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키 로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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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최초의 미국 흑인 야구선수."오늘날, 모든 미국인들은 재키 로빈슨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oday, I think Every American should say a special word of thanks to Jackie Robinson.
1947년의 그의 데뷔는 미국이 민권법을 제정하기 16년 전이고, 선거 관련 법안을 제정하기 18년 전이었다.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20세기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로 활약하며 스포츠계에서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야구선수를 은퇴하고 나서는 흑인 저소득층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한 사업을 하는 등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한 전 구단 영구결번 선수로 지정되었고 2003년 야구 선수로써는 두 번째로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았다.[5]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재키의 형 매튜 매킨지 '맥' 로빈슨도 1936 베를린 올림픽 육상 200m 은메달리스트 출신[6] 일 정도로 체육인 유전자를 타고난 집안에서 태어났다. UCLA에 진학해 미식축구, 농구, 수영, 테니스, 육상 4개 종목에서 활약하며 모든 종류의 운동에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은근 저평가받는 부분인데 로빈슨은 역대 NCAA 최고의 운동선수로 꼽을 만한 대학 시절을 보냈다. 미식축구 선수로서는 1940년 팀에서 패싱, 러싱 야드와 득점 부문 선두를 기록하는 팀의 에이스였고, 멀리뛰기도 1940년 NCAA 대회를 우승하며 (올림픽이 취소되지만 않았더라도) 국대에 뽑힐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농구에서도 1940, 42년 컨퍼런스 득점왕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만능 스포츠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빈슨은 1940년 야구 시즌에 .097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7] 학창 시절에는 오히려 야구를 못 하는 축에 속했다. 타격은 형편없지만 스피드와 수비 능력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대학을 떠난 뒤에는 뉴 딜 시대 청년조직인 NYA(National Youth Administration)에서 체육진흥 업무를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징집되었다. 흑인들로만 구성된 전차부대인 761 전차대대에 장교로 임관했지만, 역시 인종차별과 맞서다가[8] 전선에는 서지 못하고 758 전차대대로 전출된후 1941년 11월에 명예제대하였다. 군대를 나온 뒤 흑인대학 운동부 직원 등의 일을 하다 니그로리그 팀 캔자스시티 모나크스와 계약하며 본격적으로 야구계로 뛰어들게 되었다.
2.2. 메이저리그 활약[편집]
흑인 선수를 데뷔시키고자 했던 당시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 브랜치 리키[9] 에 의해 발탁되어 1947년 드디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데뷔하게 되었다.[10] 초기에는 빈볼의 위협에 타석에서 1루에 갈때마다 상대팀 1루수의 발길질에 시달려야했고, 수비할때도 1루로 달려오는 타자가 로빈슨의 발목을 공격하는 일도 수차례 있었으며,[11] 심판도 은근슬쩍 로빈슨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리고,[12] 언론들도 로빈슨에게 호의적이지 않아 "검은 파괴자", "검은 타이 콥"이라는 식으로[13] 기사를 내보내고, 동료들로부터도 따돌림 당했지만, 피 위 리즈의 어깨동무 사건 이후[14] [15] 선수들은 물론 팬들도 그를 진심으로 포용하게 되었고, 마침내 메이저리그에 유색 인종들이 활약하는 역사적인 계기를 열었다는 것이 보통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단, 이후 공개된 인터뷰 등에서 피 위 리즈와의 어깨동무 일화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관련 근거들도 꽤 신빙성이 있어 이 미담들에는 어느 정도의 각색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16] 또한 단순히 흑인이라고 비난만 받았던 것이 아니라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하니, 어느 정도 감안해서 볼 여지가 있다.[17]
아무튼 이런 일화들과는 상관없이, 그는 흑인 인권 운동가로도 유명했으며, 여러모로 미국의 흑인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2.3. 은퇴와 생애 후반[편집]
브루클린 다저스 마지막 시즌에 로빈슨은 1형 당뇨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경기력도 전성기에 비하면 떨어져[19] 선수생활에 더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다. 다만 말년에 후배 선수의 잠재력을 발굴했는데, 바로 샌디 코팩스 옹 되시겠다. 그는 코팩스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팀이 그를 중용하길 원했지만, 이 시기의 코팩스는 아직 재능이 개화하지 않은 선수였던지라 로빈슨은 당시 감독이었던 월터 앨스턴과 마찰을 자주 일으켰다고 한다. 아무튼 다저스는 경기력이 떨어진 로빈슨을 라이벌인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했지만 본인이 거부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후일 밝힌 내용에 따르면 이미 은퇴 2년 전에 1957년 시즌 후에 은퇴를 하고 커피 체인인 Chock full o'Nuts의 이사 자리에 취임하기로 해당 회사의 사장과 약속이 돼 있었다고 한다.
은퇴 이후에는 사업을 하면서 흑인직원 고용, 직업 훈련 교육 지원 등 흑인 일자리 창출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특히 그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젊은 날 당했던 차별 때문에 흑인 인권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또 공화당원으로서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1957년 민권법 통과를 주도한 리처드 닉슨을 지지했고,[20] 린든 B. 존슨의 베트남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넬슨 록펠러 경선 캠프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민권법을 반대한 배리 골드워터가 공화당 대선후보가 되자, 자신의 처지를 히틀러 치하 독일의 유대인에 비유하기도 했다.#[21]
그러나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닉슨이 남부 진출을 위해 스트롬 서먼드같은 인종차별주의 성향 남부 정치인과 정치적으로 연대하자, 로빈슨은 닉슨 지지를 거부하고 # 민주당 휴버트 험프리를 지지한다. 닉슨 행정부 중에도 로빈슨은 인종 통합을 호소하는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다. #
말년에는 지병인 당뇨병으로 인해 망막에 이상이 생겨 눈이 거의 안 보이게 되었고, 비교적 이른 나이인 53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재키 로빈슨이 생을 마감한 곳은 코네티컷의 스탬포드이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OPS 히터 타입의 빼어난 공격력에 수비력도 우수했고 주루도 매해 양수의 생산성을 보인[22] 전형적인 5툴 플레이어였다.
타격 성적은 통산 1382경기 5804타석에 나와 1518안타 137홈런 734타점 197도루를 기록했으며 비율스탯은 311/.409/.474 OPS .883,OPS+132 wRC+135 wOBA 406이다. 타석에서 로빈슨의 강점은 10시즌 통산 740볼넷/291삼진이라는 어마무시한 BB:K,삼진율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넘사벽급의 선구안과 컨택트를 과시했고, 커리어 초기에는 2번타자로 뛰었으며 후반에는 4번타자로도 뛰면서 도루왕 2회, 1949년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2루수로 맹활약하면서 신인상(1947)과 시즌 MVP(1949)도 수상했고, 팀의 내셔널리그 우승 및 월드시리즈 우승(1955)에도 기여하며 다저스의 뉴욕 시절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런 활약 덕분에 메이저리그 10년 간 fWAR 57.3, bWAR 61.7을 기록했다. 10년 동안 60 내외의 WAR를 기록했다는 것은 매 해 MVP 컨텐더급 활약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로빈슨은 역대 센터 내야수의 단기 임팩트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며, 특히나 그가 1형 당뇨병을 앓았던 인물임을 생각하면 인종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거대한 장벽을 두 개나 넘고 최고의 선수로 올라선 인간승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할 정도이다.
실제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2루수를 꼽을 때 로빈슨은 부족한 누적에도 불구하고 5위 안에 무난히 들어간다. 그만큼 짧은 커리어 동안 보여준 퍼포먼스가 대단했다는 의미다. 훨씬 좋은 누적 성적을 기록한 명예의 전당 2루수들인 크레이그 비지오, 로베르토 알로마, 라인 샌드버그 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고,[23] 로드 커류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다. ESPN은 그를 조 모건보다도 위인 2위로 평가했다. 그 인종차별을 뚫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훌륭한 실력이었다.
명예의 전당에는 MLB의 모든 유색인종 선수의 시작점이라는 상징성과 그가 선수 생활 동안 보여준 실력으로 인해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오른 첫 해에 77.5%의 득표로 입성했다.[24]
4. 연도별 성적[편집]
- 니그로리그 기록이 메이저리그의 역사로 인정되었으므로 니그로리그 기록이 포함되지만, 남아 있는 니그로리그 경기 기록이 부실하기 때문에 니그로리그 기록은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만 반영되어 있다.
5. 명예의 전당 통계(Hall of Fame Statistics)[편집]
- JAWS - Second Base (12th)
6. 영구결번[편집]
그가 선수 시절 뛰었던 등번호 42번은 다저스 구단 내에서는 1972년 6월 4일 홈경기를 앞두고 영구 결번이 되었고[27] , 이후 그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지 정확히 50년이 지난 1997년 4월 15일에 셰이 스타디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vs 뉴욕 메츠 전에서 메이저리그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20세기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28] 로서 그의 불꽃 같았던 야구인생을 기리고 있다.
단, 1997년 시즌 당시에 이미 42번을 달고 있던 선수는 예외적으로 42번을 계속해서 달 수 있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 선수들 중 마지막까지 현역이었던 마리아노 리베라가 은퇴한 2013년 시즌 종료 후에야 전구단 영구결번이 완성되었다.
1997 시즌 MLB 전체 구단은 유니폼 소매에 재키 로빈슨 데뷔 50주년 기념 패치를 붙이고 시즌에 임했다. 상술됐듯, 로빈슨은 다저스의 연고지 이전을 강력히 반대했던지라 결국은 로스앤젤레스가 아닌 뉴욕 메츠의 셰이 스타디움에서 행사를 가졌다. 또한 미망인 레이첼 여사는 LA로 가버린 다저스보다는 '브루클린 다저스'의 역사를 잇고 있는 뉴욕 메츠에 더 마음이 간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실제로도 뉴욕 메츠는 '재키 로빈슨 재단'을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구단에서 영구결번된 선수로는 재키 로빈슨 외에 NHL의 웨인 그레츠키의 99번과 NBA의 빌 러셀의 6번이 있다.[29]
이외에도 로베르토 클레멘테를 전 구단 영구결번으로 올리자는 이야기가 2000년대 중반 논의되었으나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거부했다.
비슷하게, 아메리칸리그의 최초 흑인 선수였던 래리 도비[30] 의 14번도 전구단 영구결번으로 올리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것도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대신 인디언스는 래리 도비의 날 행사를 매년 한다.
한편,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이 전구단 영구결번 되기 전부터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는데,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 마이너리그 팀인 몬트리얼 로열스에서 활약했기 때문이다.[31] 이 때문에 스타드 올랭피크 드 몽레알에 그의 동상이 있기도 하고,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옛 구장이 있던 파르크 자리(Parc Jarry) 근처에 그의 얼굴을 그린 그래피티가 있을 정도로 몬트리올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7. 재키 로빈슨 데이[편집]
원래 모든 선수들이 42번 저지를 입고 나오는 재키 로빈슨 데이의 아이디어가 나올 당시, 분위기는 굉장히 살벌했었다. 당시 한참 인종차별 협박에 시달리면서 경기에 나오던 재키 로빈슨이 "다음 경기에도 나오면 42번, 너 총으로 쏴버린다."는 정체불명의 살해협박을 받고 고통받을 때, 동료였던 외야수 진 허만스키(Gene Hermanski, 1920~2010)가 우리가 모두 42번을 입으면 누군지 모르겠지? 라는 말로 농담을 하며 로빈슨을 격려해준 일화가 시작이었다.
이후 수십년이 지난 2007년 켄 그리피 주니어가 4월 15일에 재키 로빈슨을 기리기 위해 42번 저지를 입는 것을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건의하여 실행했던 것부터 시작, 이후 각 팀의 흑인 선수 한 명에게 4월 15일 경기에 42번을 입고 뛰게 하도록 하다가 현재는 '재키 로빈슨 데이'로 지정, 이 날만은 모든 선수와 코칭 스탭, 그리고 심판까지 등번호 42번 저지를 입고 경기에 임한다.[32] 이 부분은 2015년 6월 2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참고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재키 로빈슨 데이 경기는 무조건 홈 경기로 배정된다.[33]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당초 재키 로빈슨 데이로 예정된 4월 15일에 리그 개막조차 하지 못하게 됐고 결국 8월 28일로 이 행사가 연기됐다. 공교롭게도 위스콘신 흑인 총격 사건으로 미국 내 인종차별에 대한 반발 감정이 극에 달하던 시점에[34] 재키 로빈슨 데이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그날 영화 42에서 재키 로빈슨 역을 맡았던 채드윅 보즈먼이 43세의 나이에 대장암으로 사망하였다.
8. 미디어 믹스[편집]
8.1. 영화 [편집]
자세한 내용은 42(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재키 로빈슨 역을 채드윅 보즈먼이 맡았다. 그래서 유튜브에서는 로빈슨의 손자가 블랙 팬서라는 농담이 나돌기도 한다.
9. 여담[편집]
-"내가 재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상대팀 1루수였어. 그날 내가 안타를 치고 달리면서 일부러 그의 발목을 피가 나도록 밟아버렸지. 당시 그가 아무런 보복행위를 할 수 없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걸 악용한 셈이야.[35]
쓰러져 있는 그를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며 실실 웃었어. 2년 뒤 에베츠 필드에서[36] 2루까지 달렸는데, 거기에 있던 로빈슨이 공을 잡아 내 입에 냅다 내려 꽂더군. 그때 이빨이 4개나 부러져서 사방천지에 피를 토하고 있는데 놈이 내 눈을 쳐다보며, "난 절대로 잊지 않아"라고 하더군. 난 그때부터 평생 그 대단한 개X끼를 존경했고.[37]-에노스 슬로터, 前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우익수, 명예의 전당 헌액자
- 한 성깔 했던 모양이다(...).
- 포스트시즌에 약했다. 정규리그 통산 타율은 .311에 달하지만 포스트시즌 통산 타율은 .234에 그쳤다.
10. 둘러보기 틀[편집]
[1] 제761전차대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1942년 육군 장교로 지원했으나,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복싱 헤비급 챔피언인 조 루이스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루이스의 도움으로 입대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입대를 하였으나, 군복무 중 버스에서 흑인 좌석으로 가는 걸 거부해서 군법회의에 소환되기도 하였으며, 상습적으로 인종차별을 했던 동료 백인 장교와 싸우다 불명예제대를 당할 뻔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은 군생활을 보냈다. 그래도 군복무 기간동안 장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고 한다.#[2] 루키 시절[3] 메이저리그로 본격 데뷔하기 전 브랜치 리키 다저스 단장이 인종차별이 덜한 몬트리올 로열스로 보냈다. 이런 인연으로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1997년 이전에 이미 42번을 구단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도 했다.[4] #[5] 재키 로빈슨은 1972년 타계하여 유가족들이 대신 훈장 수여식에 참석하였다. 첫 번째는 1973년 수여 받은 로베르토 클레멘테이고, 로빈슨 다음으로 수여 받은 인물은 2017년의 래리 도비이다.[6] 금메달을 딴 사람이 그 유명한 제시 오언스이다.[7] 팀에서 함께 뛰었던 동료들 중에는 린 콤튼도 있었다. 밴드오브브라더스의 그 사람이다.[8] 대학 시절 다친 발목의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가다가 흑인은 버스 뒷자리로 이동하라는 버스기사와 시비가 붙어 헌병이 출동했고, 군사법원까지 가야 했다. 참고로 로빈슨이 탄 군 버스는 인종분리가 철폐된 노선이었으며 이 점이 참작되어 로빈슨의 혐의는 심문 과정에서의 불복종 정도로 축소되었다.[9] 미국 프로야구의 역사에서는 거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팜 시스템부터 시작해서 최초의 흑인 재키 로빈슨 외에, 최초의 중남미 선수 등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켰다. 그야말로 트인 사고를 가진 만능의 천재로 야구 외에도 능해서 수많은 자격증의 보유자였다. 야구 쪽으로는 거의 토마스 제퍼슨이나 에이브러햄 링컨급의 위치에 있는 인물.[10] 재키 로빈슨보다 더 실력은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고 브랜치 리키도 공인했지만, 재키 로빈슨의 최대 장점은 붙임성과 스스럼 없는 성격이었다. 위대한 타자이자 스즈키 이치로 이전 단일시즌 안타 신기록을 갖고 있었고 은퇴 후 스카우터로 활동하던 조지 시슬러에게 브랜치 리키는 무엇보다 정신력이 강한 선수를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시슬러가 데려온게 재키 로빈슨이었다. 아메리칸 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래리 도비가 속으로 냉가슴만 앓는 성격이라 더더욱 고생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무엇보다 중요한 장점이었을 것이다.[11] 영화 42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에노스 슬로터가 로빈슨의 발목 뒷부분을 스파이크로 찢어내는 장면으로 재현되었다. 참고로 이 에노스 슬러터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악질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고 카디널스 선수들을 선동해서 다저스와 경기를 보이콧하기도 했다.[12] 리그 데뷔 첫타석 2루땅볼아웃이 오심 의혹이 있다. 영화 42에선 1루 베이스를 밟고 한참 지나서 공이 왔으나 아웃을 선언한다. 고깝게 쳐다보는건 덤.[13] 시간이 한세기 가까이 흘러 조금씩 재평가가 내려지고 있는 현대에 비해 이 시기 타이 콥에 대한 엄청난 악평을 고려해보면.....[14] 자세한 내용은 피 위 리즈 항목 참조바람.[15] 또한 브루클린 다저스의 명감독이자 '사람 좋으면 꼴찌'라는 명언을 남긴 레오 듀로셔 감독이 로빈슨을 거부한 팀원들을 향해 "난 저 친구가 검둥이든 외계인이든 상관 안해. 중요한 건 저 녀석이 잘해야 니들 연봉도 오른다는 거야, 바보들아."라며 일갈한 것도 큰 힘이 됐다. 사실 여러 일화를 통해 추리해 보자면 듀로셔 감독은 흑인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가진 게 아니라 진짜로 재키 로빈슨이 흑인이든 피부가 파란색 외계인이든 무지갯빛 반짝이 피부를 가졌던 간에 경기장에서 활약해서 경기만 이기면 장땡이었을 사람이었다. 훗날 레오 듀로셔는 이후 역대 최고의 흑인 야구선수라는 윌리 메이스의 선수시절 감독이 되며 윌리 메이스를 가장 아끼는 걸로 유명했다. 본인이 진정으로 정말 인종 차별에 열려있고 깨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행보로 미루어 봤을 때 듀로셔 감독은 인종 차별에 관해서는 까일 게 없는 수준의 야구 감독이었다. 그는 야구만 잘하면 출신, 피부색, 습관 등에 구애받지 않고 중용했다. 시대상을 감안하면 이는 선구자적 마인드며 그 자체로도 높게 평가받을 만 한 것이다. 그 대신 듀로셔는 야구를 못하면 피부색을 떠나 연봉이 얼마건 자신과 얼마나 오랫동안 지냇건 얼마나 그간 명성이 빛났건 상관없이 가차없게 갈구고 마이너로 내려버리는 공정하고 진정한 야구인이었다.[16] 피 위 리즈 본인이 훗날 인터뷰에서 "필드에서 재키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지. 사람들이 그걸 보면 우리가 친구라는 것을 알테고, 그러면 재키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어."라는 발언을 한 바 있으며, 로빈슨의 입단 소식을 듣고 보인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부터 인종차별적인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는 점, 백인이면서 흑인을 실드 쳐줬다는 이유로 그의 고향인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욕먹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 그가 평생 자신의 집 서재에 재키 로빈슨과 어깨동무한 사진을 걸어놓았다는 사실 등을 통해 추정해보면 어쨌든 1947년 5월 14일에 피 위 리즈가 어쨌든 관중들의 인종차별적인 분위기에 대항하여 뭔가 행동을 했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아마도 당시 경기에서 피 위 리즈가 관중들의 인종차별적인 분위기에 대놓고 반발하는 모종의 제스쳐를 취했다는 사실과 재키 로빈슨과 피 위 리즈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실제 사진이 결합해서 현재의 어깨동무 일화라는 형태로 구전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17] 저 시대의 백인들 중 인종차별주의자도 있었지만 반대로 인종차별을 비도덕적, 혹은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역대 2루수 랭킹에서 한손에 꼽히는 대선수였으니까 그의 피부색을 신경쓰지 않는 관중들에게는 당연히 환영받는 존재였을 것이다.[18] 필라델피아의 감독 겸 선수였던 밴 채프먼이 브루클린 다저스와의 경기중에 재키 로빈슨에게 온갖 모욕을 줬고, 이것에 대해 여론의 반발이 일어나자 재키 로빈슨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이다...라고 할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진기자 및 여론에 "이거 봐봐. 난 재키 로빈슨과 화해했음. 이제 그만 좀 X랄들 하세요."라는 뜻의 보여주기 식 행사였다.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채프먼은 흑인과 손을 맞대기 싫어해서 재키 로빈슨은 채프먼의 손 대신 그가 들고 있는 방망이를 붙잡고 있다. 전기영화 42에서 이 장면이 상세하게 묘사되니 참고 바람. 여담으로 전기영화 42의 후일담에 의하면 밴 채프먼은 1948년 감독직에서 짤린 이후, 재키 로빈슨 모욕 사건당시 유태인을 언급하며 항변했는데 하필 당시 재계에 영향력이 강한 유태인을 건드려서 다시는 감독이 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단지 영화 42 내용대로면 방망이로 악수를 대신하자고 제안한건 재키 로빈슨 본인으로 농담 겸 배려였던걸로 보인다. 그래도 밴 채프먼은 노년때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자기가 인종차별을 저질렀다고 인정을 하였고, 그 당시 자신이 부끄러웠다면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자기 아들이 흑인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자랑스러웠다고도 밝혔다. 실제로 이 사건이 일어난 날 재키 로빈슨은 안타로 출루, 도루 후 상대 실책으로 3루까지 진루한 이후 적시타 때 홈을 밟았고, 팀은 0:1 승리를 거둔다. 이 날의 경기 박스스코어이다.[19] 아래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그 떨어졌다는 경기력이 WAR 4 정도다. 선수 생활을 못 이어갈 만큼 못 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20] 당시 대부분의 흑인은 존 F. 케네디를 지지했다.[21] 본선에서는 당연히 존슨을 지지했다.[22] 사실 도루성공률은 197성공 76실패 61.5%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대 백인 야구계에서 보기 힘들었던 공격적인 주루플레이와 허슬은 많은 야구인들과 팬들에게 인상깊게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주루 부문 승리기여도가 양수를 꾸준히 기록한 것에서 나쁜 도루 성공률을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의 주루 센스가 있었다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다.[23] 사실 이는 당연한 것이, 눈에 보이는 누적 스탯은 최소 2000안타, 200홈런씩을 때려낸 이 셋에 비해 1500안타, 130홈런의 재키 로빈슨의 기록은 다소 부족해 보이나 이는 투고타저와 볼넷을 많이 골라낸 특유의 플레이스타일 때문이었고 실제 승리 기여도는 전부 60대 초중반으로 유사하다. 게다가 이 선수가 만 28세에 데뷔를 한 것을 감안하면...[24] 밥 펠러와 함께 헌액되었다.[25] 니그로리그 기록이 메이저리그의 역사로 인정되었으므로 니그로리그 기록이 포함된다.[26] 캔자스시티 모나크스(니그로리그 팀)[-] 기록 없음[27] 로이 캄파넬라, 샌디 코팩스 역시 이날 함께 영구 결번을 받았다.관련기사 [28] 1800년대에 빌 화이트를 비롯한 흑인 선수들이 내셔널리그 등에서 뛰었다.[29] 재키나 빌의 영구결번은 인종차별을 깬 공로도 있는데 반해, 웨인은 순수 기록만으로 영구결번을 받았다. 정규시즌 공격 포인트만 놓고봐고 2857점으로 2위 야로미 야거는 1891점, 즉 966점으로 차이가 매우 크다. 물론 웨인의 영향으로 약 6개의 NHL팀을 추가로 창단하게 만드는 영향을 준 공헌도 있다.[30]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재키로빈슨보다 고작 3개월 뒤에 데뷔[31] 사실 이 두팀은 같은 도시가 연고지였다는거 외에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몬트리얼 로열스는 1961년에 뉴욕주로 이사를 해서 이름을 시라큐스 치프스 (Syracuse Chiefs)로 개명했고,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1969년에 창단되었고 2004년에 워싱턴 D.C로 이사를 한 뒤 워싱턴 내셔날스로 개명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각자 연고지를 옮기고 개명을 한 후인 2009~2018년에는 치프스가 내셔널스의 산하 팀이었다. 2019년 시즌부터 치프스는 뉴욕 메츠 산하로 바뀌며 구단명도 시라큐스 메츠(Syracuse Mets)로 재개명했다. 비슷한 경우로, 밀워키 브루어스는 팀 역사에 상관없는 행크 애런을 밀워키 팬들에게 선사했던 활약에 대한 답례로 영구결번을 지정했다.[32] 다만 게임데이나 전광판에는 투수도 42번, 타자도 42번이라 헷갈리기 좋은 날(...).[33]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로베르토 클레멘테 데이도 홈 경기로 배정된다.[34] 8월 27일 MLB 다수 구단은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경기를 보이콧했다.[35] 영화 42에서 보여줬듯이 성질이라도 내면 "것봐라, 검둥이놈"이라는 여론이 나왔을 테니.[36] 당시 다저스의 홈구장[37] 출처: 래리 킹의 Why I Love Base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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