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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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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명나라의 제6대 황제. 묘호는 영종. 시호는 법천입도인명성경소문헌무지덕광효예황제(法天立道仁明誠敬昭文憲武至德廣孝睿皇帝). 휘는 주기진(朱祁鎭).
정통제는 역사에 별난 기록을 남겼다. 우선 외적에 포로로 잡힌 마지막 한족 황제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다음 황제로 동생 경태제가 옹립되어, 그덕에 가치가 없어진 정통제는 풀려났지만, 존재 자체가 황권에 위협이 되어 태상황으로 유폐되었다. 별 볼 일 없는 여생만 남은 줄 알았지만, 황제는 일찍 죽어버렸고 유폐되어 있던 정통제는 복위를 하게 된다. 명나라는 한 황제마다 하나의 연호를 사용하는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2] 를 택하고 있어 복위 후에 연호를 바꿔 천순제가 되었다. 외적에 잡혔다 풀려났지만 궁에 유폐되고, 그랬다가 다시 복위해서는 연호를 바꾼 복잡한 기록을 남긴 것.
앞의 복잡한 인생사 때문에 이 사람을 연호로 부르면 이름이 두 개가 된다.[3] 그래서 묘호인 '영종'으로 지칭하는 경우도 꽤 많이 있다.[4]
2. 생애[편집]
2.1. 어린 황제[편집]
정통제는 선덕제의 장남이다. 부황이 일찍 죽어 정통제는 9세에 즉위하였다. 황제의 할머니인 성효소황후 장씨와 삼양(三楊)이라고 불리는 3명의 훌륭한 신하들이 어린 황제를 보필하여 나라를 적절히 꾸려 나갔다. 그러나 3양은 이미 너무 늙어, 이들이 은퇴한 뒤에 자신이 총애하는 환관 왕진[5] 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았다.[6]
2.2. 황제의 삽질[편집]
환관의 전횡 등으로 명나라 초기의 탄탄했던 조정은 해이해졌다. 1449년 몽골계 부족인 오이라트는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을 늘리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는데,[7] 명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족장 에센이 이끄는 오이라트족 군대가 명의 변방을 침입하였다.
환관 왕진은 황제에게 친정을 간청했다. 신료들의 만료에도 불구하고 어린 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였다. 다만, 50만 대군에는 전쟁과 무관한 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군대의 질이 크게 떨어졌다. 지휘관인 황제조차 군대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없고, 왕진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선발대는 오이라트족에게 대패했다. 그럼에도 황제와 왕진은 친정을 계속하였다.
2.3. 토목의 변[편집]
한편 오이라트족에게 보급이 차단당한 명군은 고립되었고,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삽질을 거듭 일삼던 왕진으로 인해 명군은 결국 토목보에서 에센의 오이라트족에게 포위당하다가 기습 공격으로 대참패를 한다. 이때 왕진은 분노한 대장군에게 피살되고, 황제는 탈출에 실패해 오이라트족의 포로가 된다. 더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이들의 패배 소식에 북경의 명 조정은 큰 충격을 받아 남쪽으로 천도하자는 등의 논의로 시끌벅적했으나, 결국 북경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다.
2.4. 퇴위 (태상황)[편집]
명나라를 혼내 주는 것을 넘어 황제를 포로로 잡는 의외의 성과를 이룬 에센은 다시 명과의 교섭을 시작하려 했으나 북경의 명 조정은 이미 황제의 이복 동생 주기옥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렇게 경태제가 즉위하니 교섭에서도 정통제의 존재감은 0에 수렴했고, 때문에 에센은 북경을 공격했으나 명군 수비대의 저항으로 실패했고 명군의 지원군이 오자 철수한 다음 다음해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 정통제를 명 조정에 무조건으로 송환했다. 그렇게 개망신만 당하고 돌아온 정통제는 송환되어 태상황이 되었으나, 형인 정통제의 존재는 경태제에게도 압박을 주었는지 정통제는 남궁에 유폐되었다.[8]
2.5. 탈문의 변으로 중조(重祚)하다.[9][편집]
이렇게 정통제가 유폐되자, 조정은 정통제 일파와 경태제 일파로 나뉘었다. 경태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래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 태자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1457년 1월 황제가 병을 앓아 누워 있는 중에 대장 석형(石亨), 태감 조길상(曹吉祥), 대신 서유정(徐有貞)이 정변을 일으켰고 경태제는 폐위되었다. 폐위된 지 한 달 후에 병사했다.[10] 그렇게 정통제는 다시 황제의 자리에 돌아왔지만 이전 연호를 그대로 쓰지 않고 천순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내걸었다.[11]
2.6. 조흠의 변[편집]
일단 정통제 때와는 달리 꽤 괜찮은 정치를 하긴 했지만 두 번째 재위도 편치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에도 그를 복위시키는 데 공을 세운 환관 조길상과 석형에게 휘둘렸고, 그들도 왕진과 똑같은 전횡을 일삼았다. 그래서 황제는 그들을 놔두면 황권을 위협한다는것을 알고는[12]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먼저 금의위의 수장인 녹고가 석형이 저지른 악행을 고발하자 황제는 이를 구실로 석형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는데, 체포된 석형은 얼마 안되어 감옥에서 옥사했고 그의 아들도 처형된다. 그 다음엔 조길상의 양자인 조흠이 위법 행위를 저지른 사실을 알게되어[13] 그를 불러 크게 질책했다.
석형의 몰락과 조흠에 대한 질책으로 위협을 느낀 조길상은 조흠과 조카 조현, 조탁, 조예와 상의해서 반군을 조직했고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14] 하지만 조흠의 부하인 마량이[15] 배신하고 이를 조정에 고발하는 바람에 들통났고 보고를 전해들은[16] 황제는 즉시 조길상과 그의 가족들을 전부 체포한다.
조흠은 거사가 들통났음을 알고는 조현, 조탁, 조예랑 휘하 부대들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 사건이 바로 조흠의 변(曹石之變)이다. 조흠은 반군을 이끌고 녹고의 집으로 쳐들어가 녹고를 죽였다.[17] 그다음엔 내각대학사 이신을 붙잡아 인질로 잡고는 조방으로[18] 가서 관리들을 죽이고 황궁인 자금성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예상하고 있던 황제는 황궁문을 굳게 잠그고는 근위병 5610명으로 황궁을 철통같이 수비하고 있었다. 조흠은 이신을 협박하여[19] 황제에게 녹고를 죽인것은 어쩔수 없었고 황제에게 반역할 생각은 없으며 대사면을 내리며 황궁문을 열어달라는 문서를 쓰게 했고 이신은 이를 그대로 써서 황궁 경비병들에게 주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를 흉계로 간주하며 끝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조흠은 곁에 있던 이신을 죽여버리려 했으나 부하들이 이신이 조흠 아버지의 장례식 축문을 써준 은혜를 말해서야 이를 거둔다.
협박이 통하지 않자 궁지에 몰린 조흠은 반군으로 황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흠의 반군은 황궁의 동문과 서문에 불을 질렀지만 갑작스럽게 내린 비로 인해 불이 꺼지면서 실패한다. 그러자 조흠은 이신과 대신들을 죽여버리라고 지시했고 이신과 대부분의 대신들은 모두 북경에서 빠져나간터라 실패한다. 그러나 미처 탈출하지 못한 몇몇 관리들은 반군에게 살해된다. 조흠은 자금성의 동화문을 공격해서 반군과 근위병들간의 전투가 벌어질때 도독 손앙과[20] 병부상서 마앙의 관군이[21] 공격해온다. 놀란 조흠은 저항했으나 관군이 궁병과 포병으로 사격을 하면서 수세에 몰렸으며 북경의 동쪽 시장으로 후퇴한다. 북경 동쪽 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조흠은 추격해온 손당의 관군과 싸우면서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고 전투가 치열해진다. 손당은 궁병과 포병의 사격으로 조흠의 반군을 몰살하기 시작했고 전세는 조흠에게 서서히 불리해진다. 게다가 손당의 관군이 북경 성의 모든 문을 봉쇄한터라 탈출도 불가능했다. 결국 조탁, 조현, 조예가 진압군에게 살해되고[22] 조흠은 양팔에 중상을 입고 자신의 집으로 퇴각해서 저항하다가 더이상 이길수 없음을 알고는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면서 조흠의 변은 진압된다.[23]
조흠의 변을 진압한 황제는 진압에 공을 세운 대신들에게 포상을 내리고 항복한 조흠의 부하들을 모두 처벌했다. 체포된 조길상은 재산이 전부 몰수되었으며[24] 천순제를 폐위하고 황태자를 옹립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책형에 처해진다. 조길상과 조흠, 조탁, 조현, 조예의 가족들도 연좌제로 전부 처형된다.
2.7. 말년[편집]
조길상을 제거하여 황권을 회복한 천순제는 황제로 지낸 두 번째 시기 동안에는 상당히 개념찬 황제로서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상기했듯 자기를 다시 황제로 만들어주었지만 간신으로 평가받는 조길상이나 석형 등을 제거하고 이현(李賢)과 같은 훌륭한 신하를 기용하기도 했다. 이때 천순제는 자기의 하루 일과를 설명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조상에게 절을 올리고 그 다음에는 조회를 보고 그 다음에는 밥 먹고 상주문 읽는 것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꽤 열심히 일했다.
다만 조길상, 서유정의 모함에 속아서 토목의 변 때 북경을 지킨 공신인 우겸을 죽이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비록 우겸이 경태제를 옹립한, 천순제 본인에겐 반역자와 같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상황이 매우 불가피한 경우인 데다 우겸 본인은 청렴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있는 인물이라서 대국적으로 용서해 주었다면 우겸 또한 천순제에게 충성했을 것이므로 이는 실책이라는게 후대의 평가. 천순제도 이후 우겸이 훌륭한 신하라는 것을 깨닫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건문제의 유일한 후손이자 그의 차남 윤회왕 주문규를 56년만에 유폐에서 해방시켰으며[25] 자신이 오이라트에게 포로로 잡힌 쓰라린 기억을 참고해서 그때까지 남아있던 비빈들의 순장을 금지하라는 유언을 남겨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순장이 없어진다. 당시 명나라 내부에 남았던 몽골의 풍속은 뒤틀린 폐습인 경우가 많아서 매우 개념찬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천순제는 조흠의 변을 진압한지 7년 만인 36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감한다.
3. 효장예황후와의 금실[편집]
정통제는 15세때 할머니 성효소황후가 선택한 전씨를 효장예황후로 맞이하였다. 황후의 집안은 평범했지만 품성이 훌륭하여 황후와의 금실이 아주 좋았다. 다만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26]
토목의 변으로 황제가 포로로 잡히자 황후는 깊은 슬픔 속에서 남편의 무사귀환을 위해 엄동설한에도 기도를 올리다가 건강악화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되었다. 황제가 풀려난 후엔 유폐되어 먹을 것이 곤궁해지자 전씨와 궁녀들이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황후에 대한 황제의 애정도 매우 깊어, 천순제로 다시 즉위하자 법도에 따라 황태자를 낳은 후궁 주씨를 황후로 앉히자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전씨를 다시 황후로 앉혔으며, 이후 죽으면서 황후가 죽으면 자기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상술한 비빈의 순장을 금지시킴과 동시에 자신이 죽은 뒤 성화제가 즉위해 생모 주씨를 태후로 추존하고 주씨를 합장하고 전씨를 별묘에 모실까 염려되어 내린 유언이었다. 결국 황후는 천순제 사후 4년 후 숨을 거두었으며, 황제의 유언대로 남편의 곁에 묻히게 되었다.
4. 명사의 논찬[편집]
영종은 인종과 선종의 대업을 이어받아 해내가 풍부해졌고 조야가 태평하고 편안하였다. 삼양(三楊)[27]
, 호영, 장보(張輔)와 같은 대신들은 모두 역대의 훈구들로 유조를 받들어 정사를 보좌했으며, 기강이 아직 느슨해지지 않았다. 홀로 왕진이 권력을 독점하고 전쟁을 일으켜 결국 승여가 파천하기에 이르렀다. 비로소 복벽한 뒤에야 오히려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도대체 얼마나 심한 유혹에 빠졌는가? 전후로 24년을 재위하면서 매우 불량한 시정은 없었다. 공양후(恭讓后)라는 시호를 올리고 건서인의 유폐를 풀고 궁비의 순장을 폐지하기에 이르렀으니 곧 성대한 덕업이 가히 후세 사람들이 본받을 만했다.
5. 어진[편집]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젊은 나이에 죽은 황제라는 인식과는 다르게 어진을 보면 관우 수염이 돋보이는 괄괄한 풍채를 지닌 황제이다. 사실 명나라 황제들은 지방 군벌 출신인 홍무제를 조상으로 두고 있고 영락제 이후의 황제들은 모두 황제이자 명장이기도 했던 영락제의 후손들인지라 명 전반기의 황제들은 풍채도 크고 수염도 풍성한 편이다.[28]
정통제가 천순제로 복위한 이후 어진들을 보면 곤룡포가 선대에 비해 화려해진 것이 눈에 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아들인 성화제의 어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똑같다는 점인데, 부자 관계라지만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우측이 성화제의 어진.
6. 창작물[편집]
- 작자 및 창작 연대 미상의 한국의 고전 한글 소설 《유충렬전》은 정통제 연간으로 설정되었고, 극중에 유충렬에 의해 구해지는 천자가 정통제이다.
- 2019년 드라마 《대명풍화》에서 주인공 손약미(탕웨이)의 아들로 후반부에 등장한다. 아버지인 선덕제가 역사대로 요절하면서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환관 왕진의 말만 들어서 손태후의 속을 어지간히 썩인다. 왕진에게 산해관을 선물로 주겠다며 무리한 친정을 시작했다가 왕진이 고향이 그립다고 하자 행군 노선을 변경하는 미친 짓을 벌이기도 한다. 번충 장군이 황제를 만나고 싶어하지만 환관들에 가로막혀 만나지도 못한다. 환관들이 뇌물을 주면 폐하를 뵐 수 있게 하겠다고 하자 번충 장군은 뇌물을 건네며 명나라의 현실에 통곡한다. 허허벌판을 벗어나 성 근처로 이동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황제는 번충 장군이 건방지다며 무시한다. 결국 벌판에서 진영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에센의 몽골군에게 습격당하고 포로가 된다. 포로 생활에서 몽골군에게 멸시를 받으며 온갖 굴욕을 당한다. 그러다 에센이 북경 공략에 실패하면서 북경으로 돌아오나 폐위되어 감금된다. 탈문의 변으로 다시 황위에 복귀한다.
7. 둘러보기[편집]
[1] 복벽은 왕정 복고와 같은 뜻으로 쓰이므로 다시 즉위하는 것을 따로 뜻하는 재조(再祚)나 중조가 적절하다.[2] 한 황제마다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것.[3] 1차: 정통제, 2차: 천순제[4] 가령 명나라의 각 황제에 대해 서술한 영어 위키백과의 문서들은 기본적으로 각 황제를 연호로 칭한 이름을 문서 제목으로 사용하지만,(가령 선덕제 문서는 'Xuande Emperor'를 문서 제목으로 사용.) 정통제 문서만큼은 예외적으로 묘호로 칭한 이름인 'Emperor Yingzong of Ming'을 문서 제목으로 사용한다.[5] 건달 출신으로 과거시험에 연거푸 낙방하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히자 처벌을 면하려 자진해 거세를 하고 환관이 되었다. 정통제가 황위에 오르기 전 글 선생을 하여 친해지고 이후 정통제가 즉위한 뒤에는 권력을 잡게 되었다. 출신부터가 막장이니 인성도 나빠서 정치를 잘해낼 리가 없었다.(...)[6] 일개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에는 황권강화를 위해 도입한 제도에 원인이 있었다. 영락제는 군인들을 견제하고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신임하는 환관들에게 군대를 감독하게 했었는데, 영락제와 선덕제처럼 뛰어난 황제들이 있던 시절에는 황제가 환관을 통제함으로써 군대까지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유약한 정통제는 환관 왕진을 통제하지 못했다. 왕진은 이를 이용하여 군대를 장악했고, 대신들과 장군들은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7] 조공으로 바치는게 많아지면 명나라로부터 돌려받는게 많아진다. 한국사에서도 고려가 이를 노리고 뻔질나게 송나라 국경을 넘나들어서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고려도경이라는 책까지 쓴 바 있는 서긍이라는 인물이 고려에 사절 좀 작작 보내라고 요구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도 명나라에 조공을 많이 하는것 때문에 명나라가 이 문제로 골치 아파서 조공을 줄이려 했기에 조선과 갈등하기도 했다. 비슷하게 여진 부족들과 류큐 왕국도 조선에 열심히 조공을 바쳐 조선이 골머리를 앓았다.(…)[8] 그나마 이것도 운이 좋은 거다. 앞서 북송의 휘종과 흠종은 이후 남송 고종의 정통성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송환되지 못하다가 휘종은 죽어서야 유해로 돌아왔고, 위험요소 1순위였던 흠종은 아예 금나라에서 먼저 송환 제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송 측에서 거부하여 유해조차 송환되지 못했으니, 그에 비해 정통제는 취급이 좋았던 편. 그뿐만 아니라 유폐 생활 와중에도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들을 얻은 것을 보면, 외출이나 외부와의 접촉은 통제되었을지언정 사생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9] 복벽은 왕정 복고와 같은 뜻으로 쓰이므로 다시 즉위하는 것을 따로 뜻하는 재조(再祚)나 중조가 적절하다.[10] 여담으로 정변 과정이 좀 황당하다. 석형과 조길상이 정통제가 유폐되어 있던 남궁 문을 부숴서 정통제를 빼낸 다음 군대를 이끌고 동화문(자금성의 동문) 앞에 나타나자 병사들이 경계태세를 갖추었는데 태상황이던 정통제가 앞으로 나와 "짐이 태상황이니라!"라고 외치자 경비병들이 일제히 무장을 해제하고 궁궐 문을 열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11] 본래 중국에서는 황제가 바뀌면 이듬해에 예고한 연호로 개원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경태 연호를 천순 연호로 개원할 때는 정통제가 경태제를 폐위하고 복위한 사정상 정통제의 복위 후 곧바로 천순 연호로 개원하였다. 다만 경태 연호 자체는 무효화되지 않아 경태제 재위 기간의 연도를 계속 경태 연호로 표기하였다.[12] 특히 왕진을 통제하지 못하여 왕진이 황제를 사실상 꼭두각시로 만들고 토목의 변이라는 참사를 만들었기에 이를 제대로 경험한 황제로서는 묵과할 수 없었다.[13] 황궁 근위병이 조흠의 측근인데 조흠과 친분이 있고 그의 이름을 빌려 돈벌이를 했는데 워낙 대놓고 하다보니 입장이 난처해진 조흠은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막으려고 독단적으로 그 호위병을 죽여버렸다. 그 다음에는 시신을 숨기고 근위대장과 그의 아내한테 정신병이 나서 도망쳤다고 거짓말했다. 당연히 이를 수상하게 여긴 근위대장과 병사의 아내가 황제에게 고발했고, 황제가 조사를 명령하면서 조흠이 저질렀다는것이 들통났다.[14] 이는 조길상이 그의 조카인 조현, 조탁, 조예를 도독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길상의 조카들이 지휘한 군대는 몽골 유민 출신으로 구성된 정예 기병대였다. 황제가 조길상에게 위협을 느낀것도 병권을 장악한 조길상이 역모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예상했는데 이것이 맞아떨어졌던 것.[15] 몽골 출신의 기병대 장교이다. 마량은 고변한 대가로 후한 보상과 승진을 하게 된다.[16] 당시 황궁에 숙직하고 있던 도독 손당과 관리들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놀란 손당과 관리들이 바로 황제한테 보고했다.[17] 조흠이 직접 녹고를 참수했다. 당시 녹고는 조길상 일가를 감시하고 있어 이를 알게된 조흠이 그를 증오했다. 녹고는 사후 관직이 내려지며 그의 가족들이 후한 보상을 받는다.[18] 명나라에서 관리들이 조회 시간을 기다리며 쉬는 방으로 현대로 치면 휴게실이다.[19] 조흠을 질책하는 이신에게 참수된 녹고의 목을 보여주어 이신을 공포에 질리게 하고는 문서를 쓰라고 협박했다.[20] 토목의 변 때 에센의 몽골군으로부터 북경의 서직문을 지켜낸 유능한 장수이다. 무예도 뛰어나서 직접 대도를 들고 선봉에 나서 몽골군 여러명을 죽였을 정도다.[21] 산시성의 방비를 맡은 정예 병력인 서정군 1만 5천명이었다.[22] 조탁과 조예는 싸우다가 진압군의 칼에 맞아 죽고 조현은 손당이 쏜 화살에 맞아죽었다.[23] 사후 조흠은 그의 시신을 우물에서 건져낸 관군이 목을 베어 황제에게 바쳤고 목이 북경성의 성벽에 효수된다.[24] 이때 몰수된 조길상의 재산이 굉장히 많았기에 조길상이 부정축재를 한 것이 드러났다. 몰수된 조길상의 재산은 진압에 공을 세운 신하들과 병사들한테 상으로 공평하게 분배된다.[25] 정난의 변을 일으킨 영락제가 유폐시켰다.[26] 정통제는 후궁 주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전체적으로는 후궁들 사이에서 총 9남 10녀를 두었고, 6남 8녀가 성인으로 성장했다.[27] 양사기(楊士奇), 양영(楊榮), 양부(楊溥)를 말한다.[28] 다만 정통제의 손자인 홍치제는 이전의 황제들보다 덩치가 작은 편이고 그 다음 대 황제인 정덕제부터는 수염도 빈약해진다. 정덕제 이후의 황제들 중엔 만력제가 그나마 풍채가 있는 편이지만 수염이 빈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