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파시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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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교황 베네딕토 6세, 베네딕토 7세, 요한 14세에 대적한 대립교황.
2. 행적[편집]
본래 이름은 프란코(Franco)로, 로마의 귀족인 페루치우스(Ferucius)의 아들이었다. 972년 추기경을 맡기 전까지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972년 9월 6일 교황 요한 13세가 사망한 뒤,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는 대다수 선거인단이 성 테오도르 교회의 추기경인 베네딕토 6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973년 5월 7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가 사망한 뒤 새 황제 오토 2세가 독일 귀족들과의 정쟁에 집중하느라 로마에 신경쓰지 못하자, 평소 황제가 로마에 간섭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로마 귀족들은 이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974년 6월 집정관 직위를 가진 크레센치오와 프란코 페루치가 이끄는 반란군이 베네딕토 6세를 체포해 산탄젤로 성에 감금했다. 그 후 프란코는 스스로 교황 보니파시오 7세로 즉위한 뒤 베네딕토 6세를 재판에 기소했다.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오토 2세는 시코 백작을 특사로 보내 교황의 석방을 요구하려 했다. 그러나 시코 백작이 산탄젤로 성 인근에 도착했을 때, 스테파노라는 이름의 신부가 보니파시오 7세의 지시에 따라 베네딕토 6세를 교살했다.
로마 민중은 전 교황이 교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다. 보니파시오 7세는 재임 한 달 만인 974년 8월에 동로마 제국에 속한 이탈리아 남부로 도피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이후 수트리의 주교였던 베네딕토 7세가 새 교황에 즉위한 뒤 공의회를 소집하고 보니파시오 7세를 파문했다. 980년 베네딕토 7세가 다른 곳에 가 있는 틈을 타 보니파시오 7세가 로마로 잠입한 뒤 라테라노 궁전을 장악했지만, 베네딕토 7세가 직접 소환한 오토 2세의 군대가 로마에 진입하자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아났다.
983년 7월 10일 베네딕토 7세가 사망한 뒤 요한 14세가 교황에 올랐다. 그러나 983년 12월 7일 오토 2세가 사망했고, 새 황제가 된 오토 3세는 겨우 3살이었고 그를 대신해 섭정을 맡은 어머니 테오파노는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찬탈 시도를 저지하느라 바빠서 요한 14세를 도와줄 수 없었다. 보니파시오 7세는 이때를 틈타 동로마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지원에 힘입어 984년 4월 로마로 진입해 라테라노 궁전을 장악한 후 요한 14세를 산탄젤로 성에 투옥시켰다. 요한 14세는 같은 해 8월 20일에 굶어죽거나 중독사했다고 전해진다.
보니파시오 7세가 로마에 돌아온 뒤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985년 7월 20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의 상황을 볼 때 자신이 오랜 망명 생활을 하게 만든 자들에게 잔혹한 복수를 해 수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유해는 로마 시민들에 의해 시가지 곳곳에 끌려다니다가 라테라노 궁전 앞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상 밑에 던져졌다. 다음날 동정심이 많은 사제들이 시신을 수습해 성 베드로 성당에 안장했다.
그는 20세기 초까지 합법적인 교황으로 간주되어 주요 교황 목록에 포함되었고, 그의 초상화는 로마 성벽 바깥의 성 바울 대성당에 다른 교황 초상화들과 함께 장식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역대 교황의 행적을 정리한 <교황청 연감(Annuario Pontificio)>을 새롭게 편찬할 때 그가 집권하는 과정이 불법적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결국 그는 대립교황으로 격하되었고 초상화도 치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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