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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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승
태조 ~ 성종
[ 좌의정 ]

태조조
문하좌시중문하좌시중 → 문하좌정승
초대
배극렴
제2대
조준


정종조
문하좌정승
제2대
조준
제3대
심덕부
제4대
성석린
제5대
민제


태종조
문하좌정승문하좌정승 → 좌정승좌정승
제6대
이거이
제7대
김사형
제8대
하륜
제9대
조준
좌정승판의정부사 → 좌의정
제10대
하륜
제11대
성석린
제12대
하륜
제13대
남재
좌의정
제14대
하륜
제15대
유정현
제16대
박은


세종조
제16대
박은
제17대
이원
제18대
유정현
제19대
이직
제20대
황희
제21대
맹사성
제22대
최윤덕
제23대
허조
제24대
신개
제25대
하연
제26대
황보인


문종조
제26대
황보인
제27대
남지


단종조
제27대
남지
제28대
김종서
제29대
정인지


세조조
제30대
한확
제31대
이사철
제32대
정창손
제33대
강맹경
제34대
신숙주
제35대
권람
제36대
한명회
제37대
구치관
제38대
황수신
제39대
심회
제40대
최항
제41대
조석문
제42대
홍달손
제43대
박원형


예종조
제43대
박원형
제44대
김질
제45대
홍윤성
제46대
윤자운



[ 우의정 ]

태조조
문하우시중문하우시중 → 문하우정승
초대
조준
제2대
김사형


정종조
문하우정승
제2대
김사형
제3대
성석린
제4대
민제
제5대
하륜


태종조
문하우정승문하우정승 → 우정승우정승
제5대
하륜
제6대
이서
제7대
이무
제8대
성석린
우정승
제9대
이서
제10대
조영무
제11대
이무
제12대
이서
우정승판의정부사 → 우의정우의정
제13대
조영무
제14대
남재
제15대
이직
제16대
류량
우의정
제17대
남재
제18대
박은
제19대
한상경
제20대
이원


세종조
제20대
이원
제21대
정탁
제22대
류관
제23대
조연
제24대
황희
제25대
맹사성
제26대
권진
제27대
최윤덕
제28대
노한
제29대
허조
제30대
신개
제31대
하연
제32대
황보인
제33대
남지


문종조
제33대
남지
제34대
김종서


단종조
제34대
김종서
제35대
정분
제36대
한확


세조조
제37대
이사철
제38대
정창손
제39대
강맹경
제40대
신숙주
제41대
권람
제42대
한명회
제43대
구치관
제44대
황수신
제45대
박원형
제46대
황수신
제47대
최항
제48대
홍윤성
제49대
강순
제50대
김질


예종조
제50대
김질
제51대
윤사분
제52대
윤자운
제53대
김국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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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종영
六宗英
안평대군금성대군화 의 군한 남 군영 풍 군하 령 군
사의척
四義戚
판돈녕부사
송현수
예조판서
권자신
영양위
정종
돈녕부판관
권완
삼상신
三相臣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삼중신
三重臣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김문기
양운검
兩雲劍
도총부 도총관
성승
증 병조판서
박정
육신
六臣
우승지
성삼문
형조참판
박팽년
직제학
이개
예조참판
하위지
성균사예
유성원
도총부부총관
유응부
기타형조판서
박중림
지평
하박
좌참찬
허후
수찬
허조
증 이조참판
박계우
순흥부사
이보흠
도진무
정효전
영월호장
엄흥도





조선 정승
충장공(忠莊公)
정분
鄭苯
출생1394년(태조 3)
사망1454년(단종 2)
전라도 낙안군
시호충장(忠莊)
본관진주 정씨
자유(子㕀)
애일당(愛日堂), 성재(省齋)

1. 개요
2. 생애
3. 후손
4. 기타



1. 개요[편집]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건축가.


2. 생애[편집]


예문관 대제학과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시를 잘 지은 것으로 유명했던 문정공 교은 정이오와 안동 권씨의 외동아들[1]이다. 부인으로는 정인지의 누나인 하동 정씨와 원주 변씨가 있었으며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와 함께 장릉배식록삼상신 중 하나다.

음서로 벼슬길을 시작했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는 공조판서와 호조판서를 거쳐 우찬성까지 진급했다. 문종 때는 좌찬성이 되었고 문종이 붕어한 뒤에는 황보인, 김종서와 함께 단종을 보필했다. 남지가 병으로 사직하자 김종서의 추천을 받아 우의정에까지 오른다.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고 문신임에도 토목에 조예가 깊어 토목 공사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우의정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공사를 지휘하러 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다른 신료들이 채신머리에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목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공사를 할 때 크고 아름답게 했다고 한다. 숭례문을 개축했고 서산의 해미 읍성도 그의 작품이며 그 외에 세종~문종조의 건축이나 토목 공사는 정분이나 민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강직한 김종서보다는 성격이 원만한 황보인과 비슷했던 인물로 김종서와 뜻을 같이 했으나 그의 독단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약간 비판적이었다. 이 때문에 계유정난 직전 하삼도의 도체찰사로 나갈 때는 단종이 친히 배웅하고 도성의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후 부임지에서 돌아오던 중에 유배를 당했고 수양대군에게 먼저 포섭된 처남 정인지의 거듭되는 회유를 모두 뿌리친 끝에 교형에 처해졌다.

숙종 때 황보인, 김종서와 같이 벼슬이 환원되었고 영조에게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묘는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경상남도 진주시 상대동에 있으며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에는 그와 그의 양아들인 정지산을 함께 모신 정려와 사당이 세워져 있다.


3. 후손[편집]


후사는 사촌형인 홍주목사 정효안(鄭孝安)에게 당부하여 정효안의 장남이자 자신의 5촌 조카인 정지산(鄭之産)[2]이 봉사손이 되어 이었고 도망가서 미친 척하며 숨어 살던 아들의 후손이 나중에 나타나 같이 복권됐다. 이 바람에 봉사손의 후손인 공주계와 나중에 나타난 후손 계통인 광양계가 갈등을 빚고 있다.

일제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은 그의 15대손이다.


4. 기타[편집]


영의정이었던 황보인이나 6진 개척 등으로 널리 알려진 김종서보다 인지도가 낮은데 조선 초기를 다루는 대체역사물에서는 토목과 건축의 전문가라는 특성상 거의 빠짐없이 등장해서 장영실, 정인지와 함께 들어간다.

[1] 교은 선생 문집에는 4형제 중 장남으로 적고 있으나 문정공 본인이 직접 외아들인 분이 죄를 짓고 외지에 나가있어 거동이 불편하다고 세종께 상소를 올린 기사가 실록에 존재함.[2] 당시 호조정랑.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양어머니(정인지의 누나는 계유정난 이전에 사망했으므로 후처인 원주 변씨)를 모시고 공주시 동혈에 숨어 살았다. 김시습 등과 계룡산 초혼각지에서 초혼제를 올렸으며(단묘초혼칠현신) 평소에 친분이 있던 세조가 등용하고자 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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