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황후 기씨
덤프버전 : (♥ 1)
위서(魏書) | ||||||||||||||||||||||||||||||||||||||||||||||||||||||||||||||||||||||||||||||||||||||||||||||||||||||||||||||||||||||||||||||||||||||||||||||||||||||||||||||||||||||||||||||||||||||||||||||||||||||||||||||||||||||||||||||||||||||||||||||||||||||||||||||||||||||||||||||||||||||||||||||||||||||||||||||||||||||||||||||||||||||||||||||||||||||||||||||||||||||||||||||||||||||||||||||||||||||||||||||||||||||||||||||||||||||||||||||
|
|
1. 개요[편집]
서진 시기 색두부(索頭部) 대인 탁발의타의 정실 부인. 탁발보근, 탁발하녹, 탁발흘나의 어머니. 《북사]》와 《자치통감》에 한해서 유씨(惟氏)라 기록되어 있다.
2. 생애[편집]
영흥 2년(305년) 6월, 탁발의타가 장안의 서진 정권을 도와 한(漢)과 싸운 공로로 가 대선우(假大單于)에 임명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이에 탁발의타와 기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탁발보근이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건흥 4년(316년) 4월, 탁발보근이 정변을 일으킨 탁발육수(拓跋六脩)를 제거하고 대왕(代王)에 오르자, 탁발보근을 따르는 무리와 탁발육수에게 시해당한 탁발의로를 따르는 무리가 나뉘어 대립하였다. 이때 탁발의로의 무리가 대거 이탈해 진나라에 투항하는 등 혼란한 와중에 탁발보근이 사망하니, 기씨는 재빨리 갓 태어난 아기인 탁발보근의 아들을 왕위에 앉혔다.
건흥 4년(316년) 12월, 탁발보근의 아들이 대왕에 오르고 8개월만에 사망하였다. 이에 색두부의 부족원들은 탁발보근의 5촌 당숙인 탁발울률을 옹립하였다.
대흥 4년(321년) 12월, 탁발울률이 부족을 잘 이끌면서 민심을 얻고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해지자, 기씨는 이것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불리할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하였다. 결국 기씨는 거병하여 탁발울률을 비롯해 그를 따르는 대인 수십 명을 살해하고, 차남 탁발하녹을 대왕으로 세웠다. 이리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된 기씨는 아들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홀로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한번은 기씨가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기씨가 대나라를 장악한 일이 널리 알려졌다. 당시 후조의 사람들은 그 사신을 가리켜 여자의 나라에서 온 사신이라는 뜻으로 '여국사(女國使)'라 불렀다.
태녕 2년(324년), 기씨가 사망한 뒤에야 국왕인 탁발하녹이 비로소 친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훗날 도무제 탁발규가 칭제하고 선조들을 추존할 때, 탁발의타는 환황제로 추존되었고, 그 처인 기씨는 환황후로 추봉되었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4-02-10 21:56:08에 나무위키 환황후 기씨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