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한림아
덤프버전 :
韓林兒
(?[1] ~ 1367[2] )
1. 개요[편집]
홍건적의 명목상 지도자[3] 이자 동계홍건군의 2대 지도자로, 홍건적의 난을 일으킨 한산동의 아들이다.
명사에 열전이 있지만 대부분은 유복통이나 홍건적의 난 분량이 압도적이다.
2. 생애[편집]
한림아의 고향은 난성(欒城)[4] 이며, 한산동이 아닌 이씨 성을 가진 다른 사람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한림아의 선조들은 집안 대대로 백련교를 신봉하였는데, 향불을 피우는 의식을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였고[5] 오랜 세월동안 거점을 계속 옮겨다니면서 재앙을 퍼뜨렸다.
원나라 말기에 한산동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다음과 같은 요언(妖言)을 민간에 퍼뜨렸다.
하남(河南), 강(江), 회(淮) 일대의 백성들 중 이 말을 믿은 우매한 자들이 많았다. 그들 중 영주(潁州) 사람 유복통(劉福通)은 그의 패거리인 두준도(杜遵道), 나문소(羅文素), 성문욱(盛文郁) 등과 함께 한산동에게 가세하였고, 한산동이 그러했듯이 그들도 요언을 퍼뜨렸다.천하(天下)가 지금 큰 난리에 빠졌으니, 미륵불(彌勒佛)이 강림할 것이다.
한산동은 마침내 흰 말과 검은 소를 각각 죽이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면서 그의 무리들이 일으킬 거사를 맹세했으며, 유복통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킬 일을 모의하였는데, 뒤에 그의 무리들이 들고 일어나자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빨간 두건을 머리에 둘렀다 하여 홍건(紅巾)이라고 불렀다.
1351년 5월, 마침내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가장 처음 군대를 일으킨 자는 유복통으로, 그는 황급히 영주로 들어가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획대로라면 가장 먼저 군대를 일으킬 자는 한산동이었지만, 그는 일을 벌이기도 전에 모의가 발각되어서 지역 관리에게 붙잡혀 죽었다. 유복통은 당시에 한산동과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가까스로 관리의 추격을 피해서 자신의 고향으로 달아났고, 모의가 들통났으므로 지체없이 난리를 일으켰다. 한산동이 죽임을 당하자 한림아는 그의 어머니 양(楊)씨와 함께 무안산(武安山)으로 달아났다.
유복통은 주고(硃皋)를 거점으로 삼아서 움직였는데, 그는 기세가 매우 강하여 순식간에 하남 일대의 지역 수비군을 무력화시키고 성들을 닥치는대로 무너뜨렸다. 유복통의 무리는 순식간에 10여만 명에 달할 정도로 불어났으며, 원나라의 군대는 감히 유복통을 막지 못했다. 이에 더하여 서수휘(徐壽輝)라는 자는 기(蘄)、황(黃) 지역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포왕삼(布王三)[6] , 맹해마(孟海馬) 등은 상(湘), 한(漢)에서 일어났으며, 지마이(芝麻李)는 풍(豐), 패(沛)[7] 일대를 어지럽혔다. 이때 곽자흥도 그의 고향인 호주(濠州)에서 군대를 일으켜 난리에 호응하니 이들은 모두 홍군(紅軍) 혹은 향군(香軍)이라고 불렸다.
1355년 2월, 반란을 통해서 세력을 어마어마하게 키운 유복통은 한림아를 찾는 일에 몰두했었는데 오랜 노력 끝에 탕산(碭山)의 협하(夾河)에서 한림아를 찾아낼 수 있었고, 한림아는 박주(亳州)에서 유복통의 영접을 받았다. 유복통은 한림아에게 황제를 참칭(僭稱)하도록 했으며 소명왕(小明王)의 칭호를 더해주었다. 나라의 이름은 송(宋)으로 하고, 연호는 용봉(龍鳳)으로 정했다. 탁록읍(拆鹿邑)에 있는 태청궁(太清宮)을 허물고 그 목재를 이용하여 박주에 새 궁궐을 지었으며, 한림아의 어머니 양씨는 황태후(皇太后)로 높였다.
비록 반란군의 집단이긴 했지만 관료체계도 그럴듯하게 짜여져서 두준도와 성문욱은 승상이 되었고, 유복통은 나문소와 함께 평장정사(平章政事)[8] 가 되었으며, 유륙(劉六)[9] 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가 되었다.
두준도는 한림아의 비위를 잘 맞춰주었던 모양인지 한림아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 때문에 유복통이 두준도를 시기하게 되어 끝내 그를 죽여버리고 자신이 두준도의 관직들을 꿰어찼지만 한림아는 유복통을 제지하거나 처벌하지 못했다. 이렇게 송나라의 권력은 유복통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 유복통은 태강(太康)에서 원나라의 군대에 크게 패배했고, 그들은 진격해와서 박주를 포위했다. 유복통은 한림아를 데리고 안풍(安豐)으로 달아날 정도로 심하게 몰렸었지만 이후에 세력이 다시 불어나자 부하들에게 군대를 내주고 길을 나누어 보내서 대륙 곳곳을 침략하게 했다.
1358년 5월, 유복통이 변량(汴梁)을 무너뜨리고 한림아를 맞이하였으며, 변량을 송나라의 새 수도로 삼았다[10] . 한림아는 한낱 도망자이자 도적에 불과했을 뿐이라 원래부터 큰 뜻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거기에 더하여 유복통의 명령만을 따르게 되니 그가 가진 것은 헛된 명성밖에 없게 되었다.
1359년에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가 변량을 공격해오자 유복통의 군대가 출전하였지만 나갈 때마다 패배하였고, 성안에 틀어박혀 수비만 한 지 100여 일이 지나자 먹을 수 있는 식량이 거의 다 없어졌다. 유복통은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자 한림아를 데리고 100여 기(騎)를 인솔하여 동쪽 성문을 열고 안풍을 향해 달아났다. 후궁과 관리들의 자녀 및 부새(符璽)와 인장(印章), 금은보화들은 모두 찰한첩목아가 고스란히 차지하게 되었다.
원나라 군대의 반격으로 인한 패배와 부하들의 배신, 하극상으로 인한 내란이 거듭되어 한림아의 세력은 그가 황제로 등극한 직후(1355년)에 비해서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1363년, 장사성의 장수 여진(呂珍)이 안풍을 포위하자, 한림아는 주원장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원장은
라고 말하면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림아를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여진이 이미 성 안으로 침범해와서 유복통을 죽인 뒤였다[11] . 주원장은 여진을 패배시켜서 성 밖으로 몰아내고 한림아를 돌아오게 한 뒤, 그를 저주(滁州)에 살도록 했다.안풍이 장사성에게 넘어가면 그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그 다음해에 되자 주원장은 오왕(吳王)이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한림아가 죽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기에 의혹을 불러일으켰는데, 의혹을 제기한 사람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자도 있었다.
처음에 주원장은 곽자흥의 부하로서 화양(和陽)에 주둔하였는데, 곽자흥이 죽자 한림아가 명령을 내려서 곽자흥의 아들 곽천서(郭天敍)를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장천우(張天祐)를 우부원수(右副元帥), 주원장을 좌부원수(左副元帥)로 삼았다. 이때 주원장은 성 하나만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군대(孤軍)에 불과했지만 한림아는 송나라 황제의 후예라고 불렸기에 사방에서 한림아를 향하여 호응과 지지를 보내왔다. 한림아는 그에 힘입어 마침내 황제가 되고 연호를 써서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주원장이 요영충(廖永忠)에게 한림아를 맞이하여 응천(應天)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는데, 그와 동시에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요영충은 과보(瓜步)에 도착하자 주원장의 지시대로 한림아가 타고 있는 배를 뒤엎어 그대로 침몰시켰다.[12]
한림아가 죽자, 주원장은 한림아가 죽은 해까지는 연호를 쓰지 않다가 그 다음 해부터 연호를 사용하여 오(吳) 원년(1367년)으로 삼았다. 그 해에 주원장은 대장군을 북쪽으로 보내서 중원(中原)을 공격하여 평정하였고, 결국 순제(順帝)가 북쪽으로 달아나니 그 모든 일들이 한림아가 죽은 때로부터 겨우 1년 남짓의 기간[13] 에 일어났다. 한림아가 황제를 참칭한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기간은 무릇 12년이었다.
3. 평가[편집]
한림아는 중원을 횡행(橫行)하고 웅거(雄據)하면서 그의 군대를 풀어 원나라의 모든 국토를 유린하고 장강과 회하를 원나라로부터 막아낸 것이 10여 년이었다. 태조(太祖)가 조용히 제업(帝業)을 달성한 것은 한림아의 선례에 힘입은 것이다. 제왕(帝王)이 흥하여 나라가 세워질 때는 반드시 선도하는 자[14]
가 있고, 제왕이 그의 힘을 빌려서 제업을 이루게 된다. 태조가 이룩한 제업을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4. 둘러보기[편집]
[1]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1340년에 태어났다고 적혀있으나 확실한 정보는 아니다.[2] 사망한 시점이 1366년 음력 12월이나, 양력으로 적용하면 1367년이다.[3] 실권은 한산동과 같이 반란을 일으켰던 유복통이 오로지했다.[4] 현재의 허베이성 스자좡시 롼청구[5] 한림아의 조상들은 단순히 백련교 신도가 아니라 교주의 자리를 맡아서 사람들을 끌어모았을 것으로 추정된다.[6] 본명은 왕권(王權)이다.[7] 한고조의 고향이다.[8] 평장정사는 정2품의 재상직이기에 높은 관직이긴 하지만 승상보다는 격이 한참 떨어진다. 사실상 최초의 홍건적 우두머리와 다름없는 유복통이 어째서 승상보다 낮은 평장정사를 맡았는지는 불명이다.[9] 유복통의 동생이다.[10] 변량이 북송의 수도였던 점을 생각해보면 유복통이 한림아 정권의 정통성을 생각하여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11] 유복통이 죽음으로써 동계홍건군은 사실상 붕괴된다.[12] 송나라 황제의 후예라는 칭호에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한림아는 당시 주원장의 입장에서 이용가치가 전혀 없는 껄끄러운 상관에 불과했다.[13] 한림아가 죽은 것이 1366년 음력 12월이고 원나라가 멸망한 것은 1368년 음력 8월의 일이다.[14] 전한의 건국을 예시로 들자면 제왕은 유방이고 선도자는 진승과 오광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