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문황후 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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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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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위의 태조 평문제 탁발울률의 추존 황후. 유주(幽州) 광녕군(廣寧郡) 출신. 왕봉(王丰)의 누이.
2. 생애[편집]
왕씨는 13세일 무렵 볼 일이 있어 입궁하였는데, 이때 대왕(代王) 탁발울률의 눈에 들어 그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이후 탁발울률의 총애를 받아 대흥 3년(320년)에 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을 출산하였다.
대흥 4년(321년) 12월, 대왕 탁발울률이 부족을 잘 이끌면서 민심을 얻자, 죽은 탁발의타의 정처 기씨는 이를 경계하여 탁발울률을 비롯한 그를 따르는 대인(大人) 여럿을 죽였다. 왕씨는 탁발울률의 아들을 색출하려는 기씨 일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어린 아들 탁발십익건을 포대기에 싸서 바지 안에 넣어 감췄다. 그리고 사람들이 눈치챌까 두려워,
라며 탁발십익건이 울지 않기만을 기도하였다. 다행히 탁발십익건은 왕씨의 바지 안에서도 오랫동안 울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만약 천조(天祚)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너는 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다."
건국 원년(338년), 대왕 탁발예괴(拓跋翳槐)[1]
탁발울률의 장남으로 왕씨 소생은 아니다. 기씨가 탁발울률을 죽일 때, 탁발예괴는 하란부에 머물고 있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건국 2년(339년) 5월, 대왕 탁발십익건이 참합피(參合陂)에 각 부의 대인들을 모으고, 유원천(灅源川)을 수도로 삼아 정착하는 안건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오래도록 결론에 다다르지 못 했다. 이를 들은 왕씨가 탁발십익건에게 말하길
이에 탁발십익건이 중지하였다. 당시 탁발예괴가 죽고 대나라가 혼란한 시기였지만 탁발십익건은 이후로도 어머니 왕씨의 조언을 새겨들어 나라를 부흥시켰다."우리 나라의 조상들은 이주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작금의 상황이 어렵고 기반이 아직 확고하지 않은 마당에 성곽을 쌓고 정착한다면 적이 쳐들어와도 무리를 통솔해 이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건국 18년(355년), 왕씨가 사망하여 운중(雲中)의 금릉(金陵)에 안장되었다. 훗날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즉위하자, 평문제 탁발울률을 추존하면서 왕씨도 '평문황후'로 추봉하고 태묘에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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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탁발울률의 장남으로 왕씨 소생은 아니다. 기씨가 탁발울률을 죽일 때, 탁발예괴는 하란부에 머물고 있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