 1마리는 어째 서로가 닮은 이미지가 아닐까 한다. 훗날 복위된 단종의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조정에서 지관을 보내어 장릉의 지세를 살폈는데 실제로 가본 지관들은 엄흥도가 임시방편으로 모셨던 그 자리가 이미 천하길지라는 것을 알고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왕릉의 격식에 맞추어 고쳤다고 한다.
엄흥도 암매장 전설이 모두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 엄흥도가 숨었다는 이야기도 없고 암매장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고을 아전 1명이 매장하고 무덤 쓰면 그걸로 예를 갖춰서 매장했다고 판단할 여지도 <중종실록> 편찬자 기준에서는 충분하다. 비참한 사망 과정까지 논할 필요도 없이 단종이 죽고 60년이나 지난 시점까지 무덤 위치 이야기가 이렇게 돌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므로 암매장했을지라도 그리 문제가 안 되고 엄흥도를 찾으려고 했던 흔적도 이 시기에는 없다.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단종이 복위된 다음 숙종 시기를 거친[60] 민담과 설화들은 이렇게 안 끝난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몰래 묻을 때 자신의 노모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61] 관과 수의를 썼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후환을 두려워해 그를 말리자 "옳은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괜찮다."는 폭풍간지 대사를 남기며 강행하고야 만다. 매장을 마친 후 엄흥도는 그 길로 가족들과 함께 영월을 떠나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엄흥도의 일가족이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던 주변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았으며 현지 주민들은 단종이 묻힌 무덤을 묘가 아닌 왕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엄흥도는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이듬해에 공조좌랑에 추증되었고 영조 때 공조참의, 공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때는 장릉배식록에 포함되었고 순조 33년(1833년)에는 공조판서로 추증되었다. 6부 중 공조로 추증되었던 것은 왕릉의 조영(건설)을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였으며 엄흥도의 일을 왕릉 조성으로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고종 14년(1877년)에는 '충의공'이란 시호와 함께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이란 정승급 벼슬이 추증된다. 엄흥도가 원래 지방의 미관 말직이었던 점에 비추어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낸 그의 충의를 후세가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알 만하다. 세조가 얼마나 살벌하게 집권했는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신과 일가족의 목숨을 걸고 한 일이니 말이다.
생육신 중 하나였던 조려가 단종의 죽음을 전해듣고 영월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했다는 말도 있다. 이 때 강물이 불어서 영월로 건너가지 못한 조려가 통곡을 하자 호랑이가 나타나서 등에 태워 강을 건넜다는 설화도 존재한다.
5.3. 복권[편집]
한동안 단종의 폐위와 죽음은 정치적인 금기가 되었다. 이는 세조 다음의 왕들이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들이기 때문이다.[62]
하지만 유교 이념에 반하는[63] 무력과 강압에 의지한 정변과 그로 인한 강제 폐위, 그리고 사사는 조선의 성리학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무도한 짓이었다. 단종이 당한 이 모든 수모에 대한 명분마저 전무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때문에 단종의 사후에도 그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게 된다. 폭정과 실정이라는 해명거리가 있는 연산군[64] 과 광해군[65] 과 달리 단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라 어린 나이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17살에 반정 세력들에 의해 폐위되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살아생전 폭정과 실정을 저지를 기회조차도 가져보지 못했다.
연산군이 일으킨 무오사화의 계기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로도 사림에서 복권 논의가 나왔다. 사림에서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서인과 노론에서 적극적으로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며[66]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에 대한 사대부들의 지지 여론 형성에 나서며 단종에 대한 복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림이 단종 복권에 적극적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단종이 당한 비극들은 이전에 조선의 주도권을 거머쥐고 뒤흔든 훈구 세력들의 만행이었고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친조카의 정당한 왕위를 강제로 찬탈한 일은 아무리 조선의 선대 임금이 했다고 할지라도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어떤 일이든 명목과 그 명목에 합당한 본분을 갖추어야 한다고 인식하는 사림들과는 맞을 수가 없었다.[67] 계유정난을 적극적으로 미화했던 훈구파 세력이 서인에 흡수되어 계속 조선의 지배층으로 남아있기는 했지만, 애초에 서인 자체가 사림파에서 갈라져나온 거라서 결국 서인 내 훈구파계 후손들조차도 더 이상 계유정난을 대놓고 미화하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을 이끄는 지식인/지배층인 사림들의 단종 복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중종대 소릉 복위, 노산묘에 대한 치제 거행, 노산군묘에 대한 수리와 치제 등으로 이어지며 점점 단종 복권의 여론이 형성되었다.
결국 숙종 7년(1681년) 노산대군으로 승격된 후 숙종 24년(1698년) 단종으로 복위/추존되었으며 동시에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 송씨에게 '정순'이라는 시호도 함께 올렸다. 무력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단종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무인석이 없다.[68]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것은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었기에,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
5.4. 무덤과 제사[편집]
단종의 첫 무덤은 크기도 작고, 단종의 것임을 숨기기 위해 인근에 다른 무덤이 많은 곳에 묻은 것으로 보아 세조실록에서 말하는 "예로써 장사지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죽은 후 금성대군과 같이 왕실 족보에서도 삭제당한 것도 타살설과 이 견해를 함께 뒷받침한다.
다만, 중종 대까지 단종의 능(장릉, 복권 전에는 '노산군 묘')을 아무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단지 무덤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중종 대에 '노산군 묘'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그때까지 80대의 고령으로서 생존해 있던 단종의 비 정순왕후(중종실록 내에서는 '노산군 부인') 때문이다. 중종은 당시 송씨의 딱한 처지를 듣고 재산을 새로 보태주는가 하면,[69] 단종에 대해서도 최초로 제사를 지내주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면 이런 빠른 처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의 무덤을 잘 챙겨준 중종 자신은 임진왜란 때 능이 도굴되는 바람에 시신이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한양에서 영월까지 따라와 그를 모셨던 궁녀들은 단종이 세상을 떠나자 모두 강물에 뛰어내려 자결했다는 식의 전설이 만들어져서, 훗날 숙종대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그 궁녀들을 제사 지내는 단도 만들어졌다. 워낙 비극적인 장면이라 몇몇 사극에서도 이를 연출하기도 했지만, 궁녀는 내명부에 등록되어 궁궐 안에서만 일하게 되어 있는데, 폐위되고 부인과도 강제로 생이별하며 머나먼 영월까지 끌려가야 했던 (왕도 아닌) '노산군'을 궁녀가 따라가 모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전설이 당연한 듯 통했다는 건 그만큼 세간의 관심과 동정이 매우 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궁중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왕실 족보에서도 제외되고 없는 단종의 제사를 왕실에서 지내줄 리는 없었다. 대신 생육신을 포함한 여러 충신이나 단종의 살아남은 일부 혈육들이 제각각 제사를 모시기는 했다. 공식적으로는 단종의 조카인 정미수[70] 와 그 자손들이 단종의 제사를 지냈으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가에서 치르는 제사였을 뿐이다.[71]
단종의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여러 조선 왕릉과는 달리 경기도가 아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위치한다.# 참고로 북한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정종의 후릉, 그리고 왕릉의 제식을 갖추지 못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는 세계유산이 아니다.
신기하게도 장릉 주변의 소나무는 마치 절을 하듯 장릉 방향으로 굽어져 있다. 정말로 장릉에 가면 볼 수 있다. 특히 능역 근처에 가면 단종의 능을 향해 유난히 기울어진 소나무가 한 그루 남아 있는데, 이 소나무를 '충절송'이라고 부른다.[72]
살아 생전에 노산군으로 강등되었기 때문에 종묘 신위에서도 빠져있었고 왕실족보에서도 빠져있었다. 그러나 숙종이 추증과 복위를 승인함에 따라 뒤늦게 공식적으로 종묘 신위에 포함되어 역대 선대왕의 신위와 나란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단종 신위는 종묘 정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녕전에 모셔진 유일한 조선 국왕의 신위이다.
5.5. 추모[편집]
단종이 죽은 영월 일대에서는 민간에서 단종이 죽고 태백산의 산신령이 되었다는 믿음이 퍼졌다. 실제로 아직까지도 이 일대의 무속인들은 태백산신 아기대왕을 섬기는 이들이 많은데, 이게 바로 단종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대에선 산신제를 올리면서 태백산신제라는 이름으로, 그것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치러 와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태백산신제에서는 소를 잡아서 그 고기를 올렸다는 점이 특기할만한 점이다. 당시 소는 농업의 근간이라하여 함부로 잡지 못했고,[73] 소를 잡아 그 고기를 쓰는 제사는 왕에게만 올리는 것이었다. 민간에서 소를 잡는 제사는 태백산신제가 유일하다시피 하는데, 민간에서 산신령에 대한 민간신앙으로 가장하여 단종에게 왕의 예로 제사를 올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제사가 매년 군 관아뿐만 아니라 시골에서 리(里)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가령 녹전리서낭제 등이 있다.[74] 단종이 공식적으로 복원되기 전까지는 그를 언급하거나 기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를 알고도 백성들이 이렇게까지 지극정성으로 목숨 걸고 단종을 모셨다는 것은, 그만큼 비운의 어린 왕으로서 크나큰 동정을 얻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 태백산신제는 상당히 큰 규모를 유지하며 계속 명맥을 이어갔다. 영월 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이 산신제를 보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통에 관련된 지명까지 남아 있을 정도. 여러 형태의 태백산신제는 오늘날에도 계승이 되어 산신제만 무려 8가지, 서낭제가 5가지, 한풀이굿 2가지가 잘 유지되고 있다.(참고자료: 영월문화원 홈페이지) 영월군의 공식축제인 단종문화제(매년 양력 4월 하순)도 태백산신제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데, 사육신제와 함께 매년 지내고 있는 제사이자 중요한 지방축제이다.
영월 젊은층들이 인식하는 단종문화제는 축하행사에 유명한 연예인들[75] 이 오고, 국장행렬재현에서 봉사활동 시간을 쌓고, 야시장에서 간식을 먹을 수 있고, 바이킹 등 임시로 설치된 각종 놀이기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일 때문에 혹시나 수업[76] 을 빠지고 가는 것을 방지하려 교사들이 순찰을 돈다.
6. 가족관계[편집]
7. 직접 쓴 글과 시[편집]
영월군 객사인 동헌에서 머물 때 지은 시이다. 관풍매죽루에 올라 시를 읊었다. 이 시 구절을 듣고 울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단종의 무덤인 노릉에 관한 책인 노릉지에 실려있다.영월군의 누각에서 지음
달 밝은 밤 두견새 우는데
시름겨워 누각에 기대었네
네 울음소리 슬퍼 나 듣기 괴롭구나
네 소리 없으면 내 시름없을 것을
이 세상 괴로운 이에게 말을 전하니
춘삼월 자규루에는 부디 오르지 마소
영월군의 누각에서 지음
외로운 몸 외딴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들 길 없고
해마다 한을 끝내려 하나 끝없는 한이네
산봉우리에 울음소리 끊오지니 새벽달이 비추고
봄 골짜기에 피 흐르니 붉은 꽃이 떨어진다
하늘은 귀 먹어서 하소연 못 듣는데
서러운 몸 어쩌다 귀만 홀로 밝은가
8. 전설[편집]
8.1. 피끝마을 전설[편집]
한편 단종의 작은 아버지이자 세조의 동생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계유정난에 반발, 단종 복위 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본인을 포함하여 관련자들은 물론 해당 지역의 백성들까지 모조리 멸절당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정축지변'이라 한다. 정축지변 자체가 실제가 아니라 단종 복위 운동에 대한 전설이지만, 그만큼 당시 세조의 찬탈 과정과 단종 복위 운동을 겪으면서 멸절당한 왕족이나 양반 계층들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 세조의 찬탈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자세한 설명은 피끝마을 항목 참조
8.2. 추익한 전설[편집]
추익한은 불안한 마음에 단종의 거처로 달려갔지만, 단종은 사약을 받고 죽은 후였다. 추익한은 울면서 단종의 환상을 보았던 강가로 달려가서는 거기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때 추익한의 나이는 75세였다.[83] 이 때문에 추익한은 사후에 벼슬을 하사받았으며 이에 유래하여 단종은 민간신앙에서 태백산의 산신령으로 여겨진다. 덧붙어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의 산신령이라고.# 하지만 역대 한성부윤 중 추익한이라는 사람은 없는 걸로 보아[84] 후대의 창작으로 보인다.
8.3. 현덕왕후 전설[편집]
단종 본인에게 해당되는 일은 아니지만, 단종을 폐위시켰던 세조는 이후 현덕왕후의 유령에 시달렸다고 한다. 세조는 꿈 속에서 현덕왕후(문종의 비, 단종의 어머니)가 뱉은 침을 맞았고, 이 때문에 그 이후로 침 맞은 자리를 시작으로 온 몸에 종기가 생겼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는 큰어머니(현덕왕후)의 유령에 시달리다 죽었다.
다만 이 내용은 야사이고, 정사의 기록에서는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먼저 죽었다. 왕과 비에서는 "꿈에 형수님이 피를 흘리며 나타나서는 '네놈이 내 아들을 죽이려 하니 본보기로 네 아들을 데려간다'고 말했다"는 세조의 대사를 통해 정사와 야사를 적절하게 섞었다. 자세한 내용은 세조 항목 참고. 참고로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1달 정도 일찍 죽었는데, 이 때문인지 왕과 비에서는 단종을 죽인 걸 의경세자의 죽음에 대한 세조의 복수로 각색.
8.4. 영월부사의 고뇌[편집]
단종은 폐위되어 유배된 후 때때로 인근 정자에 나아가 경치를 구경하곤 했는데, 영월부사가 사사건건 간섭하며 괴롭히자 결국 괴로운 마음에 경치 구경마저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후로 영월부사가 외출할 때마다 어디서인지 모르게 돌팔매가 계속 날아왔다. 단종을 동정하던 인근 주민들이 괘씸한 마음에 부사에게 던진 것이었다고. 하지만 동정심에 단종에게 잘해줬다가는 조정에서 벌을 받을 수도 있었고, 그렇다고 단종을 괴롭히자니 민중의 시선이 싸늘했기에 사람들은 영월부사 자리를 매우 어렵게 여겼는지, 새 영월 부사가 부임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죽고 말았다는 괴이한 헛소문까지 퍼졌을 정도였다.
8.5. 정효준 전설[편집]
단종의 조카인 정미수의 후손을, 단종의 혼령이 혼인을 맺어줬다는 야사가 있다. 정미수의 후손들은 대대로 단종과 정순왕후의 제사를 지켜왔는데, 정효준의 대에 이르러서는 벼슬도 하지 못해 가세가 매우 기울었다. 정효준은 3번이나 결혼했지만, 부인들이 모두 일찍 죽고 자식도 남기지 못해 늙은 홀아비로 살아가는 비참한 처지였다. 그나마 부사(府使)를 지낸 친구 이진향과 교류하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정효준과 이진향이 함께 장기를 두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정효준이 이진향에게 "자네의 딸과 결혼해 자네의 사위가 될 수 없겠나"라고 질문했다. 이에 이진향은 "황당한 일을 다 본다"며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런데 그날밤 이진향의 꿈 속에 단종이 국왕의 모습으로 나타나, "정효준과 너의 딸을 결혼시켜라"라고 명했다. 이진향은 꿈 속에서는 그리하겠다고 했지만,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이라 부인과 상의했다. 당연히 부인은 "가난뱅이 홀아비와 딸을 결혼시킬 수 있냐"며 거절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 꿈속에서 다시 단종이 나타나 "왜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느냐"며 부인에게 곤장을 때렸고, 결국 정효준의 청혼을 수락해야 했다.[85] 그런데 그 이후, 정효준도 "나 역시 꿈 속에 단종이 나타나 '이진향의 딸과 결혼하라'고 명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정효준은 이진향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엔 아들들을 낳아서 모두 높은 벼슬을 하고, 정효준 역시 높은 벼슬을 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다.
해당 전설은 야사에 따른 것으로, 정효준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역임하고 해풍군으로 추서된 실존인물이다.
또한 정효준의 묘에 세워진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47351&cid=62132&categoryId=62132 정효준은 3번의 상처(부인의 죽음) 이후 4번째 부인으로 경상우병마절도사 이진경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나온다. 부사(府使)라는 정식벼슬은 없으며, 있다하더라도 고려조의 벼슬이기에, 야사에서의 부사라는 의미는 현재로 따지면 지자체장 쯤으로 봐야 하는데, 절도사는 장군의 개념이므로 이또한 실재역사와는 다르므로 틀린 정보가 되겠다.https://blog.naver.com/roaltlf/223083241082 이진경이 이진향으로 소개된 부분은, 경(卿)자와 향(鄕)자가 비슷한 데서 나오는 인식의 오류로 보인다.
야사에는 정효준이 이진경의 딸과 결혼하기 전 3번의 상처와 함께 자손조차 없다고 되어있지만, 죽은 처들과의 관계에서 자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처인 이진경의 딸이 정효준에게 출가하여 5남2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자신의 친자식보다 전처의 자식을 더 지극히 보살폈다는 내용이 비문에 나오기 때문이다.
고 고우영 화백의 작품 "오백년"에서도 해당 야사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8.6. 의미[편집]
위의 야사나 민담들도 그렇고 전설도 그렇고 단종은 조선 왕 중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남긴 왕인데, 이것은 그만큼 단종의 생애가 민중들의 동정을 받았고, 수양대군 일당이 얼마나 민중들에게 미움을 받았는지를 시사하는 예다. 당장 숙종 때 단종 복위를 논하면서도 "단종의 일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는 백성이 없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도 보아 이러한 단종에 대한 동정심은 사림과 백성을 막론하고 광범위한 여론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종합해서 정리해 보면 혈연 때문에 개고생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실제로 아직도 강원도 영월군에서는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단종제와 사육신제는 영월의 명물로 홍보되고 있다.
유시민은 알쓸신잡 영월편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 결코 옳지 못했던 세조에 대한 민중의 역사적 단죄라고 해석했다. 백성들로서는 단종이 계유정난을 겪지 않고 오래 집권했다고 해서 할아버지나 아버지 정도의 군주가 되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고 단종 자신의 집권기 동안 무언가 자신들을 위한 업적을 그렇게 많이 남겨준 것도 없었을망정,[86] 특별히 어떤 정치적 실책이나 정통성의 흠결도 없이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 죽음을 맞은 희생양이기에 더욱 그를 추모하고 동시에 그럴싸한 좋은 목표를 내세우며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부정한 방법과 수단을 정당화하는 일이 역사에 또 일어나선 안 된다는 생각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는 것.[87]
9. 어진[편집]
10. 대중매체[편집]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저자인 만화가 박시백의 그림이다.)
10.1. 영화/드라마[편집]
- 단독 작품으론 1929년에 소설가 이광수가 쓴 《단종애사》가 있는데, 1956년에 전창근 감독과 유치진 작가가 처음으로 영화화했다. 1963년에도 이규웅 감독과 이서구 작가가 리메이크했으며 1956년판은 배우 황해남이, 1963년판에선 김운하가 각각 연기했다.
- 1959년작 연극 《대수양》에선 여배우 조미령과 옥경희가 더블캐스팅 방식으로 연기했다.
- 1968년작 영화 《풍랑객》에선 배우 박기범이 연기했다.
- 1970년작 영화 《세조대왕》에선 배우 송재호가 연기했다.
- 1971년작 영화 《나를 버리시나이까》에선 아역배우 김정훈이 연기했다.
- 1980년작 KBS-TV 일요사극 《파천무》에서는 여성 아역배우 윤유선이 단종을 연기했다. 수양대군의 야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천연덕스럽게 수양대군과 팔씨름을 하고[89] 문종이 승하하자 신하들이 어서 곤룡포를 입고 보위에 오를 것을 간청하자 눈물을 흘리며 누나에게 "누님 제가 꼭 왕이 되어야 하나요?"라고 하는 모습이 상당히 안타깝다. 이 드라마에서 수양대군은 김흥기, 성삼문은 임혁, 김종서는 신구이다. 공교롭게도 훗날 용의 눈물에서는 김흥기가 이방석의 충신 정도전으로 임혁은 정안대군을 도와 이방석을 제거하는데 앞장선 하륜으로 나오게 된다. 그리고 왕과 비에서는 신구가 양녕대군을 맡아 김종서의 살해를 강력히 주장하는 역할로 나온다.
- 1980년작 MBC 드라마 《고운 님 여의옵고》에선 아역배우 손창민이 연기했다.
- 1984년작 영화 《사약》에선 배우 이재학이 연기했다.
- 1983년작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뿌리깊은 나무'에선 이민우가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설중매'에선 아역배우 신성원이 연기했다.
- 1990년 KBS2 드라마 파천무에서는 문종의 생존시 아역으로는 장덕수[90] 가, 중반기의 소년 왕때는 윤선빈이 각각 연기했다.
- 1994년 KBS2 드라마 《한명회》에선 아역배우 정태우가 연기했는데, 1998년 1TV 대하드라마 왕과 비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91]
- 1995년 1월 2일자 KBS1 《역사의 라이벌》에선 배우 윤준식이 연기했다.
- 2007년 SBS 드라마 왕과 나에서는 배우 이풍운이 단종을 연기했다.
- 2011년 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는 배우 노태엽이 단종 역을 맡았다.
-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와 2013년작 영화 관상에서는 배우 채상우[92] 가 단종 역을 맡았다.
- 2019년 영화 나랏말싸미에서는 정시율이 세종(송강호)의 어린 세손, 즉 단종 역을 맡았다.
10.2. 소설/웹툰[편집]
- 김종훈의 데뷔작 살생부에서는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이후 세조에 대한 복수에 눈이 멀어 주인공인 길도의 동생을 외면하는 바람에 이에 빡친 길도는 단종복위음모를 세조와 한명회에게 다 밀고하여 실제 역사대로 유배 이후 자살을 하게된다. 창작물에서 비극성만 강조되는 기존의 모습과 달리 상당히 교활한 모습을 많이 보인다.
- 그 외에도 단종을 주인공으로 해 수양대군의 반정을 막아내고 실제 역사에선 세조에 의해 제거될 인재들과 강력한 정통성을 무기로 조선의 부흥을 그리는 대체역사물이 많이 있다. 죽지 않는 왕-무왕 단종, 군에서 종으로, 종에서 조로 등이 대표적 사례.
11. 여담[편집]
- 단종 2년인 1454년 단종이 도통사(都統使)에게 명하여 청계산(淸溪山)에서 사냥하게 하였는데, 이때 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와 낭발아한(浪孛兒罕)·이귀야(李貴也) 등 여러 여진족 족장들이 따라갔다고 한다. 이때 여진족들은 태상왕(太上王), 즉 태조 이성계가 다시 나온 줄 알고 내알(來謁)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당시 조선과 여진족들의 관계 그리고 이성계의 여진족들에 대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만주 또한 부르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청계산에서 사냥하다 또 한편으로는 단종 3년인 1455년에 여진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호구 조사까지 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조선의 편집증적인 여진 기록의 일례.
- 고종 황제의 칭제 이전의 (왕 취급을 받는) 조선 왕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으로부터 받은 시호가 없는 왕이다. 고종이 칭제건원을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기 이전의 조선왕들은 연산군, 광해군 같은 왕 취급을 하지 않는 폐주가 아닌 이상 모두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았는데 오직 단종만이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지 못했다. 숙종이 단종을 복권하면서 청나라 측에 단종의 시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93] 그래서 단종은 아직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 취급을 받을 때의 임금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으로부터 받은 시호가 없는 왕이다.
- 권오창 화백이 표준영정을 제작하였다.#
- 단종실록은 단종이 즉위하였던 시절 단종의 행적과 그 시절 왕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한 실록이었는데 단종이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폐위되고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당초에는 노산군일기로 격하되어 기록되었다.[94] 단종 이후에도 10대 연산군과 15대 광해군이 반정으로 축출되고 왕권까지 상실하면서 당시까지는 연산군, 광해군과 함께 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되는 임금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대 숙종이 단종 추존을 승인하게 되면서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제목만 바뀌었을 뿐 내부 서술은 계속해서 노산군으로 기록되며 당시 수양대군을 세조라 적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95] 어쨌든 실록이 아닌 일기로 기록되는 임금은 연산군과 광해군만 남게 되었다.
12. 관련 문서[편집]
- 계룡산 초혼각지
- 단종대왕실록부록찬집청의궤
- 단종실록
- 단종애사
- 마도 4호선 수중발굴 조선시대 유물 일괄
- 사육신
- 생육신
- 애장왕
- 정업원
- 피끝마을
-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 헌종
- 홍무정운역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