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프버전이 더 최근에 편집되었을 수 있습니다. > 덤프판 보기
신라/역대 왕비
최근 편집일시 : (♥ 0)
분류
1. 개요[편집]
신라의 역대 왕비 목록을 서술하는 문서. 공주이자 왕비였던 경우는 ☆을 표시한다.
2. 역대 왕비[편집]
3. 추존왕의 비[편집]
4. 여담[편집]
5. 기타[편집]
신라 초기 왕실 여성들의 명칭에 알(ar) 발음이 들어있는 경우를 여럿 확인할 수 있다.
- 알영부인
- 아로공주
- 운제부인의 별칭인 아루부인(阿婁夫人).
- 아효부인의 별칭인 아로부인(阿老夫人) 및 아니부인(阿尼夫人).
- 아이혜부인
- 아류부인
- 차로부인의 별칭인 아로부인(阿老夫人).
- 월명부인의 별칭인 아니부인(阿尼夫人).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5 18:34:17에 나무위키 신라/역대 왕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어디까지나 《삼국사기》 기록상이다.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연대가 현대에는 전부 허구까지는 아니라도 다소 부정확하다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혁거세왕의 정확한 즉위년은 무상에 가깝다.[2] 아로부인(阿老夫人), 아니부인(阿尼夫人)이라고도 불린다.[3] 아로부인(阿老夫人)이라고도 불린다.[4] 삼국유사 원문에는 기보 갈문왕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습보의 다른 표기인 사보의 오기로 본다.[5] 거칠부의 할아버지 잉숙과 동일인으로 여겨진다.[6] 이사부는 내물 마립간의 4세손 또는 5세손인데, 처음으로 발령받은 곳이 현재의 울진군에 해당하는 실직주이다. 벽화부인이 현재의 영주시에 해당하는 날이군 출신이기 때문에 1세대의 항렬차가 확실시되는 이상 가장 연관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7] 삼국유사에는 사축부인(巳丑夫人)이라고도 적혀 있는데 파도부인(巴刀夫人)의 오기로 보인다.[8] 백제의 공주.[9] 알천의 후손으로 보인다.[10] 점물왕후(占勿王后)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순우리말 참의 음차이다.[11]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사서마다 다른데, 혜명부인이 경덕왕 치세에 태후로 불렸으므로 실제 경덕왕의 어머니었던 소덕왕후의 인적정보와 혼동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에서 왕비를 두 번 책봉받아서 왕비가 2명이 아니냐는 가설도 있는데, 해당 기사의 원사료인 구당서의 사료적 문제로 인해 해당 사건이 2년 앞당겨져 기록되었을 뿐이며, 효성왕의 두 번째 왕비 같은 건 없다는 시각도 존재한다.[12] 사로 6부 중 하나인 사량부에서 이름을 땄다. 삼모부인(三毛夫人)이라고도 불린다.[13] 내물 마립간 12세손. 원성왕의 자식들과 김순정의 자식들은 같은 항렬자를 쓰고 있어, 직계로 꽤 가까운 혈족인 것으로 추정된다.[14] 경수왕후(景垂王后)나 경수태후, 경목왕후(景穆王后)라고도 불린다.[15] 바로 위에 나오는 김순정의 아들이다.[16] 아버지인 김장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17] 삼국유사에는 각간 낭품으로 기록되어 있다.[18] 파진찬 김원량의 딸[19]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 따르면, 애장왕의 후궁이 입궐한 시점에 등창이 났다고 한다.[20] 정목왕후(定穆王后)라고도 불린다.[21] 명(明) 돌림자는 혜충태자들의 손자들이 공통적으로 쓰던 항렬자인데, 만약 이 김○명이 헌덕왕의 태자와 동일인이라면 정계부인의 어머니는 정교부인이 된다. 이부남매끼리 혼인한 것.[22] 그녀가 입궁하기 1년 전 당나라에서 책봉받은 왕비가 따로 있지만, 이는 당나라 측 사서의 원문을 그대로 실은 것으로 칭원법 차이로 인해 당나라 측 기록과 우리 측 기록이 1년씩 차이나는 경우는 꽤 많았다. 실제로 해당 왕비는 당나라로 갈 때 소명왕후의 아버지인 김양과 동행했고 문성왕에게 다른 아내가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23] 의명왕후(義明王后)라고도 불린다.[24] 장사택(長沙宅)은 금입택 중 하나로, 집안이 금입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력한 진골귀족었던 것으로 보인다.[25] 경애왕 시해 후 견훤에게 강간당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존재는 확실하다.[26] 일설에 경순왕의 모후(母后. 왕의 어머니)라 주장하나, 이에 대해 《고려사》를 오역(誤譯)함에 따라 비롯된 결과라는 설도 있는데 조선 문종 1년에 완성된 고려사는 고려를 기준으로 신라 경순왕을 선왕으로 보고 그의 왕비인 죽방부인을 선왕 경순왕의 태후(太后)라 기록하였다고 해석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문종은 경순왕의 후손이 아닌 것은 물론 신라와 고려는 아예 다른 나라여서 경순왕의 아내를 태후라고 부를 위치가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왕비로서의 기록이 나타난 것은 조선 말기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부터이고, 죽방(竹房)이라는 명칭은 인명이 아닌 “대나무 방” 정도의 의미로, 신라 시대 관서 중 방(房)은 주로 여관이 근무하던 곳을 부르던 명칭이었고 여성 인명을 사서에 표기하지 않게 된 고려시대의 특징을 고려하면 그녀가 기거하는 공간을 뜻하는 명칭일 가능성이 있다. 굳이 왕의 생모가 아니어도 전임 왕의 아내로서 태후라는 명칭을 쓴 흔적도 삼국사기에서 발견된다.[27] 고려의 공주였다.[28] '부인 왕씨'으로도 불린다. 작호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29] 선덕여왕의 남편인 음갈문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남동생 김국반도 마찬가지.[30] 선덕여왕의 남편인 음갈문왕과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둘째 형 김백반도 마찬가지.[31] 마야부인 소생임이 확실한 선덕여왕과 달리 어머니가 불명확하다.[32] 소덕왕후는 입궁한 지 4년만에 사망하므로 세 명을 낳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고, 반대로 성정왕후는 입궁한 지 11년 뒤에 폐출되므로 한 명만 낳기에는 시간차가 크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태자 책봉은 꽤 어린 나이(약 3~5세 경)에 진행되므로 김중경의 출생은 입궁 후 7년차 정도로 예측되고, 따라서 앞에 추가적인 자식들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남편인 김효방이 734년 사망하기 때문에 그녀가 그 당시에 기혼녀였다면 적어도 719년 이전에는 태어났을 것이다.[33] 파진찬 김원량의 누이[34] 혜충태자의 자식들인 김충공과 귀보부인이 서로 결혼하므로, 둘은 어머니가 달랐음이 확실시된다. 희강왕이 혜충태자의 아들로도 언급된 기록이 있는 점을 봐서는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