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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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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공무원, 정치인, 관료.
2. 생애[편집]
1939년 전라남도 목포부에서 아버지 전태환(田泰煥)과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첫째 숙부인 전무환(田武煥)에 입양되었다. 목포유달초등학교, 목포제2중학교, 서울고등학교(11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였다.
1966년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경제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물가정책국장, 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1995년 12월부터 1996년 8월까지 수산청(현 해양수산부) 청장 등을 지냈다. 1997년 3월부터 2000년 8월까지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이때 처음 자문관제도를 공정거래위원회에 도입하면서 유승민을 자문관으로 추천했다.
2000년 8월부터 2002년 1월까지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1월부터 같은 해 4월까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2002년 4월부터 2003년 2월까지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2003년 11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제19대 감사원장을 지내고 이어서 제20대 감사원장에 재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5월 사퇴하였다.
이후 경원대학교 석좌교수, 조선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석좌교수,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이사장, 광주비엔날레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16년 초 국민의당이 창당되자 국민의당에 입당하여 공직후보자격심사위원회 위원장, 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7년 2월 국민의당을 탈당하고, 문재인의 대선 캠프에 영입되었다. 영입한 배경에는 호남 민심을 둘러싼 국민의당과의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도로 보이며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전망했다.#
아니나다를까 39석에 불과한 국민의당은 집권 능력 없다며 몸담았던 국민의당을 디스했다(...). #[3]
20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힘의 살리는 선대위에 합류했다. 그의 친 민주당 성향을 고려하면 의외라는 평.[4]
현재는 국민통합위원회 고문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3. 여담[편집]
과거 5급 공무원 시절부터 상부의 무리한 지시가 있을 경우 득달같이 반박을 하는 등의 패기를 보인 덕분에 대표적인 별명이 전핏대 선생, 혈죽(血竹)이라고(...)... 오죽하면 김대중 - 노무현 정권 때 엄청나게 정부를 몰아붙이던 한나라당 의원들조차 전윤철 부총리/감사원장 앞에서는 최소한 한 수 접어주는 시늉이라도 하면서 조심스럽게 대했고 심지어 2005년 국정감사 때는 최연희 당시 법제사법위원장이 혈죽이라는 별명까지 언급하며 답변을 좀 더 부드럽게 해줄 것을 부탁하기도... 물론 참여정부 시절 다른 정부 여당 인사들 대하듯이 전윤철 감사원장을 대했던 한나라당 의원들은 여지없이 역관광을 당했다.[5] 오죽하면 이해찬 총리가 퇴임하고 나서 새 총리에 대한 하마평이 나올 때 전윤철 감사원장까지 거론되자 "전윤철은 이해찬 복사판이야. 절대 안돼."라는 얘기가 한나라당 내부 회의에서 나왔을 정도.(...)당시 YTN 영상
4. 둘러보기[편집]
[1] 담양전씨 인터넷족보에는 1938년 4월 22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경은파 31세. 족보명은 전철원(田喆源).[3] 하기야 얼떨결에 집권했어도 순탄치 않았을 것 같기는 하다. 극단적인 여소야대가 되었을 것이므로...[4] 다만, 윤석열의 정치 성향이 매우 애매모호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다지 의외라고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정권교체동행위원회 문서 참고.[5] 전윤철은 행시 3회, 이종구는 17회 출신이다. 이종구 의원이 전윤철 감사원장에게 따지자, "내가 당신보다 12년 이상 더 공직에 있었다"며 "(공직에 있는 동안) 뭘 관여했느냐"며 역공을 맞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