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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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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의 현재 이름인 고려대학교에 대한 내용은 고려대학교 문서
1. 개요[편집]
2. 역사[편집]
2.1. 초기 시절[편집]
1905년(광무 9년) 대한제국 탁지부대신,[4] 군부대신이었던 이용익에 의해 설립되었다.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은 고종이 직접 하사한 것이며 '널리 사람다움(인간성, 人間性)을 열어 이루게 한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5] 보성전문학교의 초기 모표와 교기가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한 이화장(李花章)을 사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며,[6] 직원 봉급도 흡사 황립학교처럼 황실 내탕금에서 지급하였다.[7]
처음에는 당시 정부조직인 외부, 법부, 농상공부 등을 반영하여 법률학, 이재학,[8] 농학, 상학, 공학의 5개 학과 및 외국어학 1개 특설과로 구성된 전문학교를 기획하였으나, 신교육에 대한 일반의 이해 부족과 기타 이유로 농학, 상학, 공학 등은 지원자가 거의 없어 법률학전문과와 이재학전문과의 2개 학과로 개교한다.
이용익이 보성전문학교를 세우면서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이 학원에서 배움을 받는 준재 여러분은 나라와 겨레를 이끌 독립과 자주를 이룩하기 바란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그저 외국어의 습득에만 급급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신문화의 창조를 위해 모든 분야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며 이에 법률경제 등의 새 학문을 닦아야 한다.
보성전문학교의 초대 교장은 신해영(1865~1909)이었는데, 고종시대에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기주쿠대학에서 경제학 학사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1906년 6월에 펴낸 4권 2책의 '윤리학 교과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윤리학 교과서임에도 불구하고 용감함에 대한 강조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위기의 시대 상황에서 진취적인 인재상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책은 당시 대표적인 국민윤리교본으로, 1909년 일제 통감부로부터 국권회복을 선동하는 불온한 교과서라 하여 발매금지처분이 내려진다.진정으로 받들어 높여야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지적인 용감이니, 의무를 완전히 하고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여서 어떠한 곤란을 만난다 할지라도 굽히고 꺾이지 아니하고, 마침내 처음의 뜻을 이룸은 과연 참으로 받들어 높여야 하는 진정한 용감의 기운이니, 사회의 행복과 진보는 이런 부류의 용감한 사람이 져야 할 바가 많은 것이다.
교사(敎舍)는 처음에 서울 박동(현재의 수송동)에 위치한 관립 한성 아어(러시아어)학교의 건물을 빌려 사용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다가 1906년 아어학교에 이웃한 김교헌(金敎獻: 조선시대 문신,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대종교 제2대 교주)의 기와집 200여간을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현재 조계사 터이기도 하다.
2.2. 일제강점기[편집]
이용익은 항일운동을 하다 1907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피살되고, 그의 손자 이종호(독립운동가)가 2대 교주(校主)를 맡아 독립운동과 함께 경영을 계속하였다.
당시 일제의 한국통감부[9] 는 학부를 통하여 보성전문학교를 일제 산하로 관립화 또는 예속화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통감부는 학교 경비의 부족액을 기부하겠다는 회유책을 폈었다. 이종호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뒤로도 통감부의 지속적인 권유와 위협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종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통감부는 안중근사건연루혐의라는 죄목으로 이종호를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붙잡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국권이 상실된 후 보성중학 교장 노백린과 한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없었던 이종호가 해외 망명길에 오르면서 보성전문은 졸지에 공중분해될 위기에 처하고 만다. 특히 일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전문학교 규칙을 공포 및 시행하였고, 당시 전문학교의 명칭을 써왔던 보성전문학교는 구제전문학교로서 인가 요건에 부합되지 않아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되었다.
위기에 빠진 보성전문을 인수한 이는 천도교의 손병희였다. 당시 천도교회는 민권운동의 가장 강력한 보루였으며, 이미 10여 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천도교 총부는 1911년 들어 보성전문의 경영을 맡으면서 학감이던 윤익선을 교장에 임명하였고, 천도교 총부측의 최린은 중학교 교장대리로 임명하였다.
이후 보성전문은 동학을 계승한 민족종교인 천도교 계통의 학교로 새롭게 자리매김하였다.[10] 그러나 천도교는 보성전문을 종교계 학교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부 미션스쿨처럼 교학의 목적을 자기 교파의 교리에 얽매려 하지 않았다.
천도교의 금전적 지원이 가능해지자, 여태 사용하던 기와집을 허물고 신식 교사를 새로 지었다. 1918년에는 수송동에서 낙원동 교사로 이전하였고, 여기서 손병희와 보전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3.1 운동이 일어났다.[11]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교육 정책에 있어 보다 유화적인 정책을 실시할 필요를 절감했고 이에 '(사립)전문학교규칙'을 폐지하고 이를 완화한 '부령 제21호 공립사립전문학교규정'으로 통합하여 1922년 4월부터 시행했다. 이에 따라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되었던 보전은 1921년 11월 28일 서둘러 전문학교 재단법인 설립허가신청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했고 총독부의 심사를 받아 그해 12월 28일 현대 대한민국/일본의 대학교/단과대학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인 구제전문학교로서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1922년에는 송현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3.1 운동의 여파로 손병희가 사망하고, 천도교 조직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데 따른 여파가 미치면서 보성전문학교도 재정적 위기에 처하였다. 1919년초까지만 해도 보성전문에서 총 26명의 학생이 졸업하였으나, 3.1 운동 당시 워낙 많은 보전 학생들이 구속되고 퇴학 당하다보니 1920년에는 졸업생 숫자가 11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1920년 교장에 취임한 고원훈은 김기태(金琪邰)에게서 거액의 기부금을 유치하는 등 보전의 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학교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물러났다. 그 후 보전 졸업생이며 유명 변호사였던 허헌이 잠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가 1924년에 물러났고, 그 뒤로도 보성전문의 재정은 계속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1929년 세계 경제공황이 몰아닥치자, 보성전문은 재정난에 더욱 심하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2년에 인촌 김성수가 보성전문 이사 김병로와 교섭하여 재단을 인수하면서 보전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이미 중앙학원을 경영하던 김성수가 추곡 5천 5백석의 토지 기부 대가로 보성전문학교까지 넘겨받게된 것이다. 이 때 천도교는 기존 이사진 전원을 사직시키는 등 김성수의 학교 경영에 부담이 될 요소를 원천 제거하였으며, 김성수에게 오직 "보성"이라는 교명을 지켜줄 것만을 요구했다.[12][13]
그리고 송현동 교사 6백여 평에 자리잡고 있던 보성전문은 현재의 고려대학교 자리인 안암동으로 1934년에 이전하였다. 1932년 6월 보성전문 제10대 교장에 취임한 김성수가 보전 창립 30주년인 1933년 중앙학원을 통해 안암동 일대 부지 6만 2천여 평을 매수하고, 신 교사를 신축한 것.
당시 조선인 가운데 뛰어난 학자들은 일본의 대학에 교수로 임용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보성전문 교사진으로는 아주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예를 들어 안호상, 장덕수, 유진오, 최태영, 김광진, 진승록, 오천석, 손진태, 최용달 등이 그들이었다. 이러한 인재들에게 보성전문은 교사 1인당 1 연구실을 제공하여 일부 일본의 대학보다 더 좋은 연구환경을 제공하였다.
그러다가 1944년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접어들던 일본이 총동원 체제에 들어가면서, 보성전문학교는 강제로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개명되는 굴욕을 겪게 된다.
2.3. 고려대학교로의 전환[편집]
1932년 3월 김성수에 인수된 후 보성전문학교는 막대한 투자에 힘입어 조선 제일의 사립 전문학교를 넘어서, 일본 내지의 사립 구제대학 못지 않은 교수진과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14] 이에 그치지 않고 김성수는 1940년 법과과장 유진오, 상과과장 이상훈과 함께 법과를 법학부로, 상과를 상학부로 승격시키고 추가로 농학부를 설치해 3개 학부로 구성된 구제대학을 세우겠다는 사립종합대학 설립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일본 내지와 세계 주요 대학들의 학칙과 교과과정을 조사하여 학교 규칙에서부터 수지예산서, 창립부터 완성까지의 연도 계획서 등 수백면에 이르는 구체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19년 대학령 시행 당시 사립대학 설립이 가능해졌음에도, 이미 그전부터 대학을 칭하고 있었던 소케이 등 내지의 구제전문학교들의 경우에도 요건을 갖추기 위해 추가로 몇 년씩 걸렸을 정도로 엄격한 구제대학 승격 조건(재단예치금 최소 3만엔 등)을 만족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였다. 이후 일제가 총력전을 위한 전시체제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면서 보성전문은 구제대학 승격이 아니라 오히려 구제전문학교로서 운영도 어려워졌고, 1944년에는 전시 조치에 따라[15] 그 명칭까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바꾸며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구제대학 설립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광복이 되고 미군정에 의해 기존의 구제 고등교육기관(구제대학, 구제고등학교, 구제전문학교)을 미국식 4년제 대학으로 일원화하는 학제 개혁이 이뤄지면서(참조) 보성전문은 1946년부터 신학제에 따른 신제대학(新制大學)으로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보성전문학교는 고려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때 대학 명칭이 결정되는 과정을 보면 김성수는 오래전부터 '고려'라는 교명을 사용하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군정에서 각 전문학교에 우선권을 주어 대학설립원을 받는다고 하자, 김성수는 직원들을 시켜 서류 접수일 전날부터 미군정 청사에 대기하게 했다. 그 이유가 다른 학교가 '고려/Korea'라는 명칭을 먼저 사용할까봐여서 였다. 아마 구제대학 승격이 이뤄졌다면 그 경우에도 교명은 '고려대학'으로 바뀌었을 수 있을 것이다.
건국동량의 요람, 대학으로 승격되는 24 남자대학(동아일보, 1946.05.20)
우리 육영계의 반가운 소식은 9월 신학기부터 28개 관공 남녀 사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되므로 더 한층 빛을 발하고 있다. 이리하여 문과계통은 4년제 대학으로, 자연과학 계통은 6년제 대학으로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내용 충실을 도모하고 있다. 이리하여 새로 나타나게 되는 대학은 서울대학[경성제대]
을 제외하고 관공립전문학교가 대학으로 된 것이 14교, 민립대학이 9교이고, 여자대학만도 이화대학을 비롯하여 여자사범, 여자의과, 숙명여자대학 등 5교나 된다. 그리고 입학시험은 제1기로 7월 1일부터 4일 간, 제2기로 7월 13일부터 4일 간 각기 모집하는데 금년 은 기왕에 이 학교 저 학교 시험 치던 폐단까지 없이 하고, 다만 두 번만 수험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제정하여 학도의 불타는 연학의 좁은 길을 열어주기로 하였다.이미 결정된 대학 중에 가장 그 이름부터 특이한 학교는 보성전문이 고려대학이라 한 것이고, 그밖에는 대개 전 교명을 단과대학으로만 고쳤다. 연희전문은 종합대학으로, 중앙전문은 중앙여자대학으로 각각 승격준비를 하는 등 각 학교는 아연 활기를 띄우고 있는 터이다.
이제 각 대학의 시험기일 모집인원 등을 조사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기 시험(7월 1일/4일)
경성대학(전 성대) 예과 문과 120명(국사/한문), 이과갑 160명(화학/물리), 이과을12명(화학/생물)
고려대학 예과(전 보전) 법과 경제과 문과 각 100명, 문과 2년 보결 약 60명
경성의과대학(전 경성의전) 동 예과 100명(물리화학), 전문부 100명(동일)
승격준비중인 학교
대구농업대학(전 대구농전)
광주의과대학(전 광주의전)
경성광산대학(경성광전)
대구사범대학(대구사범)
경성법과대학(법전)
숙명여자대학(숙전)
경성약학대학(약전)
제2기시험(7월7일/13일)
세브란스의과대학(전 세의전) 대학예과 100명(물리/화학/생물), 전문부 80명(동일)
연희종합대학 문과예과, 정치과예과, 경제과예과, 외교과예과, 수리과예과
경성사범대학(전 경사) 동예과 문과 150명, 이과 150명, 동학부 교육과, 국문과, 사학과, 영문과, 체육과(이상 각 40명)
경성여자사범대학(전 여사) 국문과예과, 영문과예과, 역사과예과, 교육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신설준비) 이상 각과 50명
경성경제대학(전 고상) 예과 100명, 전문부 200명, 동 각학년 보결생 약간
경성치과대학(전 치전) 예과, 전문부
이화대학(전 이전) 문과예과, 음악과예과, 가사과예과, 미술과예과, 보육과예과, 약학과예과, 의학과예과,(각 모집인원 미정)
승격준비중인 학교
수원농림대학(수원고농)
경성공과대학(경성고공)
부산수산대학(부산수산전문)
혜화대학(혜화전문)
3. 역대 교장[편집]
- 신해영 (1905~1907/1908~1909)
- 유성준 (1907~1908/1924~1925)
- 정영태 (1909~1910)
- 윤익선 (1911~1919)
- 고원훈 (1920~1923)
- 허헌 (1923~1924)
- 박승빈 (1925~1932)
- 김성수 (1932~1935/1937~1946)
- 김용무 (1935~1937)
- 현상윤 (1946)
4. 역대 교주(校主)[16][편집]
- 이용익[17] (1905~1907)
- 이종호[18] (1907~1910)
- 손병희[19] (1910~1921)
- 재단법인 보성전문학교(1921~1932) - 김기태와 박인호[20] 등 58명의 공동명의[21] 로 설립됨.출처
- 재단법인 중앙학원[22] (1932~1946)
5. 커리큘럼[편집]
5.1. 법과[편집]
1895년에 설립된 3~6개월 과정의 법관양성소에 비해 현저히 세분화된 커리큘럼을 제공했다.[23] 민법, 형법, 헌법, 상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24] , 행정법, 행정재판법 등 모든 실정법 과목이 개설되었고, 교강사 역시 일본에서 3~4년간 수학한 사람들로 구성하여 법률가의 직업적 전문성과 법학의 학문성에 걸맞는 교육을 하였다.
교과목은 일본대학의 교과목을 모방하여 편성하였고, 일본실정법이론을 강의대상으로 채택하였다. 법학교재 역시 일본법률서적을 번역하여 활용하였다. 당시 일본법을 가르쳤던 이유는 대한제국에 아직 민법전과 형법전이 제정되지 않았다는 것 외에 서구법의 직접수용과 고유법제도의 재정립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법적 사고와 법기술을 훈련시키려는 것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20세기 초에 일본실정법은 계수적상에 있어서 구한말의 규범적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실용화된 법상태에 있었으며, 지리적, 언어적 조건에도 장애가 적어 일본법문화의 수용이 다른 법문화의 수용보다 더 쉽고 빠를 수 있었다. 또한 당시의 한국법학은 서구법을 직접 수용하여 고유법제도로 실용화할 수 있는 창조적, 학문적 역량을 아직 배양하지 못하고 있었다.
졸업연한은 개교 당시 2년이었다가 곧 3년으로 늘어났다. 실정법 과목 외에 소송연습회, 즉 모의재판(moot court) 교육을 실시하였던 것은 이론교육 외에 실무교육도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보성전문 외에 법관양성소, 양정의숙[25] 등에서도 법학교육을 실시하였으나, 그곳에서는 한일합방 이후 총독부 산하 중간관리층 양성을 위주로 한 법학교육을 실시한 반면, 보성전문은
6. 학술활동[편집]
1907년 5월에 '법정학계'라는 한국 최초의 법률전문 저널을 발행하였다. 물론 그 성격이 법률전문교양지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보성전문의 교강사는 이 회지에 논설을 통하여 법전편찬의 필요성, 법의 기본원리와 개인의 기본권, 여러 법제도의 차이 해설 등 근대국가형성에 있어서 법의 중요성과 법제도일반의 기초적 이해를 위한 계몽활동을 전개했다.[27]
또한 법정학계지는 보성전문학교의 교강사를 중심으로 한 법률가의 법학연구와 논문발표의 무대가 되어 학술활동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보전의 교강사들은 법정학계지를 통해 입법정책을 비롯하여 법률상의 현안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예를 들면 당시의 실정법인 대명률과 대전통편이 법으로서 효력을 상실한 것을 지적하면서, 근대의 새로운 생활현실에 걸맞는 새로운 입법을 촉구한 것이 있다. 이로써 보성전문학교는 근대화과정에서 특히 보수층을 비롯한 일반지식인에 대하여 근대국가형성의 제도적 기초로서 법의 의의와 기능을 인식시키는 계몽활동의 역사적 과제를 남김없이 수행했다.
7. 교풍[편집]
민족의 성금으로 세운 학교인 데다, 일단 설립자인 이용익부터 대단한 강골의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내내 민족주의와 반골의 기운이 매우 강한 학교였다. 가뜩이나 민족주의적 저항정신이 강했는데 동학농민운동을 계승한 종교단체인 천도교 교단에 인수된 1911년 이후부터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더욱 강화되었다.
당연히 3.1 운동에는 교주, 교장부터 강사, 학생까지 모두가 목숨 걸고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교주 손병희는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도 최고 핵심이었고, 3.1 운동으로 구속기소되어 그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사하였다. 그의 사위였던 보전 학생 방정환도 그때 고문 당한 후유증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물론 보전 교장 윤익선도 체포되어 고문 당하고 징역형을 선고 받아 복역하였다.
우리나라 어느 학교도 보성전문처럼 이렇게 전교적으로 3.1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특히 3.1 운동 당시 학생 지도부의 핵심은 보성전문 학생 강기덕이었는데, 강기덕은 그 당시 일제에 타협하여 시위를 포기하려 했던 민족대표 33인을 대신하여 파고다공원 앞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분연히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서울역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의 회오리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보전 학생들이 그때 일제의 총칼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형무소에 오랜기간 갇혀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보성전문의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인종주의적, 소제국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 배타적 폭력주의로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 보성전문의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우리 영역을 팽창하려는 강자동일시의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 엘리트들이 대세에 타협하고 일본 문화나 서구 문화의 우월함을 받아들이며 "난 보통 한국인과 달라"하고 외칠 동안, 일제의 차별에 맞서고 한국 고유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일본인들에게서 천대 받는 한국민중들과 함께 하겠다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자리에 서서 온갖 고난을 짊어지겠다는 의미에서의 대중주의적 민족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주의와 팽창주의를 저지하겠다는 의미에서 평화주의적 민족주의, 저항적 민족주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보성전문 구성원들 사이에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약화되고 사회주의적인 성향이 강화되었다. 일단 독립운동 진영 내에서 민족주의 우파는 일제의 탄압, 회유공작과 내부 분란 등으로 인해(자유시 참변 참고) 거의 대가 끊기다시피 했을 뿐 아니라, 당시 다수의 보전 교수들[28] 에 의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수입되어 학생들에게 소개되었고, 일제에 의해 식민조선의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한반도 내에서도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보성전문 출신의 대표적 유명인사인 허헌과 강기덕이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경도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전설적인 남부군 총수 이현상, 강동정치학원 원장을 지냈고 빨치산으로 내려 왔다가 목 없는 귀신이 된 이호제, 한때 남로당에서 활동하다가 훗날 쌍용그룹을 창업하는 김성곤 등이 모두 그때의 보성전문에서 배출된 게 우연이 아니었다.
물론 좌익까지는 아니더라도 반골 기질은 이미 보성전문의 교풍처럼 자리 잡았다고 해도 무방하였다. 당시에는 일본인들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면 출세는 말할 것도 없고 생계조차 보장이 안 되는 현실이었지만, 보성전문 출신들은 다른 학교 출신들과 다르게 일본인 앞에서 꼿꼿하였고, 강직하며 바른 말 잘 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일본인뿐 아니라 미국인, 유럽인 앞에서도 추종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줏대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 하였다. 다만 반골 기질과 꼴통 기질은 일부 학생들에게 구분이 잘 안 될 때도 있어서, 예를 들어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했던 유명한 깡패 신마적 엄동욱 같은 이가 보성전문에서 배출되기도 하였다.
7.1. 보연전[편집]
1925년 5월 30일 조선 체육회 주최로 열린 ‘제5회 전조선(全朝鮮) 정구대회’에서 보성전문학교 정구팀과 연희전문학교 정구팀의 대결이 벌어졌다. 이때 양교 선수들이 자교의 자존심을 걸고서 치열하게 경기했을 뿐 아니라 그 응원전 역시 대단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대결은 장안의 화제를 불러모았다. 나중에는 단순한 체육이벤트가 아니라 일제의 억압 속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젊음을 발산하는 하나의 제전(祭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간의 대결은 처음에 정구에서 시작되었지만, 1927년 축구 대항경기가 시작되었고, 1930년 농구 대항경기, 1940년 빙구 대항경기가 시작되면서 점차 종목이 확대됐다. 그리고 이러한 경기들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면서 범민족적인 스포츠행사로 발돋움했다. 운동경기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특히 응원전이 볼만했는데, 1931년 조선 축구대회에서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이 격돌했을 때, 보성전문은 농악을 반주로 한 응원곡으로 응원한 반면에, 연희전문은 밴드를 중심으로 한 응원곡으로 응원하여 서로 대조를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보연전'이냐 '연보전'이냐 하는 명칭을 갖고서 말다툼이 있었다고 하나, 그 중 어느 명칭이 더 많이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1925년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보연전은 무려 20년 동안이나 수시로 열렸으며, 보성전문과 연희전문 간의 운동경기는 당시 양교 학생들만 아니라 서울의 모든 대학생들, 젊은이들, 그리고 시민 대다수가 함께 하는 민족집회의 성격을 띠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세상에 볼거리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보연전이 열리면 양교 학생들만이 아니라 경성법학전문학교[29] , 경성의학전문학교[30] , 혜화전문학교[31] , 명륜전문학교[32] 에 경성제국대학[33] 학생들도 빼놓지 않고 단체로 관람했고,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숙명여자전문학교의 학생들 역시 보성전문학교나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는 남자친구들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을 많이 찾았다고 한다.
7.2. 경성 학생생활 르포르타주[편집]
1940년 8월에 발간되어 수십만부가 팔린 '조선 1940'이라는 책[34] 에 실린 '경성 학생생활 르포르타주'를 보면, 경성(서울)의 4개 명문대학 학생들의 기질이 묘사된다. 이에 따르면 경성제국대학은 '신사형', 보성전문학교는 '호걸형', 연희전문학교는 '청춘 구가형',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은 '낙원의 처녀들'이었다.
이 중에서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과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의 학교(학생) 기질을 비교한 대목은 재미있다:
"학교건물이 신촌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 언덕 위에 있어 이화전문이 언덕을 넘어 저편에 로맨틱하게 위치하는 점 등, 지나치게 혜택받은 그들에게 질투가 날 정도다. 연희전문 학생과 이화전문 학생이 사이가 좋은 것은 자연의 이치다.(중략) 그들은 미국학생처럼 행복하다. 청춘을 마음껏 즐긴다."
이걸 보면, 요즘 한국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두 대학의 기질 차이에 대한 평가는 아무리 늦어도 1940년 이전에 그 원형이 존재하였던 셈이 된다. 관련 기사"연희가 게이오라면 보성은 와세다나 메이지(대학) 풍이다. 학생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배와 상급생에게 절대복종한다. (중략) 예를 들어 보성전문의 학생이 우연치 않은 일로 학교 밖에서 억울하게 당하거나 해를 보았을 때 학생들은 당장 집단을 이루어 반드시 복수를 한다고 한다. 무서운 학교다."
8. 출신 인물[편집]
- 허헌 - 김일성종합대학 초대[35] 총장 (법과 1907년 졸업)
- 윤익선 - 보성전문학교 교장 (법과 1907년 졸업)
- 변영만 - 독립운동가/변호사 (법과 1908년 졸업)
- 남형우 - 임정 법무총장 (법과 1908년 졸업)
- 서상일 - 독립운동가 (법과 1909년 졸업)
- 윤해 - 임정 국민대표회의 의장 (법과 1910년 졸업)
- 김립 - 임정 국무원 비서장 (법과 1910년 졸업)
- 장도빈 - 대한매일신보 논설주필 (법과 1911년 졸업)
- 차상찬 - 한국 잡지언론의 개척자 (법과 1913년 졸업)
- 이종성 - 독립운동가/국회의원/검찰총장(법과 1914년 졸업)
- 이병도 - 대한민국 역사학계 태두 (법과 1915년 졸업)
- 김용무 - 대법원장, 국회의원 (법과 1915년 졸업)
- 이춘숙 - 임정 학무차장 (법과 1916년 졸업)
- 김기전 -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 (법과 1917년 졸업)
- 한기악 - 동아일보/조선일보 편집국장 (법과 1917년 졸업)
- 강기덕 - 3.1.운동 학생대표 (법과 1919년 졸업)
- 엄항섭 - 독립운동가/임정 외무위원장 (법과 1919년 졸업)
- 방정환 - 어린이운동가 (법과 1918년 입학)
- 최규옥 -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법과 1923년 졸업)
- 권병노 - 국회의원 (법과 1925년 졸업)
- 김정렬 - 2선 의원/ 변호사 (법과 1926년 입학)
- 이현상 - 빨치산 사령관 (법과 1927년 입학)
- 김용식 - 조선의 축구영웅 (법과 1930년 입학)
- 이원홍 - 제헌의원 (법과 1931년 졸업)
- 김재열 - 변호사 (법과 1932년 입학)
- 유성권 - 3선 의원 (법과 1936년 중퇴)
- 허정 - 독립운동가, 국무총리 (법과 1936년 졸업)
- 백남억 - 5선 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윤택중 - 3선 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김덕열 - 국회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김성곤 - 쌍용그룹 회장, 국회의원 (상과 1937년 졸업)
- 허정구 - 삼양통상 회장 (법과 1937년 졸업)
- 이호제 - 사회주의 운동가 (법과 1938년 졸업)
- 김학묵 - 한국뇌성마비복지회장 (법과 1938년 졸업)
- 강의석 - 검사/변호사 (법과 1939년 졸업)
- 김세련 - 한국은행 총재, 재무부장관 (상과 1939년 졸업)
- 조병일 - 법무부장관 (법과 1939년 졸업)
- 손기정 -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상과 1937년 입학)
- 백상기 - 법무부장관 (법과 1940년 졸업)
- 정성태 - 국회부의장 (법과 1941년 졸업)
- 이진용 - 국회의원 (법과 1941년 졸업)
- 이건국 -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군인 (법과 1941년 졸업)
- 이철승 -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법과 1946년 수료[36] )
- 홍범희 - 국회의원 (법과 1941년 졸업)
- 김중서 - 대법관/중앙선관위장 (법과 1943년 졸업)
- 김상홍 - 삼양그룹 회장 (상과 1943년 졸업)
- 윤장섭 - 성보학원 이사장 (상과 1943년 졸업)
- 김성집 - 올림픽 역도 동메달 (상과 1943년 졸업)
- 이종욱 - 수원대 설립자 (상과 1943년 졸업)
- 장영순 - 검찰총장/법무부장관 (법과 1944년 졸업)
- 김종경 - 검찰총장 (법과 1944년 졸업)
- 이중재 - 6선 의원 (경제과 1946년 졸업)
- 이범석 - 외무부장관 (경상과 1947년 졸업)
- 김일두 - 인권변호사 (법률학과 1948년 졸업)
- 김원기 - 경제부총리 (정치 1949년 졸업)
- 이용상 - 독립운동가, 前 국립극장장 (1949년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