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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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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까지 활약했던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 한국인[5] 운동선수 최초로 올림픽을 제패한 한국 체육계의 선구자다.
2. 생애[편집]
2.1. 초년 시절[편집]
1912년 10월 9일, 평안북도 의주부 광성면 민포동(現 신의주시 민포동)[6] 에서 아버지 손인석(孫仁錫)과 어머니 김복녀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나[7] 고향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위로 맏형 손기만(孫基萬)과 둘째 형 손기용(孫基用)이 있었다.
어린 시절 당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랬듯이 매우 가난했는데, 그래서 손기정은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옥수수나 참외 장사를 하기도 하고 우동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손기정은 이 당시에 호떡을 매우 좋아했으나, 당시 호떡이 꽤 비싸서(5전) 많이 사 먹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집과 학교가 2km 거리에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그 거리를 매일 달려 다녔고, 심지어 노는 시간에도 압록강변을 달려 다녔을 정도로 뛰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 때 막연하게 운동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손기정의 모친 김복녀 여사는 어린 아들이 운동보다는 공부로 성공하길 바랐고, 아들이 달리지 못하도록 잘 벗겨지는 여아용 고무신을 신겨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손기정은 고무신을 새끼줄로 묶어서 달렸고, 새끼줄에 발목이 쓸려서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고 한다.
이런 손기정의 재능을 눈여겨본 당시 담임교사였던 이일성이 손기정에게 육상 선수가 될 것을 권유했고, 약죽보통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고향 신의주에서 열린 육상대회 장거리 종목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보통학교 졸업 후 생계가 막막해져서 육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1932년 이일성 선생이 그를 일본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으로 도저히 학업을 이어갈 수가 없게 되자, 6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어느 회사의 점원으로 취직하여 학업과 육상을 병행할 수 있었는데, 그 회사의 사장은 당시 신의주시에서 동익상회를 하던 공정규로, 안과의사 겸 국어학자 공병우 박사의 부친이었다. 손기정은 이곳에서 일을 하며 쉬는 날에는 압록강변을 달리며 연습했다.
1932년, 경성부에서 열린 제 2회 동아 마라톤에 출전했는데 서울의 복잡한 지리를 몰라서 삼각지 로터리에서 길을 잃었고 아쉽게 2위를 했다. 그러나 이 경기 이후 인생이 바뀌었는데, 당대의 걸출한 마라토너들이 배출된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 육상부 중장거리팀은 한반도 내에서만 유명했지만, 기록만 보면 세계적 수준이었다고 한다.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자, 더욱 마라톤 훈련에 매진했고, 그 결과 이듬해 제3회 동아 마라톤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1935년, 도쿄 메이지 신궁대회에서 마라톤 풀코스에 처음 출전하여, 2시간 26분 42초이라는 비공인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공식 세계신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는데, 당시 비서구권에서 열린 대회는 대회 운영이나 코스 길이를 신뢰할 수 없었던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비공인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마라톤 풀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깬 사례이다.
그리고 이듬해 열린 조선육상경기대회에서도 역시 1위를 차지하며 단번에 장거리 육상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이 당시 13개의 대회에 출전하여 10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여담으로 메이지 신궁대회 마라톤 종목은 손기정을 시작으로 이후 3개 대회 연속으로 한국인들이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35년 손기정-1937년 유장춘-1939년 오동우가 그 주인공들이다.
2.2. 1936 베를린 올림픽[편집]
그러나 대표 선발전에서 1위에 남승룡, 2위에 손기정이 랭크되자, 일본 대표팀은 억지를 부려서라도 이 둘을 탈락시키려는 속셈으로 수작을 부렸다. 현지에서 컨디션 조절을 하고 쉬어도 모자랄 판에, 그렇게 일본 육상팀의 억지로 전대미문의 2차 선발전 현지 테스트가 열렸고, 이것도 모자라 일본 측에서는 이 둘을 탈락시키기 위해 일본 선수 스즈키 히로시게, 타마오 시와쿠를 후보로 추가시켰다.
그러나 그렇게 꼼수를 부리고도 레이스 내내 일본 선수 2명이 이 둘을 따라잡지 못하자 일본 선수들은 몰래 코스를 이탈하면서 지름길로 가는 반칙까지 저질렀고, 이를 본 손기정과 남승룡은 분노하며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하고 달렸다고 한다.
결국 2차 선발전에서도 손기정과 남승룡은 사이좋게 1, 2위를 나눠 가졌다.[한편] 여담으로 지름길로 왔으면서도 늦게 들어온 일본 선수들에게 남승룡은 뺨따귀까지 날리며 격분했다고. 시원시원하고 활발한 손기정에 비해 남승룡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했을 정도면 화가 얼마나 났을지 짐작할 수가 있다. 어쨋건 2차 예선에서 현지 적응에 실패하여 컨디션 난조를 보인 스즈키[11] 가 기권하며 1936년 일본 대표팀 마라톤 출전선수 손기정, 남승룡, 타마오 시와쿠 3인으로 결정되었다.
당연히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이 대일본제국의 대표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라는 반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 둘이서 별 말 없이 실력으로 찍어내려 주니 그런 의견은 쏙 들어갔다.
손기정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일제 치하 조선의 대중들에게 암묵적으로 큰 인기와 존경을 얻었으며, 이 당시 국내의 신문광고, 특히 의약품, 식품 광고는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담는 광고가 많았다.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과자 광고에는 '이 과자를 먹고 쑥쑥 커 손기정과 같은 사람이 되겠다'라는 식의 카피라이트가 유독 많았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당시 일본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 시골 아낙들도 올림픽이 무엇인지 알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손기정의 우승을 찬양하며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 시는 심훈이 같은 해인 1936년 9월 갑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하면서 그의 마지막 시가 되었다. 시의 전문은 심훈 문서에 있다.
그러나 손기정은 스포츠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된 사건 때문에 떳떳이 활동할 수 없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통해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강화를 바짝 경계하던 조선총독부는 아무 죄 없는 손기정에게 사복경찰을 붙여서 감시했고, 손기정은 심적으로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풍문에 따르면 의지의 승리를 찍은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과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까지도 손기정에게 상당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손기정이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게 굴지 않고 일견 우울한 듯 보일 정도로 과묵한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19]
올림피아에서 손기정이 꽤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았을 때 리펜슈탈이 이 동양인 선수에게서 정말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은 1956년에 다시 만나게 된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손기정을 '동맹인 일본의 국민'으로 간주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전쟁 당시 동맹국이란 것만 알고 있으면 나오는 오류로, 올림픽 당시에는 독일에겐 일본은 적국이었다.[20] 히틀러는 그의 성격상 단순히 체력과 정신력을 많이 소모하는 근본있는 메인 종목에서 약자들을 찍어누르고 승리한 가장 강인한 인간에 대한 존경심 정도만을 가졌을 확률이 크다.
1차 대전의 일본 제국은 승전국 포지션으로 이것저것 뜯어갔기 때문에[21] 공산주의와 일본을 견제한다고 중국 국민당군을 정예화 시켜놓은게 독일이다. 이 군사적 지원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에 질질끌리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니 말 다한 셈이다. 다만 올림픽 이후 방공협정을 맺어 동맹을 맺긴 했다.
또한, 히틀러는 출전 소속만 일본으로 되어 있을 뿐 손기정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주지하고 있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독일 방송들은 이렇게 보도했다.
1936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본에서 우승 소감을 녹음한 내용이 레코드로 남아 있는데, 들어보면 손기정의 고향인 신의주 억양이 배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내용은 손기정의 자발적인 발언이 아닌 일본에 의해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에 불과했기에, 손기정의 진심이 담겨 있다고 보긴 어렵다. 심지어(아래에서는 생략했지만) 누군가가 옆에서 끼어들어 '크게 해라'고 협박하는 것도 고스란히 녹음되어 녹음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22]Wo der Japanische Sieger Son kommen muss, der Koreanische Student, er hat die Streitmacht der Welt zertrummert, mit asiatischer Fähigkeit und Energie ist der Koreaner durch
일본의 우승자 손기정이 옵니다, 조선 대학생 손기정은 전세계의 경쟁자들을 아시아의 능력과 에너지로 눌렀습니다.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의 수상자 명패에는 '손기정' 대신 '손 기테이(SON, Kitei)'[24]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사건으로 1970년에 신민당 제7대 국회의원이었던 박영록이 야간에 베를린 올림픽 기념관에 불법 침입하여 기념비에 새겨져 있던 손기정의 국적을 훼손하여 불법 침입, 절도 및 공공재산파손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체포되기 전에 한국으로 도망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박 의원이 무엇을 훔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서독 경찰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JAPAN이라는 글자를..."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고치기 위해 이 5개 문자를 다른 우승비에서 떼어모았으니 명백한 기물파손이며 도려낸 일본(JAPAN)의 문자는 그대로 들고 도망갔으므로 절도 혐의도 적용됐지만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송환되어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25]손기정: 저는 손기정입니다. 24년 간의 숙망을 달성하려고 우리들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8월 9일 오후 3시에 스타트에 나섰습니다.
이때 나는 신궁대회 때 스타트와 같은 가벼운 기분이었습니다. 이 정도이면 반드시 우승하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쟈바라가 먼저 뛰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내 페이스대로 달렸습니다. 나는 침착한 태도로 달리었습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달리고 있는 외국인들을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영국인 하파가 곧 내 앞에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32km를 앞두고 하파와 함께 전 회의 우승자인 아루젠친[23]
의 쟈바라를 따라버리었습니다. 그리고 하파와 함께 나는 한동안 똑같이 달리고 있었습니다. 하파를 따라버리기에는 무한히 어려웠습니다. 내 전신에 아직도 힘이 가득하였으므로 능히 우승할 자신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인제 즉 문제의 언덕에 다다르니 우리나라 일장기가 나를 응원하여 주는 것이 보이었습니다. 좌등 코취 역시 응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큰 기를 흔들면서 '인제는 6km가 남았다' 고 큰 고함을 지르는 소리에 일층 더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2번째 언덕에 도달하였을 때도 역시 이곳에 나를 응원하여 주는 우리나라 일장기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수많은 응원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인제는 1km 반이 남았다'고 고함치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려주었습니다. 나는 무의식 중에서 죽을 힘을 다 하여 더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기었습니다. 기록의 시간은 2시간 29분 19초 2의 올림픽 신기록이었습니다. 하파가 나보다 2분 4초 지나치어 들어왔습니다. 그 뒤를 이어 남 군이 원기있게 달려들어왔습니다. 이때의 반가움은 내 입으로서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오후 6시 15분 나는 하파와 남 군과 함께 표창대에 올랐습니다. 장엄한 우리나라 국가가 엄숙하게 내 귀를 울려줄 뿐이었습니다. 이때의 기쁨은 내 일생을 통하야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승리는 결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우리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 크게 해라.
이 승리야말로 내 개인의 달린 힘보담도 우리나라 동포 여러분들의 열렬한 응원의 결정(結晶)인줄 생각하는 바입니다.
금메달 획득 소감. 일본 당국이 써 준 대본을 그대로 읽은 것에 불과했다.
국제 올림픽 위원회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국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이름이나 국적을 은퇴 후 기준으로 수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식민지 출신 선수가 종주국 대표로 나와서 메달 딴 건 손기정, 남승룡 말고도 많으며, 그들 역시 종주국 선수로 기록에 남아있다. 혹시라도 은퇴 전에 독립해서 독립국 선수로 나오는 경우도, 독립 전후의 국적을 다르게 기록할 뿐이다.[26][27] 민족, 출신지, 정체성, 올림픽 이후의 활동 다 필요 없고 오직 대회 당시 소속 하나만 보는 것이다. 이런 사례를 공식 인정할 경우 국적 변경을 요구하는 다른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각국은 외국 대표 선수라도 조금이라도 자기 나라와 관련이 있는 선수는 자기 나라로 고쳐 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높으며, 이럴 경우 국적 분류가 완전히 흔들리기 때문이다.[28] 한 번 기록되면 평생 정도가 아니라 영원토록 남는 것이다. 그 때문에 현재 IOC에서는 공식적으로 'Kitei Son, Japan'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신 약력에는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한국인 출신이었음이 강조되며, 후일 일어난 일장기 말소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2011년 12월 9일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손기정의 '대한민국' 국적은 인정했지만, 역사 왜곡(Historical Distortion)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력에 있는 국적 자체를 바꾸지는 않았다.
2.3. 1937년~1945년[편집]
손기정은 보성전문학교 육상부를 대표해 1937년 봄에 조선학생육상연맹이 주최하는 2개 대회에 출전, 보성전문의 우승에 기여했다. 그 대회 중 하나는 4월 25일에 거행된 조선학생 수원~경성간 역전경주대회.[30] 당시의 학제는 3월 졸업, 4월 입학이었으니까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5명이 이어 달리는 보전팀 최종 주자로 시흥~서울운동장 간을 역주, 7개 팀 중 최선두를 달려 보전을 우승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6월 5~6일에는 서울운동장에서 조선학생육상대회가 거행되었는데 첫날엔 1,500m, 이튿날엔 5,000m에서 우승했다. 당시 보전엔 박찬규, 백승욱, 인강환 등 장사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포환, 원반, 해머던지기 등에 활약한 데다 손기정의 장거리 우승을 더하여 보전은 종합 우승을 달성했다.
이렇듯 손기정이 보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골치 아프게 생각했다. 당시 1930년대 중반에 조선인 학생이 진학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조선인이 교장인 학교는 보전뿐이었고, 교수들 가운데엔 창문을 닫게 하고 한국어로 강의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학교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이 재학하면서 육상대회에서 활약하자 그는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어 보전에는 그를 중심으로 서클이 형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손기정이 보전에 다니는 것을 꺼렸고 조선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총독부의 관헌은 손기정을 주야로 감시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손기정은 1937년 2학기에 반강제로 보성전문을 중퇴하고 일본 내지로 건너가 도쿄의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에 편입했다.
그런데 도쿄에서도 일본 관헌은 손기정이 마라톤을 달리고 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하는 것을 막았다. 해마다 양력 정초엔 도쿄~하코네 간 대학대항역전대회가 거행되었다.[31] 손기정을 맞은 메이지대학은 그 역전에서 성적을 올리게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그는 달릴 수가 없었다. 일본 관헌이 공중 앞에서 손기정이 달리는 것을 금지했던 것이다. 결국 손기정은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후 1944년까지 조선저축은행[32] 에서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2.4. 지도자·체육 행정가로서의 활약[편집]
손기정은 대한민국의 체육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는 각각 1947년과 1950년에 감독으로서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과 함기용을 훈련시켰다. 1948년에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1948 런던 올림픽부터 1964 도쿄 올림픽까지 마라톤 대표팀 감독을 맡아 지휘했고 KOREA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참여한 올림픽에서 개막식 기수로 당당히 태극기를 들고 입장했다. 이후 1963년에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을 맡았으며 1966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대표단장으로 참가했다. 1971년에는 올림픽 위원회(KOC) 위원,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1988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을 맡았다.
1983년에는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란 제목의 자서전을 발간하고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시의 상황과 심정을 밝혔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의 회고에 따르면 손기정은 본인이 당연하게 최종 성화 점화자로 선택될 거라 생각했는데 대회 직전에 이게 뒤집히자 의자까지 집어던지며 격노했다고 한다.[35] 그의 증언에 따르면 성화봉송 때 자신이 있었고 멋있게 달리기 위해 1년이나 훈련했다고 한다.[36] 하지만 대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손기정은 결국 자신의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당시 영상을 보면 손기정은 가슴에 당당하게 태극 문양의 1988 서울 올림픽 엠블럼을 달고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유튜브에서 영상으로도 볼 수 있다.[37]
공교롭게도 황영조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날과 손기정이 우승한 날은 8월 9일로 똑같다. 황영조는 손기정이 자신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시상이 끝난 직후 경기장에서 지켜보던 손기정이 황영조를 만나 격려하는 장면도 유명하다. 이때 황영조의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손기정의 사진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당시 은메달이 일본, 동메달이 독일 선수라 폐막식 때 태극기 양 옆으로 일장기와 독일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는데, 이걸 보고 손기정은 "56년 전 그날, 한국인인 내가 일본 국기를 달고 독일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그 3개의 국기가 나란히 올라갔다"고 감격하기도 했다.[38]
손기정의 영광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는 순간에 있었다. 당시 뉴스
의외로 축구계와도 접점이 있다. 1950년대에 조선방직 대구공장(대구방직)의 상무이사로 재직했었는데, 대구방직이 1951년 1952 헬싱키 올림픽 선수 선발을 겸해서 열린 전국축구선수권 대회에서 당시 한국 축구의 최강팀이었던 육군 특무대를 이기는 파란을 일으키자 김창룡 특무대장이 조선방직의 선수들을 잡아갔다가 조선방직 단장이 바로 손기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얘기석방했다는 애기가 있다.
2.5. 사망[편집]
1997년부터 다리의 동맥경화증 때문에 잘 걷지 못하여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남북대표팀 공동입장, 2002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에 이어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까지 지켜보았지만[39] , 2002년 11월 15일에 지병이던 만성 신부전증과 폐렴으로 인한 숙환으로 타계했다.
사후에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으며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됐다. 모교인 양정중학교, 양정고등학교[40] 의 옛 터가 있는 서울특별시 중구 만리동(서울역 뒷쪽)에는 손기정 기념공원을 조성했다.[41]
손기정공원에는 손기정기념재단도 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1979년 5월 손기정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 의사에 따라 기념품 1,500여 점을 국가에 기증했고, 육영재단은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의 어린이회관에 '손기정 전시관' 을 지어 2005년도 기념품을 보관 및 전시하고 있다.
2005년, 한 독일인이 손기정에게 헌정하는 앨범을 만들었다.
3. 수상 기록[편집]
4. 대중 매체[편집]
- 1982년, KBS 1TV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을 소재로 하여 한국 최초의 스포츠 드라마 '맨발의 영광' 5부작을 방영했다. 극본은 박찬성, 연출은 전세권 PD가 각각 맡았으며 손기정 역은 배우 김영철이, 남승룡 역은 강태기가 연기했고, 그 외 배역들은 장민호와 김세윤, 이치우, 백수련, 이영수, 김길호, 전원주, 김해권, 금보라, 정재순, 우제영, 김숙경, 이대로, 이정웅, 신종섭, 정운용, 김윤형, 이현두, 안광진, 송희남 등이 출연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자료가 소실돼 KBS 영상자료실엔 5화 하나밖에 없으며, 이마저도 화질이 안 좋다. 그 에피소드는 2020년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자료실에 업로드됐다.
- 2011년작 영화 《마이웨이》 초반부에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등장한다. 인력거꾼인 주인공 김준식에게 한 신사가 시간이 급하다면서 최대한 빨리 가달라는 주문을 받고 육상 선수가 꿈으로 꾸준히 연습해 오던 김준식의 속도로 아슬아슬하게 도착하자 신사는 고마워한다. 나중에 김준식이 육상 대회 신청을 하려 하지만 일본인 위원들의 방해로 등록조차 못할 찰나 아까 그 신사가 들어오며 김준식의 참가를 강력히 요구하는데 이 신사가 바로 손기정이었다. 조선인이긴 하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그의 발언권이 장난이 아닌지라 금방 상황이 정리되면서 김준식의 참가가 이루어졌다. 해당 인물은 배우 윤희원이 연기했다.[42]
- 2019년작 일본 NHK 대하 드라마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에서도 손기정이 언급되나 일본의 시점으로 그렸기 때문에 한국인 입장에서 평가는 좋지 않다. 실제 방영분에는 훈련 장면에서 손기정, 남승룡을 소개할 때 단역 배우 두 명의 뒷모습과 앞모습이 잠깐 지나가는 모습이 나오며 대회 장면은 실제 영상으로 대체했다. 다만 일본 시점으로 그려졌기에 일장기 말소 사건같은 우리 입장의 사건은 당연히 안나오며[43] 수상식 당시 기미가요가 나올때 손기정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내레이션이 "하지만 수상식에서 우승국 출신 선수의 국기가 걸리고 국가가 연주되는 것을 손 선수와 남 선수는 알지 못했다"라고 말하는데 당연히 일본 국가가 나오는 걸 두 선수가 몰랐던 건 아니고 전반적인 뉘앙스상 조선인임에도 일본 국적으로 출전하여서 일본 국가를 수상대에서 들어야하는 저 선수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할까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 2020년 6월 20일 일본 NHK의 다큐멘터리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6부 - "올림픽 ·격동의 제전"에서 영상매체 그리고 근대 올림픽의 탄생 과정을 다루면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에 대해 어느정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44]
- 2023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7월 13일에 방영했다.
5. 기타[편집]
- 가족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가정사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손인석(孫仁錫)은 베를린 올림픽 개최 1년 전인 1935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김복녀는 1941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39년에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체육교사이자 단거리 육상 선수 출신인 약혼녀 강복신[48] 과 결혼했지만 5년 뒤 부인은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둘의 사랑 이야기는 2016년 7월 10일 방송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오기도 했다. 강복신 씨 사이에서는 자녀가 2명이 있는데 딸 손문영(孫文英, 1940년생), 아들 손정인(孫正寅, 1943년생)이 있다. 손정인 씨는 재일교포거류민단 요코하마지부 사무총장으로 일했고 2002 한일 월드컵 때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외손자 이준승 씨는 現 손기정기념관의 관장이기도 하다. 사위, 즉 손문영의 남편이자 이준승의 아버지인 이창훈도 손기정이 키운 선수로, 1958 도쿄 아시안 게임 마라톤 우승자다. 장서가 나란히 마라톤 금메달을 딴 셈이다.
-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함께 출전한 미국의 존 켈리 선수가 이때 손기정이 신고 뛰었던 운동화를 청해 선물받아 갔다고 한다. 이후 광복이 된 뒤 남승룡과 함께 후진을 양성하고 있던 손기정은 켈리가 보내 온 안부 편지에서 올림픽 외에도 또 다른 마라톤 경기, 바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출전을 준비해 남승룡과 함께 가르친 제자 서윤복을 데리고 미국으로 향한다. 이 대회에서 서윤복은 우승을 차지했고, 남승룡도 제자의 페이스메이커로 참가해 태극기를 달고 달리면서 베를린의 한을 풀었다고.
- 월남 이후 황해도 사리원시 출신의 김원봉(金源奉)[49] 과 재혼했는데, 1940년 15.86m로 세단뛰기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던 육상 선수 김원권(金源權)은 그의 처남이다. 재혼 당시 손기정은 양정동창회를 통해 풍국제분의 헌 창고를 불하받아 풍국산업 진흥회사를 설립, 사장에 취임해 있었다. 재혼 후 그는 처가에 회사 경영을 거의 일임했는데, 결국 파산했고 1970년에는 서울형사지법에서 부정수표 발행의 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 일로 재혼한 부인과도 이혼소송까지 갔는데, 1972년 두번째 부인 김원봉마저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후 손기정은 칩거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인데, 손기정은 초대 해참총장을 지냈던 손원일 전 국방부장관의 7촌 조카이기도 하다. 손기정의 증조부 손종일(孫鍾一)은 손원일의 조부 손몽룡(孫夢龍)[50] 의 남동생이다.
- 일제강점기의 올림픽 우승자라는 사실이 부각되어 실력자임에는 이견이 없되,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는 덜 알려져 있는데, 12년 동안 세계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거물이었다.[51] 이 기록은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손기정의 제자인 서윤복이 2시간 25분 39초의 기록으로 깼다. 올림픽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였는데 당시 올림픽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2시간 30분의 벽을 깼다. 훈련법도 무척이나 독해서 발에 무거운 추를 달고 달리기도 했고, 일본 대표팀이 전부 자고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나서 혼자 훈련을 강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 육상 선수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긴 했지만, 본인은 "어릴 적에 스케이트를 살 돈만 있었으면 스케이트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 태극기를 24살 때 처음 보았다고 한다. 베를린 올림픽 우승 이후 일제의 감시를 받던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봉근이 운영하는 두부공장에서 몰래 파티를 하며 보여주었다고 한다.
- 평안북도 신의주시 민포동 출신으로 죽을 때까지 언제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았으며, "죽기 전에 남북통일이 된다면 신의주 - 부산 간 역전경주 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만 했다.
- 북한 정권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1946년 평안북도 체육회 창립 당시 체육회 측에서 참가를 끈질기게 종용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서울로 도망친 일화는 유명하다. 이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서 통일원에 방북 신청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고립되었는데 이때 북한군의 감시를 받아서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숨어지냈다. 북한에서도 자국의 체육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동안 손기정에 대해서 거의 다루지 않았으나 21세기가 되면서부터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뛰어서 우승했고 당시 일장기 말소사건 등이 있었음도 언급하게 되었다. 로동신문에서 손기정의 우승을 이야기하면서 '나라를 잃은 체육인의 금메달은 그 자신에게도 민족 성원들에게도 기쁨과 자랑보다 눈물과 치욕을 더 뼈아프게 자아낸다'라고도 했다.
- 생전에 여기저기서 정치 입문을 많이 권유받았는데, 이를 전부 뿌리치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한국 스포츠계의 진흥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순수한 스포츠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한국 근대체육사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손기정 선수가 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던 원인에는 여운형의 비극적 죽음도 같이 결부되어있다. 여운형은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자 조선 체육계의 대부로서 손기정과 인연이 있었는데, 손기정이 월남한 후 이 인연으로 여운형을 많이 수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여운형이 백색테러로 암살을 당하면서 손기정이 그의 관을 운구하는 비극적 순간도 함께하게 되었다. 조선중앙일보로는 시인이자 소설가인 심훈과도 인연이 있어, 3명의 후손들이 81년 만에 만나기도 했다.
- 성품은 시원시원하고 활달하고 농담도 곧잘 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황영조가 손기정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 은퇴 이후에도 꾸준히 달리기를 하여 건강을 유지했기 때문에, 거의 한 세기를 살다시피 장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