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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라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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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캐나다의 前 아이스하키 선수. 뉴욕 레인저스 최초의 정규시즌 100포인트 달성 선수이며, 보스턴 브루인스 이적 후에도 달성하며 NHL 최초로 복수의 팀에서 정규시즌 100포인트를 달성한 선수이다.
2. 선수 경력[편집]
데뷔와 동시인 만23세 때 심각한 허리 부상으로 척추 수술을 받게 되는 등 일찍이 하키 선수 생명이 끝날 뻔하는 등의 위기를 겪었음에도, 회복에 성공하며 1963년부터 레인저스의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또다른 영구결번 선수인 빅 해드필드와 로드 질베르와 함께 라인을 형성한 이후 1968년부터 1973년까지 레인저스의 포인트 팀내 1위를 유지했다.
특히, 1971-72시즌에는 레인저스 109포인트로 레인저스 첫 100포인트 기록 선수가 되어 커리어 최초이자 마지막 올스타팀에 선정되었지만, 부상으로 15경기를 결장하는 바람에 아쉽게도 커리어 첫 아트 로스 트로피 획득에는 실패했다. 그래도 당시에 63경기만에 109포인트를 달성했으니 더욱 대단한 기록.[1] 부상에서 회복하여 라이벌 보스턴 브루인스와의 스탠리 컵 파이널을 위해 복귀했지만, 필 에스포지토와 자니 뷰식, 바비 오어와 같은 괴물들이 버티고 있던 브루인스에게 석패했다.
1975년 11월에 필 에스포지토와 캐롤 바드니스를 대가로 브래드 파크와 조 자누시와 함께 보스턴 브루인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라이벌인 두 팀이 서로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맞바꾸게 되었는데, 당시 레인저스 단장이었던 에밀 프랜시스가 이적시키되 가족을 멀리 떨어뜨리고 싶지 않던 라텔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가장 가까운 팀에 이적시키게 된 것. 브루인스 이적 이후에도 날라디니면서 90포인트를 추가, 정규시즌 105포인트로 두 번째 100포인트 시즌 달성 및 NHL 최초로 복수의 팀에서 정규시즌 100포인트를 달성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1981년에 은퇴할 당시에는 NHL 역대 6위에 해당하는 1280경기 1267포인트로 당시에는 고득점 경기가 많았던 것도 아니였고, 경기 수도 적었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많은 편. 하지만, 그에게도 득점 타이틀과 스탠리 컵 파이널 우승과는 연이 없었으니, 1972년에 보스턴에게 패배하고, 그 보스턴에 와서 1977년과 1978년에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모두 준우승을 거뒀다.
3. 은퇴 이후[편집]
은퇴 이후에는 레인저스가 아닌, 브루인스에 남아 1981년부터 1985년까지는 코치로, 하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1985년부터는 2001년 NHL드래프트가 열린 6월까지 16년간 브루인스의 스카우트를 역임했다.
그가 은퇴한 지 무려 36년이 지난 2017년 8월 28일, 레인저스에서 그의 등번호 19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했다. 영구결번식은 이듬해 2018년 2월 25일에 치러졌다.
4. 기타[편집]
- 현재보다도 더욱 과격한 하키를 하던 시절이라 감정적인 싸움도 많이 일어나던 시절이었음에도, 매우 점잖은 성격으로 존경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Gentleman Jean". 덕분에, 레이디 빙 메모리얼 트로피 후보에만 오른 것이 무려 9회에 달하며 2회 수상하였다. 레 카나디앵 드 몽레알의 장 벨리보는 "그(라텔)는 이타적인 선수"라고 평했을 정도.
- 이런 그의 성격은 플레이 스타일에서도 묻어나 있는데, 직접 전방으로 들어가 골을 넣기 보다는 양측의 윙어에게 킬패스를 꽂아 어시스트를 따는 것을 선호했다. 또한, 몸싸움도 거의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페널티 자체를 거의 받지 않았다.
5. 연도별 기록[편집]
5.1. 정규시즌[편집]
5.2. 플레이오프[편집]
[1] 더군다나, 82경기로 증가한 현대 하키에서도 레인저스의 정규시즌 최다 포인트 기록은 무려 2006년에 가서야 프랜차이즈 선수도 아닌 야로미르 야그르가 123포인트로 경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