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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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이신 추모 임금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자라를 띄워라!"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임금의 언령. 광개토대왕릉비 중 발췌.
1. 개요[편집]
고구려의 초대 군주. 묘호와 시호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시조 '동명성왕'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는 '태조 중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태조'라는 묘호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뒤에 태조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 따로 있다는 점도 동명성왕의 호칭인 태조가 묘호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준다.
보통 주몽과 동명(東明)을 동일시하지만 당대 기록인 702년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東明)과 '주몽'(=추모/중모)을 별개 인물로 보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 때까지는 동명과 주몽이 별개였으나, 삼국시대가 끝난 뒤 훗날 고려시대 이후 시점에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추모왕이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동명왕 문서 참조.…옛날에 동명(東明)이 기(氣)를 느끼고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朱蒙)은 해를 품고 패수(浿水)에 임해 수도를 열어, 위엄이 해 뜨는 곳[扶索\]의 나루에 미치고 세력이 동쪽 지역[蟠桃\]의 풍속을 제압하였으니…
…東明感氣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臨浿水而開都 威漸扶索之津力制蟠桃之俗…
〈연남산 묘지명〉 中
2. 칭호[편집]
2.1. 성씨[편집]
2.2. 이름[편집]
휘는 매우 다양한 기록이 있다. 당시 고구려인들이 직접 남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추모(鄒牟)로 쓰여 있으나 따지고 보면 모두 같은 이름을 서로 다른 한자로 음차해 놓은 것이다. 첫 음절의 초성이 /t/이고 두 번째 음절의 초성이 /m/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의 언어학자 알렉산더 보빈 교수는 이 이름의 첫 음절을 *tjoh(둏)으로 재구하기도 했는데,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뛰어남', '좋음'의 의미를 가려낸 뒤, 이를 '좋다'의 중세 한국어 형태인 '둏다'와 연관 지은 것이다. 그러나 주몽의 시대가 워낙 오래 전이기 때문에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다.[6] 오히려 한국어의 말음 'ㅎ'은 고대로 가면 'k' 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tjoh'이 아니라 '*tjok'[7] 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보빈은 '주몽'의 '주' 부분이 '좋-'의 어원으로 보았다. 하지만 '몽' 부분은 오리무중이라고 했다. 그 어떤 한반도 주변의 언어에서도 궁수와 관련해서 'mV' 형태의 단어는 없었기 때문이다.[8]
한편, 상고한어 시절에 '조(朝)'의 발음이 백스터-사가르의 재구음으로 't(r)aw'로 [다우] 내지는 [드라우]인 것으로 보아, '(고)조선'의 '조'와 '주몽'의 '주' 모두 같은 단어(보빈의 견해대로라면 '좋-'의 고어형)를 음차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조선(朝鮮)'이 음차 표기가 아니라 '아사달'을 훈차한 표기라는 주장도 제기되므로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사달 항목 참조.
대중적인 '주몽'이라는 이름은 우리 고유어를 한자로 음차할 때 일부러 "朱蒙" 자를 쓴 이름이다. 일부에서는 고주몽이라는 이름에서 '주'는 "난쟁이 주(侏)"이며 '몽'은 어리석음을 뜻하는 "우매할 몽(蒙)"을 쓰기에 중국 쪽이 추모왕을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주몽의 朱와 난쟁이 侏는 비슷하지만 다른 한자이고, 蒙자는 역사적으로 중국인 이름에도 쓰인 예시가 있기 때문에 과도한 꿰어맞추기라고 볼 수도 있다. 애초에 한자는 글자 하나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으며, 그 중에서 굳이 나쁜 의미만을 찾아서 그쪽으로 해석하고 트집 잡는 건 청나라 황제들이나 하던 일이다.
만일 중국 측에서 정말 비하적인 의도로 추모의 이름을 주몽으로 바꾼 것이라면, 소서노의 奴도 음차할 때 비하적인 목적으로 일부러 奴(종 노) 자를 사용한 결과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소서노는 중국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삼국사기 등 국내에 현전하는 사서 몇 권에서만 전해지는 인물이다. 또한 고구려 인명중에서 奴(종 노)를 사용하는 인명은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서 유리왕 때의 신하 부분노도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서 등장하는 고대 한인이나 왜인의 인명 중에서도 奴, 尸(주검 시) 등의 부정적인 한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많은 것을 보면, 이 주장은 신빙성이 그리 높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9] 따라서 주몽을 의도적으로 비하했다는 논리는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당대 고구려인들이 작성한 금석문에서는 일관적으로 추모로 칭해지기 때문에 주몽이 아닌 추모라고 부르는 게 타당하고 합리적이며 바람직하다.
생부인지 계부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일단 동명성왕 추모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도 몇몇 고구려, 백제 계열 성씨의 조상으로 나타나며, 여기선 '도모'(都慕)라고 기록되어 있다.
2.3. 묘호, 시호[편집]
2.4. 기록 원문[편집]
그가 성장하여 자(字)를 주몽(朱蒙)이라고 하니, 그 나라의 속언(俗言)에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及長, 字之曰朱蒙. 其俗言 「朱蒙」者, 善射也.
《북사》 열전 〈고구려〉
옛날을 생각건대 옛날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이 땅에 나라를 세웠으니...
惟昔 始祖鄒牟王 之創基也...
『광개토대왕릉비』 제1면
하박(河泊)[14]
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이신 추모성왕(鄒牟聖王)께서는 북부여(北夫餘)서 태어나셨다. 천하사방(天下四方)이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거룩함을 알지니…河泊之孫 日月之子 鄒牟聖王 元出北夫餘 天下四方知此國郡最聖...
〈모두루 묘지명〉
시조(始祖)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며 이름이 주몽(朱蒙)【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한다.】이다....
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본기〉 제1 '시조 동명성왕'
백제 시조는 온조왕(溫祚王)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鄒牟) 혹은 주몽(朱蒙)이라고 한다.
百濟 始祖 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 朱蒙
《삼국사기》 제23권 〈백제본기〉 제1 '시조 온조왕'
(문무왕이)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생략)...그대의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遣 沙飡 須彌山 封 安勝 爲 高句麗王 其 冊曰...(생략)...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
《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시조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성은 고씨(高氏)고 이름은 주몽(朱蒙)이다....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동명왕'
신작(神雀) 4년 계해년[15]
여름 4월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무릇 백제의 태조(太祖) 도모대왕(都慕大王)은 태양신이 몸에 내려온 분으로 부여에 머물러 나라를 세웠다. 천제(天帝)가 녹(籙)을 내려 모든 한(韓)을 통솔하고 왕을 칭하게 하였다
《속일본기》 〈간무 덴노기〉 엔랴쿠 9년
덕좌왕(德佐王)은 도모왕(都慕王)의 손자(孫)[17]
다.
《신찬성씨록》 〈우경제번〉(右京諸蕃)편
동으로는 개오(開梧)의 지경을 막고, 남으로는 ▨▨과 이웃하고, (북쪽으론) 황룡을 맞이하여 주몽을 태우고...
東拒開梧之境南▨▨桂之接黃龍駕朱蒙...
3.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동명성왕/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숭배[편집]
동명성왕의 경우, 그래도 한국 고대사의 왕들 중 사후에도 꾸준히 영광을 얻은 편이다.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 같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대 및 중세 국가들의 시조로 오랫동안 추앙받아 왔다. 조선은 국가의 시조로까지 보진 않았으나, 조선 시조 단군[18] 과 동격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신궁(神弓)'으로 불리었으며, 물레 위의 파리를 쏘아 잡았다거나 송양과 나라를 두고 재주를 겨룰 때 100보 바깥의 옥가락지를 깨었다는 등 관련 설화가 전해진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양궁 선수들을 가리켜 '주몽의 후예'라는 표현을 언론에서 쓸 정도로 현대 한국에서도 명궁의 대명사로 통한다. 드물지만 현재에도 동명신(東明神)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있다.
4.1. 고구려, 백제[편집]
고구려 당시엔 국가 시조이니 당연히 숭배됐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요동성이 당군에게 공격받는 기록에서, 요동성에는 그의 창과 갑옷을 모신 사당이 있고 무녀가 있다는 언급이 남아있다. 그리고 무녀의 예언을 듣고 처녀를 제물로 바치자, 무녀가 "주몽이 기뻐하시니 요동성은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는 말을 했지만 결국 함락됐다.[19]
중국의 역사서 《북사》에도 주몽 숭배 관련 기록이 있는데,
라고 쓰고 있다.신묘가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조각해 부인상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여 그들의 시조이며 부여신의 아들이라고 한다. 모두 관사를 설치해 놓고 사람을 보내 수호하는데 대체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고 한다.
동명성왕의 유물에 관련된 기록이 남은 건 저 정도뿐이지만, 나라의 시조신인 만큼 요동성에만 이런 사당이 있었을 리는 없고, 아마 주요 도시마다 사당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20] 무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제사 의식에는 무속적인 요소가 강하게 있었던 듯하며,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상을 바탕으로 초상이나 상(象)을 만들어서 모신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고려도경》의 내용에 의하면 고려 중기에도 고구려와 비슷한 방식의 숭배가 내려오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백제에선 동명왕의 아들 온조왕이 '동명묘'를 두어 제사지냈고, 또 국가시조로 '태조 도모[21] 대왕'을 언급하는 등 숭배 의식이 명확했다.
4.2. 고려~조선[편집]
고구려 시조에 대한 숭배는 고려, 조선 때에도 이어졌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시대엔 중화현 용산에 '동명왕묘(東明王廟)'가 있었고 평양 인리방엔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가 있었다. 동명왕묘는 왕릉이 있던 곳이고[22] 동명성제사는 신사(무교)였다[23] .
고려시대 당시 평양 지역의 동명왕 사랑은 매우 컸는데, 평양 각지에 동명왕과 관련된 전설이 잔뜩 남았다. 동명왕의 별궁인 구제궁[24] , 그가 건너 다닌 통한교(通漢橋), 기린마를 길들인 기린굴, 승천할 때 밟았다는 조천석까지[25] . 중화현 용산엔 화반석으로 만든 동명왕릉이 있는데, 《제왕운기》는 동명왕이 승천해 돌아오지 않자 성자(聖子) 유리가 부왕의 옥 채찍을 용산에 묻었으니 바로 지금의 동명왕릉이라고 했다.
고려 시절 위 같은 동명왕 사랑 덕분에 왕은 신적 존재인 '동명성제(東明聖帝)'로 숭배됐는데, 《삼국유사》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26] . 또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평안도 안주목 은산현 관음봉에 천성사(天聖寺)가 있었는데, 민간에선 '동명성제'가 평양 조천궁에서 은산현 관음봉으로 강림할 때 궁전으로 쓰던 곳이 천성사였다고 전해졌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 개경 나성 안에 '동신사'가 있었는데, '동신성모'를 모신 신사(무교)였다. 저자 서긍은 이 동신성모는 '고려시조[27] 를 낳은 부여의 아내이자 하백의 딸'이라고 기록했다[28] . 고려에선 동명왕 숭배의 연장선으로 유화부인도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엔 동명왕이 기자, 단군과 함께 평양의 삼성(三聖)으로 숭배됐다. 세종대왕은 평양부 의리방에 동명왕과 단군을 같이 제사지낼 전각을 만들었고[29] , 세조는 동명왕의 위패를 '고구려시조 동명왕지위'로 고정했다[30] . 영조는 이 전각에 숭령전이란 전호를 내렸다. 대한제국 때엔 각 도에서 지내는 제사로 동명왕릉과 숭령전 등을 지정했다.
국초 명나라를 공격하기로 한 요동 정벌 계획에선 관료들이 동명왕의 옛 강토 운운하는 계승 의식이 보인다#.
5. 광개토대왕과의 관계[편집]
지안시의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광개토대왕이 추모왕으로부터 17대손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두 왕의 생년은 약 430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3세손(12대손)이 된다. 대손으로 셀 경우 세손에서 1을 뺀다. 세손은 기준 세대를 포함해서 계산하는데 대손은 포함하지 않기 때문. 나를 1세로 한다면, 나의 자식은 나의 2세/2세손이 되면서 1대손이 된다.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다. ...(중략)...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셨다.'''
『광개토대왕릉비』
그래서 신채호는 차대왕과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서자로 보았다. 그렇게 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렇게 하면 1세대가 늘어나고, 진수의 《삼국지》의 설을 채택하여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본다 해도 2세대가 늘어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다른 사서를 참고하지 않고, 연대 계산을 다시 해서 태조왕을 유리명왕의 손자가 아니라 대무신왕의 손자라는 가설도 세웠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이 주몽의 자손임은 여전하지만,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없지 않다.
재사를 대무신왕의 아들로 보고, 차대왕이 71년생이고 신대왕이 89년생이므로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보더라도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5세손이 된다. 《삼국지》의 〈위지〉 동이전에는 초기 고구려의 왕계를 주몽-여달-여율-막래로 전하는데, 막래는 모본의 오기로도 추정된다. 여달은 유리명왕으로 비정되며, 〈위지〉 동이전에 막래가 부여를 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막래를 모본왕이 아니라 대무신왕으로 보며, 여달과 막래 사이의 여율을 유리명왕의 아들 여진과 같다고 본다면, 다음과 같이 광개토대왕을 동명성왕의 17세손(16대손)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 동명성왕 - 유리명왕 - 여율 - 대무신왕 - 재사 - 태조대왕 - 차대왕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6. 정체에 대한 논란[편집]
6.1. 부여 시조 동명왕과의 관계[편집]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을 존중해 동명왕보다 추모왕이라는 칭호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영향인지 동명왕과 추모왕이 별개의 인물이라는 설이 생겨났다.
참고로 〈동명왕 전설〉은 《논형(論衡)》 〈길험〉편에 나오는 부여 건국 설화와 상당 부분 일치하며, 백제 왕족들의 성씨를 보면 주몽이 일단 부여계라는 게 거의 정설이다. 즉, 고구려의 건국 왕인 주몽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조상인 〈동명왕 전설〉을 차용했다는 것이다. 고리국 → 부여, 부여 → 고구려로 이동하는 부분도 그렇고 설화 자체가 거의 똑같아 상당 부분 〈동명왕 전설〉을 차용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평가받는다.
KBS 역사스페셜에서 고구려와 부여 설화 차용과 관련된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다. 동명성왕의 건국 설화, 즉 하늘 신이나 하늘 신의 아들이 강의 신의 딸과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주변의 사악한 왕의 미움을 받다가 도망쳐서 왕국을 세운다는 내용의 설화는 중앙 유라시아의 건국 설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벡위드 교수는 스키타이, 흉노, 몽골, 돌궐를 비롯한 유목 국가뿐만이 아니라, 고대 로마나 중국의 주나라 등 중앙 유라시아에서 영향을 받은 많은 정주 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건국 설화로 삼고 있다고 한다.
6.2. 해씨? 고씨?[편집]
성을 해씨에서 고씨로 고쳤다고 하나, 아들인 유리명왕 대부터는 다시 해(解)씨(《삼국유사》·〈왕력〉)로 나오기 때문에, 고구려 초기 왕계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런데 동명성왕만이 아니라 이후 고구려 왕족의 계보도에서 여러 문제가 발견되기 때문에 해씨 고구려설이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아마 주몽의 원래 성씨는 고씨가 아닌 해씨였을 터인데 제6대왕인 태조대왕 때부터 고씨를 차용하게 되면서 소수림왕이 건국 군주의 성씨를 조작했을 것이라고 한다.
혹은, 해씨를 쓴 게 맞으나 원래는 방계였던 태조대왕계가 고씨라는 성을 쓰기 시작하면서 추모왕계에 대한 신성화 과정에서 동명성왕이 고씨임을 유난히 강조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러면 유리명왕, 대무신왕 등도 자연히 고씨가 되기 때문에 해씨를 성으로 썼던 역사가 묻힌 거라는 것이다.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 신라도 초기 국왕 계보에서 사실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중반기부터 왕위를 확립한 왕족들이 자신들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국왕 계보에 조작을 가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기에 고구려 시조 주몽의 성씨와 그 계보에 대해선 논란이 클 수 밖에 없다.
《후한서》에 나오는 '고구려후(侯) 추'[31] 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실제로는 AD12 임신7월 한나라 전담(田譚)이 색두(索頭)와 서로싸우고 색두(索頭)가 현토태수 구추(勾鄒)에게 원병을 구하자 구추(勾鄒)는 연비(延丕)를 보내어 전담(田譚)을 공격해 죽였다 (유리왕31년)
三十一年 壬申七月 漢人田譚 與索頭sutou相爭 請救於勾鄒 勾鄒使延丕 擊譚殺之 譚不遜故也
《동국통감》에는 중국 장수 엄우가 '고구려 장수 후추'(高句麗將 侯鄒)를 잡았고, 그다음 중국이 왕을 '하구려후'라고 비하했다고 한다.
6.3. 백제의 태조?[편집]
일본의 사서 《속일본기》나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백제의 왕족 및 귀족들은 주몽의 다른 이름 혹은 일본식 발음인 도모를 백제의 태조라고 기록했다.
백제인들은 온조가 아니라 온조의 아버지 주몽을 시조로 보고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정작 고구려인들은 주몽이 아니라 제6대 왕을 태조대왕이라 칭했다는 점이 특이 사항이다.황태후의 선조는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태자(純陀太子)에서 나왔다. 황태후는 용모가 덕스럽고 정숙하여 일찍이 명성이 뛰어났다. 코닌 덴노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혼인해서 맞아들여 지금의 덴노와 사와라 친왕(早良親王)과 노토 내친왕(能登內親王)을 낳았다. 호키(寶龜) 연간( 770년 ∼ 780년)에 성(姓)을 (야마토에서) 타카노노 아소미(高野朝臣)로 고쳤다. 지금의 천황이 즉위하여 황태부인(皇太夫人)이라 하였는데, 엔랴쿠 9년에 추존(追尊)하여 황태후라 하였다.
그 백제의 원조(遠祖)인 도모왕(都慕王)은 하백의 딸이 해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는데, 황태후는 곧 그의 후손이다.
《속일본기》 엔랴쿠(延暦) 8년(789)
다만 《삼국사기》에 보장왕의 아들이라 추정되는 안승의 조상이 '태조 중모왕'이라 나오는데 중모는 주몽의 다른 음차로 여겨지며 이럴 경우 고구려의 태조도 동명성왕이 되지만 태조왕과의 기록과 모순이 생긴다.
6.4. 구려후 추?[편집]
《한서》 〈왕망전〉에 따르면 서기 12년, 구려후 추가 엄우에게 유인당한 후 살해되었는데 이때 살해된 추가 추모(주몽)라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에 의하면 추는 고구려 장수 연비로, 주몽이나 유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추'라는 발음이 추모의 앞글자와 유사하기에 주몽 쪽으로도 설득력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구려후 추 항목 참조.
7.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一年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二年夏六月 비류국이 고구려에 항복하다.
三年春三月 황룡이 나타나다.
三年秋七月 경사스런 구름이 나타나다.
四年夏四月 짙은 구름과 안개가 끼다.
四年秋七月 성곽과 궁실을 짓다.
六年秋八月 신기한 참새가 궁전에 모이다.
六年冬十月 행인국을 정복하다.
十年秋九月 난새가 왕대에 모이다.
十年冬十一月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성읍으로 삼다.
十四年秋八月 동명성왕의 어머니 유화 부인이 동부여에서 죽다.
十四年冬十月 부여에 토산물을 주다.
十九年夏四月 왕자 유리가 부여에서 도망해 오다.
十九年秋九月 동명성왕이 죽다.
건국 신화의 경우, 동명왕의 기록과 융합된 것으로 관측된다.
8. 《구삼국사》 기록[편집]
《동국이상국전집》 제3권 〈고율시〉 '동명왕편'
《구삼국사》는 유실되었으나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에 남아있는 〈동명왕 본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참고로 이규보가 남긴 기록에는 연도가 정확히 언급되지 않는다. 원본에는 남아있을지도?
一年 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다.
?? 비류국왕 송양과 활쏘기를 하였다.
?? 비류국에서 북을 훔쳤다.
?? 六月 비류국이 고구려에 항복하다.
?? 七月 검은 구름이 끼었고 일주일후 궁궐이 완성되었다.
??[32] 四月 부여에서 도망쳐온 유리를 태자로 삼다.
?? 九月 왕이 하늘로 승천하고 내려오지 않았다.
9. 기타[편집]
- 많은 사람들이 국사와 세계사를 따로 배우기 때문에 동명성왕이 마치 신화 속 인물쯤 아주 오래된 인물로 생각하지만 고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거의 비슷한 연배다. 실제로 둘이 비슷한 연배지만 현대 사람들에게 아우구스투스는 노련한 정치가였던 역사적 실존 인물로 인식되고, 고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신의 아들로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인물로 인식된다. 이는 로마의 기록이 상당히 풍부하기 때문인데, 로마는 고대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역사 기록에 신화적이거나 전설적인 부분을 섞지 않고 현실적인 기록을 남겼다. 이는 신화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의 철학과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로마인들의 철학이 당시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드문 사례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존하는 대부분의 고대 기록들은 현실적이기보다는 종교적, 신화적, 전설적인 내용이 섞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럽도 서로마 멸망 후 게르만이 주도하던 서유럽 세계에서는 비슷한 일이 벌어져 역사에서 신화적인 요소가 완전히 빠지고 객관적인 서술을 하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제외하면 중세 말기가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한국의 고대사 기록이 로마나 중국에 비해 아쉬운 건 사실이나 세계 4대 문명이나 그리스-로마 정도를 제외하면 기원전의 고대 기록이 남은 곳 자체가 매우 드물다. 그리스-로마 문명은 서양 문명의 실질적인 원류라 볼 수 있는 문명이었기에 어느 나라가 유럽을 제패하든 그리스-로마 문명에 대한 사료나 유적은 비교적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유럽권만 해도 그리스와 로마를 제외하면 고대의 게르만족이나 켈트족, 슬라브족이 직접 남긴 기록은 극히 드물고 이들의 고대 역사는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으로만 단편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로마 멸망 이후 중세 사회가 성립하기 전까지 한동안은 진짜 문자 그대로 기록의 암흑시대가 돼버려서 당대의 기록은 매우 부실하다. 그래서 현존하는 한국 고대사가 기록이 적다는 건 훨씬 후대인 조선시대와 비교해서 그렇지,[33]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한국은 고대 기록이 상당히 풍부한 축에 속한다. 《삼국사기》 시조 〈동명성왕 본기〉나 《구삼국사》의 기록은 나름 현실적이기도 하다.
10.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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