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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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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음이의어에 대한 내용은 광개토대왕(동음이의어) 문서
1. 개요[편집]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태왕의 은택이 황천에 두루 미쳤고, 위무가 사해에 떨쳤다.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의 제19대 태왕.廣開土王, 諱談德, 故國壤王之子. 生而雄偉, 有倜儻之志.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조
담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제법 알려져 있고, 한국에선 "한국사의 알렉산드로스"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다.《삼국사기》기준으로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추모의 13세손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었는데, 아마 직계가 아닌 왕계를 기준으로 한 것 같다. 18세(만 17세)에 보위에 올라 39세(만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기까지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으며 특히 전쟁에 대해서는 한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복자이자, 세종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칭호를 대중들이 가장 자주 붙여 부르는 군주이기도 하다.[6]
한국의 고대 왕조인 고구려의 역사적 이정표를 뒤바꿔 놓은 위인이자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군주다. 즉위하자마자 남쪽의 주요 적국이었던 백제를 쳐서 항복시키는 동시에 서쪽의 후연 등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광대한 요동 지역을 차지했으며, 북쪽의 유목 민족들을 정벌하여 만주를 포함한 넓은 땅을 영토로 삼고 말갈 등 유목 민족들을 휘하에 두어 북쪽 영토를 크게 넓힘으로써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키웠다.[7]
2. 호칭[편집]
광개토대왕의 공식적인 호칭은 당대에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것을 줄여 광개토왕이라 표기하였고, 이것이 현대에 들어 공식적으로 주로 쓰이는 명칭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 여기에다 대왕이라는 존칭을 붙인 표기가 바로 광개토대왕이며, 이것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표기이기도 하다. 한편 당대에 사용된 태왕 칭호를 존중하여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을 줄인 광개토태왕이라는 표기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하는 역사서와 비석에서 대왕을 칭하는 이름들이다.
2.1. 명칭의 의미와 이름 진위 논란[편집]
다음은 광개토대왕의 시호를 단어별로 구분하여 해석한 것이다.
2012년 중국 지린성에서 〈지안 고구려비〉가 발견되어 비문 해석이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학자 장푸유(張福有, 장복유)가 해석한 비문은 광개토대왕릉비와 내용이 얼추 비슷하며, 임금의 본명이 '평안'이라는 기사를 적어 두었다.(國罡上太王 號平安) 또한 다른 중국 왕조의 사서들을 고찰해보면 임금의 이름을 '안'이라고 칭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안 고구려비의 진위 논란을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평안'이 임금의 진짜 본명이라고 단정하는 의견도 있으나 여기에는 많은 반론들이 있다.
지안 고구려비는 문서에 서술된 것처럼 중국 당국이 동북공정을 시도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다른 유물은 공개하지 않으면서 비석만 공개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 고구려가 세워졌을 때는 중국식 시호 제도나 고구려식 시호 제도가 완전히 세워지지 않았고, 초기에는 그저 이름만으로 전해지다가 이후에 가서야 묘지의 장소를 기입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초기와 다르게 발전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평안'은 이름일 가능성이 있을 뿐 '평안'이 임금의 이름인 것처럼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우리나라 고대 임금들의 이름은 대부분 순우리말인데, 이 이름들은 중국 왕조에서 기록될 때 많은 음차를 거쳤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에 '추모'라고 전해진 이름을 중국에서는 '주몽'으로 전한다든지, 백제 임금의 성은 '부여씨'로 복성인데 중국에서는 단성인 '여씨'로 표기한 것과 같은 잦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중국 사서가 지안고구려비와 비슷하다고 무작정 교차 검증을 할 수는 없다.[12][13]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평안'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주장 단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3.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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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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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편집]
5.1. 태왕릉[편집]
호태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동탁(銅鐸)이 출토되기도 했는데, 이 호태왕이 일반명사인지 광개토대왕을 특정한 용어인지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그러한 바 그 사실만으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말하진 않고, 오히려 태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동아시아 광역 편년 체계 속에서의 시간적 위치, 그에 따른 적석총 형태의 변화 등을 고려하여 볼 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서 태왕릉은 대체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교적 소수론이지만 태왕릉을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이런 경우에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장군총이라고 본다.
하지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태왕릉 묘실이나 봉토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태왕릉의 능원 내에서 출토된 것으로, 도굴되었던 시점에 도굴꾼들이 나중에 가져가려고 퇴장한 것인지 아니면 태왕릉에 있었던 의례행위의 결과로 남은 것인지는 불명확하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화랑세기》의 저자 박창화는 〈광개토대왕릉비〉를 고려에서 뽑아다가 현재의 위치에다 박아놓은 거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
5.2. 시조 동명성왕과의 관계[편집]
지안시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3세손이 된다.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중략)...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호(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414)〉
동명성왕 - 유리명왕 - 재사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만약 신채호처럼 차대왕,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서자로 본다 해도 1세대가 늘어나고, 진수의 《삼국지》의 설을 채택하여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본다 해도 2세대가 늘어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다른 사서를 참고하지 않고, 연대 계산을 다시 해서 태조대왕을 유리명왕의 손자가 아니라 대무신왕의 손자라는 가설도 세웠다. 그렇게 보더라도
동명성왕 - 유리명왕 - 대무신왕 - 재사 - 태조왕 - 차대왕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의 자손인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보는 설을 채택해도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6세손이 된다.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는 주몽의 뒤를 여달이 잇고, 여달의 뒤는 여율이 이었으며, 여율의 뒤를 막래가 이었다고 했는데 막래는 모본의 오타로도 추정된다. 그런데 여달을 유리명왕으로 보고, 〈위서〉 '동이전'에 막래가 부여를 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막래를 모본왕이 아니라 대무신왕으로 본다면,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한 사람이 더 있게 되며 이렇게 놓고 보면 어떻게든 세대가 맞게는 된다.
한편, 위에서 나온 17세손의 의미는 직계가 아니라 왕계라는 견해도 있다.
태조대왕의 생몰년 의혹에 따르면 대무신왕이 44년에 사망하고 77년 재사와 부여 출신 태후가 7세의 태조대왕을 왕위에 앉히기까지 33년의 공백기간이 있기에, 그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왕이 하나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재사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7살짜리 아들을 앉혔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이상한 광경이니까. 17세손이 왕계라면 ?가 왕이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가 된다.
5.3. 사료적 측면[편집]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사료로는 금석문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여러 사료들이 전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현전하는 한국 고대의 비문들 중 내용이 비교적 온전히 전해지는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로, 당대 역사를 전하는 내용이 많아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부터 사망까지 고구려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대순으로 서술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중국 사서는 광개토대왕 시기 모용선비족의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이외에도 《삼국유사》나 《일본서기》에 단편적인 사건들이 전하고 운좋게 살아남은 〈모두루 묘지명〉과 호우명 그릇은 지워진 역사의 편린을 전해주고 있다. 광개토대왕 시기 사료는 한국사 전반에 걸쳐서 보면 적지만 한국 고대사로 한정한다면 매우 풍부한 편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광개토대왕 시기의 통치와 전쟁 기록이 고구려의 다른 왕들 기록보다 많고, 고고학 발굴 성과도 광개토대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남아 있다는 점이 크다.
사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뒤 한참 동안 잊혀졌고, 재조명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이루워졌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근초고왕이나 진흥왕과 비슷한 수준의 정복 군주로 평가되어 수나라에 맞선 영양왕이 훨씬 높게 평가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었던 압록강 이북의 경우에는 발해 멸망 이후로 이민족 국가의 영토였던 데다가 특히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봉금령으로 인해서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채 금나라 황제가 세운 비석 정도로 여겨져서 재조명이 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문화재가 다른 것으로 오해받은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15] 해당 시기에 조선이 여러 강대국들과 얽히면서 외세의 침탈에 시달렸던 때였기도 했고, 그동안 삼전도의 굴욕을 씻어내지도 못했던지라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재조명되기에 시기적으로 타이밍이 맞았다. 당연히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취의 관점에서 다시 부각된 측면이 크다. 물론 비문이 발표되는 과정에서 일본군이 개입해서 의도적으로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내놓았지만, 근본적인 해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 때문에 고구려가 망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광개토대왕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끽해봤자 고구려의 왕들 가운데 1명으로 소개되면서 특징으로 싸움을 잘했다거나 땅을 넓혔다고 언급되는 것이 전부였다.
역사서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주로 무인의 기질이 있고 웅대한 야망을 품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가운데 그나마 재미있는 것은 두 조선 문인들의 평가이다. 14세기에 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3년상도 다 안 치른 채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고 복수한답시고 지난 일이나 들추는 몹쓸 사람'이라 평가했고[16][17] 반대로 18세기 안정복은 '고작 22년밖에 안 지난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는데 그게 바로 도리'라는 주장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야사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거의 출처 불명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종종 정사인 것마냥 소개되고 있다는 건데 요즘은 예전에 비하여 한국 고대사가 많이 정립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상대적으로 학술적 접근이 관철되지 못한 동화책에는 이런 내용이 넘쳐나고 있다. 사실 동화 작가들이 지어낸게 설화마냥 퍼져나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설화로는 광개토대왕이 여자 때문에 싸움이 난 두 마을을 화해시켜 줬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위서 《환단고기》에도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는데 의외로 중원을 호령하고 어쩌고 하는 내용은 없다. 선비계인 후연이나 만주 대륙의 국가들과의 싸움은 없고, 왜와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를 공격하는 내용인데... 이 기록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 참고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광개토호열제'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야사나 다름없는 《조선상고사》에도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대표 업적으로 생각하는 대륙으로의 진출보다는 왜군과의 격돌에 비중을 두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로 유명한 박창화가 남긴 다른 책 《고구려 사초》의 〈영락대제기〉도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다루고 있는데 자잘한 내정 기록, 왕실 비사 등을 제외하면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고, 정사로 통용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정복 전쟁과 관련해서는 탐라국이 항복했다는 것 말고는 새로운 것이 거의 없는데,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 같은 정사로 통용되는 사료의 기록을 살짝 비틀어놓거나 전투 기록을 1줄 더 추가한 게 전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탐라가 항복했다는 내용과 거란과의 전투 기록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존의 사료에 존재하는 내용들이다.[18] 그런데 광개토대왕 대에 활동했던 것이 확실한 진이나 모두루가 《고구려 사초》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소설일 가능성도 높다. 진, 모두루 모두 박창화 사후에 확인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비려'의 위치나 정체에 대해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의 유연이라고 했으나 근거 자체가 해괴하다.[19] 신채호가 해괴한 추론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이건 매우 극악한 편에 속한다.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시라무렌 강 상류에 위치한 세력으로 훗날 비려가 거란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고는 한다. 이 때 토벌한 비려를 391년 토벌한 거란과 같은 존재로 보기도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광개토대왕 때 상대한 적들은 모두 기재했다는 가설에 의하면 거란이라고 빠뜨렸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비려는 거란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다. 더구나 비려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 의하면 거란이 위치해 있던 곳에 있었다.
다만 이러한 내용을 딱히 실증할 만한 뚜렷한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주요 근거는 비려와 거란의 위치가 비슷한 것 같고 거란의 부족 중에 필혈부가 있었는데 비려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위서》에는 '필혈부라고도 읽는 필결부(匹絜部)·려부(黎部)', 《통전》에는 '필려부(匹黎部)', 《북사》에는 다시 '필결부(匹潔部)·려부(黎部)'라고 적혀 있는데[20] 근데 이건 아예 당시부터 물길의 '필려이국'과 헷갈리고 있었으니 더구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당장 고구려를 의미하는 '무구리'와 '말갈'만 해도 발음이 비슷한데 완전히 남남인 것을 보면 발음이 비슷한데 남남인 경우가 매우 흔하다.
비려와의 전쟁터였던 부산, 염수 등의 위치를 재현하면 대강 실마리가 잡히겠으나 그마저도 힘든게 현실이다. '염수'가 고유 명사일 수도 있고, 소금이 많이 나서 붙은 이름일 수도 있는데 만주 지방에 소금이 나는 곳이 한둘인가? '부산' 같은 경우도 고유 명사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고구려인들이 이름 모르는 산을 '아무개'라고 부르거나 '큰 산'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비려는 고구려 국경에 근접한 거란을 먼저 토벌한 점이나 〈광개토대왕비문〉에 장거리 원정이 있었던 것마냥 기술한 점으로 보아 거란보다 서쪽의 내몽골 어딘가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신채호가 주장한 유연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 셈이다. 어쩌면 유연에 복속한 부족일 가능성도 높다.
아니면 《진서》 〈동이전〉에 기술되어 있는 만주 중앙에 위치한 '비리국'일 수도 있는데, 《진서》가 광개토대왕 시기를 기록하고 있고 《진서》 〈동이전〉에서 서술하는 비리국의 위치가 〈광개토대왕비문〉의 비려처럼 고구려의 북쪽 어딘가이기 때문에 비리국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비리국이 광개토대왕 시기인 《진서》 〈동이전〉에만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도 묘한데 광개토대왕 치세에 고구려에게 먹혀서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뭐 한국 학계에서는 이 주장이 사장되기는 했다. 중국 학계에서는 요동의 태자하 상류의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헌데 '태자하 상류설'이 말이 안되는게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격파하고 돌아오며 태자하를 거쳤으므로 성립하기 어렵다.
비려의 인구는 35만명 정도로 추정된다.[21] 기껏 3개 부락을 격파했는데 어떻게 35만이라는 숫자가 나오는지 의아할 수 있는데, 부락이라는 단위는 고정된 수치를 갖고 있는게 아니라 쓰일 때마다 다르다. 마을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고 부족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다. 근데 이것도 비문의 판독에 따라 부락이 아니라 부(부족)로 판독할 수도 있어서 참 애매하다. 3개 부의 의미를 부족이나 부락 3개를 격파했다는게 아니라 거란족이 스스로를 칭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3개 부라는 의미로 해석한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그건 훨씬 후대의 일이다.
396년에 점령한 백제의 58성 700촌은 대강 현재의 강원도, 충청북도와 경기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58성 700촌의 위치 비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일각에서는 충청남도까지 남하한 걸로 보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충주 고구려비가 397년에 세워진 것이 맞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비류백제설로 이어지고는 하니 문제.
5.4. 기년 수정론[편집]
광개토대왕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능비를 통해 추론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가 있고, 또 사망연대와 맞춰 볼 때도 의아한 점이 있어 학계에 이론이 있다. 학계의 중론은 대체로 374년인 듯하나, 3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대주류왕께서 국가의 기초를 이어받으신 후 17세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등극하니 부르길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돌아가셨다.
〈광개토대왕릉비〉
능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18세 되던 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 설은 즉위년에 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한 것이 되는데, 연표에 따르면 이 해는 바로 임진년이다. 그런데 능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을 391년이라고[22] 하고 있다. 릉비는 60갑자와 왕의 연호를 병기하고 있으므로, 릉비를 만든 고구려인들이 착각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영락 5년 을미(395년)', '영락 6년 병신(396년)' 등으로 정벌 기록마다 확인이 되고, 덕흥리 고분 등에서 교차 검증도 되는 사실이다. 반면에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왕의 연호만 이용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김부식이 사서나 문헌을 인용할 때 오산했는지 추적이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주류 학계에서는 능비문에 《삼국사기》를 맞추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 해 앞당김으로서 광개토대왕이 신묘년 즉 391년에 즉위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즉위년만 앞당기게 되면 광개토대왕의 재위년 자체가 23년으로 40세에[23] 사망한 것이 되어 《삼국사기》 본래의 기록은 물론이고, 능비와도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며#, 혹시 전체 재위년을 한 해씩 당겨서 391년 즉위해 412년 사망한 것으로 한다면 중국 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삼국사기》의 연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긴다.[24]# 그러나 연표가 중국 사서와 교차검증된다는 것은 중국 사서에서 전하는 한반도 관련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받아쓰기했기 때문에 일치하는 것이다. 국내 전승이나 문헌에서만 확인가능한 국내 관련 기록과 기사를 인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각에서 '사서의 연도에 능비의 간지(干支)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도 한국 고대사에서 유일하게 잘 정리된 연표의 간지를 무시하고 연대를 끼워맞춰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양 사료 간에 미묘하게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간지와 연호를 병기하고 있으므로 당대에 고구려인들이 년도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릉비 기록에 《삼국사기》를 끼워맞추는게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e.g. 병신년 = 396년 etc.)
그러던 중 광개토왕릉비의 기년 문제에 대해 의문을 해소해줄 유물이 2004년에 중국 집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청동 방울에는 '호태왕 신묘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로 광개토대왕의 원년은 신묘년(391)년이거나 그 이전이라는게 중론이 되었다. 다시 말해 적어도 391년 = 신묘년이나 그 이전에 광개토왕이 즉위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최소한'[25] 광개토왕의 392년 즉위 기사가 오기되었다는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 상식적으로 년도가 기록되어 있는 유물이라면 해당 년도에 만들어졌을 공산이 크므로 오기했을리가 없다. 고로 광개토왕릉비의 기년 오기 문제 제기는 자연스럽게 소거된다.
이상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능비의 '신라 구원 요청(9년 기해) - 신라 구원군 파견(10년 경자)'에 비정되는 《삼국사기》의 '신라 내구마 울음(9년 경자) - 실성 귀환(10년 신축)'을 굵은 글씨에 주목하며 비교해보자. 추측의 영역이지만, 내물 마립간의 울음은 왜구에 의한 왜란을 비유적으로 표현 했다고 추론 할수 있다. 그렇다면 릉비 9년에 내물 마립간이 사신을 보내어 대왕께 스스로 신민이 되겠다고 언약한 것과 같은 사건으로 볼수 있으며, 이듬해 대왕이 실성과 함께 신라 구원전에 참여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7월에 실성이 귀환했다고 하는데, 왜구는 알다시피 여름에 계절풍을 이용해 약취해 겨울에 훈풍을 타고 도망가는 존재였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 또한 〈고구려본기〉와 같이 1년씩 일괄적으로 마루면, 서로 부합하는 측면도 있다.
혹자들은 이 차이가 칭원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칭원법은 간단히 말해서 선왕이 승하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그 해를 새로운 왕의 원년으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이 해를 선왕의 마지막 연호로 보고, 그 이듬해를 새로운 왕이 즉위한 원년으로 볼 것이냐이다.
또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이 승하한지 3년이 되는 해에 이장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릉비의 기록대로 역산한 광개토대왕의 사망년도는 412년. 그리고 릉비에서 기록한 414년에는 릉을 이전하고 릉비를 건립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을 3년 동안[26] 상을 치뤘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서에는 고구려인들이 부모가 죽었을때 3년상을 치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릉비에 맞추어 일괄적으로 그의 치세를 모두 1년씩 당겨 온다면, 릉비에서 증언하는 릉비의 이장 기록은 광개토왕이 승하한지 딱 24개월 차이가 난다.
또, 이를 토대로 복원한 광개토왕의 생몰년도(374년~412년)와 치세기 391년~412년은 세는 나이 기준[27] 으로 정확히 릉비의 기록과 맞아 떨어진다. 이를 본다면 릉비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하고 디테일함을 알 수 있고,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년도를 오산해서 향년 (태어난 년도와 승하한 년도)을 오기 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28] 《삼국사기》에는 10월에 사망했다고 기록 되어 있고, 릉묘를 이전한 날짜는 3년후인 (만 24개월) 9월 29일이었다. 그 당시에도 만 24개월 ~ 27 개월동안 상을 치뤘다는 사례는 (물론 훨씬 후대이긴 하지만) 백제 무령왕과 그의 왕비의 경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1년 늦다는 학설에 힘이 실린다.
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북사》 〈열전〉 '고려'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석도 이러하다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태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41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광개토대왕릉비문〉
능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종래에는 《삼국사기》의 기년에 따라 414년을 장수왕 2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유월칭원법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광개토왕이 죽은 412년은 곧 장수왕 원년이 된다. 따라서 비가 건립된 414년은 장수왕 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의 모든 기록을 1년 올려 해석할 순 없다. 전연과의 전쟁 기록은 《자치통감》에서 비롯됐고 백제와의 전쟁 기록이 백제 측 전승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이 일괄적이고 기계적인[29] 오류를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되며,[30] 꼭 교차검증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사료 비판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단순 즉위년도나 사망년도에 대한 단편적인 기사에서 생기는 오류가 아니라, 즉위 기사부터 승하 기사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391~412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이미 김부식 손에 의해 편년 작업을 할 때 392~413년 동안에 일어났던 사실인양 일괄적으로 욱여넣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첫 단추인 즉위기사부터 1년씩 잘못 끼웠으니, 나머지 후술되는 고구려 전승의 기사들에서 만큼은 광개토왕이 사망할 때까지 편년 작업이 꼬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릉비의 기록을 실제 대왕의 치세기로 파악하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김부식의 착오로 인해 혹은 칭원법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을 착각했기 때문에 1년씩 밀려썼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되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 김태식[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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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돈 교수 또한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왕이 죽고 삼년상을 치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
왜 칭원법에서 기인한 차이가 생겼냐에 대한 추론은 고국양왕이 광개토왕에게 생전에 양위했기 때문에, 유교의 예법으로 최대한 선왕의 치세기를 존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속사정도 모른채 김부식은 유월칭원법으로 작성된 문헌이라고 가정한채, 그대로 받아적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민족주의 사학자 김석형 등도 〈고구려본기〉 392년(광개토왕 원년)에 기록되어 있는 관미성 함락 기사를 391년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주장을 제시했고, 이와 연개해서 릉비에 기록된 신묘년의 신민의 주체를 고구려로 해석하는 등의 학설을 제기했다.[32]
광개토대왕릉비 해석에 일생을 바친 다케다 유키오 도쿄대 동양사학과 학장도 관미성 함락 기사는 392년이 아닌 391년이 유력하다는 취지의 논문을 썼다.[33]
따라서 결론은 왕이 사망한 년도는 릉비에 기록된 412년이 맞고, 생년은 새는 나이로 39살에 죽었다고 하니, 374년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10월에 왕이 죽었다는 기사는 412년을 413년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사서의 고구려인들의 장례 풍습이 뒷바침한다. 즉위 원년은 1차 사료인 릉비가 증언하는 391년이며, 다른 1차 사료인 청동 방울에서도 교차 확인 가능하다. 《삼국사기》가 1년씩 밀려써서 생몰년도와 치세기가 1년씩 어긋난다는 결론은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5.5. 유사역사학[편집]
민족을 숭배하는 한국의 유사역사학과 엮이기 좋은 소재이다 보니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유사역사학적인 주장들도 많다.
광개토대왕이 젊은 나이로 죽고 나서 훈족에 아틸라가 등장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아틸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틸라는 선대의 계보가 명확해서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인지도는 후달리지만 한국판 미나모토 요시츠네 = 칭기즈 칸 설이랄까...
〈광개토대왕 비문〉에 등장하는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에서 토곡만 떼와서 토곡이 토욕혼과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주장도 있다. '식신토곡'이라는 말은 '식신땅의 곡'이라는 의미지 토곡 자체가 어떤 세력명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아니다. 더구나 당시 토욕혼은 '백란'으로 국호를 바꾸었다.[34] 토욕혼이 고구려의 원수인 선비 모용씨의 나라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그럴싸하기도 한데 환빠들은 토곡 = 토욕혼 주장을 할때 이런 근거는 들지 않는다. 그런데 토욕혼은 오늘날의 칭하이성에 위치해 있었는데 어떻게 정벌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지...
398년 북위의 수도 업에 고구려인 46만명과 기술자 10만명이 가득차서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는데 사실은 고구려가 북위의 수도 업을 함락해서 북위가 불가피하게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 거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와 북위의 최초 접촉은 장수왕 때다. 둘다 공동의 적으로 후연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굳이 동맹을 맺을 만큼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지도 않았고(서로 눈치보면서 후연을 공격하는 수준) 국경이 닿아있지 않은 관계로 직접적으로 접촉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강원도 고성군에서는 화진포 앞바다의 금구도가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한 유사역사가의 주장을 고성군이 멋대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 ##
6. 노래[편집]
7.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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