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성량
덤프버전 :
명사(明史) | |||||||||||||||||||||||||||||||||||||||||||||||||||||||||||||||||||||||||||||||||||||||||||||||||||||||||||||||||||||||||||||||||||||||||||||||||||||||||||||||||||||||||||||||||||||||||||||||||||||||||||||||||||||||||||||||||||||||||||||||||||||||||||||||||||||||||||||||||||||||||||||||||||||||||||||||||||||||||||||||||||||||||||||||||||||||||||||||||||||||||||||||||||||||||||||||||||||||||||||||||||||||||||||||||||||||||||||||||||||||||||||||||||||||||||||||||||||||||||||||||||||||||||||||||||||||||||||||||||||||||||||||||||||||||||||||||||||||||||||||||||||||||||||||||||||||||||||||||||||||||||||||||||||||||||||||||||||||||||||||||||||||||||||||||||||||||||||||||||||||||||||||||||||||||||||||||||||||||||||||||||||||||||||||||||||||||||||||||||||||||||||||||||||||||||||||||||||||||||||||||||||||||||||||||||||||||||||||||||||||||||||||||||||||||||||||||||||||||||||||||||||||||||||||||||||||||||||||||||||||||||||||||||||||||||||||||||||||||||||||||||||||||||||||||||||||||||||||||||||||
※ 25권 ~ 99권은 志에 해당. 100권 ~ 112권은 表에 해당. 명사 문서 참고
|
이성량 李成樑 | |
| |
이름 | 이성량(李成樑) |
자 | 여계(如契) |
호 | 인성(引城) |
본관 | 철령 이씨[1] 성주 이씨 중에서 명나라로 넘어간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
출생 | 1526년 |
대명 산동성 요동도사 철령위 | |
사망 | 1615년 (향년 89세) |
대명 북경 순천부 | |
가족 | 장남 이여송 외 8남 |
국적 | 대명 |
1. 개요[편집]
명나라 후기의 무관이다. 요동 총병관으로서 요동 일대를 통괄, 여진족을 다스렸다.
2. 생애[편집]
본관은 성주로 자는 여계(如契)였다. 고려의 전객부령이었던 이천년의 6대손이었다. 이천년은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시조 <다정가>로 유명한 이조년[2]
고려 말기의 권신이었던 이인복, 이인임 형제의 할아버지였다.
이승경의 아들 이영(李英)은 중국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 이영의 4대손이 바로 이성량이었다. 요동 철령위의 지휘첨사를 대대로 세습하고 있었지만, 1570년에 요동총병이 되어, 당시 침입이 격렬했던 여진족에 대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이성량은 군비를 확충하면서, 건주 여진, 해서 여진, 야인 여진 등으로 나뉘어 있었던 여진족이 명나라와의 교역권을 놓고 싸우는 것에 개입해 내부 분열을 도모하는 전략으로, 요동의 안정에 큰 공적을 세웠다. 이 시기에 이성량의 후원을 얻어 세력 확대에 성공한 사람이 훗날의 청태조 누르하치였다.[3]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인 기오창가와 아버지인 탁시 부자는 건주 여진인이었지만 이성량이 이끄는 명군을 도왔는데, 1583년 명군과 연합해 타 부족의 마을을 치는 과정에서 명군에 의해 둘 다 오인 사살된 바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요동을 통괄해, 지방의 실력자로서 할거한 이성량은, 한편으로 군비의 유용 등 독직이나 전단이 많아 사실상 요동 군벌로 변하면서 1591년에 탄핵 되어 실직되었다. 그후 잠시 복직했지만, 1608년에 파면되었으며 이후 1615년에 사망했다.
3. 기타[편집]
소생으로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운 이여송, 임진왜란과 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이여백(李如柏) 등 9명의 자식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 일가를
이라고 불렀다.이가구호장
(李家九虎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