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이북5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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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한반도 서북부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이며, 이북 5도 중 하나. 면적은 광복 당시 28,443㎢로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넓었으며, 인구는 약 400여만 명[4] 으로 추정된다. 남쪽에 평안남도, 동쪽에 함경남도가 있다. 서남쪽은 서해 바다가 펼쳐져 있으며, 서쪽과 북쪽으로는 압록강(한만 국경선)을 경계로 중국 랴오닝성과 지린성에 접한다.
도청 소재지는 신의주시.[5]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은 일부 지역[6] 을 실효지배한 적[7] 이 있다. 하지만 수복 직후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곧바로 청천강 유역으로 후퇴한 바람에 청천강 전투 이전까지 청천강 일대[8] 를 제외한 도 대부분 지역은 북한 지배 아래에 있었다. 유엔군이 평안북도에서 후퇴한 이후로도 전략도서 확보 작전의 일환으로 가도, 신미도 등의 평안북도 서해안 도서 지역을 정전 협정 체결 시까지 점유했다.
2. 도기[편집]
종전까지 사용되었던 평북도기(道旗)는 2019년 12월 26일 폐지되었다. 유관 보도에 따르면, 도기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데다가 깃발 자체가 스포츠 단체의 깃발과 흡사해 다른 도와 비교할 때 상징성으로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어, 2019년 11월 26일 제정된 ‘평안북도 상징물 관리 규정’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상징 아래 '평안북도'라고 쓰여진 깃발로 교체되었다. # 사실 평안북도를 비롯한 북한 북부 지역에 사는 백두산 호랑이를 상징한다고 생각해보면 상징성이 크게 떨어지지도 않는데도, 오히려 상징성이 전혀 없는 정부상징으로 교체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있다.
3. 특징[편집]
![파일:평안북도(이북 5도).jpg](http://obj-sg.the1.wiki/d/3a/78/617359bcee19658c8081ba806ef5321b36074d46670c75123b59d4ef75686b74.jpg)
주요 도시로는 도청 소재지인 신의주시를 비롯해 강계시(강계군), 만포시(강계군 만포읍), 정주시(정주군), 희천시(희천군), 구성시(구성군)가 있으며, 그 외에 영변군, 의주군, 선천군, 중강진(자성군 중강면) 등이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북한의 핵시설이 영변군에 있다.
현재는 북한에서 자강도에 있지만, 강계 지방은 공기 좋고 물 좋은 동네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지금까지 미인의 고장으로 상당히 유명하다고 한다. 서해안 지방은 섬이 많은 다도해 지역이며, 갯벌이 많아 항구나 해수욕장은 잘 발달되지 않았다.
일제 말기인 1943년 당시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 총수의 약 40%(약 3만명)가 평북에 거주했는데, '일본인을 제외한 외국인'이란 거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다. 이는 대륙과 인접한 지리적인 특성 때문이다.[9]
4. 인구[편집]
5. 교통[편집]
경의선, 강계선, 만포선 철도가 지난다. 명목상이긴 하지만 1번 국도, 3번 국도, 5번 국도, 10번 국도 등이 평안북도를 지나간다. 그런데 78번 국도(강계~만포)는 1996년에 폐지되었다.
6. 특산물 및 산업[편집]
이 지방의 유명 음식으로는 순대가 유명하다고 한다. 의주의 왕만두도 유명했다.
특산물로는 정주 약밤이 유명하다고 한다. 운산 대유동 광산에서는 금이 많이 났다. 수력 발전소로 수풍댐이 유명하며 북한 치하에서 운봉댐, 위원댐 등이 더 건설되었다.
황해도, 평안북도와 함께 평지가 많아 농업이 많이 이루어진다.
신의주시를 비롯해 중국과의 국경지대라 북중무역의 거점지로서 성장하는 중이다.
7. 관광지[편집]
영변군의 묘향산, 동룡굴, 약산동대, 선천군의 동림폭포, 의주군의 통군정과 의주남문, 삭주군의 수풍호, 강계 인풍루, 후창군의 갈전협 등이 있다.
8. 남북통일 후 전망[편집]
북한 지역들 중에서도 발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신의주시 같은 경우 중국 단둥과 압록강을 두고 접하는 만큼 한중 무역의 거점이 되는 어마어마한 도시로 발전할 것이며, 경의고속도로와 경의고속선이 지나가게 될 정주군, 선천군, 용천군과 같은 지역들도 대도시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발전이 기대되는 곳은 경의선이 지나는 지역 및 강계시 - 만포시 지역뿐이고, 강남산맥, 적유령산맥이 지나는 내륙 산간 지역은 북한 정권의 인구 통제가 없어지게 되면 급속히 인구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9. 출신 인물[편집]
실향민, 1953년 정전 협정 체결 이전(1953.07.27)에 태어난 사람에 한하여 작성할 것.
- 강영훈(평안북도 창성군)
- 계광순(평안북도 선천군)
- 계용묵(평안북도 선천군)
- 계철순(평안북도 선천군)
- 계훈제(평안북도 선천군)
- 고병간(평안북도 의주군)
- 고병국(평안북도 의주군)
- 공병우(평안북도 벽동군)
- 길옥윤(평안북도 영변군)
- 길재호(평안북도 영변군)
- 길창덕(평안북도 선천군)
- 김규원(평안북도 선천군)
- 김덕승(평안북도 용천군)
- 김득황(평안북도 의주군)
- 김묵(평안북도 의주군)
- 김사성(평안북도 희천군)
- 김삼락(평안북도 박천군)
- 김상철(평안북도 태천군)
- 김선도(평안북도 선천군)
- 김성이(평안북도 신의주시)
- 김성일(평안북도 철산군)
- 김세윤(평안북도 영변군)
- 김숙현(평안북도 선천군)
- 김승학(평안북도 의주군)
- 김신재(평안북도 영변군)
- 김애실(평안북도 강계군)
- 김영도(평안북도 정주군)
- 김영일(평안북도 정주군)
- 김영훈(평안북도 운산군)
- 김우영(평안북도 선천군)
- 김우전(평안북도 정주군)
- 김원용(평안북도 태천군)
- 김윤도(평안북도 정주군)
- 김익준(평안북도 선천군)
- 김정남(평안북도 자성군)
- 김정흠(평안북도 용천군)
- 김종성(평안북도 박천군)
- 김준섭(평안북도 신의주시)
- 김준엽(평안북도 강계군)
- 김진기(평안북도 후창군)
- 김창순(평안북도 의주군)
- 김창영(평안북도 강계군)
- 김학원(평안북도 강계군)
- 김홍일(평안북도 용천군)
- 리영희(평안북도 운산군)
- 문선명(평안북도 정주군)
- 문용채(평안북도 정주군)
- 문윤극(평안북도 정주군)
- 문정숙(평안북도 선천군)
- 문창극(평안북도 삭주군)
- 문창모(평안북도 선천군)
- 문창탁(평안북도 신의주시)
- 박관숙(평안북도 위원군)
- 박성범(평안북도 선천군)
- 박승준(평안북도 의주군)
- 방상훈(평안북도 박천군)
- 방우영(평안북도 정주군)
- 방일영(평안북도 박천군)
- 방응모(평안북도 정주군)
- 방종현(평안북도 정주군)
- 배성서(평안북도 영변군)
- 백낙준(평안북도 정주군)
- 백낙환(평안북도 정주군)
- 백창섭(평안북도 영변군)
- 백철(평안북도 의주군)
- 사광욱(평안북도 철산군)
- 선우연(평안북도 정주군)
- 선우진(평안북도 정주군)
- 선우휘(평안북도 정주군)
- 설경동(평안북도 철산군)
- 손기정(평안북도 신의주시)
- 손인호(평안북도 창성군)
- 송성문(교육인)(평안북도 정주군)
- 송우범(평안북도 위원군)
- 송지영(평안북도 박천군)
- 승병일(평안북도 정주군)
- 신상초(평안북도 정주군)
- 신언한(평안북도 의주군)
- 안두희(1917년 평안북도 용천군)
- 안철원(평안북도 후창군)
- 오형근(평안북도 선천군)
- 유기천(평안북도 박천군)
- 유봉영(평안북도 철산군)
- 유창근(평안북도 의주군)
- 윤흥정(평안북도 초산군)
- 이기건(평안북도 의주군)
- 이기백(평안북도 정주군)
- 이봉수(기업인)(평안북도 의주군) [10]
- 이석제(평안북도 삭주군)
- 이성순/시라소니(평안북도 신의주시)
- 이승복(평안북도 선천군)
- 이영근(평안북도 정주군)
- 이용설(평안북도 희천군)
- 이우근(평안북도 용천군)
- 이유립(평안북도 삭주군)
- 이윤영(평안북도 영변군)
- 이익흥(평안북도 선천군)
- 이정선(평안북도 의주군)
- 이찬영(평안북도 철산군)
- 이태영(평안북도 운산군)
- 이홍근(평안북도 선천군)
- 오상원(1930년 평안북도 선천군)
- 임동원(평안북도 위원군)
- 장경근(평안북도 용천군)
- 장기려(평안북도 용천군)
- 장덕창(평안북도 의주군)
- 장도영(평안북도 용천군)
- 장상(평안북도 용천군)
- 장재민(평안북도 정주군)
- 장준하(평안북도 의주군)
- 장철(평안북도 의주군)
- 장호강(평안북도 철산군)
- 정기엽(평안북도 용천군)
- 정비석(평안북도 신의주시)
- 정영숙(평안북도 선천군)
- 조경철(평안북도 선천군)
- 조상건(평안북도 정주군)
- 조영식(평안북도 운산군)
- 지명관(평안북도 정주군)
- 차기벽(평안북도 용천군)
- 차약도(평안북도 선천군)
- 차인태(평안북도 벽동군)
- 최대현(평안북도 정주군)
- 최명헌(평안북도 정주군)
- 최윤식(평안북도 선천군)
- 최응찬(평안북도 신의주시)
- 최창봉(평안북도 의주군)
- 최창윤(평안북도 선천군)
- 최창학(1891)(평안북도 구성군)
- 최훈(평안북도 정주군)
- 채수반(평안북도 영변군)
- 탁원제(평안북도 박천군)
- 한이윤(평안북도 구성군)
- 함석헌(평안북도 용천군)
- 허순오(평안북도 구성군)
- 현상윤(평안북도 정주군)
- 홍두영[11] (평안북도 영변군)
- 홍종철(평안북도 철산군)
- 황용하(평안북도 자성군)
10. 출신 인물 (탈북인)[편집]
탈북자, 북한이탈주민 정전협정(1953.07.27) 이후에 북에서 탈북(이탈)한 사람에 한하여 따로 작성함.
11. 관련 문서[편집]
[1] 명목상 소재지[2] 이북5도위원회 소재지[추정] A B 추정치 기준[3] 평북도정협의회[4] 광복 당시 행정구역 범위 기준으로 2008년 추산.[5] 1921년에 이전. 과거 평안북도 도관찰부 / 도청은 영변군 영변면(1896년 ~ 1907년), 의주군 의주읍(1907년 ~ 1921년)에 있었다.[6] 정차동 - 구성 - 운산 - 초산 - 희천 이남 지역.[7] 1950년 10월 24일(청천강 도하) ~ 1950년 12월 2일(청천강 전투 종료)[8] 정주 - 박천- 영변 - 구장 이남 지역[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평안북도[10] 1916~2000년 5월 14일 소천 신일고등학교 설립자[11] 남양유업 창업주[12] 탈북자(북한이탈주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