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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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한 함경남도의 소재지. 성천강 하구 함흥평야에 자리잡은 공업도시이다. 광복 당시에는 함주군, 흥남시와 경계를 접했다.
함흥냉면으로 유명하며, 함흥차사라는 사자성어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도시의 서쪽을 성천강(城川江)이 흘러 동해로 빠져나간다.
2008년 기준으로 인구 약 77만 명. 북한에서 평양과 남포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이 정도면 남한 기준으로도 어지간한 지방 대도시급이다.[5] 해방 전 함흥과 흥남을 합친[6] 인구는 대구와 인천보다도 많았기 때문에[7] 분단 없이 이곳이 이남의 도시처럼 제대로 성장했다면 현재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인천은 수도권 버프 때문에 무리라 쳐도 대구 정도는 제칠만 할 것이다. 현재 함흥보다 인구는 많지만 평양의 위성도시이자 여러 지역이 한 행정구역으로 묶여 형성된 남포와 달리, 함흥은 함경도 지역의 대표도시이고 함흥대극장과 신흥관등 평양과 비견될 문화관광 시설들이 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북한 제 2의 도시로 여겨지기도 한다. 통일되면 광역시의 지위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함흥 역시 인구가 36만 명에 달했던 흥남시를 흡수한 도시이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청진시의 지위를 좀 더 높게 본다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2002년 기준으로 도와 동급인 평양, 남포, 라선을 제외하고 인민위원회에 처급 부서가 편성되어 있는 일반시는 오직 청진시뿐이다.[8][9] 단, 청진시가 함북 행정구역 특성상 워낙 면적이 넓어 홍천군과 면적이 비슷한 것을 생각하면 청진시의 지위는 중앙정부의 정치적 통제를 위해 높여준 것이 강하다.[10]
결론적으로 말하면, 함흥시는 '문화와 역사의 도시'의 성격이 강한 것에 비해, 청진시는 '경제와 공업의 도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적으로도 조선시대 함흥부는 조선왕조의 발상지 중 하나로 꼽혔을 만큼 그 문화적 위치도 높았다.
서울에서 철도로 약 350km[11] , 속초에서 뱃길로 200km[12] . 함경도와 함길도의 '함'이 이 도시이다.[13]
2. 역사[편집]
한사군 시대에는 임둔군(臨屯郡) 부조현(夫租縣)으로 추정된다. 원삼국시대에는 대략 옥저 땅이었다가[14]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진흥왕 대에 잠깐 신라 땅이 되었다가 다시 고구려에 빼앗기고[15] 이후 발해의 일부였다가, 고려시대에는 천리장성 이북으로 여진족의 영역[16] 이었으며, 고려의 여진 정벌 때 윤관의 활약으로 확보한 동북 9성 가운데 하나인 함주(咸州)였다.[17] 그러나 고려는 동북 9성에서 철수하면서 다시 함주를 여진족들에게 반환했고, 이 땅은 몽골(원나라)에게 정복되어 요양행성 합란부로 불렸다.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펴면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때 진출해 1108년 함주 설치가 실패한지로는 150년만에, 제대로 영유한 것 기준으로는 발해 멸망 이후 400여 년만에 한민족의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고, 다시 함주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함흥부라 불리며 관북 최대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함주와 화령(영흥군. 오늘날 금야군)을 오가며 자랐고, '풍패지향(豊沛之鄕)'이란 별명[18] 이 있었다. 경흥동에 정화릉(定和陵)[19] ·덕안릉(德安陵)[20] 등 왕릉이 있고, 귀루동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선원전(璿源殿), 경흥동에는 그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 가운데 하나인 경흥전(慶興殿)이 있다. 별궁 격인 함흥본궁(구 사포구역 → 흥남시 소재) 역시 존재했으며, 흑백사진으로만 남은 이성계의 젊은 어진은 함흥본궁에서 촬영된 것이다. 함흥차사라는 관용구도 물론 여기에서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