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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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테파노 3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2. 행적[편집]
네피 공작 토토의 동생이다. 767년 교황 바오로 1세가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토토는 로마 귀족들과 접촉해 동생을 교황으로 세우는데 협조해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바오로 1세의 심복으로서 새 교황 선출을 관리하는 프리미케리오를 맡고 있던 크리스토포로는 토토의 동생은 평신도일 뿐인데 교황이 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토토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767년 6월 28일 바오로 1세가 사망하자, 토토는 형제 파시보, 파스칼, 그리고 무장병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야밤에 산 파크라치오 문을 통해 시내로 진입한 뒤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고 유명 인사들을 모은 뒤 협조를 요구했다. 프라에네스테의 주교 조르조는 동생을 성직자로 세우라는 요구에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이같은 지시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지만, 토토의 강압을 버티지 못하고 신부로 세웠다. 그후 콘스탄티노는 산 로렌조 성당의 부집사가 되었다가 같은 날 집사로 승격했다. 성직자들은 이 같은 상황에 불만을 품었지만 감히 저항할 수없었고, 크리스토포로도 로마를 떠나 은거했다.
767년 7월 5일, 콘스탄티노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에 선임되었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국왕 피피누스 3세에게 교황청과 프랑크 왕국의 동맹을 이어가겠다며 자신을 교황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피피누스 3세는 이 편지에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크리스토포로와 아들 세르지오는 로마를 떠나 스폴레토의 공작 테오디키우스를 찾아가서 콘스탄티노 2세를 폐위시키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테오디키우스는 두 사람을 랑고바르드 왕국의 수도인 파비아로 보냈고, 랑고바르드 국왕 데시데리우스는 이들을 도와줌으로써 교황청에 대한 통제권을 얻고자 했다.
768년 7월 29일, 스폴레토 공국의 두 도시 리에티와 푸르토나의 분견대가 포함된 랑고바르드 군대가 로마에 입성한 뒤 토토 공작을 살해했다. 콘스탄티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된 뒤 첼라노바 수도원에 보내졌다. 친 랑고바르드 인사들은 필립보를 새 교황으로 옹립했지만, 크리스토포로가 이를 무효로 처리하고 스테파노 3세를 새 교황으로 세웠다. 스테파노 3세는 768년 8월 7일 교황좌에 공식적으로 착좌했다. 이후 알라트리에서 콘스탄티노 지지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내 진압되었고, 콘스탄티노는 실명형에 처해졌다.
769년 4월 12일 라테라노 성당에서 열린 공의회에 끌려온 콘스탄티노는 평신도로서 어떻게 감히 베드로의 의자에 앉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로마인들이 바오로 1세의 억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나를 강제로 교황으로 삼았소."
그리고는 땅바닥에 몸을 던지고 팔을 벌리며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심판관들은 마음이 약해져서 판결을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다음날 다시 소환된 콘스탄티노는 선례를 들면서 자신이 교황이 된 것을 정당화하려 했다.
"형제들이여, 나는 변명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소. 나와 같은 평신도인 세르지오는 라벤나 주교로 봉헌되었소. 평신도 스테파노는 나폴리 주교로 서품되기도 했소."
그러자 모든 사제들이 격노하여 그의 얼굴을 땅바닥에 내리꽃고 성당에서 쫓아냈다. 이후 공의회는 콘스탄티노를 파문에 처하고 혀를 뽑아버리라고 명령했으며, 그에 관한 모든 기록과 법령을 불태우게 했다. 그후 첼라노바 수도원으로 되돌려보내진 그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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