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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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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비서실장 (1948~1960)

이승만 정부


허정 내각

초대
이기붕
제2대
김양천
제3대
고재봉
제4대
유창준
제5대
장일강
청와대 비서실장 (1960)

장면 내각

제6대
김준하
대통령비서실장 (1960~2008)

장면 내각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정부

초대
이재항
제2대
이동원
제3대
이후락
제4대
김정렴
제5대
김계원

최규하 정부


전두환 정부

제6대
최광수
제7대
김경원
제8대
이범석
제9대
함병춘
제10대
강경식

전두환 정부


노태우 정부

제11대
이규호
제12대
박영수
제13대
김윤환
제14대
홍성철
제15대
노재봉

노태우 정부


문민정부

제16대
정해창
제17대
박관용
제18대
한승수
제19대
김광일
제20대
김용태

국민의 정부

제21대
김중권
제22대
한광옥
제23대
이상주
제24대
전윤철
제25대
박지원

참여정부


제26대
문희상
제27대
김우식
제28대
이병완
제29대
문재인
대통령실장 (2008~2013)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초대
류우익
제2대
정정길
제3대
임태희
제4대
하금열
제5대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 (2013~현재)

박근혜 정부

제30대
허태열
제31대
김기춘
제32대
이병기
제33대
이원종
제34대
한광옥


제35대
임종석
제36대
노영민
제37대
유영민
제38대
김대기
제39대
이관섭




파일:liujuncanmou_2.png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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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8대: 육군총참모장 / 9대~현재: 육군참모총장







파일:지상작전사령부 부대마크.svg
대한민국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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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ff0000>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대장.svg ||
||<width=20%> 초대
백선엽 ||<width=20%> 2대
송요찬 ||<width=20%> 3대
유재흥 ||<width=20%> 4대
김종오 ||<width=20%> 5대
이한림 ||
|| 6대
박임항 || 7대
민기식 || 8대
장창국 || 9대
김계원 || 10대
서종철 ||
|| 11대
한신
|| 12대
최세인 || 13대
이소동 || 14대
정승화
|| 15대
김학원 ||
|| 16대
윤성민 || 17대
김윤호
|| 18대
소준열 || 19대
정진권
|| 20대
안필준 ||
|| 21대
정호근
|| 22대
이진삼
|| 23대
이문석 || 24대
조남풍 || 25대
이준
||
|| 26대
오영우 || 27대
이재관 || 28대
김석재 || 29대
김판규
|| 30대
김종환
||
|| 31대
정수성 || 32대
김병관 || 33대
김태영 || 34대
김근태 || 35대
정승조 ||
|| 36대
박정이 || 37대
박성규 || 38대
신현돈 || 39대
장준규
|| 40대
김영식 ||
|| 41대
박종진 ||<-4>지상작전사령부 통합 이전 ||
||<-5><#006633> ※ 명칭 변천: 제1군사령관(초대~37대) ▸ 제1야전군사령관(37대~41대) ||
||<-5><#006633>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파일:대한민국 육군 마크.svg
대한민국 육군
육군참모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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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ff0000>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
|| 초대
이응준 || 2대
윤병현 || 3대
장도영 || 4대
유재흥 || 5대
장도영 ||
|| 6대
김종오 || 7대
최경록 || 8대
김형일 || 9대
장창국 || 10대
김용배 ||
|| 11대
김계원 || 12대
임충식 || 13대
문형태 || 14대
김상복 || 15대
한신 ||
|| 16대
심흥선 || 17대
서종철 || 18대
노재현 || 19대
이민우 || 20대
이희성 ||
|| 21대
윤성민 || 22대
황영시 || 23대
차규헌 || 24대
정호용 || 25대
소준열 ||
|| 26대
이기백 || 27대
김홍한 || 28대
박희도 || 29대
오자복 || 30대
최세창 ||
|| 31대
정동호 || 32대
박명철 || 33대
이진삼 || 34대
신말업 || 35대
이문석 ||
|| 36대
이문석 || 37대
김연각 || 38대
김진선 || 39대
김형선 || 40대
이재관 ||
|| 41대
길형보 || 42대
박영익 || 43대
강신육 || 44대
선영제 || 45대
신일순 ||
|| 46대
홍갑식 || 47대
박흥렬 || 48대
방효복 || 49대
한민구 || 50대
임관빈 ||
|| 51대
조정환 || 52대
김요환 || 53대
황인무 || 54대
김유근 || 55대
박찬주 ||
|| 56대
정연봉 || 57대
구홍모 || 58대
최병혁 || 59대
김승겸 || 60대
박주경 ||
|| 61대
황대일 || 62대
안병석 || 63대
여운태 || 64대
고현석 || ||
||<-5><bgcolor=#2A5034> ※ 초대~현재 : 중장 ||
||<-5><bgcolor=#2A5034>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파일:제6군단 부대마크.svg
대한민국 육군
제6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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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ff0000>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중장.svg ||
|| 초대
이한림 || 2대
백인엽 || 3대
강영훈 || 4대
김웅수 || 5대
최홍희 ||
|| 6대
김계원 || 7대
정래혁 || 8대
한신 || 9대
김희덕 || 10대
이세호 ||
|| 11대
박원근 || 12대
이소동 || 13대
김용휴 || 14대
이재전 || 15대
신현수 ||
|| 16대
강영식 || 17대
김홍한 || 18대
안필준 || 19대
박명철 || 20대
나병선 ||
|| 21대
임인조 || 22대
김재창 || 23대
최경근 || 24대
이재관 || 25대
서경석 ||
|| 26대
김판규 || 27대
서종표 || 28대
김충배 || 29대
류우식 || 30대
송기석 ||
|| 31대
정두근 || 32대
이홍기 || 33대
서길원 || 34대
김학주 || 35대
이범수 ||
|| 36대
박종진 || 37대
김성진 || 38대
김성일 || 39대
박양동 || 40대
강건작 ||
||<-5><bgcolor=#004ea2> 관련 직위 둘러보기 ||





파일:제27보병사단 부대마크.svg
대한민국 육군
제27보병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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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ff0000> 파일:대한민국 육군 및 해병대 소장.svg ||
||<bgcolor=#F08080,#5c6169> 초대
이형석 || 2대
김봉철 || 3대
김계원 || 4대
정래혁 || 5대
이치업 ||
|| 6대
박경원 || 7대
김동수 || 8대
전부일 || 9대
안광영 || 10대
이준학 ||
|| 11대
임지순 || 12대
나희필 || 13대
윤흥정 || 14대
최영식 || 15대
김선일 ||
|| 16대
권영각 || 17대
정진권 || 18대
정순현 || 19대
김찬기 || 20대
편동수 ||
|| 21대
윤인하 || 22대
편장원 || 23대
양상태 || 24대
오형근 || 25대
김현수 ||
|| 26대
이풍길 || 27대
김승광 || 28대
김기성 || 29대
김군식 || 30대
이명구 ||
|| 31대
하정열 || 32대
이승우 || 33대
김인동 || 34대
전인범 || 35대
이진원 ||
|| 36대
김종태 || 37대
김정수 || 38대
허강수 || 39대
정해일 || 40대
정진팔 ||
|| 41대
민인기 || 해체 ||







대한민국 제5대 중앙정보부장
김계원
金桂元 | Kim Kye-won


출생
1923년 6월 28일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동부2동
(現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동부2리)#
사망
2016년 12월 3일 (향년 93세)[1]
본관
나주 김씨

안산(安山)
재임기간
제18대 육군참모총장
1966년 9월 2일 ~ 1969년 8월 31일
제5대 중앙정보부장
1969년 10월 21일 ~ 1970년 12월 20일
제5대 대통령비서실장
1978년 12월 23일 ~ 1979년 10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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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남동생 김계일, 김계삼, 김계정
배우자
서봉선
자녀
아들 김병덕, 김병민
딸 김혜령
학력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상과 / 졸업)
종교
개신교
신체
162cm
경력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제5대 중앙정보부장
제7대 주 중화민국 대사
제5대 대통령비서실장
원효실업 회장
원효실업 명예회장
군사 경력
임관
군사영어학교 (1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45 ~ 1945년 8월
대한민국 육군
1946 ~ 1969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참모총장
주요 보직
육군대학 총장
육군 제1야전군사령관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군인, 정치인, 외교관.


2. 생애[편집]


1923년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동부2동에서 개신교 집안의 4남 1녀 중 장남이자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배재고등학교 졸업 후 1942년 경성부 연희전문학교 상학과에 입학했다가 일제가 학병제를 실시하면서 강제 징집되어 일본 육군에서 견습 사관으로 복무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일본군 소위로 임관과 함께[2] 소집 해제가 되어 서울특별시로 돌아왔다. 국군준비대이혁기와는 교회 친구였다. 당시 서북청년회와 국군준비대의 갈등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이혁기는 그가 개신교인이라 공산당 계열이 많이 포진한 국군준비대보다는 미군정이 장교단 인원을 만드는 쪽에 가담하기를 추천했다. 당시 일본군 출신들은 이응준이 주로 이끌었고 김계원은 이응준의 아들과 아는 사이였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대한민국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1960년 육군대학 총장이 되었고, 이 때 부총장이 바로 김재규였다. 이 둘은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김재규를 김계원이 구해주면서 친해졌다 한다. 이후 제3군관구사령관으로 보직을 옮겨 근무할 때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김계원은 5.16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군사혁명위원회로부터 충청남북도지구 계엄사무소장으로 발령 받기도 했다. 이후 제5군단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차장, 제1야전군사령관을 거쳤고, 1966년에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69년 육군참모총장으로 대장 예편 이후 '남산 멧돼지' 김형욱의 뒤를 이어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된다. 임명 당시의 에피소드가 흥미로운데 김계원은 대장 전역 후 부인 서봉선과 함께 고향 쪽으로 기차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영주역에서 기차가 멈춰서더니 수십 분간 움직이지 않았고 영주역장이 객석을 일일이 누비며 '김계원 장군님'을 찾아다녔다고 하는데 청와대에서 급히 호출했다는 것. 결국 김계원은 기차에서 내려 인근 군부대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청와대로 직행하여 중앙정보부장 임명 언질을 받았다.[3]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중앙정보부장으로서는 유능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대통령 박정희의 신임이 대단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 김계원은 전임인 김형욱과는 달리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신사같은 인물이라 김계원 본인은 이 영전을 곤혹스러워했고 내가 어떻게 그런 중책을 할 수 있겠냐고 강력하게 고사했지만 박정희는 '김형욱이처럼 사람 막 안 패도 돼. 임자가 맡아!'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한다.[4]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김형욱과 비교하면 나름대로는 할 수 있는 한 양심을 지키고 불필요한 폭력도 최대한 자제한 편으로 당시 야당 사람들은 칭찬 반 놀림 반으로 그를 '남산골 샌님'으로 부르기도 할 정도였다.[5] 그래서였는지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대비에 미흡하다는 이유로 1970년 12월 중앙정보부장직에서 경질되는데 중앙정보부장 중에서는 재임 기간이 짧은 편이다.[6] 후임 중앙정보부장에는 주 일본 대사였던 이후락이 취임하였다.

1971년 1월 주 대만 대사에 임명되었으며 1978년 12월에는 주일대사로 가게 된 김정렴의 후임으로 박정희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는데 이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천거에 의한 것이다. 이 때도 김계원은 일차 비서실장 임명을 거부했으나 노년의 정권 말기 박정희는 "실장일은 안 해도 되니 와서 말벗이나 하라"면서 결국 비서실장에 임명했다.[7] 김정렴이 영전한 이후 외롭던 박정희가 정말 친밀한 인물을 비서실장으로 들인 것. 세간의 오해와는 다르게 박정희는 차지철과는 다소 거리를 두는 사이였다고 한다.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신분으로 궁정동 만찬에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과 함께 참석했다. 만찬 직전에 김재규에게서 차지철을 죽일 거란 말을 들었으나[8] 아무런 대처도 하지 않고 만찬에 참석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차지철을 해치워 버리겠다"[9]는 말이 국가 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말 그대로 암살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10] 만찬장에서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에게 총을 쏘고 김재규의 부하(궁정동 안가 직원)들이 청와대 경호원들을 거의 다 죽여버릴 동안 이를 막지 못했다. 물론 김계원 비서실장은 당시 술에 취해 있던 상황이었고 수중에 무기도 없었으므로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김재규가 궁정동을 떠나자마자 박정희의 시신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싣고 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는 청와대로 들어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저격범은 김재규라고 말했으며 최규하와 함께 대한민국 육군본부로 가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만나 거듭 범인은 김재규라고 말했다. 직후 정승화가 김재규를 체포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으며 김재규는 아마도 김계원을 믿었던 것 같은데 공포심에 의한 것이었든 어쨌든 결과적으로 김계원은 김재규의 뒷통수를 친 셈이었다.[11] 그러나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만찬 전에 김재규로부터 박정희 암살을 암시하는 말을 듣고도 이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아서 결과적으로 박정희 암살을 방조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1980년 재판에서 김재규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고 1988년 특별 사면으로 복권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체포 된 이후 합수부에게 압류당한 경기도 과천시의 땅 13,000평과 서울특별시 서초구 소재의 양재동 땅 4,000평 및 기타 재산등 1990년 재판 당시 시가 약 100억원 상당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청구했으나 1991년 시효 만료 및 증거 불충분 등으로 패소하였다.뉴스

2016년 12월 3일 향년 93세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한국 헌정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 집회가 열린 날이었다. 유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생전에 최순실 게이트 소식을 듣고 박근혜를 매우 걱정했다고 한다. 사실 김계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박근혜와 최씨 일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3. 여담[편집]


  • 육군참모총장 시절에는 육군의 병력 처우 개선 및 예비군 무기 도입과 관련해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주임원사[12] 제도를 도입하며 부사관 및 병사들의 권익을 개선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훗날 TV 자서전에 출연하면서 자신이 군인으로 있으면서 이룬 업적들 중 주임원사 제도 도입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예비군의 창설로 개인화기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자 마침 제식 소총 교체를 계획 중이던 미군으로부터 구형 M1 카빈 소총 100만 정을 인수받아서 예비군의 주력 화기로 쓰게 하였다.[13]

  • 국군(당시 조선경비대) 최초의 군악대장이다. 군사영어학교 수료 후 임관할 때 군악대장으로 보직되었다. 배재고등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의 도움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군악대를 창설했으며 곧 전투 병과로 옮겨 갔지만 육군참모총장 시절 국악대 창설을 지시하는 등 군악대 발전에도 기여했다.

  • 10.26 사건 직후 다음 날 새벽 2시에 박근혜에게 소식을 전하자 박근혜가 "전방은요?"라고 되물었다고 한다.[14]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3년 KBS <다큐멘터리 극장>에서는 배우 정욱이 연기했다.




  • 1998년 SBS 드라마 <삼김시대>에서도 배우 오승명이 연기했다.




[1] 공교롭게도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당일이다. 역사의 우연인 셈.[2] 일본 군부는 패전 직후 군인들이 후생성의 군인연금 및 공제비를 더 받을 수 있도록 패전 당시 진급을 앞두고 있었던 장병들을 대상으로 임관과 진급을 대대적으로 시켜줬는데 이를 포츠담 진급이라고 한다. 김계원의 경우에는 복무 기간이 짧을뿐더러 조선인은 패전 이후에는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후생성의 군인연금 대상자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었다.[3] 출처: 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제1권, 동아일보사.[4] 사실 김형욱이 중정부장으로서 공포스러운 존재이긴 했지만 반대급부로 중정 내의 여러 가혹행위 등이 외신에 알려지는 바람에 정권에 상당히 부담이 갔다고 한다. 김형욱을 물러나게 한 것은 결국 3선 개헌으로 정권 연장에 성공한 박정희의 입장에선 공포정치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 강원용 목사의 자서전에서도 이런 면모는 두드러지는데 호통과 협박으로 일관했던 전임 중앙정보부 인사들과는 달리 김계원은 강원용 목사에 대해 수집한 자료를 늘어놓으면서 진심으로 한숨을 쉬며 '목사님이 자꾸 이러시면 우리도 어찌하는 수가 없지 않냐'고 인간적으로 하소연할 정도였다.[6] 중앙정보부부터 국가정보원까지 역대 수장 중 김계원은 12.12 군사반란 세력을 빼면 단기 재임 3위에 해당하는데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보다 짧을 정도. 김계원이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시절에 요원들이 샌님처럼 행동해서 힘이 없어 보였다는 박정희의 압박이 있었단다.[7]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 3인방은 군 시절부터 매우 친했다고 하는데 박정희와 김재규는 동향과 같은 교사 경력이 있었고 박정희와 김계원은 누가 더 키가 크냐며 아웅다웅하며 장난칠 정도였다고 하며 김계원은 김재규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뻔한 것을 구해줬다고 한다.[8] "형님, 그 놈을 해치워버릴까요"라고 말해서 차지철만을 얘기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설도 있다.[9] 김계원은 이 말을 "경호실장 자리에서 잘리게 만들고 다시는 재기 못하게 조치를 취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김재규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음을 감안하면 차지철을 좌천시킬 만한 건수 하나 잡는 건 그닥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테고, 혹시나 차지철이 방해를 할 것을 우려해 자신에게 대강의 계획을 미리 얘기했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앞뒤가 맞는다. 김계원은 대통령 비서실장이었으니 대통령을 만나는 걸 차지철이 막을 명분이 없기 때문.[10] 이 견해는 다름아닌 10.26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대법원 1980. 5. 20., 선고, 80도306)에서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대법관 등이 제기한 소수 의견에 나타나 있다. 양병호 당시 대법관의 소수 의견을 그대로 인용한다. "(김재규의) 해치워 버린다"는 말이 깡패 사회도 아닌 피고인들과 같은 국가 고위직 인사 사이에서 죽여없앤다는 뜻의 말로는 도저히 새겨들어지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피고인(김계원)이 위 T(차지철)를 암살하겠다는 것인 점을 인식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는 보여지지 아니한다."[11] 보통 무기력한 방관자 정도의 이미지지만 사건 전에 김재규가 차지철을 해치우겠다는 말을 할 때 별 말 없이 그대로 듣고만 있다거나 하는 등, 전후 여러 미심쩍은 움직임이 있어 암묵적인 방조자 내지 기회주의적 배신자로 보는 입장도 있다.[12] 당시에는 원사 계급이 없었고 주임상사라 불렸다.[13] 예비군들 입장에서는 이런 낡은 총을 아직도 쓰게 하느냐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지만 1960~1970년대라면 카빈도 2선급 화기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당시 베트남 전쟁에 파병나간 미군도 후방 부대 장교들 중에는 M1 카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 문제는 수십 년이 지난 21세기 현재까지도 계속 M1 카빈을 쓴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예비군 부대는 박근혜 정부 시절 모조리 M16으로 바뀌었다.[14] 이 말은 박근혜 본인의 회고록이 각색된 듯하다. 회고록 본문을 발췌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를 인용하면 “간밤에 일어난 일을 김계원 비서실장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 무의식 중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삼팔선은 안전한가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틈타 북한이 무력 침공을 감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