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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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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서달(徐達)은 명나라의 군인, 장군으로 명나라의 개국공신이다.
홍무제 주원장을 따르던 수많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선장, 유기와 함께 명나라 3대 개국공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곧잘 한 고조 유방의 공신들과 비교되는데, 이선장이 소하처럼 내정을 맡고, 유기가 장량처럼 모략을 냈다면, 서달은 한신처럼 군대를 지휘했다는 식이다.
2. 생애[편집]
주원장과 동향으로 주원장, 주덕흥, 탕화 등과 함께 지주의 소를 치며 목동 노릇을 하였다. 지주의 송아지 일화를 보면 이때 무리의 리더는 주원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홍건군에 가담하여 당시 곽자흥의 부장이었던 주원장의 수하가 되었다. 주원장이 위기에 빠졌을 때 몇 차례 구해준 적이 있어서 그와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선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공훈을 세웠다.
1353년(지정 13) 주원장의 군대에 들어가 진무(鎮撫)가 되었다. 1356년(지정 16) 진강을 점령하고 탕화와 함께 진강에 설치된 회흥익원수부(淮興翼元帥府)의 통군원수(統軍元帥)가 되었다. 1359년(지정 19)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1361년(지정 21) 우승(右丞)이 되었다. 1363년(지정 23) 파양호 대전에서 진우량과 싸우는 데 참여했다.
1364년(지정 24) 주원장이 오왕(吳王)이 되었을 때 좌상국(左相國)이 되었다. 1366년(지정 26) 상우춘과 함께 20만명을 이끌고 장사성 정벌에 나섰다. 1367년(지정 27) 장사성을 정벌하고 신국공(信國公)에 봉해졌다. 같은 해 좌상국의 명칭이 우상국(右相國)으로 바뀌자 그대로 우상국을 맡았다. 이어서 상우춘과 함께 25만명을 이끌고 북벌에 나섰다.
1368년(홍무 1) 북벌 도중 명나라가 세워지자 그대로 정1품 우승상(右丞相)이 되었다. 이 해에 원혜종을 북쪽으로 도망가게 만들고 대도를 점령했다. 1369년(홍무 2) 북벌을 마치고 돌아왔다. 1370년(홍무 3) 다시 북벌에 나서서 코케 테무르를 크게 무찔렀고, 돌아와서 개국공신이 되어 위국공(魏國公)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후로도 계속 북벌에 나서서 대체로 1375년(홍무 8)까지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항상 전쟁터에 나가있어 1371년(홍무 4) 이후 왕광양(汪廣洋) 등이 대신 우승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승상 대우를 받았다.
1376년(홍무 9) 맏딸을 뒷날의 영락제인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시집보냈다. 이후로도 대장군으로서 연왕부(燕王府)가 있는 북평을 오가며 1384년(홍무 17)까지 국경 순시와 군사 업무를 보았고 종종 직접 출진하기도 했다. 1385년(홍무 18) 죽고 중산왕(中山王)이 추봉(追封)되었다. 시호는 무녕(武寧)이다. 1388년(홍무 21) 맏아들 서휘조(徐輝祖)[2] 가 위국공 작위를 이어받았다.
서달은 사막 원정에서 코케 테무르에게 한 번 패배하기도 했지만, 그 패배를 제외한다면 그가 이끌거나 참전한 모든 전쟁과 전투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서달이 중국 내륙에서 벌인 모든 싸움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던 점에 주목한다면, 주원장의 한신이라는 별칭이 붙는다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인물이다. 원나라를 무너뜨려서 몽골 세력을 그들의 원주지인 몽골 고원으로 밀어내고, 변경을 어지럽히는 원의 잔여 세력들을 철저히 소탕했다. 서달의 북벌은 원의 뒤를 이어서 등장한 북원의 위세를 크게 약화시킴으로써 명 초기의 안정된 대외 환경에 크게 기여했다고 여겨진다.
서달의 남다르고 혁혁한 전과에 크게 기뻐한 홍무제는 서달이 개선할 때 직접 도성 밖으로 나와 맞이하였으며, 큰 공을 세운 개선 장군이자 돈독한 친구로써 황제인 자신과 나란히 앉도록 하였을 정도로 환대하였다. 이후 홍무제의 넷째 아들인 주체를 사위로 맞이하고 녹봉 5천석을 받는 위국공에 봉해지는 등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인효문황후가 홍희제를 낳았으므로 서달은 홍희제의 외할아버지기도 하다.
서달이 세운 공이나 군에서의 영향력으로 보면 홍무제에게 큰 위험이 되는 인물이었다. 다만 서달이 자신의 공을 크게 내세우지 않았고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았던 까닭에 그런대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수많은 공신들이 숙청되는 와중에서도 서달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전장터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등창을 심하게 앓았다. 서달이 등창으로 심하게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홍무제가 서달을 위로하면서 진귀한 약을 하사하였지만 결국 등창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고 만다.
홍무제는 공신이자 돈독한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중산왕에 봉하는 등 끝까지 예우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서달의 가문은 명말까지 최고의 명문가 지위를 유지한다.
3. 자녀들[편집]
정난의 변에서 서달의 자녀들의 운명은 엇갈렸다. 맏딸은 연왕 주체의 정후였는데, 맏아들 서휘조는 건문제 밑에서 군대를 이끌고 제미산에서 반란군의 장수 이빈을 죽이는 등 매형과 서로 적이 되었다. 셋째 아들 서증수(徐增壽)는 처음엔 황제군 소속이었지만 주체와 내통하다 감옥에 갇혔다.
1402년(건문 4) 영락제가 최후의 승자가 되었을 때, 서증수는 남경에 군대가 입성하여 혼란스러운 와중에 살해당했다. 반면 서휘조는 작위를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죽은 동생 서증수의 공로가 참작되어 사면되었다. 1407년(영락 5) 죽었을 때에도 맏아들 서흠(徐欽)이 별탈없이 할아버지의 가문과 위국공 작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고, 후손인 서홍기(徐弘基) 대에 이르러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상속되었다.[3]
정치적 혼란 속에서 가족끼리 편이 나뉘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지만, 결국 이긴 쪽이 죽고 진 쪽이 살아남아 집안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것은 기묘한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야사[편집]
명말 어느 소설에서는 홍무제가 서달도 숙청했을 거란 야사를 집어넣었다. 숙청했는데 서씨가 어떻게 번창했냐 할 수 있겠지만, 해당 소설에서 말한 숙청 방식은 공식적인 처형이 아닌 자살 권유다. 홍무제가 서달에게 내렸다는 진귀한 약이 많은 양의 술과 거위 고기인데, 이것이 등창에 상극이어서 병사를 유도했다는 것. 소설 작중에서 서달은 선물의 의미를 알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인데다, 사실이었다 쳐도 숙청이 맞다고 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라[4] 증명할 길이 없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서달에게 위해가 가해졌단 기록은 없다. 정사인 명사에는 서달이 홍무제가 내린 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이후 가문도 공신 가문으로 계속 번창했다. 3족에 5족까지 만들어서 씨를 말리는 홍무제 특성상 숙청을 하고도 가문이 번창할 리가 없다. 무엇보다, 등창 같은 종기는 면역력과 항생제가 중요하지 음식을 먹는다고 죽는 게 아니라서 민간야사는 믿을게 못된다.
5. 관련 유적지[편집]
오늘날 중국 난징의 태평천국역사박물관이 있는 관광지 첨원[瞻园]은 원래 서달의 후손이 위국공 저택 부지에 조성한 정원인 서화원[西花园]이었다.
6. 대중매체[편집]
2006년작《주원장》에 당연히 등장한다. 참고로 배우의 생김새가 다소 이국적(?)인데, 배우는 바이두에 의하면 다우르족이라고 한다.
2022년 드라마《산하월명》에 중서우승상으로 등장한다. 거위고기를 좋아한다. 대장군으로서 국경의 20만 병사를 통솔하고 있다. 병사들의 수포를 직접 치료할 정도로 병사들을 아낀다. 배우는 장풍의
시대적으로 비슷한 김용의 소설《의천도룡기》에도 잠시 등장한다. 장무기에게 무목유서를 받게 된다.
김혜린의 만화《비천무》에도 등장하며, 여기서는 자하랑이 숙청당하면서 버려진 철기십조를 제압하고 그 대장이 되기도 한다.
코에이의《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4의 명나라 무장으로 등장하는데 오프닝 이벤트에도 등장하며, 능력치도 명나라 초기를 대표하는 명장답게 먼치킨. 정치 67, 전투 90, 지모 85에 특기로 농업, 등용, 기동, 돌격, 화공, 공성을 보유하고 있으며, 병과 적성 보병 S, 궁병 A, 기병 A, 수군 B로 주체(영락제)와 함께 명나라 사기 장수진의 대표격이다.
7. 둘러보기[편집]
[1] 율리우스력 4월 7일.[2] 인효문황후의 동생으로 처음 이름은 서윤공(徐允恭)이다. 1389년(홍무 22) 황태자의 아들인 주윤문의 이름자를 피휘하여 개명했다.[3] 서홍기는 마테오 리치와도 교류하였는데, 마테오 리치에 따르면 서홍기의 가문은 남경에서 최고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고 한다.[4] 겉으로는 선물을 내렸는데 우연히(?) 병에 상극이었을 뿐이고, 공식 숙청도 아니니 서달 본인을 뺀 가문이 딱히 해를 입지도 않는다. 이것은 조선의 임오화변이 공식적 형벌이 아닌 뒤주에 가둬 아사시키는 형태를 취했던 것과 같다. 사도세자에게 공식적으로 처벌을 가하면 세손(정조 임금)도 연좌되어 계승받을 수 없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