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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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이순신은 뛰어난 군사 능력[2] 을 십분 활용하여 초반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계속해서 승전을 거듭한 끝에 조선을 패망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전투에서 빛나는 전승을 거두고 단 한 번의 패배는커녕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은 해군 제독은 이순신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육상까지 포함해 세계 역사를 고루 둘러본다고 해도 이처럼 전설적인 신화를 이룩해낸 명장은 잔 다르크 정도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세계의 전사(戰史)에서 일컬어지는 '전장의 신화'를 쓴 명장이 이순신 하나뿐인 것은 아니나[3]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정복자이며, 이들이 이뤄낸 전과의 동기는 현대 기준으로는 좋게 보이지 않는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들을 싫어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싫어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조정, 특히 국왕의 시기를 받아 심한 견제를 당한 끝에 결국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처분을 받았으며, 적을 맞아 싸우고 있는 상황인 자신 휘하의 군대에게 보급을 잘 해줘야 할 책임이 있는 조정으로부터 오히려 반대로 국정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생필품과 식량 등을 보낼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당했다. 즉,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정부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군대를 보급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오히려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군대가 그 와중에 정부까지 보급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지원과 도움을 받아 전쟁 수행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조정으로부터 발목만 잡히기 일쑤였다. 게다가 조정의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독자적으로 일구어낸 병력과 물자들이 원균이라는 무능한 지휘관 탓에 모조리 사라지고, 전란 중에 난중일기를 통해 그토록 애달프게 그리워하던 어머니와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까지 모두 잃는 아픔까지 겪었지만, 한 마디 불평 없이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끝까지 싸워 승리를 얻은 만큼, 이순신은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성품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명장이나 구국영웅을 넘어선 성웅(聖雄)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순신에 대한 존중은 국내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콧대가 높았던 진린도 이순신의 인품에 감복하여 나중에는 자신보다 두 살 적은 이순신에게 노야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며 존경하였고 훗날 노량에서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할 정도였다. 심지어 적국이었던 일본에서도 이순신을 무신(武神)이라 치켜세우며 그를 기리는 사당까지 있는 실정이고,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문은 한산도 대첩 패전일인 8월 14일(음력 7월 8일)에는 하루 식단을 전부 미역으로 하는 전통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여러 명장들은 전략/전술적으로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 인격과 성품에서 하자를 드러내 후대에 저평가를 당하는 경우도 적잖은데, 이순신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단 하나의 흠결마저 나온 것이 없다. 오히려 맨 앞의 서문처럼 난중일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인물이 이순신 본인이었다. 결론적으로 이순신은 그야말로 훌륭한 참군인의 표상 그 이상인, 위대한 인물이었다.
2. 각종 기록에서[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순신/각종 기록에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순신 사후 조선에서 이순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정리한 문서이다.
3. 사후 조선에서[편집]
이순신은 죽기 이전부터 이미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었고, 선조를 제외한[4] 후대의 왕들과 신하들도 한결같이 모범적인 장수이자 중국의 명사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인물로 칭송하였다.
이순신 이전까지 조선에서 군사 문제를 논할 때 비교 기준은 중국이었다. '손빈, 한신의 계책', '송나라 악비' 등과 같이 중국의 이름난 명장들의 사례를 제시하며 비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 사후 조선의 군사 문제에서 비교 기준은 이순신이 되었다. 신하들이 군사 관련 안건을 논할 때 "이순신의 계책에 따르면..."이라 하며 언급한 것이 실록에 여러 차례 대놓고 실려 있을 정도. 중국 역사에 능통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보기에도, 이순신만한 인물은 역사를 통틀어 중국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 (중략)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조정에서 사람을 잘못 써서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하게 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만약 순신을 병신년과 정유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5]
가 왜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아, 애석하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전조 때에는 비록 군사력이 강하였어도 외적을 토벌하기가 어려웠는데, 변란이 잇따르니 진실로 경의 생각을 듣고자 한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소신이 보아하니 고 통제사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지금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왜란 때에는 오직 이순신 한 사람만이 있었을 따름이다."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의 아들 이예(䓲)가 지금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죽게 되자 이예가 그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 운운하였습니다. 그러자 예는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여느 때처럼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상께서 말씀하셨다. "옛적의 대신들은 반드시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만한 인재를 천거하여 주겠는가?"
이원익이 말하였다.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고 있어서 사람들과 거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쓸 만한지를 어찌 알고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에는 신이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고 그가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변사에서는 원균을 천거하여 다시 그를 통제사로 추천하였습니다. 신은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을 등용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칠 것이라고 서둘러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아뢰었는데도 비변사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일을 그르친 뒤에야 다시 이순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하였으나 그땐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7]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8] 의 대화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10]
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후략)ㅡ 이항복, 《충민사기》
수군 통제사는 진실로 하늘이 낸 거룩한 분으로, 일선 장수에 임명되자 변경에 크게 자리잡고 한산 섬에서 적의 바닷길을 끊으면서 여섯 돌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장수를 바꾼 일은 본래 적의 꾀에서 나온 것이요, 장군이 군사를 내는 시기를 그르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균(元均)이 싸움에 패한 뒤에 아홉 척의 배와 남은 군졸로써 여러 번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으니 그 공은 종에 새겨 길이 남길 만한 일이요, 노량(露梁) 싸움에서 공이 임종할 때에 죽음을 숨기고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싸움을 계속할 것을 분부하자 아들이 그 명령대로 하여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한 것처럼 하였으니, 그 꾀가 더욱 기이하다 하겠습니다.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백 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 애석한 일이다.
ㅡ 류성룡, 《징비록》
이순신(李舜臣)을 등용한 한 건(件)은 바로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었다.
바다를 가로질러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꺾은 것은 저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12]
과 같고 몸소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 그만둔 것은 저 제갈무후와도 같다. 그러나 나라 일에 죽은 것은 이들과 같을지라도, 큰 공을 거둔 이는 오직 공 한 분뿐이다.ㅡ 김육, 『통제사이순신신도비명』
조그만 웅덩이에는 큰 고기가 없고, 작은 나라에는 큰 사람(巨人)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통제공 같은 분은 바로 그 수립한 바가 옛 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주아부ㆍ이서평(李西平 : 당나라 때의 명장 이성李晟)ㆍ악무목 등에게 손색이 없으니, 심산 대택(深山大澤)의 용호(龍虎)와 같이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괴걸(魁傑)[13]
한 인물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침에 이순신의 비문(碑文)을 보았는데,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일에 이르러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는 하늘이 우리나라를 중흥시키기 위하여 이런 훌륭한 장수를 탄생시킨 것이다. 순신의 재능은 악비(岳飛)와 같은데, 더욱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공격하는 데 능하였다. 그 당시 청정(淸正)의 간사한 모략에 빠져 잘못되어 견벌(譴罰)을 받기에 이르렀고 드디어 원균(元均)의 패배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순신이 약간의 거북선을 가지고 대적을 격파하였으니,[15]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인재이다.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은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이 충무공이 나옴으로써 조선이 망하지 않았고 통제영이 완성됨으로써 왜구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불식되었다.
ㅡ 원중거, 《승사록》[16]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하더라도 과연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왜구를 토벌한 공로는 백세토록 영원히 그 덕택을 입고 있고, 변방의 방비를 규획하는 데 방략(方略)이 두루 갖추어져 있으며,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늠연히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우리나라의 장재로서 예전에는 김종서를 칭하고 근세에는 이순신을 칭하는데 종서는 충신이고 순신은 효자였다.
전후 선조는 이순신을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했으나 선조 자신의 정치적 입지 때문에[18] 원균을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제수하였다. 이는 주위에서 모두 반대했음에도 선조 혼자 우겨서 이뤄낸 어이없는 성과(?). 그러나 당장 선조 사후부터 원균은 먹튀의 대명사가 되었고,[19] 이순신은 더할 나위 없는 조선의 성웅이 되었으며, 이것으로 아무리 왜곡하려 해도 결코 왜곡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이순신의 시호인 '충무공'을 선조가 내린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도 많지만 충무공이라는 시호는 인조 때 붙여진 시호다. 정확히는 1643년(인조 21년)에 내려진 시호라서 공이 죽은 후 꽤 오래 뒤에 붙여진 셈이다. 애당초 이순신 깎아내리기에 바빴던 선조가 원균을 1등공신으로 만드는 꼼수를 썼을지언정 결국 이순신이 1등공신이 된 것만 봐도 그 누구라도 이순신의 공을 가릴 수는 없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조선시대에만 해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서 충무공의 사당을 세운 경우가 있다.[20] 또한 위의 순조실록의 내용만 봐도 알 수 있듯 이순신 사후 200년 이상이 지난 순조 시대에 이르러서도 통영 백성들은 이순신의 기일에 모두 소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특히 이순신의 운구 행렬 때 백성들의 통곡만 봐도[21] 그가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임금이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이순신을 사모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니, 이당이 말하기를 "충무공의 상(喪)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흰 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유전(流傳)되어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모두 흰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하였다. -《순조실록》 순조 8년(1808년) 1월 10일
다만 이처럼 하도 곳곳에서 칭송과 존경을 받고 대를 거듭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조정에서도 비교 기준으로 등극하다 보니, 조선 후기에는 관리들이 정말 어려운 사정에 처했더라도 이순신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해냈는데 넌 왜 못하냐?!라는 식으로 갈굼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사례 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어사 박문수. 박문수가 황해도 수군절도사로 재직하던 시절 청나라 선박들이 불법 어업 및 밀무역을 숱하게 행하자이순신은 간과(干戈)[22]
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을 만들었는데 옹진이 아무리 피폐하였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ㅡ 영조, 《조선왕조실록》 영조 20년 / 1744년 2월 20일. 당시 황해 수사 박문수가 경비정을 만들 예산이 부족하다고 예산 지원을 요청하자 내린 답변
이순신의 후손들은 너무 위대한 무장을 조상으로 둔 죄로 소질과 적성이 모두 무시된 채 반강제로 무과에 응시해야 했다. 덕수 이씨 충무공파는 조선 최고의 무반 명가로 자리잡았는데 이순신 아래로 무려 267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한 반면 문과 급제자는 단 1명에 불과하다.[26] 장남 이회 계열에서 114명, 차남 이열 계열에서 151명, 여기에 후사를 이어가지 못한 서자 이훈과 이신까지 합해 총 267명으로 특이하게도 선조~경종대까지는 몇 명 되지 않다가 영조 시기부터 급등해 고종 시기에만 93명의 무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순신의 장남 이회(李薈)와 조카 이분(李芬), 이완(李莞), 이봉(李菶)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숙부 곁에서 의병 신분으로 종군했다. 조카 이완은 정묘호란 당시 끝까지 싸우다 여의치 않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서자 이신(李藎)은 이완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서자 이훈(李薰)은 이괄의 난 때 전사하였다.
이런 모습은 이후로도 계속되어서 이인좌의 난 때 이순신의 후손이었던 5대손 충민공[27] 이봉상은 처조부가 윤휴였던 이인좌의 거듭된 설득에도 이순신의 후손으로서 역적에게 항복할 순 없다며 항거하다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윤휴가 등장한 이유는, 다름아닌 자기 서형의 반려자가 이순신의 서녀였기 때문이다. 즉 윤휴의 형의 장인이 이순신이었다. 그리고 9대손 이용희(李容熙)는 병인양요에 참전했으며 형조판서를 거쳐 어영대장, 훈련대장, 한성부 판윤 등을 지냈다. 심지어 충무공의 13대손과 14대손은 독립운동가로서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또한 그 유명한 삼도수군통제사에도 역대 208명의 통제사 중 13명이 덕수 이씨 충무공파로, 이는 전주 이씨, 전의 이씨 다음으로 많은 것이다. 덕수 이씨와 앞의 두 성씨의 인구수 차이를 고려하면 놀라운 저력이다.
후손들도 이런 내력에 대해 부담스러워했는지, 이와 관련된 재밌는 일화가 《매천야록》에 실려 있다.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당시 실각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던 대원군에게 이순신의 8대손인 이문영이 배알했다. 흥선대원군이 그에게 일본을 물리칠 방안을 물어보자 이문영은 거기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그 이유를 묻자 자신도 이렇게 못났는데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도 어찌 잘났겠는가[28] 하고 대답했다고. 실제로 운요호 사건을 이끈 구로다 기요타카가 가토 기요마사의 후손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실없는 대답 같지만, 사실은 흥선대원군이 먼저 농담으로 꺼낸 질문에 이문영이 재치있게 맞받아친 것에 가깝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도 이순신의 후손 중 12명이 독립 운동을 하였고, 10명이 독립 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2013년 1월의 이달의 독립 운동가 이민화도 이순신의 후손이다. # 이민화는 김좌진의 부관으로 김좌진의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처럼 대대로 무신 명가로서의 명예를 지켰으나, 역시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후 종친회 내부의 알력 다툼 속에 충무공의 유물이 암시장에 나오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
4. 현대 한국에서[편집]
"지금 《이순신전》을 선택해 고통에 처한 우리나라 국민에게 양식으로 삼게 하노니, 제2의 이순신을 기다리노라!"
-신채호, 《이순신전》마지막 부분 中
"아직 조선이 망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29]
"실로 하늘이 내린 인물. 그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그때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리라. 원칙적이고 기본을 중시하는 태도, 피아의 역량과 지형지물을 정확히 판단한 데 따른 창의적인 전략전술, 필사즉생의 정신, 선비보다도 더 선비다운 풍모와 자기 절제, 나라와 백성, 대의를 철저히 앞세우는 모습에서 '성웅'이란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은 인물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후기> 中[30]
[31]
- 한국인에게 "역사상 최고의 명장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면, 십중팔구 "이순신"이라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사를 대표하는 성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위인으로서의 이순신의 위상은 독보적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사 최고의 명장을 논할 때 사실상 이순신 말고 거론되는 이가 없는 정도이며, 한국인이 존경하는 위인으로 세종대왕과 함께 늘 1위를 다투고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서 있는 두 동상이 바로 세종대왕과 이순신인데, 광화문광장의 사회·문화적 상징성을 고려한다면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대신해 그 자리에 설 수 있을 만한 위인은 없다. 물론 이 두 인물이 또한 서울 출신이고 생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32]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이 장소에 이 두 인물처럼 상징성을 지닌 인물들도 또 없을 것이다.
- 흥미로운 점은 2000년대까지 국내 사학 전공자 중에 순수하게 이순신을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임진왜란이나 임진왜란 해전 전반 혹은 선조 시기 정치사(政治史)와 연관지어서 다뤘고, 해군은 충무공 리더십 센터를 만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다 순천향대에서 이순신 연구소를 만드는 등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인물 이순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학자들에게 관심을 못 받은 경우라고 해야 맞는 것인데, 더 연구해봐야 지금 상황에서 딱히 성과적으로 나올 거리가 없다고 여긴 것도 있다. 유명 수군 도독이 어떠한 의미인지, 20세기 내내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
- 해군의 다짐
- 해전에서 활약한 인물이므로 당연하지만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장보고와 함께 엄청나게 좋아하고 밀고 있는 위인이다. 훈련병들은 기본적으로 정훈교육을 통해 이순신에 대해서 배우며, 훈련병용 교재에서도 한 파트를 차지하고 있고 해군 훈련소의 건물 곳곳에 이순신 장군의 어록들이 적혀있다. 대표적으로 명량 해전 당시 장계로 올린 "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가 제7기동전단 본부에 당당히 걸려 있다. 해군의 다짐 또한 '우리는 영예로운 충무공의 후예이다'로 시작하며, 군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해군의 자존심의 근원이다. 또한 해군사관학교에 거북선 모형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고 이순신 제독 동상도 있다. 참고로 해사의 연구자들은 다른 교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비해 이순신에 대한 분석 및 연구를 오랫동안 추진해왔기 때문에, 이순신과 관련된 정보나 자료는 한국에서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반적인 장교들의 지식 수준은 이순신을 장군이라 칭하면 정색하며 제독이라 부르라고 하거나 명색이 충무공 리더십 센터 교관 출신 장교가 전역 후에 조선은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환빠가 되고, 충무공 리더십 센터에서 나왔다는 장교가 훈련소 정훈 시간에 날조된 <칭기즈 칸 어록>을 다시 날조한 <이순신 어록>을 가지고 강의하고,[33] 해군정보단 앞 비석에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왜곡된 문구를 정보전의 중요함을 강조한 충무공 어록이라는 주석까지 달아 새겨놓는 수준이라는 점이다. 짤막한 이순신 영화를 만든 적도 있는데 명량 철쇄설을 지지하고 참수리보다 작은 판옥선이 주 무장으로 승자총통을 쓰는, 그야말로 발로 만든 한심한 작품이다. 아무리 학계가 따로 있다지만,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는 집단치고는 한심한 수준. 그러다보니 한국 해군은 충무공의 후예를 자처하지만, 그저 이순신의 승리에만 관심을 가질 뿐 실존 인물 이순신이나 조선 수군사를 연구하는 데는 쥐뿔도 관심 없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더 나아가 소설 불멸에서 이순신을 사실과 관련 없이 매우 부정적으로 그린 김탁환이 해사에서 교수 사관을 했다는 이유로 SBS에서 남희석과 해사를 방문할 때 해사 생도들이 동원된 장면이 전국으로 중계되었다.
- 대한민국 KD-2 구축함 1번함인 DDH-975 충무공이순신함은 당연히 충무공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후 동일함급은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이 된다. 하지만 밀덕들은 충무공이라는 상징성 강한 명칭을 고작 구축함에 사용한 것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34] '항공모함까지는 무리더라도, 이후의 이지스함에다 쓸 수도 있었는데 좀 참지…' 정도의 뉘앙스. KD-3 이지스함은 결국 세종대왕급으로 명명되었고, 이 중 3번함에 이순신의 조력자였던 류성룡의 이름을 딴 '서애 류성룡'이 붙여졌다.[35] 아무래도 해군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한국형 이지스함에 대왕 칭호가 붙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 못지않은 국민적 존경을 받는 세종대왕을 붙이는 것도 합리적인 건 마찬가지이고 또 이순신 장군의 성격이라면 구축함이라도 불만이 없을 거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오히려 충심 깊은 이순신 장군의 성정에 비춰 보면 자신의 이름이 선왕보다 높은 함급에 붙으면 불충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 해군이나 해군 출신자 등 일부에서 해군의 장성 계급을 이르는 호칭인 제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전공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싸우는 수군으로서 세웠고 실제로 해외에서는 전부 Admiral Yi Sun Shin이라고 표현한다.[37][38]
- 해병대 내에서는 농담 삼이 이순신이 해병대라 말하기도 한다. 이유는 1.북방에서 육상에서 근무했다. 2.제독이 아니라 장군이라고 부른다. 3.결정적으로 신고 있는 군화가 세무워커다. 라고...
- 특히 군인 출신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많이 존경했다고 한다.[39] 그 존경 덕에 이순신의 사당인 현충사가 크고 아름답게 증축되었고, 세종로 한복판에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한국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현재 사용되는 원화 중에 100원 주화의 앞면[40] 에 이순신의 초상화가 있고, 그 전에도 구 500원권 지폐에 등장한 적이 있다.
- 숫제 서울시는 광복 전 일본인들로 넘쳐나 왜색이 짙었기 때문에, 일본의 기를 누르기 위해 경성부 본정목에 충무로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다만 이 때문에 이순신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띄워준 것이라고 왜곡되기도 하는데, 이미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에서부터 널리 숭배하던 인물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이미 전국에 크고 작은 이순신 사당이 여럿 세워졌고 민중에게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 물론 추숭도 언제나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에 특별히 더 유난히 평가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없다.역대 추숭을 찾아서 정리한 글 이를테면 중국 민중의 관우 신앙과 비슷하다.
- 또 효종, 숙종, 영조 대(代)에 이순신에 대한 추숭 사업이 여러 번 진행되었고, 숙종 대에는 현충사를 확장하고 거기에 숙종이 친히 제문을 내리기도 했으며, 정조 대에는 《이충무공전서》를 내는 등 조선 왕조 후반기 동안 꾸준히 추숭 사업이 이뤄졌다. 특히 정조는 평소에도 이충무공에 대한 열광적인 빠심(?)을 드러내고 다녔으며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고는 이의 인쇄 비용을 자신의 사재인 내탕금에서 보태고,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에서는 아예 "이충무공의 집안이야말로 가히 조선의 명족(名族)이라 할 만하다"라고까지 극찬한 바 있다.
- 무속 신앙에서는 용장군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참조. 용장군이라는 것은 흔히 물에서 싸우던 무인들을 영령으로 모시는 것[41][42] 이라고 한다. 무당의 신앙은 무당 개인적으로 신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충무공을 신으로 모시는 무당도 존재한다. 특히 호남 지역에서는 민간에서 이순신을 신으로 섬겼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수의 '영당 풍어굿'. 풍어굿은 원래 물고기가 잘 잡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굿인데, 여수의 '영당'이라는 곳은 충무공을 주신으로 모신 사당이다.[43] 위치는 여수시 남산동 어항 단지이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방문해서 이 굿을 직접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매해 정월대보름에 이틀에 걸쳐 굿을 벌였는데, 오늘날에는 지역 행사처럼 벌인다. 이 굿을 하다 보면 무당이 "여수는 이순신 장군님 덕택에 나갈 적에 빈 배로~ 올 적에 만선하야~"라고 외친다. 이처럼 일부에서 말하는 것 마냥 무속이나 민간 신앙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신으로 모셔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일반인들에게 이순신은 지장의 이미지가 강하고 유독 용장의 이미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장뿐만 아니라 용장의 덕목도 확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녹둔도 전투에서 이일의 부장으로 종군할 때 이일이 도망치는 와중에 이순신은 남아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조선 백성들을 구출해내는 등 무예를 발휘했으며[44] , 명량 해전 때는 아예 미적거리는 부장들을 뒤로 하고 홀로 일본군에 맞서 싸워 전세를 뒤집었다.
- 풍어(豐漁)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은 부하들을 시켜 청어 잡이에 열중했다. 한산도에 개간한 둔전만으로는 병사들과 피난민을 위한 식량 공급이 부족하여, 청어잡이로 군량을 때우려 했던 셈.[45] 그리고 비범하게도 명량 해전 이후에는 부족한 군량을 모으기 위해 '해로 통행첩'을 발급해 백성들에게 군량을 거두는 대신 말 그대로 바닷가를 통행할 수 있는 통행 허가증 비슷한 것을 내줬는데 이 결과 군량을 모으는 원 목적을 달성했고, 또한 조선 백성이면 통행첩을 가지고 있으니 없는 놈은 일본군이란 소리가 되어 간첩선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징비록》에서 이 해로 통행첩이 언급된다.
-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에 위치하고 있다.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를 찾아가는 김에, 묘소가 현충사 경내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방문하려는 사람들도 있는데, 현충사와 이순신의 묘소는 떨어져 있다. 현충사는 아산 염치읍에 위치하고 있으니 주의할 것.
- 이순신의 업적이나 가지고 있는 비중만 보면, 사실상 임진왜란의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이며, 근래 들어 임진왜란의 다른 전투들이 세간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대다수의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이 이순신이 벌인 전투들의 일대기와 몇몇 유명한 육전들을 다루는 수준에서 머무를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룬 책들에서는 이순신이 반드시 언급되며, 더 깊이 파고 들어간 경우 아예 주인공급의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보통 임진왜란 하면 십중팔구 이순신을 떠올린다.[46]
- 그의 수많은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한산도 대첩 축제 등 그와 관련된 축제를 여는 지방자치단체가 있으며, 이순신이 해전을 벌인 남해의 모든 지역에는 승첩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또한 여수에는 이순신대교로 명명된 교량이 있는데, 그 유래는 이 다리의 길이가 1,545m로 1545년생인 이순신의 생년과 같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 현대에는 무략이나 전술·충심뿐만이 아니라, 전란 속에서 사람들을 이끈 리더십과 철저한 관리 능력에 대해서도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충무공은 그 마음 쓰는 것이 도(道)가 있었도다. 그는 높은 위치에 있으나 마음에 넘치는 바가 없이 모든 군졸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고. 권세를 잃어 일개 마졸이 되었으나 또한 마음에 원망과 타락이 없이 말 먹이는 데에 전력을 다하여 말을 살찌게 했다. 때로 말에게 이르기를. '네 비록 짐승일지언정 국록(國錄)을 먹고 이만큼 자랐으니 국가 존망의 시기를 당하여 힘을 다하라'고 타일렀다 한다. 오직 위를 섬김에 충성을 다하였고 아래를 거느림에 사랑을 다하였으니. 과연 그는 '지(智)와 덕(德)을 겸비한 성장(聖將)'이라 할 만하다."
이순신에 대한 박중빈의 발언
- 워낙 유명하고 존경받으며 뛰어나고 유능한 군인의 대표격 인물이기 때문에 상당수의 군 간부들이 롤모델로 꼽는 인물이다. 물론 군대에 이런 말이 괜히 팽배한 것이 아니듯 대부분이 똥별 행각이나 하면서 쓸데없는 군기만 빡세게 잡는 걸 좋아할 뿐 진짜 이순신의 참된 모습은 조금도 본받을 생각이 없는 게 대부분이다.
- 갤럽 조사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2014년, 2019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4.1. 독재 정권 관련[편집]
일설에는 이순신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 국민들을 단합하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악용된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48] . 시기적으로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띄워진 위인이라는 요지이다. 다만, 이순신은 조선시대부터 저명했으며 교과서에 이미 등장했던 실제 유명했던 위인이었기 때문에, 유명한 것과 별개로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동시에 '이순신'이 문화 산업 안에서 캐릭터로서 주인공으로서 다뤄지기 시작한 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1962년 무용극 성웅 이순신이란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역사적으로 파시즘 성향의 국가나 세력이 과거의 전쟁 영웅이나 위인을 프로파간다로 악용한 사례는 상당히 흔하고,[49] 한국 역시 그러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심지어 이순신 장군이 무명은 아니어도 생각만큼 유명하진 않았는데, 과거 군사 정권이 이순신을 띄우는 프로파간다로 유명해졌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옳지 못한 주장이다.
물론 멸사봉공이란 문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보면 전체주의적 요소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멸사봉공'이라는 단어 자체가 일제 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 길들이기에 자주 사용하면서 등장한 단어로써 멸사봉공이라는 단어에서의 '공'이란 다름아닌 일본 제국주의 전쟁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일본 측 위키피디아 설명에서는 <전국책>의 진책에서 따온 단어로 패전 이전까지는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교육으로써 도입됐으며, 일본 기업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는 기업 내 (마치 봉건 시대 주군과 가신 사이의 관계나 다름없는) 상하 관계를 지칭하는데 쓰이기도 하고, 과도하게 강조될 경우 자신의 희생이 요구되는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출처 : 이윤옥 저 <오염된 국어사전> 27쪽 ~ 32쪽 및 일본어 위키피디아 '멸사봉공' 설명)
그러나 당시는 지금 같은 천부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백성[50] 은 왕을 섬기는 게 당연한 것이고, 왕과 국가[51] 를 구분할 줄도 몰랐다. 같은 나라 안에서 왕이 바뀐다면 몰라도 외세에 의해 왕이 살해 당한다면 그건 나라가 망했음을 의미한 게 그 시절이었다. 그 둘이 나뉘게 된 것은, 즉 '시민'이란 개념이 생긴 건 프랑스 혁명 이후다. 당연히 파시즘이란 개념도 민주주의의 대척점으로 생겨난 것. 따라서 이순신의 언행을 두고 전체주의 운운하는 건 온당치 않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순신은 파시스트였던 게 아니라 당시 충효사상을 강조하던 유교 사회에 태어나 살았던 인물일 뿐이고,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대 자체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식의 논리는 과거의 역사적 인물을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의 사상과 관점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순신은 당시 시대를 감안해도 충분히 훌륭한 인물이었다. 지장, 용장, 명장일 뿐만 아니라 덕장의 면목도 충분히 갖췄다. 이순신과 대비되는 원균의 경우 수급을 얻겠다고 죄 없는 백성들 목까지 베었다는 것이나 이순신이 죽자 남도 백성들이 통곡했다는 것을 상기하자.
이러한 반발로 인해 민주화 이후에는 역으로 '이순신은 조선 왕조가 아닌 백성에게 충성했다'라고 주장하며 이순신을 민본주의적 영웅으로 표현하는 창작물들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방향만 반대일 뿐 무리하게 이순신의 성향을 왜곡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랬다면 역성혁명 혹은 자살 의혹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왕권국가인 조선에서 나고자란 이순신의 충성은 왕과 백성 모두에게 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왕 혹은 국가만을 생각했다는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와 백성만을 생각했다는 민주화 이후의 주장은 모두 이순신이 가진 충성의 단면만 두둔하는 것에 불과하다.
4.2. 정치적 견해에 따른 폄하[편집]
21세기에 들어와서 한국 사회에 헬조선 담론을 위시로 한 자국 혐오와 탈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지다 보니, 이런 두 가지 성향을 따르는 사람들이 탈민족주의 시각이 강하거나 정치적 이해관계나 진영논리에 함몰된 사람들도 이순신을 폄하하는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박정희를 싫어하는 한국 강성 좌파 운동권에서는 이순신을 띄워준 박정희를 싫어하다 보니, 진영논리로 그 이순신의 대척점에 있는 원균을 띄워주고 "사실 원균은 용맹한 장군이었는데 이순신 성웅화 작업을 주도한 박정희 때문에 억울하게 간신이 되었다."라는 원균명장설을 내세운 바 있었다. 심지어는 "이순신이 원균을 질투해서 그의 공을 가로챘다."라거나 "이순신의 능력은 사실 별거 아닌데, 다 박정희가 만들어낸 가짜 영웅이다."라든지 "이순신은 조선 시대에 전혀 인정을 못 받았고 아무도 알지 못한채 그대로 묻혀 버렸는데, 박정희가 집권하면서(혹은 일제가 이순신을 찾아내서) 다시 발굴해서 띄워준 엉터리 영웅이다."라는 식의 역사왜곡마저 서슴치 않는다. [52]
원균명장설이 꽤 열풍을 일으켰던 1990년대에 나왔던 이순신이나 임진왜란 관련 서적들 중에는 이런 식의 이순신 폄하론을 실은 것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1994년 4월 출간된 재야의 괴벨스 고정욱의 소설 <원균 그리고 원균>과 1998년 10월에 출간된 김탁환의 소설 <불멸>과 1999년 9월에 출간된 신봉승의 소설 <권율> 또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순신의 전공은 하층 계급, 즉 일반 병사들과 백성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관점이야말로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인데, 이런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근대 이전의 역사나 문화 유산들은 모두 지배층들이 피지배층들을 착취해서 만든 나쁜 것이므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홍위병이 되기에 딱 알맞다[53] .
다만 NLPDR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국내 좌파 운동권에서 쪽수가 많은 정파의 특성이 특성이다보니, 과거 운동권 출신치고 맑시즘 사관에 취해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편이고 지금도 그렇다.[54] 문제는 어설프게 맑시즘을 경도된 인물들은 상당히 많으며, 젊었을 때 구축된 사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이들이 원균명장설을 지지하는 경우도 꽤 많다.
또한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이 박정희 집권 무렵에 세워졌다고 해서 철거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다. 다소 특이한 경우지만 진보 진영 인사이자 맛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은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철거를 긍정하는 주장을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를 빌미로 한국의 모든 진보/좌파 성향 사람들이 이순신을 폄하한다고 매도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애초에 이런 진영논리로 이순신을 비하하는 작태를 보이는 몰상식한 사람들은 진보 세력 내에서도 극히 비주류일 뿐이며, 국가와 민족의 영웅으로 이순신을 고평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더 나아가서 진보적인 민중사관에 입각해서 이순신을 민본주의 성향의 영웅으로 재해석하는 주장들과 이를 반영한 창작물들도 나오고 있다.
또한 진보 인사들만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도 절대 아니다. 보수 우익이지만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잡지인 미래한국에서는 영화 명량을 두고 "이순신은 엄연히 명량해전에서 패배했는데, 왜 영화 명량은 그런 이순신이 명량에서 이겼다고 역사왜곡을 했느냐?"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애당초 이순신 폄하의 가장 큰 결정체인 원균옹호론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좌우 구분이 없다. 당장 원균의 후손으로서 원균을 적극적으로 미화하는 정치인의 당시 소속 정당도 보수에 속한다.[55] 이 외에도 보수 우익이면서 탈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작가인 백지원도 그의 책인 조일전쟁에서 이순신을 다분히 폄하하는 시각을 드러냈다.
또한 탈민족주의와 자국혐오 및 일뽕 성향이 강한 네티즌들이 활동하며 보수 지지자들이 많은 일베나 디시 같은 사이트들에서는 이순신이 굉장히 폄하당하고 있다. 한 예로 2005년 지금은 없어진 모 인터넷 사이트에서 루XX[56] 라는 닉네임을 쓰는 네티즌이 "한산도 대첩은 날조다", "영국 해군 제독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가 자신의 책에서 이순신을 찬양한 일이 없다. 내가 그 책을 갖고 있어서 안다."라는 주장을 하면서 이순신을 마구잡이로 폄하하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여러 사료들에서 찾아내 제각기 반박을 하는 등[57] 한국 인터넷의 여러 게시판들이 한동안 매우 시끄러웠다. 또다른 예로 위와 같은 정치 성향이라고 하기에는 종북질도 자랑이라고 올리는 유튜버 우리가 만약 손을 잡는다면도 원균옹호론을 주장했다.[58][59]
자칭 친일/친미 사회학자이방주라는
4.3. 한국 인터넷상에 퍼진 오류들[편집]
다만 한국에 이순신에 관한 여러 잘못된 정보들이 퍼져 있긴 하다. 과도한 국뽕으로 부풀린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
- 구루시마 미치후사에 관련된 일화 중 "이순신 장군이 번개를 다뤘다"라는 이야기가 일본에 있다는 말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 이른바 이순신 번숨설.
이순신 일본 기록중에 이런 거 있던데 <2017-11-23>
이순신 목 따러간 왜장 최후의 결전 만화.manwha <2017-11-23>
그러나, 이 일화는 출처가 없다. 실제로는 일본측 기록에도, 조선군 기록에도 "이순신이 입에서 번개를 뿜었다"와 같은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인터넷에 나오는 글에는 그냥 두루뭉실하게 '일본 측 기록' 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그 기록이 어딘지 적어 놓은 곳은 한 군데도 없다. 그 '일본 측 기록'에도 구루시마는 그냥 전사했다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 문제는 이게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디시 인사이드의 유머성 글이 시초로, 초기에는 분명 농담으로 시작했으나 이러한 맥락을 제거한 채 번숨설만이 널리 퍼져 "이순신 번숨설"을 진지하게 믿는 바보들이 있다. 그래서 해당 일화를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리는 사람도 등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임진왜란 당시의 군사 기록은 군사 부대의 수를 늘리거나 줄이는 등의 과장은 있었어도 "입에서 나온 번개를 맞고 죽었다"와 같은 낭설을 기록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이순신의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일본인들에게 빌미가 될 우려가 있다.
- 《불멸의 이순신》 등, 공정성을 기해야 하는 사극에서도 일본군의 규모를 늘리는 오류를 볼 수 있다. 재미있게도 상기한 위키백과의 '명량 해전에서의 일본군 1만 사상' 기재는 다름 아닌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나레이션이 출처였다.
- 일부 연구자들이 이를 무조건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역시 문제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는 이순신역사연구회가 발행한 《이순신과 임진왜란4》의 내용을 인용해, 명량 해전의 일본군 사망자를 "일본군의 중형 군선에는 약 100명씩 타고 있었으므로, 최소 3,000여 명의 전사자가 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라 기술하고 있다. 90명씩 승선하는 대 세키부네는 존재하지만, 기함용이나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된 것, 혹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규모가 커진 것이 대다수고, 이 시기에는 승무원 50명 ~ 60명 내외의 세키부네가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으므로, 이를 일괄적으로 100명으로 계산하는 것은 전사자 수를 2배로 늘리는 결과를 낳는다.
많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순신이 지금까지 칭송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같은 일부 예외적인 사례들을 제외하고), 비록 병력 측면에서 일본군에게 열세였음에도 늘 적절한 인력배치로 개개의 전장터에서만큼은 자신의 병력을 적의 병력보다 많게 유지하였던 뛰어난 전술적 식견에 있다.[62] 항상 열세인 상황에서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한의 결과만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단지 명량의 결과가 이러한 과장에 불을 붙일 정도로 극적인 승리란 점이 큰 영향을 주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5. 일본에서[편집]
옛날 일본에서는 대략 이런 식의 맹장 이미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1854년 일본의 출판사 금행당에서 발간한 《조선정벌기》라는 책 속의 이순신. 이 책은 임진왜란 전까지의 조선 역사를 서술하고, 전쟁 진행 상황을 일본 처지에서 그림으로 서술한 책이다. 한반도 모양에 맞춰 그린답시고 고증 따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지만, 제법 무섭게 그렸다. 특히 들고 있는 방천화극. 《징비록》이 일본에서 발행되면서 처음 알려졌지만,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는 김시민에 비해 인지도가 낮았고, 이후 메이지 시대의 해군 연구에 의해 일본 내 인지도가 높아졌다.
이러한 평가들로 인해 일본 교과서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여진다. 기사 물론
이순신은 단기로 오랑캐 도적들을 무찔렀다. 일본군(和兵)이 (조선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전라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귀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계림[63] 의 으뜸이었다.
이 그림 역시 《조선정벌기》에 묘사된 이순신으로, 이 그림은 사천 해전 때 부상을 당하는 것을 묘사한 그림이다. 그림 위의 텍스트 내용도, 싸움 중 총탄을 맞았으나 태연자약했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무인다움을 찬(讚)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이순신은 대개 류성룡의 《징비록》의 영향을 받아 영웅다운 인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64]
1908년 발행된 일본 해군의 사토 데쓰타로 제독의 저서 《제국국방사론》에서 "역사상 최고의 제독은 동방의 이순신과 서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다. 거기에 넬슨은 인간적, 도덕적인 면에선 이순신보다 뒤떨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났다는 불행 때문에 서방에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고 하였다.
역사를 통틀어 정면 공격과 기습 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 중에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서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과 그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의심의 여지 없는 최고의 해군 지휘관이다. 이순신과 비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덜란드의 미힐 더라위터르보다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호레이쇼 넬슨은 이순신에 비해서 인간성과 성실성의 측면에서 한참 뒤떨어졌다. (또한) 이순신은 거북선이라고 알려진 장갑 전함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여 년 전 해군 전술의 달인이었다.
《제국의 군사사》(일본어: 《제국 방위사》, p. 399, 일본 제국 해군의 사토 데쓰타로 제독 저)
/ 사토 제독의 《제국국방사론》 중 이순신에 관한 사토의 언급. 영문 위키백과 'Yi Sun-sin' 항목에서 발췌. 목차 중 'Legacy'의 3번째 단락 참고.
또, 1929년 해군 소좌 출신 작가 가와타 이사오(川田功)는 그의 소설 《포탄을 뚫고서》(砲弾を潜りて)에서 주인공인 한 해군 병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러일전쟁을 앞두고) 당연히 세계 제1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솔 능력, 그의 모계(謀計), 그의 용기, 하나라도 칭찬할 가치가 없는 것이 없다." (김준배 2018, 104에서 재인용) 출처
한편으론 1891년 강경한 확장주의자 가와사키 시잔이 쓴 위인전 《일본백걸전》(日本百傑傳)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순신, 정운(鄭運)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수군을) 한산도에서 대패시켰다. … (중략)… 옛날 나폴레옹 1세가 산을 뽑고 바다를 뒤짚어엎을 세력을 갖고도 영국을 무찌르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넬슨의 해군에게 제압 당하였기 때문이다. 조선반도의 쇠약함과 영국의 부강함은, 날을 같이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동서의 영웅(나폴레옹과 히데요시)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결과는 동일하다." (김준배 2017, 243. 재인용 및 일부 편집.) 출처
또한 메이지 덴노에게 직접 진상된 뒤 전국 중학교로 배포되었던 《제국해군사론》(帝国海軍史論, 1898)을 쓴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 長生)의 글 중에서 언급되는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임진왜란 같은 것을 사실대로 씀(直筆)으로 그 진면목을 기술하는 것은 자못 불쾌한 감이 있으나, 만일 해상권력을 쥐는 것의 필요성을 말하길 원한다면, 먼저 우리의 실패한 사적(事蹟)을 들어 은감(殷鑑, 실패를 거울삼는 것을 의미)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히데요시(秀吉)는 동양에 둘도 없는 영걸(英傑)로서 부하 장수도 모두 천군만마 중 뛰어난 인물들이다. (중략) (그러나 그들은) 평양에서 북진할 수 없었다. (중략) 이것은 우리 수군(水軍)의 여러 장수들이 해전 전술에 졸렬(拙劣)하여 순신 때문에 시종 해상권력을 장악당한 죄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행동을 할 때도 우세한 해군력을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됨은 만세불변의 원리로서 또한 성공의 기초이다" (김준배 2018, 94-96 재인용. 필자 강조) 출처
추가로 오가사와라의 글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이순신 연구를 추가한 《제국국방사론》(帝国国防史論, 1907)을 쓴 해군대학교 교관 사토 데쓰타로(佐藤鉄太郎)의 글 중 다음 대목은, 지금도 종종 인용되고는 한다.
"(본인은 현재 일본의) 제국 국방의 방침이 과연 국가가 어려울 때 이에 응할 방법인가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어 조선의 명장(名將) 이순신의 사적을 조사하여, 임진왜란 당시 (그가) 우리 수군을 격파한 것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공적은 격렬히 나의 정신을 일깨웠고, (나는) 공세적 국방의 의의(意義)에 관해 더욱 각성하는 바가 있었다.
이순신은 실로 세상을 뒤덮을(蓋世) 해군 장수로서, 불행히도 조선에서 살았기 때문에 용명(勇名)도 지명(智名)도 서양에 전해지지 않았으나, 불완전하지만 임진 왜란에 관한 전기를 보면 실로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 서양에 있어 이와 필적할 자를 찾는다면 확실히 네덜란드의 장수 미힐 더라위터르 이상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넬슨 같은 자는 인격에서 도저히 비견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은 실로 장갑함(裝甲艦)의 창조자로서, 3백년 이전에 이미 훌륭한 해군전술로 싸운 장수이다." (김준배 2018. 103 재인용. 필자 강조) 출처
참고로 오가사와라 나가나리와 사토 데쓰타로 두 사람 모두 훗날 전시총리까지 올라가는 스즈키 간타로의 동기들이다.
러일전쟁 후 각국 해군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일본 해군에 미국 해군사관생도들이 견학차 방문했는데, 한 생도가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에게 "각하께서는 어떤 해군 제독을 가장 존경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도고 제독은 "나는 조선의 이순신 제독을 가장 존경한다네. 그 분에게 비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네."라고 대답했던 일화가 전해지나[65] , 출처들이 하나같이 신빙성이 없는 서적들이므로, 사실상 국수주의자들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추정된다.[66] 그러니 굳이 진위가 불분명한 도고의 어록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도고가 개인적으로 이순신을 존경했을 개연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관련 사료들이 확실한 증거가 없고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논란이 되는 사항에 대한 근거가 되기엔 신뢰성이 부족하다.
일단 흔히 퍼져 있는 도고의 어록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 최초의 출처는 박정희 때 한일협정 당시 일본의 전 수상이자 막후 실력자였던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사이의 중계자 역을 했던 만주국 관리 출신의 친일파였던 사업가 이영개로[67] 자신이 직접 "지인에게 들었다"면서 한 말로 이는 그저 당시 한일 협정에 대한 반대가 극심하자 반일 감정을 누그려뜨리려 만들어낸 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기실 도고는 일본에서도 엄청나게 존경받는 인물로서 러일 전쟁 승전 축하연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한 말이라면 기록이 없을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발언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은 전무하다.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 않은 '도고의 어록' 같은 것을 굳이 인용할 이유는 없다.
이종락이란 사람이 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란 책에서 도고가 이순신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나오긴 한다. 이 책에는 1905년 일본 연합 함대 해산식 파티에서 도고의 말을 직접 들은 노부인의 회고담을 소개한다고 나와 있다. 당연 일본 측의 어떤 기록에도 이러한 말은 없다. 전문을 옮긴다.
"내(도고)가 이순신 제독과 동렬에 서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연합 함대는 발트 함대보다 규모가 크므로 일본 해군의 승리는 되려 당연하다. 허나 이순신 제독은 언제나 열세에 놓인 함선으로 전승하는 전과를 거뒀다.[68]
이게 내가 그를 못 따라가는 첫째 이유다. 둘째는 일러 전쟁에서 일본 육군은 연전연승했으므로 우리 해군 기지가 적군에게 위협된 적이 없다. 반대로,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해서 이순신의 수군은 언제나 기지가 위협되고 보급이 끊겼다.[69][70] 이런 어려움을 이긴 자가 이순신 제독이다. 셋째 이유는 나 도고는 황공하게도 위로는 천황,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제독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왕명으로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71]
그러나 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라는 책은 왜성을 직접 탐방했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높지만 아마추어 연구가의 한계상 사료 해석에 한계도 있고, 학술 논문도 아닌지라 출처 표기나 사료 비평적인 면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도고가 노부인께 했다는 이순신 관련 발언의 경우 해당 책에는 저 문단 하나만 있고 인용 출처나 참고 문헌 목록 같은 믿을 만한 근거는 적혀 있지 않다.
실제로 도고가 '이순신은 나의 스승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구절 역시 한국인 실업가 이영개에게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 일본 해군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도고 정도 되는 인물이 그렇게 발언했다면 일본 측에도 관련 기록이 남았을 법한데,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즉, 도고가 실제로 저런 발언을 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실제로 도고 제독이 이순신을 추앙했다는 일화들은 전부다 출처가 불분명하며 전해들은 것을 옮겨 적은 "카더라" 수준이다. 일본에서는 역사적 사실로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며, 한일 협정을 추진하던 1960년대 당시에 반일 정서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영개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일본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다름아닌 역보정 관련 때문인데, 만약 자신들이 이순신을 폄하할 경우, 임진왜란 이후 몰락한 일본의 장수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폄하한 이순신에게 개박살이 난 졸장이나 잡장으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즉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은 전국 3영걸 중 한 명이자 전국시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 외 구키 요시타카, 토도 타카토라 등등 일본의 수많은 장수들을 죄다 까내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순신을 폄하하는 것이 도리어 자충수가 되어버리는 것. 특히나 당시 도요토미 정권 하의 무장들 같은 경우는 전국시대를 거쳐 오며 히데요시 호령 하에 모인 다이묘 출신 장수들이 가토 기요마사 등과 같은 히데요시 직속 부하들보다 많았기에 더더욱 그 차이가 벌어진다.
실제로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를 폄하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영웅화하는 작업에 들어갔었고, 이와 맞물려 '육주해종(陸主海從)'의 기존 국방 노선을 '해주육종(海主陸從)'으로 바꿈으로써 해군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내려던 당시 일본 해군의 주요 인물들이 이순신의 영웅화를 통해 해군력 이론에 지역적 색채를 가미하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시도하였다. 메이지 일본과 이순신, 그 애증의 역사 간단히 생각해 보면 훌륭한 캐릭터 플롯에는 그에 걸맞는 훌륭한 적 혹은 라이벌이 필요한 법이고, 이에 이순신은 조선 최강의 이미지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라이벌로 보정받은 셈이다.
실제로 이순신의 영웅화를 통해 해군력 팽창의 정당화를 꾀하던 당시 일본 해군의 노력에 관해, 후대의 문필가 시바 료타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순신을 발견한 것은 메이지 일본 해군이었다. (중략) 1904, 5년경의 일본 해군사관은 이순신이라는 이름을 학교에서 배우고, 책으로 읽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준배 2018 재인용) 출처
5.1. 일본 우익의 폄하[편집]
일본의 연구자들 역시 이순신의 능력과 그가 전쟁에 미친 영향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72] 실제로 일본에서 해군사 및 일본 전국사 연구의 대가 중 한 명인 키타지마 만지 교수의 경우 KBS 다큐멘터리에까지 나와서 이순신에 대해 뛰어난 평가를 내릴 정도. 그러나 현실과 달리 인터넷상에서는 우익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왜곡된 문서가 많은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들 중에서도 이순신 관련 문서는 그 왜곡의 범위가 상당히 크며, 특히 사서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장의 대목만을 짜깁기해 자국의 역사에 유리한 결론을 내기로 악명 높다. 아래는 위키를 제외한 이순신 관련 왜곡사례나 수법들이다.
- 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등 전과(戰果)의 폄하. 참고로 실제 전과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와 이순신/전투 관련 문서에 정리되어 있다.
- 일본 우익들이 전투에선 졌지만, 전략 목표는 달성했다고 평가하는 명량 해전으로 일본의 서해 진공은 완전히 좌절했으며, 수군력의 약화로 이후 큰 공세를 하지 못하고, 왜성에 의지한 수비전, 교착 상태에 들어간다.
- 노량 해전에서는 마치 이순신이 전쟁 범죄라도 저지른 듯이, 퇴각하는 사람을 잔인하게 추격하다가 역관광 당했다는 식으로 써놨으며[73] , 조선군이 궤멸당하고 일본군이 전력을 온존하여 승전한 것처럼 써놨다. 참고로 퇴각과 항복은 완전히 다르며, 현대전에서도 퇴각하는 군대를 공격하는 것은 전쟁범죄가 아니다. 애초에 퇴각 자체가 병력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전술적 군사행동 중 하나다.[74] 피해 없이 집에 가고 싶으면 이기든가 그 자리에서 항복, 혹은 종전을 위해 협정이라도 했어야 했다. 군대의 퇴각은 민간인의 피난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75][76] 거기에 거짓 퇴각하면서 적을 끌어들여 단번에 격파하는 전술도 있으며 그 전술로 승리한 예가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
- 시마즈 가문은 큐슈를 정벌하려고 했던 도요토미군도 애를 먹었을 정도로 막강한 다이묘였지만, 임진왜란 참전 이후 일본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1500명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정치적인 이유[77] 가 주로 거론되나, 노량 해전에서 입은 큰 피해 역시도 주된 이유로 제시된다.
- 노량 해전이 종전 전에 벌어진 엄연한 전투 행위라는 점도 무시하고 있다. 노량 해전은 조명 연합군의 마지막 대공세였던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벌어졌다. 더구나 순천의 왜성을 바다에서 포위하다가 응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면서 벌어졌으므로, 위와 같은 시각은 당시 전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 조선과 일본의 기록들을 자신들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태도 또한 문제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일본 측 사료는 군충장과 진지표, 전황 보고서 등 신뢰도가 높은 1차 사료들을 대단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수치적인 면에 있어서, 총 참전 인원 십수 명 수준의 전투에서도 보고를 위한 군충장을 작성했던 전국 시대의 특성상, 부대 배치와 병력 현황, 일본군의 병력 흐름 등을 자세하고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일본군 장수들의 가문 기록은 조선의 족보 기록과 비슷하게, 자기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공적은 부풀리고 피해는 축소하는 면이 있어서, 완벽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78] (예컨대 있지도 않았던 명군에 대한 승리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조선인들이 남긴 기록과 마찬가지로 당대인이 남긴 1차 사료라서 섣불리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기록의 신뢰도만 따지면 조선 측 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79] 또한 조선 측 기록, 일본 측의 행정 문서와 교차검증을 통해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추론해낼 수 있다.
- 문제는 이들이 조선과 일본의 자료들을 적당히 입맛에 맞게 추려내고 해석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적당한 사실이 배합됨으로써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 일본 수구 세력이 자학사관(自虐史觀)을 극복하고, 학생들에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정통성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새 역사 교과서에서는 일부러 이순신을 뺐다. 기존 대부분의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이순신의 초상까지 실려 있었다.
- 일본어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충무공의 동상이 군사 정권의 권력과 힘의 상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80]
- 실제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세종로와 태평로가 뻥 뚫려있기 때문에 남쪽,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올라와 이를 제어해야 한다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진 동상이다. 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사항은 "일제 시대 때 변형된 조선 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변형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였다고 한다. 목적이 실제 일본의 기를 억누르기 위한 것은 분명하나, 군사 정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 이순신 장군 동상 및 몇몇 애국선열상의 철거가 거론된 적이 있다고 한다.
6. 북한에서[편집]
이북에서는 두음법칙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리순신" 이라 쓰인다.
요약하자면 인민을 위해 싸우지 않고 임금에게 충성했다는 뜻이다. 오히려 현실은 그 반대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북한이 자신들의 체재에 알맞게 입맛대로 왜곡한 셈이다.리순신 장군은 량반 출신으로 봉건 지배 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봉건국가를 위해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조국 해방 전쟁 시기에 사회주의 조국을 위하여 자기의 가슴으로 적 화구를 막아 부대의 직격로를 열어놓은 애국자들과 비길 수 없다.출처
1967년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에서도 이순신은 명장으로 큰 우대를 받고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1967년 김일성 우상화가 시작되면서 김일성을 능가하는 영웅이 있다는 것은 북한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순신에 대한 폄하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온 게 상기한 여러 망언들이다. 그럼에도 북한에선 이순신이 희대의 애국자요, 천재적 지략가로 세계 해전사에 이름을 떨친 명장이라는 것을 부인하진 않고 있다. 다만 김일성만 못하다고 할 뿐이다.김일성의 이순신 평가
아래는 1967년 이전 이순신에 대한 북한의 평가이다.
임진 조국 전쟁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전쟁에서의 리순신 장군의 역할의 평가에 대하여 반드시 언급하여야 하겠다. 당시 최대의 애국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천재적인 군사 지휘관인 리순신 장군의 임진 조국 전쟁에 있어서의 위대성은 그가 임진 전쟁을 조국 보위의 인민 전쟁으로 인식하고 인민에 의지하고 인민의 역량을 발휘시키고 인민의 역량을 굳게 결집하여 적을 대항함으로써 승리를 쟁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바와 같이 임진 조국 전쟁 과정에서 리순신 장군의 활동을 그 시대에 있어서 조선에서 뿐만 아니라 전 동양에 있어서 가장 열렬한 애국자이며 천재적인 군사 전략가의 한 사람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전쟁에 있어서 리순신 장군의 투쟁은 애국 인민의 산 표본으로 되었으며 그가 군사 예술의 우수한 정수로 되었으며 그의 전략 전술은 애국 투쟁의 영광스런 상징으로 되였다.
리청원, 《임진 조국 전쟁 1592년 ~ 1598년》 (1955년)
우리는 위대한 애국자이며 탁월한 전략 전술가였던 리순신 장군에 의하여 우리 수군 연합 함대가 지휘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순신 장군은 전쟁 전부터 왜적이 침입할 것을 예견하고 함선 건조, 함선 수리 특히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 무기의 제작, 군량 준비, 병사들의 훈련 등 모든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백방으로 군비를 강화하였다. 장군은 또한 탁월한 전략가로서 적아간의 력량 관계를 정확히 타산하고 이에 립각하여 격멸전을 용감하고 대담하게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장군은 전반적 전국에 대한 전략적 견지에서 이를 분석하고 여기서 제기되는 과업을 능숙하게 해결하는 방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면 하루 속히 원쑤들을 우리 강토로부터 몰아낼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 당시 누구보다도 깊이 연구하였으며 또한 잘 알고 시기적절한 대책을 취하곤 했다. 이와 같은 리순신 장군을 자기들의 지휘관으로 모신 우리 수군 병사들은 장군을 무한히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며 전체가 단결하여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원쑤들을 격멸하는데 언제 어디서든지 자기 생명을 서슴없이 바치였다. 제 아무리 우수한 무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리순신 장군과 같은 위대한 지휘관을 가지지 못하였을 때에는 이와 같은 승리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길성, 《임진 조국 전쟁 시기 우리 수군의 투쟁》
이렇게 이순신을 고평가하던 북한 학자들은 유물 사관을 신봉하였단 이유로 반종파분자로 몰려 대거 숙청당했다.
북한이 이순신에 대해 비교적 박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그가 우상화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1980년대만 해도 당장 북한 땅이 배경인 작품인 《심청전》마저 폄하하고 을지문덕, 강감찬 등 모든 위인으로 평가받던 인물의 계급적 한계성이 강조되었다. 오직 동학농민운동 같은 인민의 항거만 강조되고 왕조 자체는 모조리 폄하한다. 고려도 신라처럼 외세는 끌어들이지 않았지만 다른 것을 모조리 폄하하고 있다. 심지어 고조선조차 이 당시에는 지배계급이 다수를 억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지방을 강조하는 것은 '지방주의'라고 하여 초헌법적 원칙인 10대 원칙 등에서 철저히 금기시되는 내용이다. # 그나마 민족에 대한 평가가 좋아진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개혁으로 독자성을 추구해야 했던 1980년대 후반, 단군릉을 만들며 고조선의 역사성이 다시 강조되는 것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다. 이순신은 그 이후 왕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활약에 대한 언급이 늘어난다.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북한이 공을 세운 해군에게 주기 위해 만든 훈장 중에 이순신 훈장이라는 것도 있다. 북한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는 별로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이 너무 이순신만 띄워주고 그 밑의 인민대중들의 투쟁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하여 다른 전근대 위인들처럼 김일성보다 못하다는 이유로 즉각 평가절하되었다.[81] 여담으로 한홍구가 말했던 《거짓된 신화로의 이순신》이라는 것의 예로 든 것이 북한의 저런 모습을 든 것이다. 다만 2014년 들어서는 외세 배격을 목적으로 이순신과 거북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 들어, 남한에서 제작된 이순신 관련 드라마와 영화가 북한으로 전해지고 주민들에게 유포되었다. 탈북자들에 의하면 북한내 최고위층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5월 풍계리 핵실험장에 간 남측 기자들의 이순신을 영웅으로 생각하냐는 질문에 북측 관계자가 '우리 민족을 구한 영웅인데 우리가 그걸 모르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7. 중국에서[편집]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82]
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83] 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중국에서도 장웨이린 교수 등의 일부 인물들이 호평을 내리고 있으며 그는 제갈량, 항우, 손자, 관우 같은 인물들이 서양과 일본에 패한 말기의 청나라에 있었어도 청나라는 역사 속의 그 결과를 피하지 못했을 테지만, 이순신은 다르다고 언급했다.[84]
문제는 이러니까 또 중국이 이순신도 자기네들 위인으로 내세우고 싶은지 이순신이 중국인이라는 망발과 게임 등에서 문화 동북공정 및 선동을 시작하고 있다.
8. 서양에서[편집]
영국 해군의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85] 은 그의 저서인 《The Influence of the Sea on The Political History of Japan》(일본 정치사에서의 해양의 영향)에서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 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라 기술했다.###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대등한 제독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으며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 인종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좇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도(航跡圖)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George Alexander Ballard),《바다가 일본 정치사에 미친 영향》pp. 66-67.[86]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인 미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한 브리핑 중 이순신을 언급하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강력한 연합군 함대가 한국 동남부에 위치한 부산항 입구에 정박한 일부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적함 80여척 중 27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전투함과 수송선을 포함한 70여척의 일본 함선이 이 연합국 함대에게 포착되어 섬멸되었다. 일본군 함대에 가해진 이 강력한 타격들은 한국에 주둔한 일본 육군을 고립시키고 본토 기지에서 차단시켰다.(잠시 뜸을 들이고) 며칠간 진행된 이 해군 작전은 1592년 여름에 수행되었으며, 연합군 함대를 이끈 지휘관은 한국의 이순신 제독(the Korean Admiral Yi Sun-Sin)이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도 일본 해군은 이미 큰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1944년 10월 9일, 진주만 미 해군 기지에서 시행한 브리핑 中[87]
제2차 세계 대전때 엘 알라메인 전투의 영웅이었던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장군 또한 자신의 저서인 《전쟁의 역사》에서 이순신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은 뭍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바다에서는 일대 타격을 받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 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받아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88]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그 배의 선체는 속도를 낼 수 있고 작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갑판 위에는 거북 등처럼 철갑을 씌워, 불, 화살, 탄환 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하도록 철갑 위에는 큰 못을 박았다. 뱃머리는 공격적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으며, 둘레 전체에 포문이 설치되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 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히데요시의 지상 공격은 마비되고 말았다.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지상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싸웠고, 일본인들은 바다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히데요시는 1598년에 사망했다. 한반도를 무모하게 침략해 실패함으로써 결말이 좋지 못했지만, 그의 모국에서의 군사적, 행정적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中
Extra Credits[89] 에서 이순신 이야기를 연재했었다. 1편 북을 계속 울려라, 2편 태산처럼 굳건하게, 3편 한산도의 밝은 달빛, 4편 사즉생, 5편 충무공, 6편 Korea Admiral Yi:Lies로 이루어져 있다. 좋아요가 평균 8천에 1만을 넘으며 다들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반응. 한국어 자막도 있고 고증도 충실하니 시간이 나면 감상해보자. 시리즈 마지막인 Korea Admiral Yi:Lies편을 보면 고증 담당자가 나와서 관련 이야기를 하는 영상이 있는데 여기서는 자기가 찾아본 자료 중 《난중일기》가 제일 이순신에게 비판적이었다고 말한다.
미국 해군 역사가 조지 해거만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300년 동안 멈추게 한 인물', 미국 리더십 전문가 짐 프리드먼은 '일본이 영국처럼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을 만들 기회를 빼앗은 인물', 미국 UCLA대학 역사학과 마크 길버트 교수는 '히데요시의 범(汎)아시아 야망(Pan-Asian ambitions)을 좌절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43년 미국 상원에서 2차대전 일본과 전쟁 중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호명됐다는 사실이 미국 의회 회의록에서 확인되었다.
8.1. 레딧 역덕들의 평가[편집]
레딧의 r/history에서 역사상 최고의 해군 제독을 꼽을 때 호레이쇼 넬슨, 체스터 니미츠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장군이 이순신이다. 간혹 판옥선의 동 시대 기준 우수한 스펙을 이유로 이순신을 '장비빨'이라고 시비를 거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원균과 칠천량 해전으로 가볍게 논박되곤 한다.
레딧 역사 서브레딧에서 밀덕, 역덕들이 정리한 전 세계 역대 군지휘관 순위에서 해군 1위에 랭크되어 있다. 육군 1위는 칭기즈 칸, 공군 1위는 아서 해리스, 해군 2위는 나폴레옹을 무찌른 대영제국 불세출의 명장 호레이쇼 넬슨이고 영란전쟁때 대영제국 해군에 영원히 남을 대굴욕을 선사한 미힐 더라위터르가 3위에 랭크되었다. 러일전쟁의 도고 헤이하치로, 태평양전쟁의 체스터 니미츠, 살라미스 해전의 테미스토클레스 등등 불세출의 해군 명장들이 전부 이순신 아래로 평가 받았다. 해군 평가는 리더쉽, 전술 능력, 작전술, 전략적 계획, 보급 관리, 전술/전략의 혁신과 창의성, 조직/이론의 혁신과 창의성, 임무의 난이도, 영향력, 승리 여부를 기준으로 한다.# 이순신 외에 랭크된 한국의 위인은 육군 178위의 광개토대왕, 201위의 을지문덕이 있다.
레딧에서 12명의 해전 명장[90] 을 제시하고 4명을 골라서 나머지 8명을 막는 놀이를 한 적이 있는데, 많은 역덕들이 Admiral Yi 한 명만 고르고 나머지 11명을 상대해도 충분하단 평가를 했을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91]
9. 이순신 범장설[편집]
보통 함선 숫자만 보고 이순신이 무수히 많은 왜군을 물리쳤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인원은 조선 수군과 비슷하였다. 선박 수가 많은 이유는 아타케부네 같은 대형함 대신 코바야와 세키부네가 절대 다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론적인 면에서는 조선 수군이 거의 모든 면에서 일본 수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일본 수군은 중소형 함선이 주력이라 조선 수군을 상대로 사실상 공성전과 비슷한 느낌으로 백병전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패널티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이시이 켄지에 의하면 코바야선은 화포를 장착할 수도 없었으며, 세키부네는 선박 하나당 화포를 1문, 그것도 경량포인 불랑기밖에 달고 다니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이 칠천량 해전 등에서 승리한 뒤에도 주요 요지에 대한 수송 작전을 펼치거나 혹은 전쟁의 목표물(주요 도시, 왕)을 공격하기 위해 기습상륙을 감행했다는 기록이 별로 없는 이유는 일본 수군 사령관들이 무능력하거나 멍청해서가 아니라 일본 수군의 능력이 본질적으로 허접해서 그랬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 전국시대 역사를 보면 해전에 대한 내용을 찾기가 상당히 난해하다. 일본 역사에 해상은 그저 보급품을 수송하는 곳이지 싸우는 무대가 아니였다는 것.[92] 심지어 선박 건조도 자국 기술자들이 아닌 중국인 기술자들에게 의존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이러니 일본군의 방침 역시 주로 부산포처럼 한정된 지역을 통해서만 들어오는 보급을 제외하면 현지 조달이 원칙이라 조선 백성들을 동원하거나 약탈해서 성을 쌓고 물자를 얻었다. 그래서 조선의 수도를 손쉽게 점령한 일본군이었지만 지리적으로 수전 경험이나 수군이 좀 필요한 강화도나 한강 지역의 저항 세력 등은 요지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잡아서 되도록이면 싸우지 않고 항복시키기 위해 그냥 놔둔 것이다. 물론 당시 화기는 아주 절대적인 우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고 특히 아가리 파이터들이 많아서 엄청난 졸전도 많이 벌인 조선군과 다르게 실전 경험이 많고 사기도 높아 용인 전투 같은 결과를 내기도 했던 일본 수군은 그 나름 전력이 되었지만, 당시 조선 수군의 그 전력을 가지고도 허접하게 패한 원균 등은 아무리 봐도 특출나게 형편없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마치 도미나가 교지 같은 케이스였다고 보면 된다.
9.1. 반박[편집]
기본적으로 이순신의 전략이 조선 수군의 우수성에 기반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그러한 요소들을 잘 활용해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하고 적의 피해를 극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순신의 능력이다. 당장 역대 최강의 해군 전력을 인계받은 원균이 저지른 삽질만 봐도 단순히 템빨로만 이겼다고 보는건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원균만 그랬던 게 아니다. 김완은 세키부네 2척에게 배를 빼앗기고 본인은 생포당했고, 칠천량 해전 당시 이억기와 최호의 분함대도 일본 수군에게 전멸당했으며, 배설은 한산도를 불태우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경상좌수군은 전쟁 내내 아무런 움직임도 보여주지 못했다. 명량 해전에서도 이순신의 대장선이 혼자 죄다 때려부술 때 도와주러 온 안위는 컨트롤이 딸렸는지 이순신처럼 스무스하게 무쌍을 찍지 못해서 일본측 배에 쌈싸먹힐뻔해 이순신이 구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일본 수군이 정말로 마냥 약체였다면 왜 조선 수군이 이러한 위기를 겪었는지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결국 이순신의 승리가 템빨이라는 등의 주장은 조선 수군을 띄워주고 일본 수군을 깎아내릴수록 이순신을 폄훼하기 쉽기 때문에 만들어진 논리에 가까운 것이다.
이억기는 임진년부터 이순신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수없이 전공을 세운 역전의 용사이며, 최호 역시 의주를 방어하고 북방을 안정시킨 백전노장이었다. 이들처럼 원균과는 궤가 다른 평균 이상의 지휘관들도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전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일본 수군의 저력이었다. 반면에 이순신은 비슷하거나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한산도 해전처럼 기만술로 적을 유인해 섬멸하거나, 뛰어난 첩보를 통해 적이 숫적 우위로 밀어붙여 협공을 펼치기도 전에 색적 후 격파하였다. 이에 예기가 꺾인 일본 수군은 엄청난 숫적 우위에 있음에도 아예 해전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를 살펴보면 이순신은 여타 중진들보다도 한 수 위의 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당시(16세기 말) 함포와 같은 화기가 갖는 우세는 아주 절대적이진 않았다. 유럽의 예만 보아도, 레판토 해전이나 칼레 해전 등등에서 함포 같은 화약 무기가 어느 정도 활약한 것은 맞지만, 두 전투에서 모두 기본적인 전투 방식은 포격을 가하면서 접근한 뒤 배 위에서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함포가 해전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당시 유럽에서의 배는 크게 범선과 갤리선으로 나눌 수 있었는데, 당시 범선은 함포를 탑재하기 유리했던 반면, 갤리선은 기껏해야 뱃머리 쪽에 다는 게 고작이었으므로 포격전에 불리했다. 만약, 당시 함포가 정말 엄청난 우세를 가져다주는 무기였다면, 갤리선은 함포의 등장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15세기 ~ 16세기경까지만 해도 갤리선은 범선에 비해 아주 압도적으로 밀리지는 않았으며, 어느 정도 공존할 수 있었다. 즉 16세기 당시의 대포는 반동 제어나 재정전 시간 등이 월등했던 유럽에서조차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은 무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순신의 승리가 전적으로 기술과 무기 덕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른 이유들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 ① 당시 판옥선의 화약 무기는 폭발성 무기가 아니었다. 중세기 화약 무기답게 완벽하지도 못했고, 그 당시 포라는 개념 자체가 폭발하는 탄환이 아니라, 쇳덩이를 날려서 적의 배를 깨부수는 목적으로 쓰는 건데, 이는 포를 정확히 상대 배의 흘수선 밑으로 여러 발을 맞춰야 배가 격침된다는 것을 뜻한다.[93] 그런데 조선 시대 화포는 톱니바퀴 식으로 괴어서 전후좌우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정확한 조준 사격이 쉽지 않은 화포를 흔들리는 선상에서 방포하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의 대포는 유효 사정거리가 그리 길지 못하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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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상에서의 화약 무기 운용, 특히 대포의 운용에는 많은 제한 사항이 따른다. 적 함선 뿐만 아니라 대포가 거치된 아군의 함선도 끊임없이 이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상에 떠있는 선박은 롤링(rolling), 요잉(yawing), 피칭(Pitching) 등 다양한 흔들림(동요 動搖) 현상의 영향을 받는다. 이 같은 흔들림 현상은 지상에서보다 함상에서의 화약 무기 명중률을 현저하게 저하시키는 요인이 된다.
천자총통(天字銃筒)에서 대장군전(大將軍箭)을 발사할 경우, 탄도 곡선에 대해 이론적으로 분석한 박혜일 교수의 연구결과를 보면, 천자 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경우 사각 5도일 때 사거리는 152m, 10도일 때는 289m, 20도일 때는 525m라고 한다. 이러한 사거리 계산이 정확한 것인지는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사각(射角)에 따라 상당한 사거리 차이가 있다는 기본적인 전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5도 ~ 10도 수준의 롤링은 황천이 아닌 일반적인 해상 조건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사각 5도를 적용했을 때 5도의 롤링으로 인한 오차가 더해진다면 사각이 10도가 된다. 박교수의 계산 결과를 참고할 경우, 이때 발생하는 사거리 오차는 137m나 된다. 단거리라면 표적이 되는 선박의 크기가 있으므로 롤링에 따른 오차를 극복할 수 있겠지만, 사거리가 길어질수록 사격 시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당히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각 변화에 따라 발사체의 비행 최고 고도 문제이다. 천자 총통에서 대장군전 사격 시, 계산 결과를 보면, 사각 10도에서 대장군전 비행 중 최고 고도는 13m다. 이 정도 비행 고도라면, 어느 정도 사거리 오차가 발생하더라도 표적 선박의 높이가 13m 이내라면 어떻게든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에 명중할 수 있다. 하지만 사각 20도면, 대장군전의 비행 중 최고 고도가 50m, 사각 30도면 최고 고도 100m, 사각 44도면 최고 고도가 200m에 달해서 차원이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 수군이 10도 ~ 20도 정도 수준의 사각으로 사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5도 ~ 10도 수준의 롤링이 발생한다고 가정한다면, 실제 사각은 15도, 20도, 25도, 30도로 변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사거리 오차는 둘째 치고, 대장군전의 비행 고도 자체가 50m ~ 100m로 높아지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높이라면 총통에서 발사된 대장군전이 표적 선박의 돛보다 더 높은 고도로 선박 상공을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롤링에 따른 사각 변화와 이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보다는, 사각(射角) 변화에 따른 발사체의 최고 비행 고도의 변화가 명중률 향상에 심각한 장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오차 부담 때문에 20도 이상의 사각으로 사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요잉 등에 따르는 좌우 오차 문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체 길이가 30m 정도인 일본의 대형 아다케 정도라면, 배의 중심부를 겨냥했을 때 배의 선수와 선미 사이의 각도 차이는 사거리 50m일 때는 33도, 사거리 100m일 때는 그 절반 정도인 17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거리 100m일 때는 17도, 사거리 50m일 때는 33도 이상의 요잉이 발생하지 않는 한 오차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나마 요잉은 롤링보다는 부담이 적다는 의미이다.
박혜일 교수는 천자 총통에서 대장군전을 발사할 때의 사거리와 비행 고도를 계산했지만, 롤링과 요잉, 피칭 등에 따른 오차 문제는, 천자 총통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총통에 적용되는 공통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오차 부담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 방법은 가급적 근거리에 접근한 후 사격을 하거나, 사각(射角) 자체를 가급적 작게 잡는 것뿐이다. 만약 사각 5도로 사격할 때 발사체인 대장군전의 최고 비행 고도는 3.2m에 불과하므로, 이 경우에는 사거리 오차가 발생해도, 좌우 조준만 정확하다면 어떻게든 표적이 되는 선박을 맞힐 수 있다. 10도의 경우에도 최고 고도는 13m이므로, 어느 정도 오차 극복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흔들림 현상이 있는 함선에서 화약 무기를 사격할 때 높은 명중률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해서 사격하거나, 그것이 어렵다면 상대적으로 낮은 사각을 선택, 수평에 가깝게 사격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더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9세기 이전 조선의 포가(砲架)는 사각(射角) 조절이 매우 어렵거나 불편한 방식으로 되어 있다. 또한 조선군이 간접 사격에 참조할 수 있는 사각별 사거리 제원이나 화약량별 사거리 제원(諸元)이 존재했다는 증거도 없는 실정이다. 이 경우 체계적인 사거리 수정은 불가능하고, 경험에 기초한 임의적인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다시 말해, 수평 사격에 가까운 낮은 사각이 아닐 경우, 화약 무기 운용 요원의 숙련도가 이례적으로 높지 않는 한, 실질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명중률을 확보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유럽 전근대 해군들이 상대적으로 수평에 가까운 사각으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도, 이 같은 롤링에 따르는 사거리 오차나 비행 고도 오차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박혜일 교수는, 이렇게 롤링에 따른 사각의 불확실성, 화약량과 발사체의 무게 차이를 고려할 경우, 사거리 약 70m 정도까지는 높은 명중률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100m가 넘어갈 경우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조선 수군 처지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전거리는, 표준형 조총 유효사거리인 50m를 벗어나면서도, 롤링에 따른 오차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거리라고 할 수 있다. 천자 총통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아무리 크게 잡아도 이상적 사각은 20도 미만, 유효 사거리는 400m 이하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피차 이동하는 선박 간에 벌어지는 해전에서 과연 아군이 원하는 교전거리를 계속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실제로는 이보다 더 근접한 상태에서의 교전도 빈번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군에서 유효사거리가 50m가 넘는 9몬메 이상의 대형 조총을 사용하기도 했으므로, 실제 교전 상황은 훨씬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 수군 함선이 조선 수군 함선에 과도하게 접근했을 경우에도, 화약 무기 운용상의 제약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배가 완전히 붙는 접현전(接舷戰)의 경우에도 화포의 사용이 제한되는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일본의 대형 아다케 등 적의 함선 높이가 판옥선과 동일하거나 더 높다면, 접현전 상태에서도 화포 운용에 무리가 없다. 하지만 세키부네나 고바야처럼 일본 함선의 높이가 조선 수군의 주력함인 판옥선보다 현저히 낮은 상태라면, 접현(接舷) 시에 하향 사격을 해야만 사각이 나올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같은 하향 사격 시 대포 운용에 어떤 제한 사항이 발생하는지 여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다.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 시대 화약 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만약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포가(砲架)의 형태가 동거(童車)라고 가정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일정 거리 이상 접근했을 때, 특히 완전히 배가 붙는 접현(接舷) 상태에서는, 총통의 사각 제한 때문에 사격 불능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는 질려포통(疾藜砲筒) 등 손으로 투척할 수 있는 화약 무기나, 활 등 일반적인 투사(投射) 무기를 운용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군다나 조선군의 화포에 몇 차례 맞는다고 안택선이 터지는 것도 아니고,[1] 그 화포가 빠른 속도로 연사가 되는 것도 아니며, 조준이 쉬운 것도 아니고, 발사하여 명중하더라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일본 수군이 모두 죽는 것도 아니다. 일본 수군이 바보도 아니고, 화포에 몇차례 당했으니 기를 쓰고 노를 저어서 판옥선에 달라붙으려고 했을 것은 자명한 일.
물론 상기한 설명은 선상에서 화포 운용의 어려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위의 내용에만 집중할 경우, 자칫 '대포는 이순신의 기적적인 승리 행진과 별 관계가 없다'고 해석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상에서의 고민과는 별개로, 이순신의 전투에서 대포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맞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대포의 화력은 조선군이 일본군에 비해 유리했으며, 이를 이용한 것이 이순신의 전술의 핵심 중 하나였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단지 대포가 있으니까 이긴 것이지, 이순신의 존재가 승리의 요인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엄청난 왜곡이고 오류라는 것이다.[2] 애초에 임진왜란의 해상전은 동아시아의 해상전이 함포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상태이며, 이러한 개념을 체계화하고 실전에서 응용하고 조선군의 장점을 극대화시켰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역사상 유례가 거의 없는 수준이다.
한편 화포 운용의 측면이 강조되다 보니 아예 이순신이 화포를 주력으로 활용해서 이겼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많은데,[94] 이순신에게는 화포를 마구 쏴도 될 정도로 물자가 넘치질 않았으므로 원거리 포격으로 왜적을 때려잡은 장군님! 같이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난중일기의 전투 기록들에 적힌 전과에서 '얼마를 불태우고 적 얼마를 죽였다'라는 식으로 계속 나오는 것으로 알 수 있듯 이순신 함대의 주된 화력 투사 방식은 궁시와 소구경 화포[95] 의 사격을 통한 인명 살상 및 화공의 형태였다. 게다가 위에서도 서술했듯 목선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해도 포격만으로 적선을 깨부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으므로, 화공을 펼치는 게 훨씬 효율적인 전투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만 보아도 이순신이 조선 수군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선상 백병전을 가능한 피하고,[96] 조선군의 전통적 강점이었던 사격전을 적극적으로 벌여 적군을 압살한 훌륭한 전술가라는 점이 드러난다. 실제로 조선 수군의 전투 양상을 보면 일단 화포를 사용하여 적을 대충 무너뜨리고 화살 세례를 퍼부은 다음 왜선으로 건너가서 남은 적을 정리하는 방식이었다.[97] 어떤 면에서는 해상 포격을 선보인 전술적 선구자로서의 면모보다는 당대에 활용할 수 있었던 해전 전술을 극한으로 연마해서 선보인 완성형 전술가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기도 하다.
- ② 왜선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고 날래고 또 수가 많았다. 판옥선은 무겁고 둔중하다. 속도는 전투력의 가장 중요한 요건 중 하나이며, 이것은 조금만 잘못하면 순식간에 접근당해 4면에서 몰려드는 일본군을 상대로 그들의 특기인 백병전에 말려들 수 있다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순신은 이런 일본군의 강점을 발휘하기 힘들도록 거리를 유지하는데 애를 써야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은 적을 분산시키고 적의 접근을 막으며, 반대로 우위에 설 수 있게끔 아군에게 유리한 위치로 적을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전술을 사용했다. 이순신의 대표적인 승전으로 꼽히는 명량 해전도 울둘목의 좁은 해로를 이용하여, 왜선의 포위 기동을 봉쇄했으며, 한산도 해전의 경우도 틀어박힌 적을 유인해 쌍학익진으로 적을 단숨에 격멸한 사례도 있다.
- ③ 왜선에 타는 조총수 및 보병들은 대부분 아시가루로 조선과 비슷하게 농민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100년이란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역전의 숙련병들인데 비해, 조선 수군의 병졸들은 태반이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농민 출신들이었다. 2번 문단과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거나 군율이 흐트러져서 접근을 허용하면, 그건 아주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98][99]
- ④ 이순신에게 보급이 끊기기 전의 왜군들은 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출병했으나,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된 뒤에도 조정으로부터 쌀 한 톨도 지원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라 조선 수군은 군자금, 군량, 화약, 금속, 배를 수리할 목재 등을 자체적으로 조달해야 했다.[100][101]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조정(朝廷)을 유지해주기 위해서 공물을 바쳐야했는데, 심지어 공문서 쓸 종이조차 없어서 이순신이 그 종이를 지원해주는 상황이었음에도 조정에서는 늘 공물이 부족하다고 닦달했다.[102]
- ⑤ 정보전과 탐색전도 항상 철저히 하여, 단 한 차례도 왜군의 기습이나 야습을 허용하지 않았다. 왜군이 야습을 시도하다가 되려 역관광 당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 ⑥ 일본도 전란 중반에 밀폐형 층루선(層樓船)과 대조총(大鳥銃)을 일부 투입하는 등 전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던 함선이 조선의 판옥선처럼 안정감이 있는 함선이 아닌데다, 선상 백병전에 워낙 오랜 기간 동안 익숙해졌기 때문에, 처음부터 화포 계통 무기를 조선군처럼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일본군이 화포를 사용했다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는데, 일본군의 제일 큰 화약 병기는 오오츠츠(大筒)라고 하는, 단순히 구경을 늘린 화승총이었다. 그나마도 위력에 비해 다루기 까다롭고 화약 소모가 많은 등의 문제로, 널리 사용되진 않은 걸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는, 대구경 조총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는 등의 공식기록을 사실상 찾을 수 없는 것과, 칠천량 해전과 관련된 자료들 중에도 일본 측 기록에 '판옥선 한척에 대해 서너 척의 배로 포위하고 선상 백병전으로 가야 승산이 있다'라는 식의 자료들이 존재한다는 점 등이다. 일본에서 사실상 제대로 된 화포가 실전에서 선을 보인 것은 전쟁의 원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인 오사카 전투 당시.
- ⑦ 아무리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지휘관이 존재하지 않으면 이것들이 큰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다. 개전 초기, 이순신이 있던 전라 좌수영에 비해 큰 덩치를 자랑하던 경상 우수영의 원균이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모든 무기를 없애 버린 것이라든지, 칠천량 해전에서 이순신이 온갖 노력으로 간신히 마련한 조선 수군을 한큐에 말아 먹어버린 궁극의 팀킬을 자행한 것을 보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단순하게 무기의 차이로 조선군이 이겼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군은 상술했듯이 병사들의 낮은 숙련도와 사기를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보완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실제로 칠천량의 조선군은, 후대의 박문수가 지적했듯이 원균 같은 무능한 자가 지휘관이 되자, 그런 우수한 무기 체계와 전술로 승전을 경험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듯이, 말 그대로 뿔뿔이 흩어져 패전했다.
애초에 무기라는 것 자체는 그 나름의 특성이 있고 장단점이 있는 것이지, 완벽하게 모든 면에서 상대방의 무기를 상회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즉 무기의 수준이 뛰어나다는 건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 그 예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전차는 미국 전차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것은 포의 명중률과 위력, 그리고 장갑에서 뛰어났던 것이지, 속도나 양산 능력, 신뢰성, 정비성에선 미국에 한참 밀렸다. 그래서 독일의 높은 포 명중률과 위력, 그리고 두꺼운 장갑이 큰 장점이 될 수 있는 장거리 전투나, 매복 전투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반대로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물량이 많고 보급이 빵빵한 미국에 비해 불리했다. 당시 독일의 명장이라 불린 장군들은 이런 독일 전차의 특성에 맞게, 상대방을 자신에게 유리한 장거리전이나 장애물이 많아 매복하기 좋은 곳으로 이끌거나, 상대방이 지나갈만한 길목에 매복 부대를 배치해두는 등, 자신의 무기가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고, 그에 비해 약점을 최소화하면서 운용하고, 독일 무기의 진가를 발휘할 상황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높은 전과를 올렸고 명장으로 불리는 것이지, 단순히 무기의 성능이 앞선다는 것만으로는, 수적으로 독일을 압도하는 미국을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독일 전차보다 떨어진다는 평을 받던 미국 전차도, 미국의 명장인 조지 S. 패튼이 미국 전차의 우월한 기동성을 활용, 상대방의 주력 부대를 만나면 우회해 다른 길로 새는 방법으로 순식간에 독일군 전선 깊숙이 들어가서 전선을 교란시켜버리는 방식으로 운용함으로써 독일군을 궁지에 몰아버린 것을 보면, 무기는 그 자체의 성능도 중요하지만 적과 아군의 무기 특성을 파악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알 수 있다. 실제로도, 한체급 떨어지는 T-34 전차 한대로, 비숙련 인원들이 모는데다 첫 출전이라서 전차의 특성도 파악이 안된 티거 2 전차 세대를 박살낸 소련군의 알렉산드르 오스킨 중위의 사례나, 저 위 패튼의 창끝이라고 불리며 역시 한체급 아래인 셔먼 전차들을 이끌고 중전차 대대 수준의 전적을 내고 다니던 크레이튼 에이브람스의 경우를 봐도 유능한 지휘관의 가치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현대전으로 봐도 에이브람스 전차를 갖고선 제대로 된 탱크도 별로 없던 IS에게 털린 이라크군이 있다. 그리고 조선군의 무기가 비록 뛰어났을지라도 전쟁 준비가 잘 갖춰진 일본군은 더 많은 물량이 있었고, 여러모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보다 조건이 더 유리했다는 것을 유념해야할 필요가 있다.
재밌게도 이순신의 전공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근거인 '조선 수군이 가진 우수점'은, 영국의 전설적인 제독 호레이쇼 넬슨을 칭송하는 근거인 '영국 해군의 강점을 이용한 과감한 전술 운용'과 완벽히 동일하다. 넬슨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기존 해군이 잘 사용하지 않던 중앙 돌파를 시도한 근거는 영국 해군이 더 많은 항해 경험으로 인해 난전에 돌입할 시 독자적 전투 능력이 뛰어난 영국 해군이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고 이 판단력이야 말로 넬슨 제독이 칭송받는 부분이다.
10. 무예에 대한 평가[편집]
지휘 능력과 별개로, 무장으로서 이순신 개인의 무예에 대한 평가.
지금까지 이순신은 수군의 지휘관, 지략을 내세우는 지장 등의 이미지가 강하여 일신의 무예에 대해서는 비교적 주목도가 떨어졌다. 최근에는 낙마로 인해 과거 시험에 한 번 떨어졌단 점이나, 32살에 무과에 합격했다는 점 등이 알려지자 오히려 무예는 뛰어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순신의 무예가 척준경, 이성계처럼 동료 장군들도 혀를 내두르는 당대의 맹장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최소한 장군으로서 보통 이상은 했을 것이다. 오히려 보통보단 뛰어났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흔히 이순신의 무예를 저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근거는, 활 50발을 쏘아 42발을 맞추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무과에 32세의 늦은 나이에 급제했고, 무과 성적이 29명 12등으로 중간 수준이었다는 점, 낙마로 처음 친 과거 시험에선 떨어졌단 점, 몸이 아파 고생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자주 나온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거의 다 반박의 여지가 있다.
일단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나이 32세는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었는데, 애초에 당시 무과 합격 평균 연령은 34세였다. 게다가 29명 중 12등이라는 성적도 어폐가 있는 게, 최종 선발자 29인 중 12등이란 거지, 무과 응시자 자체는 당연히 훨씬 수가 많았다. 후대 정조 시기에 시행한 한 무과의 응시자 수가 약 3만 5천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순신이 합격한 무과의 응시자도 수 천은 됐을 것이다. 게다가 합격자 29인 중 25인이 현역 군인었다.[103] 문과에서 무과로 전향한 사람이 현역 군인들과 경쟁해서 29명중 12등이면 그런대로 준수한 성적이다. 더군다나 이순신은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별시가 아닌 4년마다 치르는 정식 무과시험인 식년시에 응시했다. 애초에 무과가 무술고시 같은 시험인데 여기서 극소수의 합격자들 사이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다고 무예가 별로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당시 조선에서 무과에 합격한 응시자들보다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104]
과거 도중 낙마하여 불합격을 한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낙마는 실력이 있더라도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사고라 이를 통해 실력을 판가름하긴 어렵다. 심지어 그 이성계조차 낙마하여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설령 당시에 기마 실력이 부족했다고 해도 결국 두 번째에 합격했으니 적어도 과거에 합격할 정도의 기마술은 있었다고 봄이 옳다. 애초에 조선시대 무과 시험에서 보는 기마술은 그냥 빨리 달리는 게 아니라 마상 무예는 물론 말을 달리면서 중간에 다른 말로 갈아타거나, 안장 위에서 비보잉이나 서커스에 가까운 동작을 하는 등 지금으로 치면 거의 묘기 승마였다. 일단 무과에 합격한 시점에선 기마술이 부족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순신이 자주 아팠음을 근거로 무예가 부족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지만, 이순신이 몸이 아프다는 난중일기의 기록들 대다수는 백의종군 후 두 달간의 투옥과 고문에 의한 후유증 때문이다. 또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다는 통념과는 달리, 당시 이순신은 파직 후 단 한차례 심문을 받았을 뿐이며, 풀려난 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시고 나서 말을 타고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투옥 및 심문 과정에서 받았을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심리적인 충격은 적지 않았을 테니 이것이 건강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있고, 이전에도 사천 해전 때 입은 총상의 후유증, 업무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잔병치레, 음주로 인한 숙취, 두통 정도는 있었다. 따라서 왜란 시작 이후에는 이순신이 여러 이유로 몸 상태가 안 좋았을 확률은 높지만, 태생이 무예를 익히기 어려운 병약한 체질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랬다면 무과에 합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105]
물론 그의 활쏘기 기록인 50발 중 42발 명중은 장병의 2/3가 활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활쏘기가 일반적이었던 조선 시대에는 장군이나 전문 군관 같은 정예병들 사이에선 그다지 높은 성적은 아니었다.[106][107] 하지만 최정예병들과 비교하면 하위권일지언정 객관적으로 봤을 때 크게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시 이순신은 이미 50대 전후였다. 현대 기준으로는 중년 정도의 나이지만, 당시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무장으로선 적지 않은 나이이다. 이를 감안하면 나이를 먹고 실력이 하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장 명궁으로 유명한 정조 역시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활의 적중률이 하락했다.[108] 물론 정조는 1년 동안 꾸준히 활쏘기를 수련하는 무관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기준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지만, 요컨대 사람의 활쏘기 실력이 일평생동안 꼭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위는 어디까지나 50발 중 42발을 맞춘다는 게 이순신의 일반적인 실력이라는 점에서의 가정이다. 이순신이 활을 쐈다는 기록은 수백 개나 있지만 실제 몇 발을 맞췄는가는 42발을 맞췄던 단 하루 외에는 기록하지 않았다.[109] 따라서 실제 이순신의 정확한 실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순신은 원균, 서성(徐渻), 군관 3명 등 여러 사람과 활쏘기 시합을 하여 이기기도 했다.[110] 이를 고려하면 그의 실력이 원균은 둘째치고 적어도 군영의 군관들과 비교했을 때는 딱히 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무관 출신인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활쏘기를 하였는데, 그의 활쏘기가 우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신랄하고 엄격한 이순신의 성격을 고려하면 정말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확률이 높으며, 스스로 활쏘기에 자신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군관이나 무관 등 정예병들 사이에서도 그냥 잘 쏘는 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무예에 관해 주변에서 직접적으로 남긴 기록들이 존재한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서는 이순신이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다."라고 기록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고 더욱이 글씨도 잘 썼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충무공행록에는 "22세 겨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팔 힘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이순신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111] 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이순신이 한창 무예를 훈련하던 당시에는 그 실력이 뛰어났음을 짐작 가능하다. 또 이를 고려하면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당시 무장에게 필요한 창술, 검술 등도 당연히 기본 이상은 하였을 확률이 높다.[112][113]
이순신의 용맹이나 무예는 실제 전공에서도 드러난다. 흔히 이순신 하면 원거리에서 화포 등으로 적군을 제압하는 수군 지휘관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이순신은 무과 급제 이후 여진족과 맞닿는 최전방 국경에서도 3년간 복무했었는데, 니탕개의 난때 여진족 수괴인 울지내를 생포하고, [녹둔도 전투]] 같은 야전에서도 활약한 인물이었다. 특히 녹둔도 전투에서 이순신은 수십 명에 불과한 병력을 이경록과 단 둘이 지휘하여 여진족의 1천 기병을 끝내 이겨냈다. 심지어 반격하여 포로 일부를 되찾기도 했다. 이는 그의 무예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100명 이하의 소부대를 지휘해 많은 병력의 적을 깨뜨리려면 이를 1선에서 이끌어야 할 장수 개인의 무예가 꽤 중요하다. 삼국지에서도 제갈량 같은 인물이 고작 몇십 명이나 몇백 명만 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식의 기록은 당대의 맹장인 장료 같은 장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인데 이순신에게 이런 기록이 존재한다. 즉, 함경도 군관 시절의 이순신은 개인의 용맹도 꽤 뛰어났거나, 적어도 무장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순신은 심지어 수군에서 총지휘관으로 있을 때도 직접 선봉에 나선 적이 있다. 배들 간의 선상 백병전도 이루어질 정도의 격전이던 노량해전에선 몸소 시석[114] 을 무릎쓰고 힘껏 싸우며 전투를 독려하다가 탄환에 맞았다고 한다.[115] 명량해전에서도 다른 전선들이 주저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봉으로 나가 싸운 것은 유명하다. 이렇듯 이순신은 종종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선 용장의 면모도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했을 때, 이순신의 무예가 부족했다는 인식은 여러모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순신이 이성계나 신립, 황진처럼 당대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무예가 아주 특출난 장수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적어도 무장으로서 평균은 당연히 됐을 것이며, 오히려 평균을 웃도는 무예를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는 편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