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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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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제90·96·97·98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전후 세대 출신의 첫 번째 총리이자 전후 최연소 총리[1] , 그리고 역대 최장 기간 집권한 일본 총리[2] 기록을 보유한 인물. 또한, 헤이세이 시대의 마지막 총리이자 레이와 시대의 첫 총리이기도 하다.
2006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뒤를 이어 처음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제1차 아베 내각) 그러나 지나치게 빨랐던[3][4] 정치적 성공 탓인지 여러 문제점들을 노출하며 권위가 실추된 데다 건강상의 문제가 겹쳐, 단 1년 만에 총리직을 사퇴하면서 단명 총리로 남았다.[5] 하지만 이후 자민당 출신의 후임 총리들[6] 도 1년 이하의 임기로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었고, 민주당 총리들[7] 역시 단명 내각을 이끌며 3년 만에 지지율이 급전직하하였다. 결국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의 승리로 정권 교체에 성공, 총리직에 복귀하며 정치적 재기에 성공했다.(제2차 아베 내각) 2년 뒤인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3년 뒤인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압도적 다수 의석을 그대로 유지하여 정권을 연장했다.(제3, 4차 아베 내각)
정치적 측면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임기 종료 이후 약 7년간 회전문 총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안정했던 일본의 내각제를 자신의 탄탄한 지지율을 기반으로 안정시켰다.[8][9] 경제적 측면에서는 이러한 안정된 권력 기반을 바탕으로 아베노믹스라는 이름의 강력한 양적 완화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의 경제를 상당 수준 활성화하는 데 성공[10] 했다.
외교적 측면에선 미국과 서방 진영에게,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을 위시한 반 서방 세력 견제의 매우 중요한 조력자[11] 로 인식되었다. 아베노믹스나 아베독트린이 국제 사회에서 별 잡음없이 통과된 데에는 이같은 배경이 깔려있다고 보면 된다. 반면, 한국과 중국에서는 아베 신조의 그릇된 역사관을 이유로 들어 대일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지목해 비판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013년에는 과거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기도 했다.[12] 이후에도 계속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하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주변국의 반발을 불렀다.[13][14] 참고로 아베는 일본 최대 극우 단체인 일본회의의 회원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일본의 재무장 및 군비 증강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신냉전 구도의 당사자인 중국은 당연히 이를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을 악화시키는 행동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도 이를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부활하려는 전조 증상이라며 비판에 가세하는 중이다. G7 서방국가들의 ‘요구’와 일본 내 우익 세력의 '요구'에 응하여[15] 진행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의 경기가 나아져 매년 늘어난 GDP와 세수액 및 예산을 비교해 본다면 비록 매년 증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1%대 군사비를 지출하는 일본은 오히려 한국(GDP 대비 2.6%)이나 중국(GDP 대비 2.0%)과 비교하였을 때 양호한 수치를 유지하고 있다 볼 수 있다.
2.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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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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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책 방향[편집]
3.1. 경제 정책: 아베노믹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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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노믹스의 성과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이 일군 성취와 비견될 만하다.”
무제한적 양적완화와 정부지출, 구조개혁이라는 소위 3개의 화살을 정책기조로 삼고 있다. 아베의 취임과 동시에 G7 국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실시하기 시작해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비관론도 만만치 않게 거세다. 아베노믹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해당 문서를 참고할 것.
양적완화와 정부지출의 목표는 기업들의 낙수효과와 소비심리 회복이다. 구조개혁이란 '1억총활약사회'[18] 라는 기치 아래 여성과 노인의 노동을 장려하고, 기간산업 민영화와 고용시장의 유연화를 촉진시키고, 기업규제를 개혁해서 일본을 더 활기차게 만들고, 이민 완화를 통해 1990년대부터 일본의 골칫거리인 저출산과 고령화를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
일본 닛케이 225 지수는 아베 신조가 본격적으로 아베노믹스를 밀어붙이자 하루에 3~4%가 넘는 급상승세를 펼쳐 5년 4개월만에 15,000선을 돌파했다. 2015년 이후로는 거의 18000선 부근에서 안정을 찾았고, 2016 후반기부터 2017년 중반기에는 19000대 후반에서 20000사이를 오르내리는 중으로 경기가 많이 호전되었으며 엔/달러 환율 역시 111엔대로 상당히 안정적이다. 2021년 2월 14일, 버블 붕괴 이후 30년 만에 30000선을 돌파했다.
참고로 통화 정책은 그 연구를 가장 활발히 하던 1980년대에도 국가 경제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정책으로서는 연구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미국에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경기 부양책으로 대대적인 세금 감면과 기술 개발의 정부 보조 등을 약속하는 와중에 이러한 조세 정책만으로는 자본이 제대로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는 비판을 받자(Timing Problem), 보다 단기적인 대책으로 통화 정책이 부상한 것이다.
또한 경제와 친서방 행보를 동시에 잡는 정책의 일환으로 당초 일본은 미국이 권유하는 TPP(다자간 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참가 여부를 놓고 저울질했다. 그러나 당시 내각이 민주당인 데다가 농가의 타격을 우려한 만큼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자민당의 반대가 많아 소극적이었으나 아베는 높은 인기를 기반으로 TPP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2013년 4월 TPP 참가국들의 참가 협상 승인을 받았고 # 미국은 자국 의회에 정식으로 일본의 TPP 협상 참여를 통보하였다. # 이것으로 한국의 FTA 행보(특히 한미 FTA)에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던 일본이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TPP가 성사되면 일본의 국내 총생산은 0.66%(3조 2,000억엔)이 증가할 것이고, TPP 참여국 가운데 미일만으로 90%의 경제 규모를 차지하는 만큼 환태평양 경제권의 리더로 재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수치조차 보수적인 예측으로 피터 페트리 미국 브랜다이스대 교수는 니혼 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TPPA 참여는 일본 경제 생산성을 높여줄 것"이라며 GDP를 10조 엔(약 98조 원) 정도 늘리는 효과가 있으리라 추산했는데 이것은 일본 정부의 예측치 3조 2천억 엔의 3배를 넘는 수치다. # 또한 일본의 갈라파고스화가 된 시장과 규제를 TPP 참여로 단숨에 글로벌 규격에 맞추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TPP에서 미국을 빼낸 도널드 트럼프 당선 전까지의 장밋빛 청사진이었다. 트럼프는 다자무역협정은 물론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가 협상한 모든 대외협정에 대해 부정적인데, TPP는 여기에 모두 해당되었으니 불가피한 결과였다. 아베는 트럼프의 당선소식을 듣자마자 뉴욕 트럼프타워로 황금 골프채를 들고 달려가는 정성을 보이면서까지 TPP를 지키려 안간힘을 썼으나 트럼프의 마음을 돌리는데 실패했다. 어쨌건 일본은 중국을 견제하고 해외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추가 시장개방까지 해가면서 TPP-11로 밀어붙였지만 참여국 중 일본이 가장 큰 시장이 되어버렸다. 즉, 일본은 미국과의 FTA 효과도 못누리고 졸지에 다른 10개국으로부터는 무역적자만 볼 수도 있는 상황에 놓여버린 것. 혹여 미국이 향후 다시 TPP에 복귀한다하더라도 위와 같은 희망섞인 전망을 재현하기엔 어려워 보인다.
특히 아베노믹스가 좋게 끝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이 존재한다. 왜냐면 이런 식의 무제한적인 양적완화는 언젠가는 장기 금리 상승으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특히 현재의 일본 경제는 구조적으로 국채 금리 상승에 취약한 상황이다. 이미 국채 자체가 GDP의 2배를 훌쩍 넘어간 지 오래이기 때문에 출구전략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이 영영 마이너스 금리를 못 빠져나올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비록 아베 임기 동안 소비세를 인상하는 법안이 민주당 정권 시절의 여당 의원들에 의해 통과되긴 했지만, 아베 내각 들어서 소비세를 증세하는 것도 논란이 많은데, 양적완화와 정부지출이 하는 것과 정 반대의 디플레이션, 소비침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아베 2차 내각에서도 소비세를 8%로 증세를 하면서 아베노믹스의 효과를 상쇄하는 부작용이 일어나 두 차례 추가 인상일정을 연기하고 말았다. 2013년, 2%의 성장률을 이뤄내며 기분좋은 출발을 하던 아베 노믹스는 8%로 소비세 인상을 강행하면서 상당히 동력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2013년 당시만해도 일본이 곧 3% 성장도 가능하다는 꿈 같은 관측도 나왔었지만 소비세 인상 이후 성장률이 다시 하회하면서 말그대로 꿈으로 끝나버린 것.
사실 이런 문제점이 있는데도 소비세를 인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일본의 높은 재정지출과 함께 국가 신용에 대한 의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국채 금리가 상승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보다 더 급박한 이유는 심각한 재정 적자와 국가 부채를 막기 위해서이다. 이에 대한 일본 시민사회의 반응은 소비세를 증세하는 것과 빚을 갚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는 회의적인 시선이 대부분인데, 일본이 빚갚는답시고 소비세를 1990년대부터 당시 3%에서 현재 8%로 5%포인트 올렸으나 부채는 GDP대비 50%대에서 200%로 증가해 무려 4배가 됐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가 경기부양을 위한 적극적인 승부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양적완화가 핵심정책이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새로운 기조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일본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아베 2기 내각의 정책의 성공여부가 일본의 명운을 가를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19]
일단 2019년 연말에 현행 소비세 8%에서 10%로 증세하기로 거듭 확정한 상황이다. 또한 2019년 4월부터 외국인 노동자 수용을 시작했다.
3.2. 외교 정책: 강한 친미-친서방 성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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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강한 친미 성향과 반중[20] , 반북 정책. 이는 일본 자민당의 전통적인 외교 노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우파인 자민당은 친미 성향이며, 좌파인 야당들은 일반적으로 친중, 친한 노선을 띠고 있기 때문. 따라서 아베와 자민당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 왔다. 특히 과거 핵실험으로 촉발된 인도에 대한 국제적 원자력 제재를 종식시키고 인도를 서방 측으로 포섭하여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을 지향하는 미국, 일본, 호주, 인도 등 소위 ‘Quad’로 통칭되는 반중국 연합체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실제로 이 국제정치학적 용어를 최초로 제안한 정치인이 바로 아베이기도 하다.
3.2.1. 한일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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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내각 시절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는 양국의 현대관계사에 비추어 볼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21]
- 이승만 정부 시대 전반[22] 및 박정희 정부 시절 양국관계가 나빴던 시점[23] 등과는 당연히 비교할 수 없으나, 민주화 이후 행정부 가운데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시행되던 1990년대 중반,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독도를 찾았던 2012년 등과 함께 한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 관계악화의 요인은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나 1회성 이벤트 등 일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일제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일본 정계의 극우화, 미국 행정부의 동아시아에 대한 상대적 무관심, 양국 최고 지도자의 상대국에 대한 지속적인 부정적 인식[24] 등 중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였다.
- 특히 일본 측 수상관저에서 직접 결단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에 대한 경제조치가 양국관계의 결정적 악화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과거에는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안정과 패권유지를 위해 적극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효과적인 시행을 위해 한미일 공조가 상당히 중요함에도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원칙[25] 을 계승하기보다는, 자국과 동맹을 맺은 국가들 간의 갈등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방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3.2.1.1. 관련 문서[편집]
3.3. 군사 정책: 대규모 군비 증강과 평화헌법 무력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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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강력한 지지 하에서, 전후 일본이 미국에 안보를 전적으로 의지해왔던 노선을 폐기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 등 반 서방 세계 국가들에 대한 억지력과 공격력을 키우는 대규모 군비 증강 정책이 아베 내각 기간 내내 이루어지고 있다. 당연히 동아시아의 과거 일본제국에 의한 전쟁 피해국이었던 한국, 북한, 중국 등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지만, G7을 포함한 서방 국가의 지지를 확보한 일본은 이러한 저항을 가볍게 쌩까고 해군력과 공군력을 급속도로 키우고 있는 중이다.[26]
일본의 국방 예산은 아베의 취임 시기인 2012년 4조 7억 엔에서, 2019년 5조 3천억 엔으로 증가했으며,[27] 2018년엔 다른 국가들의 해병대에 해당되는 수륙기동단을 창설했다.[28] 거기다 사실상의 항공모함에 해당하는 이즈모급 함선을 2척 건조했고 F-35를 100대 이상, 구축함급인 30FFM도 20여 척 이상 추가 주문해놓은 상태다.
또한 평화헌법에서 집단적 자위권 부분을 개정하는데 성공했으며 순수 공격용 무기인 JASSM 및 JSM 공대지 순항미사일 도입에 사실상 지대지 탄도미사일에 해당되는 도서 방위용 고속 활공탄까지 개발하기 시작했다. 미래에는 자체적으로 초음속 대지 순항미사일까지 개발하여 배치할 계획으로 이미 예산 증편을 완료했으니 평화헌법이 사실상 무력화된게 아니냐는 여론이 많다.
3.4. 외국인 노동자 수용 정책[편집]
아베 정권 하에서 일본 내의 외국인 노동자[29] 는 2018년 기준 138만명으로, 그가 집권하기 이전에 비해 2배가 되었다. 2018년 10월, 2025년까지 50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법안을 승인했으며,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2019년 4월부터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이제 일본은 저임금 단순노동직도 5년간 노동자 자격으로 일할 수 있으며, 기술직 노동자의 경우 가족 동반이 가능하고 사실상 무제한으로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데다 영주권도 취득 가능하다. 또한 일본어 능력시험 요건도 대폭 완화한다. 아베는 이것이 '이민정책'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하였으나 동시에 "일본의 문화를 외국인에게 강요할 수 없다.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야한다"고 하며 다문화 이민정책을 추진함을 시인하였다.
물론 자민당 주요 지지층인 보수계에서 격렬한 반대가 터져나오고 있으나 설문조사에 따르면 과반의 일본국민들이 이민개방을 용납한다는 결과가 나오는 등 무난하게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야당중에서도 일본제일당만이 극렬 반대할 뿐, 나머지 일본 유신회 등 우익성향 정당들은 모두 찬성이며, 입헌민주당 등 리버럴 계열 야당은 내국인의 임금감소 등 다소 우려는 있으나, 만약 유럽식 이민제도를 확립하고 외국인에게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환영할 만할 변화라는 입장이다.
이로써 아베는 일본에 첫 대규모 외국인 이민을 결단한 총리가 될 전망이다. 특히 일본 인구의 28%가 노인이고 젊은이들은 힘든 직종은 기피하고 있어 농어촌이나 지방 중소기업들은 이미 일할 사람이 없어 폐업이 잇따르고, 저출산 노령화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이민이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 국내외의 회의론자들은 아베가 한 일은 체류자격을 세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기능실습생이라는 이름 하에 오랫동안 들어온 사실상의 노동자들을 이제서야 노동자라고 인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의 거류외국인 비율도 예전부터 참 말이 많은데, 의도적으로 불법체류자 숫자를 축소해서 발표하고 있다는 소리가 있다.
4. 개인적 면모[편집]
4.1. 다혈질[편집]
일반적으로 일본 총리들은 야당의 공격을 받으면 두리뭉술하게 답변하며, 유도리 있게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결코 방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맞받아치며 대응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굉장히 모욕적인 야유를 하기로 유명하다. 발언하는 야당에게 '에~?'라면서 비웃는 표정으로 비꼬거나영상 입헌민주당 의원에게 "공산당!"하고 소리친다던가, 공문서를 들고 나와 질의하는 의원에게 "니가 만든 것 아니냐"라고 하던가, 쓰지모토 기요미 의원의 질의에 "의미없는 질문이야"영상라고 발언한 것 등이 있다.영상
이러한 괴팍한 성격은 측근인 세코 히로시게가 지적할 정도로 일본 정계에서도 유명한 걸로 보인다. 영상
4.2. 前 지한파[편집]
2006년에 쓴 책을 보면 알듯이 예전에는 정치 성향과 다르게 한일협력을 중시하였다.나라가 다르면 역사나 문화도 다르다. 양국 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서 그것들을 전부 일일이 연관 짓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인가. 서로 다름은 다름으로 해서 존중하는 것도 필요한 것은 아닌가. 일본과 중국은 서로의 문제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수뇌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과도 마찬가지이다.일한 양국은 지금 하루 1만 명 이상이 왕래하는 중요한 관계이다. 일본은 오랜 기간 한국으로부터 문화를 흡수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의미에서 한류 붐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나는 일한 관계에 관해서 낙관적이다. 한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기본적인 인권과 법의 지배라고 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실로 일한관계의 기초가 아닌가. 우리들은 과거에 대해서 겸허하고 예의바르고 미래지향으로 마주보는 한 반드시 양국의 관계는 보다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양국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EPA(경제협력협정)의 체결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4.3. 총리 공관 입주 거부[편집]
일본 총리의 집무실인 일본 총리 관저 옆에는 총리 공관이 있지만[30] , 아베는 시부야에 있는 사택에서 총리 관저로 매일 출퇴근을 했다. 아베 신조가 비교적 젊었던 시절인 제1차 아베 내각 때에는 총리 공관에 입주했었다. 이로 인해 민주당 등 야당에서 "안보 위기 의식이 없다"고 태클을 걸었지만, 아베는 "총리 생활과 사생활을 구분하고 싶다"고 대답했다.[31]
총리 취임 뒤로 총리 공관에 들어가질 않아서 공관 내 귀신 때문에 못 들어가냐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실제로 구 일본 총리 관저에서 1932년 5.15 사건 때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비롯해 여러 명이 피살된 이후로 이곳에서 전직 총리들이 귀신을 봤다는 소문이 있었다고.[32] 일본 국회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자 아베 총리는 "귀신 때문에 관저에 안 들어가는 건 아니지만, 소문은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한편으로 6월 1일 요미우리 테레비 방송에서는 모리 요시로 전 총리가 "관저에서 귀신의 다리를 봤다"는 이야기를 해서 "귀신 때문에 못 들어가냐"는 소문은 식을 기미가 없다. 아베 신조 1기 내각 때 총리 공관에 입주했다가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참패하고 불명예 퇴진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2기 이후로 아베가 공관 대신 사택에서 출퇴근한다는 설이 있다.[33]
4.4. 영어 실력[편집]
“Let me assure you the situation is under control.”
영어를 잘한다. 물론 일본식 억양, 발음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영어 구사력이 좋은 편. 사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공부한 적이 있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첫번째 총리 역임 당시에는 외국 관광객에게 환영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당시 일본 관광청의 "요코소 재팬(Yokoso Japan)"의 일환이다. 요코소 재팬, 2014년 다보스 연설
4.5. 활발한 SNS 활용[편집]
페이스북을 비롯해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인으로 하루 평균 1.8개의 페북 소식을 올린다고. '인터넷 재상'이라고 불릴 만큼 독보적 인기를 누리는데 늘 휴대하는 태블릿 PC로 전직 관료, 현직 야당 의원, 한국 그 자체 등을 심하게 까내리면서 호평과 혹평을 함께 받는다. # 참 문제 많은 행태지만 일본의 보수와 젊은 세대들은 열광한다고. 특히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아베는 "폭거다. 점령하는 쪽이 도발적 행동을 하면 몰상식하다"는 글을 올렸고 반나절 만에 2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좋아요"를 연발했다. 일본에선 대단히 보기 드문 유형인 인터넷 활동이라서 분명 대중적 인기를 끈 총리다.
2010년대 후반엔 페이스북보다는 주로 트위터를 통해 외교 정상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영상, 정책 홍보 글을 올렸다. 2019년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스마트폰을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한편, 2021년 10월에는 49회 중원선을 앞두고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였다. 자신의 세이와 연구회 정책 공약이나, 지역구인 야마구치 4구의 선거홍보영상, 지지유세 등을 업로드 했다.
그의 암살범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준 것도 결국 SNS였다. 암살범은 암살 전날 저녁 발표된 그의 나라시 유세 정보를 전일 트위터를 통해 확인했고, 해당 지역 자민당 캠프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의 업로드는 다소 시간차가 있어, 일본 네티즌들의 추모 댓글은 주로 마지막 게시물에서 이루어졌다.
4.6. 영화광[편집]
소문난 영화광으로 알려져있다. 연평균 50회 이상 영화관에 방문하여 영화를 본다. 거의 1주일에 최소 한 번은 영화를 보는데, 공휴일을 이용하거나 공휴일이 없으면 수요일 저녁에 영화를 본다. 일본인들은 영화관에 잘 방문하지 않아 1인당 평균 영화 관람 횟수가 1회를 간신히 넘어 1.5회 정도 된다. 한국은 같은 지표에서 4.1회. 아베 신조는 전 세계 국가원수급 정치인 레벨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를 많이 본다. 실제로 일반인 수준에서도 연평균 영화관 관람 50회면 이미 영화 관람 상위 0.1% 안에 들어가는 중증 영화광이다. 1년이 약 52주니까 거의 매주 한 편씩 영화를 꾸준히 챙겨보는 셈이다.
2018년 12월 31일은 부인과 이런 야심한 밤에 바나나라니 사랑스러운 실화(こんな夜更けにバナナかよ 愛しき実話)라는 영화를 보고, 2019년 1월 1일 새해 시작을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한 것도 아베의 영화광적인 성격이 드러난 면모이다. 일본의 영화관 표값이 2D 일반 영화도 1,800엔에서 2,000엔 정도 하는 것을 보면 영화에 대한 지출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TOHO 시네마즈와 이온시네마 두 군데를 이용 중이며, 둘 다 VIP 등급이 있는 것으로(정확한 등급은 불명) 알려져 있다.
아베의 영화 성향은 저예산 독립영화부터 외국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 애니메이션 영화까지 다양한 편이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잘 안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베 신조와 사이가 안 좋은 소노 시온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작품도 아베 신조가 보고 나서 가끔 트위터를 통해 의견을 올리는 경우도 있다.
아베의 영화광적 면모 때문에 일본 영화계에 대한 여러 지원책을 내놨고, 그 중 하나가 쿨 재팬 사업이었다. 그러나 일본 영화 시장 규모가 20억 달러 선에서 정체되는 등 커지질 못하니[34] 아베 신조 본인도 안타깝다고 2018년 10월 국회 질의에 답변한 바 있다. 이때 아베는 "일본인들이 영화를 더 사랑해주었으면 좋겠다. 일본 영화든 외국 영화든 여러 국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일본 영화 어느 가족에 대해선 입다물고 외면하고 있다. 일본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다루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논란이 되자 아베 신조 총리가 뒤늦게 축전을 보냈으나, 이를 모를 리 없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총리의 축전을 공개적으로 거절했다.
4.7. 피아노 실력[편집]
유튜브에 본인이 피아노를 치는 연주를 올려 화제가 되었다. 조회수는 700만회를 돌파했다.
5.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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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비판과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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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치적 성향[편집]
8. 소속 정당[편집]
9. 선거 이력[편집]
10. 저서[편집]
- 아베 신조 대론집: 일본을 이야기한다(安倍晋三対論集 日本を語る) (2006년 4월 출간.)
- 새로운 나라로 아름다운 나라로 완전판(新しい国へ 美しい国へ 完全版) (2013년 1월 출간.)
- 일본의 결의(日本の決意) (2014년 4월 출간.)
3권 모두 2016년 기준 국내에는 번역 출간되지 않은 상태이다. 다만, 한국에도 아베 신조에 대한 내용을 담은 최신 도서는 많다. 예를 들면 한동안 꽤 화제가 되기도 했던 아베 , 침묵의 가면이란 책이라든가, 참고로 이 책은 아베 신조의 출생부터 지금 일본 정치의 최정점인 총리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인생을 서술한 책이다. 아베 신조라는 인물에 대해 보다 면밀히 알 수 있는 책이지만 작가의 성향이나 시각이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 상당 부분 비판적으로 편향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 또한 책이 완성된 시기에서 보여지는 아베 신조의 행적과 현재의 행적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의 반영이 누락된 부분은 감안하여야 한다.
- 아베 신조 회고록(安倍晋三 回顧録) (2023년 2월 출간.)
아베 총리의 생전 인터뷰를 서적화한 것으로, 총리직을 퇴임한 2020년 10월부터 모두 18차례 36시간 동안 응한 인터뷰 내용이 실렸다. 재임 당시 외국 정상들과의 여러 비화들이나, 코로나-19 사태 발생 이후의 정부 대응 프로세스까지 흥미로운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1. 가족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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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담[편집]
- 그의 이름 신조(晋三)라는 이름은 에도 시대 조슈 번(現 야마구치현) 출신 사상가 요시다 쇼인이 운영한 학당인 쇼카손주쿠의 문하생이었던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신(晋, しん)"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 또한 마찬가지이다.
- か행(카키쿠케코) 발음이 좋지 않은 편이다. 2012년 자민당 광고 사실 아베의 발음은 전체적으로 부정확하고 새는 경향이 강해서 알아먹기 힘든 편. 대학 일본어 수업에서 아베의 스피칭은 최고의 난적으로 꼽힌다.
- 친일 성향 언론인인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과 친분이 깊다. 이미 오래 전(2005년 간사장 시절)부터 서로 면식과 인터뷰를 한 경험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2013년 집무실에서 인터뷰(녹음)도 했다. 조갑제 닷컴의 기사. 여하간 양국 관계가 나쁜 상황에서 한 아베 재취임 이래 한국언론 최초의 인터뷰다.
- 그의 행보 때문인지 히틀러 분장을 당해 까이기도 했다.
-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영국 태생의 코미디언 존 올리버에게 까인 적이 있다.
- 2015년에 정치자금 모금액 상위 20명 가운데 17명이 자민당 의원이며, 전체 6위를 차지했다.#
- 2017년 2월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악수할 때 트럼프가 손을 세게 잡고 악수를 했는데 악수가 끝난 후 아베의 표정이 뭔가 웃겨서 짤방으로 쓰이고 있다.문제의 악수
- 중요한 선거 전날 모든 유세를 마치고 한국 식당에 가서 불고기를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단골 식당인 가레아(可禮亜)는 코리아를 발음대로 한자로 적은 것이며, 딱히 비싼 식당도 아닌 저렴한 불고기 전문점이다. 내부는 한국식 병풍과 하회탈, 조선 백자, 궤짝 등으로 꾸며 놓아 누가 봐도 한국식당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일부 극우 인사들로부터 종종 비난을 받기도 했다.#
- 2017년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려있을 무렵, 아베는 총리 관저에 자주 머물렀는데 MBC에서 제작한 드라마 제5공화국을 시청하였다.
- 역대 최장 수준의 재임 기간을 보내고 있었던 탓에, 아베 내각의 주요 각료들도, 역대 최장기 재임 기록들을 함께 경신했다. 정부 대변인 격인 관방장관을 맡고 있던 스가 요시히데, 재무대신과 부총리를 맡고 있던 아소 다로 전 총리는 각각 역대 최장기 재임 관방장관과 최장기 재임 부총리 겸 재무대신이다. 보스이자 총리인 아베가 최장기 집권하였으니 어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물론 나머지 각료들은 내각 개조 혹은, 중의원 해산을 통한 차기 내각 성립 때 물갈이 되었다.
- 그가 총리로 재임하던 시기에 대한민국에선 노무현, 이명박[43] ,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이 차례로 집권했고, 미국에선 조지 W. 부시, 버락 후세인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차례로 집권했다. 워낙 오랜 기간 총리로 집권했기 때문.
- 2차 이후의 아베 내각은 극단적인 남고여저의 지지율 양상을 보인다.(10% 이상) 관련 기사 재미있는 부분은, 처음 집권했던 2006년, 2007년의 1차 내각 시절엔 패턴이 정반대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아베는 전후 출신의 첫 수상이자 전후 최연소에,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난 귀공자 타입의 이미지가 강해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더 높았다고 한다.(10% 이상) 그러나 2012년 재집권한 2차 내각 이후에는 1차 내각 시절의 신선미가 사라지고 노회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생긴 데다 정치 성향마저 극우화 되면서, 혹시라도 아베가 밀어붙이는 개헌이 실현되면 자신들의 자녀 세대가 조상들처럼 전쟁의 참상 속에서 희생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자식을 키우고 있는 어머니 세대 즉, 30-50대 여성의 계층에서 지지율이 현저하게 낮은 것으로 조사된다.
- 또한 2012년 이후의 2차 내각은 10대부터 30대까지의 젊은층에서 지지율이 두드러지게 높다. 관련 기사 이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우선 양적완화를 기반으로 하는 아베노믹스의 영향으로 2030 세대의 경제 상황이 상당히 좋아졌고, 2011년 중국에게 GDP를 추월당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 타이틀을 빼앗긴 이후 자신감을 잃었던 일본에게 ‘강한 일본’을 슬로건으로 외치며 군비를 강화하고 세계적인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 아베 내각과 자민당의 노선에 대해 젊은 세대가 열광하고 있는 부분이 크다.
- 제87-8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고이즈미 준이치로와는 정치적 사제 관계이다. 아베 신조가 제90대 내각총리대신(제1차 아베 내각)으로 처음 취임했던 2006년에 직전 내각이었던 고이즈미 정권에서 관방장관을 맡았으며, 그 당시의 총리 지명 역시 현직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원자력을 중요시하는 아베 신조와 탈원전을 주장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관계는 현재 그닥 좋지 않다. 고이즈미의 임기가 시작된 2001년부터 2019년 현재까지 약 20여 년의 기간 중, 이 정치적 사제 관계인 두 사람의 임기는 거의 2/3[44] 에 육박한다. 즉 21세기의 일본은 고이즈미와 아베가 이끌어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 2006년 연말에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기자: 총리한테 '올해의 한 글자'라고 하면 어떤 게 떠오르나요?
아베: 올해는 제게...'변화'(変化)의 한 해였을까요.
기자: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아베: 그건...'책임'(責任)이겠죠.
- 한 일본의 역사 학자는 2기 아베 정권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이라고 비유한 적 있다.#
- 놀랍게도 야쿠르트 스왈로즈 팬이다. 자기 저서에서 전신인 산케이 스왈로즈 시절부터 응원했다고 써놨고 방송에서도 여러차례 야쿠르트 빠심을 드러낸다. 또한 스왈로즈 빠라면 당연하게도 골수 안티 교진이다. 나가시마 시게오, 마쓰이 히데키의 국민영예상 시상식에서도 이 둘에게 "난 안티 교진이라서 이들에게 주는 게 못마땅하네"라고 할 정도.[45]
- 한국의 정치계 인사를 만날 때마다 아베 자신은 화려한 상석에, 상대는 민무늬 하석에 앉히며[46] 한국에 대한 의전 차별을 언론에 보이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문재인 정부 수립 시기에 일본에 보낸 특사 회담 사진을 두고 한국 인터넷에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는데 2018년 3월 13일 서훈 국정원장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는 아베와 서훈 국정원장 둘 다 동일한 의자에 앉았었고#[47] SBS가 아베 접견을 전수조사한 결과 어느 정도 패턴은 있지만 그건 다른 나라를 대상으로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그걸로 의전 차별이란 건 한국 언론의 호들갑이란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 로드리고 두테르테, 블라디미르 푸틴 등과 함께 서양의 대안 우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 중 하나이다.
- 박정희와 비슷한 점이 몇가지 되는데, 둘다 대외적으로는 강경파, 우파지만, 대내적인 경제 정책이나 복지 정책에서는 상당히 좌파적인 색채가 강하다. 박정희를 예를 들자면 정부주도의 경제 산업정책과 의료보험을 들수 있으며, 아베의 경우에는 소득주도성장,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소득분배 정책을 들 수 있다. 또한 각 나라의 정부수반들중 가장 최장 기간동안 재임했으며, 둘다 암살로 갔다는게 공통점이다.[48]
- 아베 신조 피살 사건으로 사망하면서 전후 처음으로 암살당한 총리가 되었다. 전전(戦前)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누카이 쓰요시, 2.26 사건 당시 암살당한 사이토 마코토,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 총리 여럿이 군부에 의해 암살당했지만, 아베의 암살은 거의 90년 만에 벌어진 총리 암살이라 충격이 크다.
- 같은 날에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 산투스랑 루이스 에체베리아랑 같이 사망했다. 참고로 저 날은 김일성과 기일이 같다.
- 아베가 착용하기 시작하여 일본 내 인지도가 크게 오른 시계 브랜드로는 Minase가 있다. 피격 당시 착용하고 있던 시계는 미나세 브랜드의 2019년 모델 VM04-R01SD[49] 이다.
-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말미에서 주인공 나옥분(위안부 피해자라는 설정)의 입으로 "아베 그거 또 헛소리 하더라"라고 언급된다. 여기서 말하는 헛소리란 당연하게도 위안부 강제동원 인정을 거부하는 당시 일본 내각의 입장이다.
12.1. 한국계 도래인 후손설[편집]
- 보수 성향 정치인임에도 뜻 밖에 한국계라는 떡밥이 있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보통 넷 우익들의 한국계 드립은 하토야마 유키오나 간 나오토같이 진보 성향의 정치인에 치는 경우가 많지만, 아베 신조는 우파 성향임에도 한국계설이 나돈다. 대표적으로 참의원 선거 때 파칭코 업계[50] 에게 5천만 엔의 정치 자금을 받았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파칭코나 야쿠자 정치 자금설은 어느 정치인에게나 흔하니 비방성 루머로만 그쳤지만 한국계 떡밥을 결정적으로 불지핀 것은 아베 신조 1차 내각이 나온 2006년 9월 주간 아사히가 아베가에서 40년간 가정부로 일해온 구보 우메와의 인터뷰에서였다.
- 2006년 주간 아사히는 10월6일자 커버스토리에서 '아베 신조 연구-가정부가 본 아베.기시3대'라는 제목으로 아베 총리 가문의 내력을 특집 보도하였고 한국 언론에서도 이를 인용해 보도하였다.
기시와 아베 가문에서 가정부로 40여년을 지냈던 구보 우메(80)는 슈칸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아베 총리의 부친 아베 전 외상이 고백한 집안 내력을 비교적 상세히 전했다. 구보는 "파파(아베 전 외상)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내게는 말해줬다"면서 "(아베 전 외상 사망 직후) 입관될 때 이 사람의 골격을 보면서 정말 일본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로 잰 듯이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완전히 한국(인)의 체형이다. (아베 전 외상) 스스로도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사람은 조선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정치인으로서 주변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따라서 좀더 건강하게 활동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북한 문제도 해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베 전 외상의 죽음은 나라의 손해였다"면서 애석해했다.
이 잡지는 아베 전 외상은 생전에 아베가(家)의 기원은 10세기쯤까지 한반도 북쪽에서 중국 대륙에 걸쳐 존재했던 발해국에서 시작됐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일본에서의 아베가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고 보도했다.
아베가의 기원에 대해 구보는 "아베가의 본류는 아오모리현이다. 아베 전 외상이 조선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이는 지금의 북한이 아니라 그 북쪽과 길림성 아래쪽에 있었던 발해"라면서 "11세기 헤이안(平安) 시대의 무장이었던 아베가 지금 아베가의 선조와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도 아베 총리를 끔찍히 아꼈다고 그는 덧붙였다. 구보는 아베 총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도쿄의 기시 전 총리의 자택에서 가정부로 지냈으며, 지금은 따로 나와 도쿄에서 살고 있다.아베 일본 총리 부친, "나는 조선인이다''
- 아베 신조의 한국계 집안 설은 외가 쪽에서도 나왔다.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총리[51] 의 동생인 외종조부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52] 심수관 14대의[53] 대화에서다.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2006년에 발간한 책 <슬픈 열도-영원한 이방인 사백년의 기록>의 내용에서, 임진왜란 직후인 1598년 일본에 끌려간 도공으로 일본의 도자기 종가를 이루게 된 심수관(沈壽官) 가문의 14대 후손을 인터뷰하는 과정 중 1964년부터 72년까지 일본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1901~75)가 죽기 1년 전인 1974년 자신을 찾아와 사토 집안도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계임을 직접 고백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14대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가문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임을 추정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1964~1972년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에게서다. 지금도 그의 거실에는 사토 전 총리가 써준 휘호가 걸려 있다. ‘묵이식지(默而識之)’라는 글씨 곁에 ‘심수관 선생에게, 갑인년 봄 에이사쿠’라는 서명이 적혀 있다. 갑인년은 1974년을 뜻한다. #
- 2016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심수관 14대는 같은 얘기를 한다.
14대는 사토 전 총리가 이 휘호를 써준 날을 어제처럼 기억한다. 사토 전 총리는 차를 대접받은 뒤 “좋은 차였습니다”고 인사하고는 “수관 씨, 몇 대째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14대입니다”라고 하니 “저는 좀 더 짧을 겁니다. 당신네는 게이초(慶長·1596~1615년) 때 왔는데 우리 선조는 그 뒤에 온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붓과 벼루를 청해 글씨를 써줬다는 것이다. 묵이식지는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줄 것은 다 알아주고 통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14대는 “그 말의 진위를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사토 총리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는 예로부터 조선반도와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라 가능한 얘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토 에이사쿠는 아베 현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친동생이다. 1975년 세상을 떴다.#
- 이와 관련해 사토 에이사쿠와 아베 신타로, 아베 신조는 생전에 공개 석상에서 자신의 집안이 한국계 도래인 후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직접 발언한 적은 없다.
- 2006년 주간 아사히가 구보 우메의 증언에 대해서 보도한 이후 아베 신조가 공식 기자회견 등 공개 석상에서 주간 아사히의 보도 내용에 대해서 긍정을 하거나 부정을 한 적은 없다. 다만 아베 신조가 주간 아사히의 보도 내용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 현존하는 일본 내 사료(史料) 중에서 사토와 아베 가문의 시조가 도래인이라고 기록된 사료가 발견된 적은 없다.
12.2. 역대 최장기 집권과 6연속 선거 압승[편집]
2019년 11월 20일을 기준으로 가쓰라 다로의 2,886일 기록을 경신하며 총리 직책이 창설된 메이지 유신 이래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한 총리가 됐다. 아베의 외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가 갖고 있었던 연속 재임일 수 기록도 2020년 8월 24일을 기준으로 넘어섰다.
2차 내각이 성립된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시작으로,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내리 압승하였다. 이는 일본 내각 130년 역사 이래 유례가 없는 놀라운 연승 기록이다. 이는 아베 내각의 경제적 성과와 더불어 정치적(개헌 추진과 군비 증강 정책), 외교적(강력한 친미, 친서방 정책) 스탠스를 국민들이 크게 지지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를 단순히 자민당 장기집권의 연장선 덕분이다 라고 치부하기엔 꽤나 어마어마한 결과이다. 당장 아베의 1차 내각 이후 2009년에 압도적인 민주당 정권 교체가 있었고, 그 이전의 자민당 독주 시대에도, 단일 내각이 선거에서 연거푸 승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어떤 내각이 장기간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정치를 지속하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그렇게 성공적인 정책을 펼쳤다 하더라도, 오랜 기간 독주하는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견제 심리로 인해 선거에서 연승을 거두는 것은 상당히 힘들기 때문. 물론 2차 아베 내각 이후의 연승은 민주당 정권 시절의 심각했던 실정을 다시는 보고싶지 않은 일본 국민들의 심리에 의한 반대 급부 성격이 짙은 것도 부인하긴 힘들지만.
1차 아베 내각의 직전 내각총리대신이자 아베 신조의 정치적 스승이기도 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역시 선거의 제왕 소리를 들을 정도의 높은 인기를 누렸던 수상이지만, 2018년을 지나는 현 시점에서는 이미 그 수준을 능가했다고 볼 수 있을만큼 많은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고이즈미는 2004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참패(49석/121석)했다. 아베도 2007년 참의원 선거 참패(37석/121석)해서 가려졌지 고이즈미도 2004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하는 바람에 수상직에서 짤릴뻔했다. 2005년 우정 해산(중의원)이라는 도박이 대박이 터졌기에(중의원 2/3 장악) 2004년 참의원 선거 참패를 덮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베가 2차 내각 들어서는 참의원 선거도 싹쓸이 중이라 더 무서운 것. 그야말로 청출어람이다.
아사히 TV에서 발표한 2017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비례대표 연령별 투표 성향. 당 이름은 왼쪽부터 자민당, 공명당, 희망의 당, 일본 유신회, 입헌민주당, 일본 공산당이다.
일본에서 아베 수상의 장기집권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계층은 바로 30대 이하의 젊은 층이다. 그 이유는 아베노믹스와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위시한 여러 중산층 위주의 경제정책이 크게 성공했고, 이에 대한 최대 수혜자가 10~20대 계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연 150만 명씩 은퇴하는 데 반해 신규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층은 70만 명 수준인 상황이라 일자리가 넘쳐나 아베의 장기집권에 득이 되는 상황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베 정권은 연금 수령 연령을 상향하고 노인 복지 규모를 축소하는 등 비록 증세에는 적극적이나 노인층 부양으로 인한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적극적이고, 당연히 젊은 계층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55]
일본 야당의 상황도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 야당들은 현실 정치와 경제 상황과 괴리되어 '반대를 위한 반대' 또는 이상적인 정치 이념을 주장하는 등, 집권당인 자민당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 일본의 국제적 위상 회복, 불황 탈출 등 현실적인 정책을 제시하고 점진적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자민당과 아베 총리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아베 총리는 방송 출연, SNS 이용 등을 통해 젊은 층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이런 것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은 당 안팍의 정치적 경쟁자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된다. 즉, 문제가 많긴 하지만, 능력은 좋다는 게 대략적인 평.[56]
2018년 8월 10일 교도통신의 여론조사가 나왔는데, 아베 신조를 적극 지지하는 연령대가 20대, 반대하는 연령대는 60대 이상인 것으로 나왔다. 아베 신조의 경제 정책 자체가 일본의 20대를 타겟으로 하였고 저출산 고령화때문에 20대 일자리가 넘쳐나는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아베는 아소 다로가 2017년에 고령층을 상대로 한 언제까지 살아있을 셈이냐는 말까지 할 정도로 노인층들한테는 각종 사회보장 혜택을 대거 축소하고 있다. 노인층한테 돌아갈 세금을 20대한테 쏟아붓는 것이 아베 정부의 아베노믹스 재정정책이다.[57] 노인 복지를 늘리고 노인의 단기 일자리에 상당한 일자리 재정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기존 사회의 통념과는 정 반대의 노선인 셈이다.
2018년 12월 10일 일본 NHK에서 발표한 여론조사. 여기서도 20대의 아베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20대 남성의 아베 지지율은 무려 73%이었고 여성들도 과반인 52%였다.
다만 주의해야 할 사실은, 이 70%는 투표 의사가 있는 유권자만을 상대로 집계한 것으로, 일본인의 50~60%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무당층인 만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수많은 일본 20대의 여론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본 국민은 투표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저연령대로 가면 갈수록 더 투표율이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 젊은 세대의 압도적 지지에도 막상 선거에서 득표수가 그만큼 나오지는 않는 것이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