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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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유사(雞林類事) 여언고(麗言攷)[1] 의 모습.
鷄林類事
1. 개요[편집]
중국 북송시대의 봉사고려국신서장관(奉使高麗國信書狀官)이던 손목(孫穆)이 1103년(고려 숙종 8년)에 서장관으로서 고려를 방문한 후 당시 자신이 고려에서 견문한 조정제도, 풍속 및 고려 방언 약 360여개 어휘를 채록하여 저술한 견문록이자 어휘집. 총 3권. 현재 홍콩대학 펑핑산도서관(馮平山圖書館)과 대만국립중앙도서관(臺灣國立中央圖書館)에 소장되어 있다.
계림은 본래 경주시의 숲 이름으로 신라 왕조의 별칭 중 하나였으나, 신라 멸망 후에도 종종 쓰였다.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시대에도 조선왕조를 간혹 고려라고 부른 것처럼 해외에서 칭하는 지명은 보수성과 모호성을 띠기 때문.
2. 내용[편집]
1103년에 북송에서 고려로 사신 유규(劉逵)와 오식(吳拭)을 수행한 손목이란 중국인이 당시 고려에 체류하면서 겪은 일들과 자신이 체득한 고려어 365어휘를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총 3권으로 토풍(土風), 조제(朝制), 방언(方言)의 3부와 부록의 표문집(表文集)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방언 파트가 흥미로운데, 1100년대 초의 고려어 어휘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중국어, 정확히는 송나라 때 쓰인 중고한어 호칭이 한자로 쓰여 있고 '가로(되) 曰(왈)' 자 이후 고려어의 한자 음차 표기가 쓰여 있다. 예를 들어 "天曰漢捺(천왈한날)"은 "(중국어의) '天'은 (고려어로) '하ᄂᆞᆯ'이라고 한다."로 해석된다.
따라서 曰 자 다음에 쓰인 한자 표기는 사실 한국 한자음으로 읽을 게 아니라, 송나라 중고한어로 재구해야 한다. 물론 한국 한자음 자체가 당나라 장안음에 기반한 것으로 생각되고 장안음 역시 중고한어 시기 음가에 속하기에, 그렇게까지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편의상 한국 한자음에 따른 독음을 달아 두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중세 한국어의 한자음도 각주로 첨기하였다.
음가를 추정할 때 유의할 점이 있는데, 계림유사의 음차 표기에는 연음변독현상(連音變讀現象)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다음 음절의 초성이 앞 음절의 종성에도 등장하게끔 음차되어 있다. 이를테면 漢捺(한날), 屈林(굴림), 孛纜(발람) 등에서 첫 음절의 종성이 없다고 보아야 하ᄂᆞᆯ(>하늘), 구롬/구룸(>구름), 바ᄅᆞᆷ(>바람)과 흡사해진다.
현재는 손목이 저술한 단행본은 전하지 않고 절록본(節錄本)으로 남아 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책의 이본(異本)은 약 20여 종에 이른다. 가장 오래된 고본은 홍콩대학 펑핑산(馮平山)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명나라 가정연간(嘉靖年間)에 제작된 설부본이다.
이 책에 실린 고려어의 문증 시기는 손목이 고려에 왔던 1103년이지만, 이는 기록 상의 연대일 뿐 실제로는 훨씬 더 이전부터 언중들 사이에서 쓰여왔을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인 고려 전기 우리말 연구 및 한자음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하늘-한날, 구름-굴림, 할아버지-한아비, 손 씻어-손 시사, 구슬-구술 등 의외로 천 년 전의 어휘가 지금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3. 손목의 고려어 채록방식[편집]
계림유사의 초기 중세 한국어 기록은 크게 손목이 고려인과의 직접적인 필담을 통해 기록한 항목과, 고려인 통역관과의 대화를 통해 들은 고려어를 자신의 중국어 발음에 의거해 적은 항목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계림유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학자 진태하는 동사 항목에서 높임말이 아닌 반말로 적은 단어들이 있는데, 이는 손목이 고려어에 서툰 중국인 통역관과 대화하여 단어를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이는 당시의 국어와 현대 국어의 높임말 체계가 달랐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손목이 고려어 단어를 완벽히 채록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단어를 채록하는 경우가 일부 있었다. 예) 虹曰陸橋, 電曰閃, 谷曰丁蓋, 臥曰乞寢, 기타 등등. 또한 실제 고유어가 따로 있는데도 당대 중국어와 동일한 한자어를 채록한 경우도 적잖게 나타난다. 예) 鹿曰鹿, 毛曰毛, 人曰人, 赤曰赤 등. 이는 계림유사가 체계화된 언어 교재가 아닌 개인의 여행기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한계점이다.
4. 고려인 저자설[편집]
손목은 서명을 빌려주었을 뿐이고, 실제로 고려인들이 고려어 발음에 의거해 한자로 고려어를 쓰고 그걸 손목에게 건네주었다는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왜냐하면 중국어 발음대로 적었다고 본다면 말이 안 되는 항목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콩을 뜻하는 太는 본래 한자어 大豆를 세로로 쓰다가 그것이 간략화된 필체인데, 원래 콩을 太로 쓰는 습관이 있던 고려인이 그걸 썼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콩"이라는 고려어 발음을 듣고 손목이 그걸 太라고 썼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현대 한국어에서도 '서리태' 같은 복합어에 '태'라는 형태소가 입말로도 쓰이기도 하지만, 단독으로 콩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또한 닭을 뜻하는 고려어는 한국에서만 쓰이던 글자인 이두로 쓰여있는데, 손목은 주석에 '音達'이라 달았다. 해석은 '음을 달로 읽어라'이다. 즉 이는 손목이 자신이 귀로 들은 입말을 통해서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적어준 글말을 통해서 계림유사를 집필했음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다.
한편 "늙은"을 뜻하는 단어는 刀斤이라 적혀있는데, "도근"이라 읽으면 중세국어에 대응하는 어휘가 없지만 刀를 刃의 오기로 보고 중세국어 "ᄂᆞᆶ" (날)로 훈독하면 "ᄂᆞᆯ근"이 되어 "늙은"과 음이 비슷해진다. 당연하지만 손목이 고려어를 직접 듣고 한자로 적었다면 고려어로 훈독해야만 말이 되는 한자를 썼을 리가 없다.
하지만 계림유사가 조선관역어 같은 언어교재가 아닌 서긍의 고려도경처럼 손목이 남긴 기행문인 관계로 고려인이 고려어 발음에 의거한 단어로 보기 어려운 단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오히려 손목이 기록한 단어에 고려인이 감수와 교정을 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5. 원문[편집]
5.1. 토풍, 조제[편집]
현재 전해지는 내용은 도종의가 임의로 발췌한 문장만 남아있다.
高麗王建, 自後唐長興中, 始代高氏爲君長. 傳位不欲與其子孫, 乃及于弟. 生女不與國臣爲姻, 而令兄弟自妻之, 言王姬之貴不當下嫁也. 國人婚嫁無聘財. 令人通說, 以米食爲定. 或男女相欲爲夫婦, 則爲之.
고려 왕건은 후당 장흥 연간(930~933)에 비로소 고씨의 대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그 자손에게 왕위를 주고자 아니하고 아우에게 이르게 했다. 딸을 낳으면 신하와 혼인하지 않으며 형제로 하여금 스스로 아내를 삼게 하고, 왕녀가 귀하므로 아랫사람에게 시집가면 부당할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혼인을 함에 있어서 재물을 가지고 맞아오지 않는다. 사람을 시켜서 혼담을 통하고, 쌀이나 음식으로 혼인을 정한다. 혹 남녀가 서로 부부가 되고자 하면 그렇게 하게 한다.
夏日群浴于溪流, 男女無別. 瀕海之人, 潮落舟遠, 則上下水中, 男女皆露. 形父母病閉于室中, 穴一孔與藥餌, 死不送. 國城三面負山, 北最高峻. 有溪曲折貫城中, 西南當下流, 故地稍平衍. 城周二十餘里, 雖雜沙礫築之, 勢亦堅壯.
여름철에는 시냇물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목욕하는데, 남녀의 구별이 없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조수(潮水)가 밀려 나가서 배가 멀어지면 물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남녀가 모두 맨몸을 드러낸다. 부모가 병이 들면 방 안에다 가두고 구멍 하나를 뚫어 그곳을 통해 약과 음식을 주며,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 고려의 국성은 삼면이 산을 등지고 있는데, 북쪽이 가장 높고 가파르다. 시내가 있어서 굽이굽이 성 안을 관통하여 흐르니, 서남쪽이 하류이므로 조금 넓고 평평하다. 성은 둘레가 20여 리이며, 모래와 자갈을 섞어서 쌓았으나 형세는 튼튼하고 장엄하다.
國官月六叅. 文班七百十員, 武班五百四十員, 六拜蹈舞而退, 國王躬身還禮. 稟事則膝行而前, 得㫖復膝行而退, 至當級乃步. 國人卑者見尊者亦如之. 其軍民見國官甚恭尋, 常則朝跪而坐. 官民子拜父, 父亦答以半禮, 女僧尼就地低頭對拜.
나라의 관리들은 한 달에 여섯 차례 조회(朝會)에 참석한다. 문반(文班)은 710명, 무반(武班)은 540명이며, 여섯 번 절하고 춤을 춘 다음 물러가면 임금이 몸을 구부려서 답례한다. 일을 아뢸 때는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분부를 듣고는 다시 무릎걸음으로 물러 나오다가 계단에 이르러서야 걸어나온다. 나라 사람들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뵈면 다음과 같이 한다. 그곳의 군민(軍民)들은 나라의 관원을 만나면 아주 공손하게 대하며, 평상시에는 조회할 때에 무릎을 꿇고서 앉는다. 관원이나 백성들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절을 하면 아버지 역시 반례(半禮)로써 답하며, 비구니들은 맨땅에 머리를 대고 마주 대해 절한다.
其俗不盜, 少爭訟. 國法至嚴, 追呼唯寸紙, 不至即罰. 凡人詣官府少, 亦費米數斗, 民貧甚憚之. 有犯不去巾衣, 但褫袍帶杖笞, 頗輕投束荊使自擇, 以牌記其杖數. 最苦執縳交臂反接, 量罪爲之自一至九, 又視輕重制其時刻而釋之.
그들의 습속은 도적질을 하지 않으며, 다투고 송사함이 적다. 국법이 아주 엄하여 관리가 세금과 부역을 독촉할 때는 오직 작은 쪽지로 하며, 오지 않으면 즉시 벌을 내린다. 관청에 가는 사람이 적으며, 비용 역시 쌀 몇 말이 들기 때문에 백성들은 가난하여 가기를 몹시 꺼린다.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두건과 옷은 벗기지 않고 단지 포(袍)와 속대(束帶)만을 벗긴 채 곤장을 치거나 매를 때리는데, 자못 가볍게 때리며, 형장(刑杖)을 묶은 다발을 던져서 스스로 고르게 하고, 패(牌)로써 곤장을 치는 숫자를 기록한다.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은 팔뚝을 구부려서 교체시킨 다음 묶는 것인데, 죄를 헤아려서 한 번에서 아홉 번까지 하며, 또 죄의 경중을 보아 시각을 조절하여 풀어 준다.
惟死罪可久, 甚者髀骨相摩胸皮拆裂. 凡大罪亦刑部拘役也. 周歲待決終, 不逃其法. 惡逆及詈父母乃斬. 餘止杖肋亦不甚楚, 有賂或不免. 歲八月論囚, 諸州不殺咸送王府, 其性仁至期多赦宥. 或配送靑嶼黑山, 永不得還.
오직 죽을 죄에 대해서만 오랫동안 형벌하는데, 심한 경우에는 넓적다리 뼈가 으스러지고 가슴팍의 살갗이 터지기도 한다. 무릇 큰 죄를 범한 자도 역시 형부(刑部)에서 구금하며, 한 해 동안 판결이 나기를 기다리므로 끝내 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반역을 행한 자와 부모를 욕한 자에 대해서는 참수한다. 그 나머지 죄수는 갈빗대를 때리는데 역시 심하게 때리지는 않으며, 뇌물을 주어도 이를 면하지는 못한다. 해마다 8월이면 가두어 둔 자들을 논죄(論罪)하는데, 여러 주(州)에서는 죄수를 죽이지 못하고 왕부(王府)로 이송하며, 사람들의 성품이 지극히 어질어서 대부분 사면(赦免)시킨다. 간혹 청서(靑嶼)나 흑산(黑山)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하는데,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五穀皆有之梁最大. 無秫糯以粳米爲酒. 少絲蠶, 每羅一疋値銀十兩, 故國中多衣麻苧. 地瘠惟産人參·松子·龍鬚布·藤席·白硾紙. 日早晩爲市, 皆婦人挈一柳箱一小升有, 六合爲一刀【以升爲刀】.
오곡이 모두 있는데, 조가 가장 크다. 찹쌀이 없어서 멥쌀로 술을 만든다. 실을 뽑을 누에가 적어서 비단 1필당 값이 은 10냥이나 되므로,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삼베나 모시를 입는다. 땅이 메말라서 오직 인삼, 잣, 용수포, 등석, 백추지가 생산된다. 날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장이 열리며, 모든 부녀자들이 버드나무로 만든 상자 하나와 작은 승(升) 한 개를 가지고 있는데, 6홉[合]이 1되[刀]가 된다. 【승을 되라고 한다.】
以稗米定物之價而貿易之. 其地皆視此爲價之高下. 若其數多則以銀甁, 每重一一斤. 工人制造用銀十二兩半入銅二兩半作一斤, 以銅當工匠之直. 癸未年倣本朝鑄錢交易, 以海東重寶·三韓通寶爲記.
피쌀을 가지고 물건 값을 정하여 무역한다. 그 지역에서는 모두 이것과 비교해서 값의 높고 낮음을 따진다. 만약 수효가 많으면 은병(銀甁)을 가지고 정하는데, 한 개의 중량은 1근이다. 공인(工人)들이 은병을 만들 때는 은 12냥 반에 구리 2냥 반을 섞어 1근으로 만드는데, 구리는 공인들의 품삯에 해당한다. 계미년(1103년)에 본조를 모방하여 돈을 주조해서 교역하였는데, 해동중보(海東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라고 새겨 기록하였다.
5.2. 방언[편집]
- 고려어(한국 한자음)의 재구음이 중세 국어(조선시대 한국어)와 다른 경우 혹은 애매하게 표기한 경우에는 마에마 교사쿠, 방종현, 진태하 및 여려 학자 등의 각종 설을 주석을 달아서 설명하였다.
6. 외부 링크[편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계림유사
-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 『계림유사』에 등재된 우리말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계림유사
- 한국어 위키백과 : 계림유사
- 두산백과 : 계림유사
- 한국고전용어사전 : 계림유사
- 시사상식사전 : 계림유사
- 문화원형 용어사전 : 계림유사
-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 계림유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계림유사와고려시기의조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