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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시 단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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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제55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역대 세번째로 임기가 짧고, 자유민주당 출신 총리들 중에서 가장 임기가 짧은 총리이다.
2. 생애[편집]
아버지가 일본의 불교 종파인 일련종 승려라는 특이 경력이 있다. 와세다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여 동양경제신보사 주필, 사장으로 일하였다.[2] 이시바시는 주필일 당시 다이쇼 데모크라시, 조선의 3.1운동에 자극받아 일본제국이 아닌 가공무역 국가로서의 소일본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 만주, 조선, 대만의 독립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런 경위로 전후에는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이 제창했던 이른바 민주전선운동에 참여하는 등 좌파와 함께 자주 활동하였고, 또 혁신정당에 참여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으나, 총선이 다가오자 자민당의 전신인 자유당에 입당하여 입후보하면서 보수진영에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총선 이후 조각된 요시다 시게루 내각에서 전격적으로 대장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요구하던 전시보상 지불정지와 재벌해체를 마지막까지 반대했으며, 당시 불어닥친 전후 인플레이션 대책으로 공업 생산을 촉진한다는 명분 하에 적자 예산을 편성하여 적극 재정을 밀어붙였다.
이는 일본을 농업 국가로 만들려던 맥아더의 시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 생산에 동원된 군수 기업과 재벌을 해체코자 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 내 좌파 세력의 분노를 샀으며, 또한 인플레이션을 해소하는데 완전히 실패하면서 사면초가에 놓였다. 진작부터 이시바시를 손봐주겠다고 벼르고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 내 좌파 세력은 일본국 헌법이 반포된 직후인 1947년 5월 이시바시에 대해 "전전부터 일관적으로 일본의 침략을 지지한 전범"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공직추방을 시키고 정계에서 내쫓기에 이르른다.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일관되게 반대한 지식인으로 전전과 전후를 막론하고 존경받았던 그이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에게 말대꾸죄로 일약 전쟁범죄자로 낙인찍힌 이시바시는 이 사건 이후 죽을 때까지 반미주의론과 독립외교론을 견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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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취임 후
1954년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는 통상산업대신을 역임하였으며, 중국(중일 국교수립 이전)과의 무역개시를 지휘하였다. 1956년 12월 보수합동 이후 자민당 전당대회에서 승리하여 55대 수상이 되었으나 취임 2개월여 만에 지병이었던 뇌병색으로 인해 사퇴하고 기시 노부스케 당시 외무대신을 자민당의 새 총재로 지명하였다.
지병으로 갑자기 사임한 것이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본의 내각제 사상 세 번째로 짧은 재임기간(65일)을 기록하였다. 하타 쓰토무가 64일로 간발의 차로 최단 2위,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54일로 가장 짧았다.
퇴임 이후에는 중국통으로 1959년과 1963년 중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하는 등 중일 국교정상화에 기여하였다.
1973년 뇌경색으로 사망하였다.
3. 선거 이력[편집]
[1] 1957년 1월 31일부터 퇴임일까지는 기시 노부스케 당시 외무대신이 총리 임시 대리를 했다. 총리의 제반 권한까지 승계하는 권한대행과 달리 임시 대리는 현임 총리가 자리를 지키는 상태에서 현상 유지만 하는 직책이다. 고로 연혁에도 반영되지 않는다.[2] 동양경제신보는 당시 일본에서도 흔치 않은 강경한 자유주의 신문이었는데,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일본의 내로라하는 언론들이 주전 논리를 펴고 있을 때에 유일하게 참전반대론을 외친 곳이 바로 여기였다. 2차대전 이후 '주간 동양경제'란 이름의 잡지로 바뀌었다.(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