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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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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파일:250px-MingRenzong1.jpg
중국 명나라의 제4대 황제.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경천체도순성지덕홍문흠무장성달효소황제(敬天體道純誠至德弘文欽武章聖達孝昭皇帝). 이름은 주고치(朱高熾)이고, 연호는 홍희(洪熙)이다.
영락제와 인효문황후의 큰아들이며, 선덕제의 아버지이며, 정통제와 경태제의 할아버지이다. 참고로 어머니 인효문황후는 명나라 개국공신인 서달의 딸로 홍희제는 서달의 외손자다.
2. 생애[편집]
영락제가 18세에 얻은 자식으로 1395년 당시 연왕이었던 주체의 후계자로써 연왕 세자(世子)에 책봉되었다. 정난의 변 당시에는 연의 땅을 맡아 지켜 주체의 총애를 받았고, 주체가 황제로 즉위하자 황태자가 되었다. 주고치는 항상 인자했으며, 자상했다고 한다. 주고치의 이러한 성격은 어머니 인효문황후의 영향을 받았다.[1]
문무에 뛰어났지만, 어릴때부터 병약하였으며 건강이 좋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비정상적으로 뚱뚱하여, 성인이 되었을 무렵에는 스스로 걷기도 힘들어 가마나 수레를 타고다녀야할 정도였다고 한다.(...)[2] 때문에 영락제는 그를 폐위하고 차남인 한왕 주고후를 새로운 황태자로 삼는 걸 염두에 두기도 했지만, 주고치가 장자인데다가, 주고후의 성격이 너무 거칠어서 무산되었다.[3] 그 후에는 그의 장남인 주첨기(선덕제)가 어렸을 때부터 황제의 자질을 보였고, 자신의 부인인 황태자비 장씨[4] 에 대한 총애가 있었기 때문에
2.1. 재위[편집]
영락제는 궁궐을 자주 비우고 외정을 나갔으므로, 그럴 때마다 태자로서 황제를 대신하여 황제의 업무와 정사를 맡아 보았다. 때문에 홍희제는 즉위하자마자 능숙한 유교 정치를 펼쳐, 정난의 변 당시 멸문당한 일가를 신원하는 등의 선정을 펼쳤다.
재위 시절 종5품의 내각 대학사를 겸직 벼슬 임명으로 정3품까지 품계를 올렸다. 명태조 시기에 승상 폐지 이후 대체 수단으로 만든 황제의 단순비서였던 이 직책은 홍희제 시대에 변화되어 다음 황제였던 선덕제 시기엔 표의권[5] 이 부여되고 육부 상서들[6] 의 겸직등으로 정1품까지 상승되어 내각 대학사들은 국가 정책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의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팽창 정책에 부정적이었던 황제로, 정화의 원정을 축소했으며[7] 또한 홍희제는 태생이 남경 출신인지라, 춥고 황량한 북경을 싫어하였다. 말년에는 명을 내려 남경천도를 검토하고, 황태자 주첨기를 보내어 천도를 준비하도록 일렀으나, 원래부터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잦았던터라 황제가 되어서도 병에 시달리다 재위 10개월만에 사망, 1년도 채 재위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래서 천도는 흐지부지되고 북경은 제국의 수도로서 그 위상을 지금까지 굳건히 지키게 된다.[8]
가족으로는 성효소황후 장씨와 3남 1녀가 있다. 사후 맏이인 황태자 주첨기가 황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선덕제이다.
3. 평가[편집]
영락제의 대외 사업 전반에 제동을 걸어 명나라 역사를 (어쩌면 필연적으로) 다시 중화의 길로 복귀시킨 인물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비교하면 세대상 세종 포지션이라 할 수 있지만, 재위 기간이 짧고 병마에 시달렸지만 태자 시절부터 아버지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오랫동안 정무를 맡아보며 상당한 경험을 쌓은 노련한 정치가였다는 점에서 문종의 포지션과 비슷하다. 성격이 온화하고[9]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병치레가 잦아 정작 황위에 오르고는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요절한게 공통점이다.[10]
그와 아들 선덕제의 치세는 성강지치, 문경지치, 정관지치, 개원지치처럼 인선지치로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아무래도 황제로 재위한 기간이 짧다보니 영락제 치세의 황태자로 등장하곤 한다. 영락제가 워낙 크게 일을 벌여놓느라 홍희제가 태자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는 묘사도 흔하다. 주요 마스코트(?)로는 할아버지가 이뻐하는 큰 아들 주첨기, 주요 라이벌로는 동생 주고후가 함께 등장한다.
2009년 드라마《정화하서양》에서는 연왕부 세자로서 처음 등장한다. 단순무식해서 매번 힘 자랑이나 하는 동생 고후보다는 영리하고 침착하지만 부왕에 비하면 부족하기 짝이 없어 아버지가 신임하는 환관 정화에게 여러 차례 도움을 받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역사와 달리 빼빼 마른 체격. 본작에서는 주인공 정화의 항해 사업 지원이 극의 굵은 줄기를 담당하다보니 영락제의 국정 운영도 성질 까탈스러운 영락상사 회장님 수준으로 그려지는데, 아버지가 온갖 큰 사업을 벌이면서 고치가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한다.
정화가 첫 항해에서부터 장사가 잘 되니까 비단이고 자기고 많이많이 보내달라고 소식을 전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데, 때마침 차기 대권 경쟁으로 인해 신경이 예민해져있던 차에 자기가 딱히 찬성하지도 않는 항해 사업을 부황의 명령으로 책임지느라 과로를 거듭하다 신경쇠약에 걸려 쓰러진다. 그 와중에도 고후는 철이 덜 들어서 해외 무역 담당인 시박사를 책임지며 온갖 이권을 챙기는데, 모후가 동생을 잘 챙기라고 눈물로 유언을 남겼기에 고후가 사고를 치고 명민한 아들 첨기가 이걸 고발하려 해도 열심히 덮어준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다보니 정화의 항해 사업을 스스로는 맘에 들어하지 않아도 심하게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지원한다.
홀아버지 신세가 되어 처량한데, 몽골의 침입과 통제 불능의 해외 사절 접대 업무로 스트레스가 심해지며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버지의 염려를 덜어주고자 정화의 서인도양 원정 자금 지원을 끌어오는 등 서로 지향점이 달라도 정화를 소중히 여기는 조력자이나, 고후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베테랑 선원들을 상당수 갈아버리는 갑질을 자행하기도 한다. 효자인척 하지만 아버지의 유언과 달리 장례를 성대하게 치렀다. 황제가 되자마자 해상 무역 금지, 금해령을 반포하여 정화의 항해 사업을 중단한다.
영락제의 최측근이자 3명의 황제를 모셨고 내관들의 수장인 왕충은 홍희제에게 "주고치 너는 아버지말을 듣지 않는 천하 제일의 불효자이자 혼군이니 하늘이 너를 벌할 것이며 나라와 백성에 해를 끼쳤으니 후세에 영원히 욕을 먹을 것이다."라고 직언했고 홍희제가 죽이려 하자 자살했다. 홍희제는 정화가 건설한 해외의 명나라 거점들을 파괴하도록 지시했고 정화와 정화의 수하들 300명을 역모죄로 몰아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20년간의 대항해 일지와 항해도를 소각하도록 명령했다. 정화는 "한 치 앞도 볼 줄 몰라 사직에 해를 끼치고 선제의 명을 거역하여 나라를 망치다니 너는 후손들에게 해를 끼친 천고의 죄인으로 남을 것이다."라며 홍희제를 비난했다. 민심을 고려해 정화를 죽이지 않고 대보은사 수리 공사 감독관으로 임명했으나 자객을 보내 정화를 죽이려 했고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있던 선덕제가 자객들을 보내 정화를 보호했다.
2019년 드라마《대명풍화》에서 중국의 베테랑 배우인 양관화가 맡아서 열연했으며 남자 주인공(= 선덕제)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성품은 좋지만 엄청난 비만이라[11] 아버지나 동생들, 아들과 다르게 무예에 재능이 없어 소위 문약한 것으로 묘사된다.[12]
야망도 없고, 업무를 하지 않을 때에는 궁에서 애완견을 돌보거나 책을 보고 그냥 누워있기를 즐기며, 미식도 좋아한다. 아내가 살이 쪘다거나, 건강이 나빠진다고 지적해도 하는 운동이라곤 엉성한 검무 정도가 고작이며, 대명 제국 황태자로서 손가락만 튕겨도 엄청난 돈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녹봉과 태자부에 할당된 돈만 받아서 살아가기에 평소엔 옷도 소박하게 입는 일이 많고 생활비도 여유롭지 않아서 황태자비가 돈 문제로 바가지를 긁을 정도다.
자리를 위협하는 동생들에게는 항상 인정을 베푸는 자비로운 형. 실제 역사에서도 홍희제는 동생들이 부황의 분노를 샀을 때마다 여러 번 주청하여 구해줄 정도로 인자한 성격이었다. 동생들과 황위 쟁탈전을 벌이기보다는 스스로 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자주 한왕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진언하며, 부황의 진노를 사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입버릇처럼 태자에서 물러나 고향인 순천부로 가겠다고 말한다.
성격은 유하고 무던하다 못해 거의 물 같은 수준이다. 한왕 주고후가 자주 자신을 능멸해도 참아주고, 일개 번왕 따위가 용포를 입고 황궁 안에서 가마를 타고 다녀도 별 말을 하지 않으며, 자신을 대신해 국정을 전담하게 되어도 그 옆에서 보좌를 자처할 정도다. 하나 하나가 대역죄를 물어 능지처참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짓을 밥 먹듯이 저질러도 태자는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또한 재정 문제로 사정이 생겼을 때는 대명 제국 황태자가 돈을 마련한다고 가산을 자금성 밖 시장에 내놓아 장사를 하고 젊은 여성에게 손금까지 봐주며, 자기 물건을 사려는 평민들과 흥정할 때도 권위 따윈 부리지 않고 평민 상인처럼 말했다.
이렇게만 보면, 황태자가 아니라 살찐 호구에 가까워 보이지만, 이는 겉보기에만 그럴 뿐이지 실제 모습은 전혀 다르다. 자주 원정에 나가는 부황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한지 10년이 넘었으며, 원정과 정화의 항해, 영락 대전 편찬 등 엄청난 재원이 소모되는 부황의 국책 사업을 차질 없이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경상비는 경상비대로 처리하고 국정을 아무 문제 없이 운영하여 10년 동안 부황에게 단 한 번도 추가 예산을 요청한다거나 사업 축소를 요구한 일이 없었다.
황태자의 일 처리는 영락제도 인정할 정도라, 원정에서 돌아와 황태자의 업무 처리 기록을 확인하고는 일 처리 방식에 만족했으며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황태자를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애초에 영락제가 그렇게나 수도를 떠나 원정에 나서는 것도 황태자의 국정 운영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작중, 영락제의 치세 후반기에 나타나는 내정면에서의 성과는 태자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황을 경외하지만, 계속되는 원정과 거대한 규모의 국책 사업에 소모되는 국력, 인민들이 입는 피해를 잘 알아서 조정 관료들과 함께 영락제의 원정을 매번 반대한다. 그러나, 국가 운영에 대한 입장 차이가 크고 서로 설득되기를 거부하는지라, 부황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갈등을 빚어 부자 관계가 나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부황이 원정을 나갈 때는 갈등과 입장 차이를 잊고 조정 전체를 통제하여 부황의 원정을 후방에서 지원했다.
황제가 될 야심으로 가득하고 늘 형보다 자신이 낫다고 생각하던 한왕이 태자를 대신해 국정을 맡았을 때는 영락제가 써대는 돈이 너무 많아, 이를 감당하지 못한 한왕이 기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백성들이 굶어 죽고 식인까지 한다는 보고가 올라와 영락제가 죄기조까지 썼다.
살집이 있고 몸이 약해 문약하단 평가를 받지만, 연왕 주체가 정난군을 거느리고 경사로 떠난 것을 노린 경군이 정난군의 본거지인 순천부를 급습해온 것을 상대로 1년이 넘도록 버텨 연왕이 안심하고 공세를 퍼붓고 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줄 만큼 군사적인 능력도 드러낸 바 있다. 한왕과 조왕이 제남에서 철현에게 죽을 뻔한 일과 정난에서 군공을 세운 것을 들먹이며 형보다 자신들이 낫다고 떠들지만, 실제로는 태자야말로 형제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영락제도 인정하는 바이다.
대군을 거느리고 봉지까지 있는 한왕이 운남에서 조달한 금을 조정 전체에 뇌물로 뿌려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조왕은 금의위를 틀어쥐고 있어 태자에게 위협이 되는 형국이지만, 태자는 부황을 대신해 10년 동안 국정을 책임지고 인사권을 행사해 명 제국 전체를 자기 수중에 넣었다. 조정의 대신인 3양[13] 은 태자의 최측근이고 조정 관료와 지방관의 대다수가 태자의 인선을 거친 사람들이며, 과거 시험도 태자가 주관했기에 신진 관료들도 태자와 연이 닿아 있다. 태자의 권위는 한왕과 조왕만이 무시할 뿐, 조정 전체가 따르고 있는 상황이고 3양을 위시한 조정 관료들은 태자를 무시하고 난행을 일삼는 한왕과 조왕을 경멸하고 그들의 찬탈을 늘 경계했다.
한왕과 조왕이 자랑하는 군권도 실상은 자신들이 거느린 직계 군대에만 한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모두 태자의 소관이었다. 예를 들어 산동 비왜병 10만을 지휘하는 사령관은 태자가 직접 뽑은 인사로서 태자가 한왕과 조왕에게 맞설 때 태자에게 충성했다.
영락제는 태자의 숨겨진 힘을 모두 알고 있었고, 태손 앞에서 자신의 장자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주기도 했다. 이런 힘을 가진 강자가 매번 동생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바로 골육 상쟁을 경계하기 때문이었다. 정난의 변을 통해 골육 상쟁의 무서움을 깨달은 그는 자신과 형제들이 황위 쟁탈전을 벌여 제2의 정난의 변이 일어나는 것을 계속 경계했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태자 자리도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들이 불평하고 아내가 타박해도 참고 넘어갔으며, 동생들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능멸해도 이를 넘어가 주었으며 어떻게든 형제 간의 우애를 유지하려 했다.
가족들과도 사이가 좋다. 아내에게는 따뜻한 남편이라서 부부 금슬이 매우 좋고 아들한테도 좋은 아버지라서 아들과의 관계가 좋다. 주첨기도 아버지의 유한 모습에 자주 불평하곤 하지만, 내심 부친을 존경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 며느리들도 잘 대해주어 며느리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건강만큼은 계속 좋지 못했다. 전쟁이 몇 달 만에 종결되는 것도 아니고, 늘상 친정을 나서는 영락제가 옥좌를 비우면 계속 후방을 책임지고 국정을 총괄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가뜩이나 병약한 건강이 계속 나빠져서 작중, 영락제의 몽골 원정 시기에 와서는 걷는 것도 어려워질 지경이 되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이르러, 병환이 깊어진 영락제는 황태자가 황제가 되어도 어차피 동생들에게 뺏길 것 같다고 판단하여 양사기에게 한왕을 황제로 삼는다는 밀지를 내린다.[14] 하지만 양사기는 평소에 한왕이 저지른 행패를 잘 알고 원한이 깊은 터라 황명을 받들어 경성으로 떠나지 않고 태손에게 가서 밀지를 전했다. 태손은 장군 번충을 포섭하고, 양사기와 함께 죽기 직전의 영락제를 찾아가 그의 허락을 받고는 성지의 내용을 바꿔 한왕, 조왕에게 타타르, 오이라트와 싸우게 한다.
이에 태자는 아들인 태손을 나무랐으나 결국 아내와 아들 내외를 살리기 위해 즉위를 감행하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형제들에 대한 우애가 깊고 골육 상쟁을 경계하여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자신과 부황을 능멸한 숙부들에 대한 원한이 깊은 황태자 주첨기가 "숙부들을 죽여야 한다."며 설칠 때마다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인내와 용서만이 황제의 명성을 지키고 선정으로 이어짐을 아들 선덕제에게 깨우쳐주고 사망했다.
2022년 드라마《상식》에선 홍검도가 홍희제를 맡았다. 이번에도 뚱뚱한 배우가 홍희제를 맡았다. 식탐이 있지만 인자한 성품의 인물로 표현된다.
2022년 드라마《산하월명》에서는 아기 때 병을 앓아서 승마와 무예를 못 하게 됐다고 언급된다. 아역은 비만이 아니지만 성인 역은 엄청난 비만의 배우가 주고치를 맡았다. 유능하지는 않으나 노력은 많이 하는 편이다. 온화한 성격이며 부모의 말도 잘 듣는다. 무관의 상소에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이것을 크게 탓하는 것은 무관 차별이라고 생각했다.
5. 둘러보기[편집]
[1] 실제로도 인효문황후는 남편 영락제와 금슬이 좋았으며 그녀가 영락제보다 먼저 사망했을때 영락제는 죽을때까지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2] 이는 주고치가 식탐이 심하고 학문을 좋아한 나머지 무예와 같은 활동적인 운동을 싫어했기 때문이다.[3] 사실 거친걸 넘어서 오만하고 난폭한 성격에다 예의가 없어 각종 문제를 일으키다보니 즉위할 경우 폭군이 될까봐 영락제와 신하들이 우려했다. 특히 주고후는 관리와 백성들을 폭행하고 재물을 빼앗는것도 모자라 백성과 대신을 살해하며 아버지의 물건을 멋대로 쓸 정도로 막장이었다. 그러다보니 영락제도 질색하여 지방으로 좌천시켜버렸을 정도.[4] 성효황후 장씨[5] 황제에게 올라오는 각종 상소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일 수 있는 권한. 대개의 표의들은 그대로 황제의 명령으로 실행되었다.[6] 명. 청 시대의 6부 상서들은 조선의 판서와는 다르게 품계가 종 1품이었고 제1, 2차관격인 좌.우시랑이 각각 정 2품, 종 2품이었다.[7] 다만 선덕제가 마지막 7차 원정을 한번 더 보내기는 한다. 정화는 이 때엔 건강도 많이 나빠져 고사하려 했으나 정화를 대신할 인재가 없었던데다 정화가 귀국 중 병사했기 때문에 결국 이 7차 항해가 마지막이 되었다.[8] 다만 명나라 전체에는 아쉬운 결정이 되었는데 북경이 수도로 남은 결과 이자성의 난과 청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속절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후 세워진 남명은 사분오열되어 자멸했던걸 감안하면 난징이 수도로 남았다면 화북을 잃을지언정 강남은 어찌저찌 보존하여 유지되었을지도 모른다.[9] 실제로 홍희제는 홍무제부터 억눌려졌던 내각의 권한을 부활시켜주고 신하들과 항상 의견을 상의하며 그들을 존중해주었기에 신하들과의 관계가 좋았다.[10] 그리고 한왕 주고후는 용맹하고 몸이 건강하지만 난폭하고 약자에게 폭력을 일삼았기에 황태자가 될수 있음에도 신하들의 우려를 받았고 영락제도 주고후의 인성이 막장임을 알고는 취소되었다. 특히 조카의 황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지닌 면에서 세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단종도 어렸으며 숙부인 세조에게 폐위되고 살해당했다는 점이다. 반면 선덕제 주첨기는 즉위 당시에 이미 20대의 성인이었고 제왕학을 다 배운 상태라서 권력 찬탈을 시도한 숙부 주고후를 역관광보냈다. 그리고 선덕제가 자비를 베풀어 살려주었더니 주고후가 적반하장격으로 그를 걷어차며 안하무인하게 굴어서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선덕제가 주고후를 역모죄를 적용하여 극형에 처했다는게 다르다.[11] 실제로 담당 배우인 양관화도 비만이라서 고증이 잘된 캐스팅이다.[12] 이 작품의 홍희제 배역이 작품상 말이 태자지 동생인 주고후의 날카로움에 눌려 있는데, 그렇다고 퉁퉁해서 이런 쪽으로만 소비(?)되느냐 하면 오산이다. 이 배우는 2010년에 적인걸도 맡은 적이 있다.[13] 양부, 양사기, 양영[14] 다만 실제 영락제는 주고후의 인성과 그가 저지른 행패를 잘 알고 있어 끝까지 주고후를 황위 계승에서 배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