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주상순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명나라 황제 만력제의 3남으로 작위는 복왕(福王), 시호는 효황제(孝皇帝)이다.
2. 생애[편집]
만력제는 주상순의 어머니 후궁 정귀비를 총애했다. 이에 주상순을 태자로 삼고자 했으나, 장자계승을 지지하는 신하들이 반대하여 쟁국본(爭國本)이라는 사태가 벌어졌다.[1] 결국 1603년 장남 주상락을 책봉했지만, 이후로도 태자 암살시도(정격안) 사건이 벌어지는 등 명나라 조정은 혼란스러웠다. 이궁안에 이르러서는 생모 정귀비가 이궁안의 배후로 지목된 탓에 정귀비가 1620년 자결했다.
아무튼 주상순은 황제가 되진 못했지만 복왕(福王)으로 책봉되어 그 이름대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만력제는 주상순이 결혼할 때 혼인비용으로 황금 30만냥을 썼고, 왕부도 다른 왕자들보다 더 화려하게 꾸며주었으며 낙양과 많은 토지들을 영지로 하사하며 후하게 대우해주었다. 그러나 주상순은 사치와 탐학질이 너무 심한 나머지 그 넓은 땅에서 나오는 세금에도 만족하지 못해 백성들을 쥐어짜고 다녔고, 명나라에서 손꼽히게 부유하던 하남과 낙양의 백성들이 끼니 걱정을 하며 주상순을 증오하게 만들었다. 조정 대신들도 주상순의 탐학질이 극심함을 알았지만 황제의 숙부이자 숭정제의 즉위를 지지하여 공을 세운 주상순을 직접 공격하진 못하고 다만 백성을 구휼하라고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말을 한다고 들어먹었을 인간이면 처음부터 착취를 안 했을 것이니 그의 탐욕은 사그라드는 법이 없었다.
1627년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고 1641년 이자성 반군이 낙양을 포위했다. 당시 낙양성은 견고하고 병사의 수와 군량도 충분했기에 이자성 군도 초반에 공성을 시도하다 피해를 입어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상순은 낙양의 병사들을 열악하게 대하고 자기 재산 지키기에만 골몰했다. 병사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위로금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주상순이 준 위로금은 고작 은화 4천 냥이었고, 이 돈조차 부장들이 그중 3천 냥을 횡령하여 병사들에게는 1천 냥만 전달되었다. 이 때문에 분노한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켜 군관들을 죽이거나 체포한 다음 성루를 태우고 성문을 열어 이자성 군을 맞이하였다. 주상순은 낙양이 함락될 때 성 밖으로 도주했는데, 몸무게가 300근(150kg)이나 되는 몸이라 지쳐서 영은사(迎恩寺)란 절에 숨어 쉬던 중에 추격해온 이자성 군에게 붙잡혔다.
이자성이 주상순의 재산을 조사해본 결과 쌀이 수만 석에 셀 수 없이 많은 금은보화를 가졌으므로 이를 본 이자성과 반란군이 놀랐으며 낙양 주민들도 놀라면서 하나같이 분노했다. 그래서 이자성이 주민들한테 끌려온 주상순을 어찌할까 물어보니 모두들 '죽이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자성은 주상순을 참수하여 목을 효수한 뒤 복록연(福祿宴)이라는 연회를 열어 사슴고기와 함께 주상순의 고기를 술안주 삼아 먹었다.[2]
주상순은 복왕(福王)이고, 사슴은 한자로 록(鹿)이라 하는데 녹봉 록(祿) 자와 발음이 같다. 복록(福祿)이라고 하면 '하늘이 내린 복과 나라가 주는 돈(녹)'이란 뜻인데 부귀영화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래서 주상순의 고기(복)와 사슴의 고기(록)를 함께 먹음으로써 복록을 얻는다는 주술적인 뜻을 부여한 것이다. 주상순의 피와 사슴의 피도 술에 섞어 복록주(福祿酒)라고 부르며 마셨다.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말 그대로 복록의 끝이 보이지 않던 자의 최후는 이처럼 비참하였다.
위처럼 이자성군에게 잡아먹혔다는 기록이 유명하지만 다른 기록도 있다. 주상순이 이자성에게 붙잡힌 뒤 연회 자리에 끌려가긴 했지만, 연회 자리에서 잡아먹힌 게 아니라 이자성에게 사슴 요리를 대접받았고 이후 주살당했다는 기록이다. 시신도 요리된 게 아니라 주상순을 따르던 환관들의 간청을 들은 이자성이 장례는 치르도록 허락해 주었고 결국 간소한 장례와 함께 묻혔다는 기록이다. 그 외에도 아예 주상순을 산 채로 삶아서 그대로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핏물, 내장, 체모를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삶으면 도저히 먹을 만한 물건이 나오지 못할 것이므로 믿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이두 백과는 잡아 먹혔다는 설은 야사고 이 설이 정설인 듯 설명한 데 반해, 중국어 위키피디아나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잡아 먹혔다는 설을 정설로 설명하였다.
분명한 사실은 주상순이 이자성 군대에 붙잡혀 참수되어 죽었고, 착취에 시달리던 낙양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기뻐했다는 점이다.
3. 추존[편집]
본래 숭정제가 내린 시호는 복충왕(福忠王)이었다.
장남 주유숭이 남명의 홍광제로 즉위하자 공황제(恭皇帝)로 추존되었고 공황제(共皇帝)로 개정되었다가 최종적으로 정순숙철성경인의효황제(貞純肅哲聖敬仁懿孝皇帝)에 추존되었다. 결국 아버지 만력제가 원하는 대로 사후에나마 황제가 되긴 했으나 홍광제의 정권이 불과 1년 만에 무너져 의미가 없어졌다.
영력제가 즉위하자 시호가 모천부도정순숙철수문현무성경인의효황제(慕天敷道貞純肅哲修文顯武聖敬仁毅孝皇帝)로 개정되었으며 묘호를 공종(恭宗)이라 하였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대체역사소설 명군이 되어보세!에서 언급되는데, 형 주상락이 일찍 사망해 황제로 즉위했다고 한다. 원역사에서 형 주상락의 연호였던 태창제를 여기서는 주상순이 썼다. 아버지 만력제에 뒤를 이어 암군의 행보를 이어가는데 고영상의 반란군이 모문룡을 통해 뇌물을 바치려 하자 웅정필이 모문룡을 처형했고 이에 주상순은 자신에게 뇌물이 바쳐지는 것을 막았다는 이유로 웅정필을 냅다 처형해버린다. 그 결과 명군은 빠르게 붕괴했고 주상순은 조선으로 탈출하려다가 고영상에게 붙잡힌다. 그래서 명나라는 실제 역사보다 더 빨리 멸망했고 최후는 원역사와 똑같이 수육이 되어 수십만의 사람에게 잡아먹힌다. 이후 산해관을 통해 입관한 청태종(다이샨)은 그에게 암군들에게나 주는 영종(靈宗)이라는 묘호를 올린다.
5. 둘러보기[편집]
[1] 쟁국본은 엉뚱하게도 조선에 불똥이 튀어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 문제로 연결된다. 광해군과 주상순 모두 임금의 장남이 아니었기에, 광해군을 책봉해주자고 하면 만력제 쪽에 명분이 실려버리니 선뜻 광해군을 지지할 수 없었던 것. 결국 명은 끝까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선에 보낸 친서에 '조선의 세자 광해'라고 하는 등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인정했고, 광해군이 즉위했을 때도 별말없이 승인해주었다.[2] 반란군이 주상순을 잡은 뒤 능지처참해서 가마솥에 넣고 고깃국을 끓였는데, 그 몸에 어찌나 기름과 살이 많은지 그곳에 있던 군중들 모두가 기름이 뜬 국물 한사발에 고기 한 점을 씹을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