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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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라의 제44대 군주.
아버지는 열조 원성왕(제38대)의 장남인 혜충태자 김인겸의 4남 대아찬 김충공(金忠恭)으로 훗날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되었다. 어머니는 귀보부인(貴寶夫人) 박씨이다.《삼국유사》에서는 귀보부인이 혜충태자의 딸로 나와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김헌정의 아들인 희강왕(제43대, 김제륭)이 헌덕왕(제41대, 김언승)의 동생으로 나오는 기록도 있어서, 귀보부인을 김헌정의 딸로 보고 김충공과 귀보부인의 5촌혼이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설도 있다.
누이 중 하나는 희강왕의 왕후인 문목왕후였으며, 나머지는 김균정의 부인들이자 각각 신무왕(제45대, 김우징)과 헌안왕(제47대, 김의정)의 생모인 정교부인과 조명부인이다.
왕후는 각간 영공의 딸인 윤용왕후 김씨(允容王后 金氏)이다.
2. 생애[편집]
민애왕 김명이 태어난 해는 817년으로 경문왕(제48대)때 팔공산 동화사에 세운 3층 석탑에 들어가 있던 사리합에서 나온 <민애왕석탑사리합기>에 적혀 있는 것을 토대로 역산한 것이다. 흥덕왕(제42대, 김수종)과 함께 생몰이 알려진 몇 안되는 신라 후기의 임금이다. 민애왕의 생년은 《삼국사기》 등 문헌 기록에는 일절 나오지 않고, 석탑 사리합이 알려진 것이 비교적 최근이었기 때문이다. <민애왕석탑사리합기>에 따르면 흥덕왕 10년(835년) 17세의 나이로 시중이 되었다. 신무왕이 되는 김우징의 아버지 김균정이 상대등이 됨과 동시에 자연스레 물러나면서 대아찬이었던 그가 후임이 된 것인데 후에 왕위 쟁탈전을 벌이는 두 파벌을 적절히 견제하려는 흥덕왕의 의도로 풀이된다.
흥덕왕의 태자였던 김충공의 적자인 김명이 왕위 쟁탈전에 참여하지 않고, 후에 희강왕이 되는 김제륭을 지지한 이유는 아무래도 나이도 비슷한데다가 권력이 강한 5촌 당숙이자 처남인 김균정을 지지하는 것보다 김제륭을 지지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김제륭이 김인겸계(열조 원성왕의 장남)의 양자로 들어가서 김충공 다음의 위치에 올랐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는 김예영계(열조 원성왕의 3남)에 대한 김인겸계의 배려 정책일 가능성도 있다. 물론 그의 아버지 김충공이 흥덕왕 치세때 살아있었다면 태자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형제 계승을 지속적으로 해오던 신라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보다 족보상으로 위에 있는 김제륭이 당연히 우위에 있게 된다.
그래서 김명은 흥덕왕의 친조카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쟁탈전의 직접 대상이 아니라 후원자가 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는 희강왕이 즉위한 이후 김명이 상대등이 된 것을 보면 그러하다. 또한 김균정의 경우, 김인겸계 계통이 전혀 아닌 철저하게 김예영계의 입장에 서 있었을 것이고, 그의 장성한 아들 김우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그에게 왕위 계승이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보다 활용하고자 싶은 마음이 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충공 사후 김균정이 상대등 지위를 이어받은 것을 기점으로 그 왕위에 대한 욕심이 커졌을 것이다.
결국 김명은 흥덕왕 사후 벌어진 왕위 쟁탈전에서 아찬 김이홍(利弘)(제32대 효소왕과 다른 사람)과 함께 김제륭을 차기 신라 국왕으로 밀었다.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김균정은 적판궁에서 살해당했고,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과 태종 무열왕의 후손인 김양은 도망갔는데 김양은 이때 배훤백으로부터 화살까지 맞았다고 한다. 이에 김제륭이 즉위해 희강왕이 되었고, 다음해에 김명을 상대등, 김이홍은 시중으로 높였다.
문제는 김우징이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도망가고, 그쪽으로 왕족들이 합류함으로서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희강왕은 종형제인 김우징이 청해진에서 세력을 다시 일으키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그를 회유하기 위해 자녀들간의 혼례를 추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도 희강왕의 아들인 김계명은 신무왕 김우징의 딸 광화부인과 혼인해 경문왕(제48대, 김응렴)을 낳기도 했다. 이렇게 희강왕의 아들 김계명이 김우징의 딸 광화부인과 이 시점에 혼인을 했다면 김우징은 사돈이자 미래의 국구로서 이전보다 더한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희강왕의 처남이던 김명으로서는 본인 스스로 왕위계승권이 있음에도 희강왕 즉위를 도왔는데 오히려 권력에서 밀려나는 어찌보면 토사구팽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할 수 있었다. 희강왕과 김우징은 열조 원성왕의 차남 김예영의 후계였고, 민애왕 김명은 흥덕왕과 같이 원성왕의 장남 김인겸의 후계였기에 더욱 배신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 이에 838년 김명이 쿠데타를 다시 일으켜 희강왕은 자살하고, 김명이 민애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후 이미 고인이던 아버지 김충공을 '선강대왕'으로 추증하고 상대등에는 이찬 김귀(金貴), 시중에는 아찬 김헌숭(金憲崇)을 임명했다. 민애왕의 재위 기간은 약 1년인데 김우징파와 싸운 것 이외에 왕으로써 뭘 했는지는 기록이 적어서 알 수가 없다. 기껏 찾아봐야 이찬 김귀(金貴)를 상대등, 아찬 김헌숭(憲崇)을 시중으로 삼았다는 것들 정도이다. 사실 김우징파와 싸우는 기간을 감안하면 전국을 통치해보지도 못했을 듯하다.
민애왕이 즉위하던 시점에 이미 청해진에 의탁한 김우징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김우징은 희강왕 때부터 자신의 세력을 모았던 듯하다. 그러다가 민애왕이 쿠데타를 다시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자 희강왕 시해를 명분으로 삼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민애왕은 즉위식이나 당나라와의 외교도 제대로 못하고 운명이 걸린 달벌대전에 뛰어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838년 2월, 김우징이 드디어 청해진(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장보고의 군사 5,000명을 빌렸고, 838년 12월, 평동장군 김양을 필두로 염장(閻長)·장변(張弁)·정연(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 등을 거느린채 왕위를 되찾기 위한 반란을 일으켰다. 무주(지금의 광주광역시)로 진격한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경주 월성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민애왕은 김민주(金敏周) 등을 파견하여 무주 철야현(鐵冶縣 : 지금의 나주시 부근)에서 반란군을 맞아 싸우게 했으나 패배했고, 그대로 달벌(達伐 : 지금의 대구광역시)까지 밀려버렸다.
839년 1월 23일, 김우징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달벌에 무려 100,000명의 대군을 파견하여 수적으로 우세했다. 장보고가 합세한 김우징 군대의 규모는 몇 천명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이 달벌 전투에서 100,000명 중 반 이상이 괴멸당했다고 한다. 엄청난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신라 중앙군은 역대급 패전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신라의 인구를 볼 때 100,000명이면 실로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만큼 거대한 규모의 전투였던 것이다. 이런 위기 속에서 민애왕은 별궁인 월유택(月遊宅)으로 도망갔으나 끝내 김양을 따르는 병사들에 의해 시해당하고 말았다.
민애왕 시해후 비록 정권이 바뀌고, 김우징 세력의 입장에서 민애왕이 부당한 방식으로 임금이 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한때 임금이었던 사실은 인정해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대왕의 예로 장사를 지냈고, 시호도 시법에서 동정하는 의미의 글자들을 써서 '민애'(閔哀)라 했다. 그리고 훗날 863년 동화사 비로암에 경문왕이 옛 민애왕의 추모를 위해 3층 석탑을 조성하고 발원 내용을 적은 사리합을 안치했는데 해당 사리합에서 민애왕을 '민애대왕'(敏哀大王)으로 높여 부르고 있다.
때문에 훗날의 우왕, 연산군, 광해군 등이 폐위당한 뒤 왕이었던 사실조차 부정당한 것과 달리 민애왕은 사후에는 크게 책임을 묻지 않고 역대 임금 중 1명으로 인정되었던 것이 문헌상의 기록과 교차검증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현재 경상북도 경주에는 민애왕릉이라고 전해오는 왕릉이 있기는 하나 신라왕릉 문서에서 볼 수 있듯 후대에 후손들이 비정한 것으로 정확하다고 단언할 수 없는 상태이다. 혹은 이근직 교수 등의 학계에서는 주인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의 구정동 방형분이 민애왕릉이라고 추정하는 주장도 있다.
3. 기타[편집]
- 고려시대 《삼국사기》에서는 반역자로 까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호는 유지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신라의 비담, 대문[2] , 궁예, 견훤과 더불어 신라 시기 손꼽히는 난신적자로 낙인찍히고 시호마저 삭탈되었다. 조선시대의 역사서인 《동국통감》에서는 아예 시대의 역적으로 규정하고 왕명을 삭탈하고는 본명인 '김명'이라고 적었다. 대신 고려시대에는 민애왕과 더불어 호는 지켜졌으나 싸잡아 반역자로 묶였던 신무왕이 조선 왕조에서는 신라 최후의 성군으로 호평을 받았다. 신무왕 문서 참조.
- 민애왕 석탑에 대한 내용은 # 이 링크 참조.
4. 대중매체에서[편집]
- 2020년 KBS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한국인>에서는 성우 김자연이 연기했다. 흥덕왕 사후 등장하는데 사망 당시 20대였던 연령을 고려해 매우 젊게 그려졌으며 대단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기타 대중매체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는 문목왕후 김씨(김명의 누이)와의 관계가 살짝 보여진다. 왕위를 차지하기 직전 "나는 게임만 하고 놀던 그 때의 내가 아니야"라며 누이를 위협했고, 찬탈 이후 달벌대전 패배 이후 자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5. 《삼국사기》 기록[편집]
一年春一月 민애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一月 아버지를 추증하고 어머니를 선의태후로 삼았으며, 부인을 윤용왕후로 삼다
一年春一月 김귀를 상대등으로, 헌숭을 시중으로 삼다
一年春二月 우징이 청해진 대사 궁복의 도움으로 군사를 일으키다
一年冬十二月 김양이 평동장군이 되어 김민주의 군대를 철야현에서 대파하다
二年春閏一月十九日 김양의 군대가 달벌 언덕에 이르다
二年春閏一月 왕군이 패하고, 김양의 군사가 왕을 시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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