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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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편집]
訓民正音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이라고 부르는 대상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하나는 1443년 음력 12월(양력 1444년 1월)에 세종대왕이 만든 한국어의 표기 체계, 즉 오늘날의 한글을 창제 당시에 부른 이름이고, 또 하나는 1446년 9월[1] 에 발간된 책 이름이다. 여기서는 후자, 즉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설명한다.
2. 서문[편집]
훈민정음 서문은 본래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를 당대의 한국어로 번역(언해)한 서문이 세조연간에 발행된 훈민정음 언해본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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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례본 원문
訓民正音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언해본 원문
世솅〮宗조ᇰ御ᅌᅥᆼ〮製졩〮訓훈〮民민正져ᇰ〮音ᅙᅳᆷ나랏〮말〯ᄊᆞ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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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서르ᄉᆞᄆᆞᆺ디아니ᄒᆞᆯᄊᆡ
이런젼ᄎᆞ로어린百ᄇᆡᆨ姓셔ᇰ이니르고져호ᇙ배이셔도
ᄆᆞᄎᆞᆷ내제ᄠᅳ들시러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
내이ᄅᆞᆯ為윙ᄒᆞ야어엿비너겨
새로스믈여듧字ᄍᆞᆼᄅᆞᆯ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ᆷ마다ᄒᆡᅇᅧ수ᄫᅵ니겨날로ᄡᅮ메便뼌安ᅙᅡᆫ킈ᄒᆞ고져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
현대어
훈민정음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5]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쓰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 현전하는 해례본의 원문에는 易, 耳 대신에 昜, 矣 글자가 쓰여 있으나, 이는 찢겨나간 부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오기(誤記)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문서로.
- 中國은 '중심이 되는 나라' 정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좁게는 중원 일대를 근거로 하는 왕조를 가리키며, 넓게는 역대 중화제국이 스스로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명나라를 가리킨다.국립국어원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에는 '중국' 밑에 주석이 붙어 있으며, 이렇게 되어 있다. "중국은 황제 계신 나라이니 우리나라에서 보통 강남(江南)이라 하느니라." 명나라의 수도는 북경이었지만, 처음에는 남경에서 건국되었기 때문에 강남이라는 이칭을 갖고 있었다. 중국(中國)이 '나라 안', 즉 지역끼리 언어 호환이 안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훈민정음 언해본에서 "중국과 달라서"로 기록되어 있어서 '나라 안'이라는 주장은 틀린 주장이다. 즉, 지금의 중국을 지칭하는 거라 볼 수 있다.
- 文字는 전통적으로 한자를 칭하는 표현으로, 최소한 설문해자 때부터 등장한다(비슷한 맥락으로 한문은 원래 文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홍윤표 전 연세대 교수는 원문의 文字가 뜻하는 것이 글자 또는 한자가 아니라 '한자로 된 숙어나 성구(成句) 또는 문장'이라고 한다. '문자 쓰고 앉아 있네' 같은 표현의 '문자'와 같다고 한다. 즉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문 구(句)·문장과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으로 (한문 구·문장을 쓸 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능히 말할 수가 없다'라고 한다. 또한 왜 '문자'를 새로 만들었는데 훈민정문(文)이나 훈민정자(字)가 아니라 훈민정음(音)인지도 이 점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에 그의 구체적 주장은 이 글의 4쪽부터 13쪽, 그리고 여기로.
- '통하지'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은 'ᄉᆞᄆᆞᆺ디'인데, 이는 중세국어의 'ᄉᆞᄆᆞᆾ다'의 활용형으로, 직역하면 '사무치지'에 해당한다. 현대 국어에서 '사무치다'는 '깊이 스며들다'라는 뜻이지만, 중세 한국어에서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녀 '통하다'를 뜻하는 말로 널리 쓰였다.
- '어리석은'이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은 '어린'인데, 이는 '성년이 되지 않음'을 뜻하는 게 아니고 '어리석다'의 옛 표현이 '어리다'였다. 다만, 현대에 '어리석다'가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와는 거리가 있으며, 여기서 '어리석은 백성'은 문자 그대로의 해석인 '멍청한 백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와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한 '배우지 못한 백성'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 '능히'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은 '시러'인데, 직역하면 '얻어'('실어'가 아니다)이다.[6] 중세 한국어의 '싣다'는 현대 한국어의 '싣다'의 뜻을 지닌 것과 '얻다'라는 뜻을 지닌 것이 두 종류 있었다. 이 단어에서 파생부사 '시러곰'(능히)이 생겼다.
- '사람이'라고 된 부분의 언해 부분을 직역하면 '놈이'이다.(위의 원문에 보면 '노미'라는 표기가 보일 것이다.) 당대의 '놈'은 비속어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키는 평칭이었다는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者'를 '경우' 또는 '(~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정요일, 2008).
- '펴디몯ᄒᆞᇙ노미하니라'에서 '하니라'는 '많으니라'를 의미한다. 오늘날에 'do'의 의미로 쓰는 '하다'는 'ᄒᆞ다'였다. 경제성장기 서울 방언에서 동사 '하다'가 '허다'처럼 들리는 것이 이 표기의 잔재다.
- '젼ᄎᆞ로'는 이두에서는 '詮次以'로 썼으며, 본래 뜻은 '순서에 따라'였으나 '까닭으로'라는 뜻으로 의미가 변화했다.
3. 관련 서적[편집]
3.1. 해례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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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때 간행한 최초의 원본과 동일한 훈민정음의 판본이다. 이에 '훈민정음 원본'이라고 불리기도 하나, 다만 현재 남아있어 대한민국의 국보 겸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훈민정음 간송본 역시 세종연간에 발행된 첫 판본으로 보기는 어렵기에, 역사학계에서는 '원본'이라고 부르지는 않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해례(解例)란,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문자 창제 과정을 종합해 기록하였다는 의미이다.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세조 때 간행된 아래의 언해본만 존재하였는데, 언해본에는 한글의 제작 원리를 기록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까지만 해도 “한글 자모는 한옥 창살을 보고 만든 것”이라는 등 온갖 루머가 난무했다.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 자음은 인체의 발음기관을 본뜬 것이고, 한글 모음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배치해 만들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흔히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훈민정음 원본은 한문 서적이다. 한글 창제 당시 한글은 문자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존재하던 한문으로 한글을 해설해야 했다.
원문과 해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3.2. 언해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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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으로 기록된 해례본을 훈민정음을 이용해 옮긴(언해, 諺解) 책. 현재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은 1459년(세조 5년)에 발간된 《월인석보》의 권두에 수록된 것이다. 세종대왕의 서문, 본문(예의) 부분이 수록되어 있고, 해례본에 있는 제자해(製字解)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한문(+현토)+언해'의 방식으로 쓰여 있는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나랏말싸미…'도 언해본에 훈민정음으로 수록된 서문의 첫 구절이다. 흔히 훈민정음의 모습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월인석보 외의 언해본으로 2종(박승빈 본, 일본 궁내청 소장본)이 더 현전하지만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다만 현대의 학자들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직후에도 훈민정음 언해본은 존재하였을 것이라 추측하여 왔다. 위 두 그림 중 아래 그림이 실제 《월인석보》에 실린 내용이고 원본의 전체를 보고 싶다면 여기로. 위의 그림은 창제 당시의 것으로 추측되는 모습을 국어사학회에서 디지털 기술로 재구성한 것이다. 관련 기사. 서울대 김주원 교수의 저서 《훈민정음》(2013)에도 관련 서술이 나온다.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일단 제목이 《훈민정음》과 《세종어제 훈민정음》으로 각각 다르다. 또한 아래의 《월인석보》에 실린 언해 부분[7] 의 첫 네 줄은 같은 책 다른 대목의 언해 부분과 글자체나 글자 간격 등이 상당히 다르다. 전자가 뭔가 더 각진 글씨인 데다 글자를 욱여넣은 듯한 모습이며 여타 대목에서는 한 줄에 작은 글자 16자가 들어가지만 첫 네 행에서만은 20자까지 들어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세조 시대에 《월인석보》가 발간되었으므로 선대 왕 세종이 직접 지었다는 뜻인 '세종어제'를 추가하는 과정에서 글자 수가 늘어나 목판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즉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그냥 《훈민정음》이라는 제목을 단 채로 위 그림과 같이 가지런한 언해가 붙었을 것이지만 세조 시대에 발간된 《월인석보》에 실린 《훈민정음》에는 '세종어제'를 추가하면서 언해 부분에도 글자를 추가로 욱여넣었던 것. 사실 '세종' 등의 묘호는 임금이 죽은 뒤에야 붙었으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쓰인 책에 '세종어제'라는 말이 쓰였을 리 만무하다.
2012년 10월 9일 한글날에 네이버에서 디지타이징 버전으로 무료 공개한 버전은 국어사학회에서 재구한 위 버전이 아닌 《월인석보》에 실린 모습인 아래 버전이다. 보러 가기3.3. 예의본[편집]
해례(解例)와 예의(例義)가 모두 포함된 해례본과 달리 예의 부분만 들어 있는 것을 예의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예의본은 단행본이 아니라, 《세종실록》과 《월인석보》에 실린 한글번역본인 언해본이 있다. 《예의본》은 1940년에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처음 발견되기 이전에 훈민정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일차적 문헌이었다.3.3.1. 실록본[편집]
《훈민정음》의 본문은 《세종실록》에도 수록되었다. 해례본에는 실려 있는 '해례'를 제외한 '세종 서문', '본문(예의)', '정인지 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이를 실록본이라고 따로 칭하기도 한다.4. 여담[편집]
- 훈민정음 해례본에 일종의 이스터 에그가 있다는 식의 설이 있다. 해례본의 아음(어금닛소리, 연구개음)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ㄱ을 설명하는 글자로 임금 君(군) 자를, ㄲ을 설명하는 글자로 아기룡 虯(규<뀨ᇢ) 자를, ㅋ을 설명하는 글자로 즐거울 快(쾌<쾡)자를, ㆁ을 설명하는 글자로 일 業(업<ᅌᅥᆸ) 자를 사용했는데 이를 합치면 君虯快業(군규쾌업), 곧 임금과 아기룡이 즐겁게 일을 이루었다는 뜻이 된다는 것. KBS 역사저널 그날
- 언해본에서 '中國'의 한글 표기인 '듕귁'은 반중, 중까 성향 누리꾼들이 중국을 지칭할 때 종종 쓰이기도 한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태종의 죽음으로 극이 끝난 관계로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충녕대군이 이미 문자 창제에 뜻을 가지고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에게 "소제가 문자를 창제하면 형님의 치세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식으로 언급된다.
-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극 최후반부의 중요 사건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반대 상소 한 장 올리고 말았던 최만리가 유생들을 동원한다거나 수양대군을 꼬드겨 세종 대신 옹립하려 한다거나 명나라 환관들이 창제를 저지하기 위해 암약한다거나 장영실과 최해산이 기여한다거나[8] 하는 등 역사상 사실과 다르게 각색한 내용들이 많지만, 문자를 창제하는 과정에서의 연구방법이나 고민 등이 꽤나 상세하게 나온다. 문자를 모두 완성하고서 신하들 앞에서 자모의 원리와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은 명장면이며 교육 자료로도 쓸만하다. 훈민정음 반포식 장면 또한 규모있게 나온다.
-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이 새 글자의 이름을 짓기 위해 고심하다가 民音訓正(민음훈정 : 백성의 소리를 새김이 마땅하다)을 쓴 후 애너그램을 시도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같은 세계관의 육룡이 나르샤 최종화에 훈민정음 반포 직전 백성들에게 미리 유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분이는 이를 보고 삼봉이 끝내 만들지 못해 아쉬워했던, 백성과의 소통 수단이 생긴 것을 삼봉이 알면 정말 기뻐했을 것이라 한다. 그 와중 삼봉의 이름을 팔아 훈민정음 반포를 비난하는 사대부에게 나긋나긋 질책하는 장면이 백미. 이 장면은 정확히 말해 문자가 생겨서가 아니라 빠른 시간 내에 익힐 수 있는 문자가 생겼기 때문에 기뻐한 것이다. 삼봉이 백성과의 소통을 끝내 풀지 못했던 건 글자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백성은 '생산'을 담당하기에 몇 천자나 되는 글자를 외울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9] 그런데 새로이 만들어진 글자는 28자밖에 되질 않으니 바쁜 백성들도 빠른 시간 내에 외울 수 있고,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그러나 뿌리깊은 나무 마지막회를 확인해보면 밀본은 정도전의 뜻을 헤아리긴커녕 훈민정음을 계집이나 쓰는 천한 글자로 깎아내리고 실제 역사에서도 창제 이후 훈민정음 취급은 그리 다르지 않다. 오늘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것은 창제된 시기를 생각해보면 그리 길지 않다.
-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는 세종과 문종의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실제 기계로 고안해낸 장영실이 명나라의 기술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명나라 사신에 의해 압송되자 세종이 자신이 탈 장영실이 만든 안여(임금이 타는 가마)에 하자를 내어 안여가 뒤집히는 사고를 유발한다. 이후 명나라에 죄인 장영실을 직접 문초하겠다고 알리고 사면하려는데,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권신들이 문자 제작을 그만두면 장영실의 사면에 힘을 실어주겠다고 권한다. 결국 장영실은 자신이 훈민정음 반포의 걸림돌이 될 것을 알고 자청하여 곤장 100대를 맞은 이후 역사에서 모습을 감췄고 4년 후 훈민정음이 반포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6. 관련 문서[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6-19 21:21:51에 나무위키 훈민정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1] 반포일 기준 1446년 9월 상한(10일) → 양력 환산 → 1446년 10월 9일[2] 물론 현대 학자들의 재구음이므로 실제 발음이 이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래아를 /ʌ/, ㅟ를 /uj/로 발음하는 등 보다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나, 아직 전반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ㄹ의 발음을 일률적으로 /l/로 발음하는 등 여전히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유튜버 본인이 이에 대한 영상을 제작하였다. #[3] 이 또한 이렇게 소리를 낸 것 같다고 추측한 것이지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아래아를 /a/로 발음하고 ㅟ를 /wi/로 발음하는 등 최신 연구 결과와는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이 영상에서는 '달아'에서의 ㅇ을 음가가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최근 언어학계에서는 ㄹ 뒤에서 분철 표기된 ㅇ이 /ɦ/ 또는 /ɣ/의 음가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4] 御製. 임금이 몸소 짓거나 만듦[5] 참고로 이 부분의 의미는 현대의 '어리석다'가 가지는 부정적인 뉘앙스와는 거리가 있으며, 여기서 '어리석은/어린 백성'은 한자와 한문 교육을 받지 못한 '배우지 못한/불쌍한 백성'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6] 이 '얻어'도 한문 부분의 '할 수 있다'라 뜻을 가진 得(얻을 득)을 직역한 것이다.[7] 한 줄에 우리말 작은 글자로 두 행을 써 넣은 부분이다.[8] 이 와중에 최해산은 명 환관들에게 해를 입기까지 한다.[9] 드라마에서도 강채윤의 입을 통해서 그 실상이 나오는데 강채윤은 작중 광평대군에게 '윗분들이야 공부가 일이니 5만 자나 되는 한자를 외우지만, 동트기 전에 일어나 해지기 전까지 허리 한 번 못 펴고 일만 해야하는 백성들이 글자를 공부할 시간이 어딨냐' 며 반박하던 것이 그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