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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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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
국방부 조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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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변천 : 헌병총사령관 (초대) ▸ 국방부 합동조사대장 (2 ~ 11대) ▸ 국방부 조사대장 (12 ~ 24대) ▸ 국방부 합동조사단장 (25대 ~ 35대) ▸ 국방부 조사본부장(36대 ~ 현임)

※ 계급 변천 : 대령 (3, 5~8, 10, 12, 14, 15, 20~22, 28, 34, 42대) ▸준장 (2, 4, 9, 18~19, 25, 29~30, 43~ 현재) ▸소장 (11, 13, 16~17, 23~24, 26~27, 31~33, 35~41대) ▸ 중장 (초대)





제18대 국방부 조사대장
김진기
金晋基 | Kim Jin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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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2년 4월 19일
평안북도 후창군
사망
2006년 12월 28일 (향년 74세)
학력
평양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경영학/석사)
경력
한국토지공사 이사장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9기)
갑종간부후보생 (6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50년 ~ 1980년
최종 계급
준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본부 헌병감계엄사령부 치안처장
주요 보직
제3야전군사령부 헌병참모
육군본부 헌병감실 차감

1. 개요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육군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준장, 병과는 헌병, 최종 보직은 육군본부 헌병감 겸 계엄사령부 치안처장이다. 호는 산민(山民), 본관은 김해, 종교는 개신교이다.

장태완, 정병주, 하소곤 장군과 더불어 12.12 군사반란 당시 신군부에 끝까지 저항한 장군 중 1명이다.


2. 생애[편집]


1932년 평안북도 후창군[1]에서 태어났다. 평양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2] 6.25 전쟁 직전 월남하여 육군사관학교 9기로 입교하였으며 이후 다시 대한민국 육군 갑종간부후보생 6기로 임관되었다. 6.25 전쟁베트남 전쟁 등에 참전하였고 보국훈장 삼일장, 보국훈장 천수장, 화랑 무공훈장, 베트남 1등 무공훈장 등을 수훈받았다. 헌병 중대장, 헌병 대대장, 3군 헌병참모, 헌병감실 차감, 국방부 조사대장, 육군 헌병감 등을 지냈다.

1979년 육군본부[3] 헌병감으로 재직 중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체포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이 김재규임을 알게 된 정승화는 육군 벙커로 김진기를 불러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으로 위장시킨뒤 김재규를 체포해 국군보안사령부에 인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김진기는 김재규를 유인하여 헌병 중대장 이기덕 대위, 국군보안사령부 오일랑 중령과 함께 체포해 국군보안사령부로 인계했다.[4] 이후 같은 해 계엄 선포 이후 계엄사령부 치안처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치안처장 재직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정보 독점 월권 행위로 인해 치안처 및 헌병대에 정보가 오지 않자 당시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전두환의 월권 행위에 대한 보고를 하기도 했다.[5]

1979년 12월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과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진압하려 하였다. 당시 그는 신군부에 의해 친정승화 계열로 분류되어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함께 연희동 위장 만찬에 유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헌병감실에 연희동 음식점 번호를 알려놓고 나와 정승화 총장이 불법 연행되었을 때 연락을 받아 다른 장군들에게 알렸다. 육군본부로 복귀한 후 보고를 통해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지했고, 이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체포 승인을 받기 위해 총리공관에 머물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체포하라고 직속 부하인 총리공관 헌병 특별경호대장 구정길 중령에게[6] 명령하지만 헌병 경비 병력들이 하나회 병력인 대통령 경호실 병력[7]에 의해 무장해제되며 실패한다. 김진기는 휘하의 헌병 병력을 이용해 최규하 대통령을 구출하려 했지만 하극상으로 인한 병력 부족으로 좌절된다.[8] 그 뒤 수도경비사령부 지휘부에서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무장해제된다. 국군보안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1980년 예비역 준장으로 자진 예편한다.[9]

다른 진압군측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김진기도 하나회에 소속된 부하들에게 하극상을 당했다. 전두환의 명령으로 정승화를 체포한 우경윤 범죄수사단장(대령)과 성환옥 헌병감실 기획과장(대령) 모두 직속 부하였다.[10] 애초에 그들이 전두환의 명령으로 정승화를 체포하지 않았더라면 12.12 군사반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별개로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를 연희동 만찬으로 유인했던 조홍 헌병단장은 병과 후배로 이미 후임자로 내정되어 있던 상태였다. 이 배신으로 인해 김진기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후에 그는 "평생을 쿠데타의 악몽에 시달렸다"라고 밝혔다.

예편 후 수원에서 농사를 짓다 보문도에서 광어 양식을 하기도 하고 일본 평화안전보장 연구소에서 지정학을 연구하였다. 김영삼 정부 때 한국토지공사 이사장[11]을 역임하였으며 1993년 이건영, 하소곤, 정승화 등과 함께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고발했다. 2006년 지병으로 사망한 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4. 여담[편집]




5. 관련 문서[편집]





[1] 오늘날 량강도 김형직군.[2] 재학 당시 성적이 우수해 1학년 월반했다고 한다.[3] 1990년 이전에는 육본이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었다. 현재는 그 자리에 전쟁기념관이 세워져 있다.[4] 후에 김진기는 이 때가 삶에서 가장 긴장되었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5] 이 보고는 정승화가 전두환을 숙청하려고 결심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6] 당시 최규하는 대통령에 당선된 상태였으나 대통령 취임 선서 이전이라 총리공관에 머물러 있었고 총리공관의 경비는 육군본부 헌병감실 소속 헌병대가 맡고 있었다.[7] 병력을 이끄는 정동호 당시 경호실장 직무대리 겸 상황실장과 고명승 경호실 작전과장 모두 하나회였다.[8] 성환옥, 우경윤 대령이 유사시 지휘 가능한 33헌병대 병력을 모두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이끌고 갔기 때문이다.[9] 사실상 강제 예편이나 다름없었다.[10] 우경윤은 체포 도중 오인 사격으로 인해 반신불구가 되어 군에서 예편한다.[11]한국토지주택공사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