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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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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지금의 일대에 있던 조선의 별궁.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역사[편집]
원래 무안대군 이방번이 살던 집 터였다. 그러다가 문종이 무안대군의 옛 집을 수리하고 아버지 세종의 후궁들을 옮겨 살도록 한 것이 자수궁의 시초다.[3] 성종 시절에는 폐비 윤씨 및 세조와 예종의 후궁들이 살았는데, 그 중 세조의 후궁인 근빈 박씨가 살게 되면서 잠시 이름을 창수궁(昌壽宮)으로 바꾸기도 했다.[4] 이 외에도 단경왕후가 폐출되고 한동안 머무른 적도 있었고,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도 자수궁에서 살았다.
당시 왕실 여성들은 불교에 대한 믿음이 강해서 후궁들도 머리를 깎고 출가하거나 또는 비구니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5]
"대저 여승[尼]이라는 것은 가장 상서롭지 못한 것인데 안일원(安逸院)ㆍ자수궁(慈壽宮)이 있으니, 그로 인연한 화(禍)가 지금 어찌 없겠습니까?"
《중종실록》 중종 12년 8월 20일
이때문에 자수궁에서 불사를 행한다고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정희왕후, 소혜왕후, 문정왕후 등의 불심 깊은 왕실 고위급 여성들의 비호가 있었고, 자수궁에서 사는 이들이 선왕의 후궁들이라는 점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심지어 불교가 잠시 권력 층과 가깝던 명종 때에는 이 곳에 종각과 나한전을 지어주기도 하였다.[6][7]"자수궁(慈壽宮)은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사는 곳이므로 엄숙하기가 궁금(宮禁)과 다를 것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듣건대 미천하고 요사한 여중이 섞여 거처하는데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늘 불사(佛事)를 하는가 하면 요사한 방법을 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요령(搖鈴)과 목탁 소리가 바깥에서 들린다 하니, 매우 불미스러운 일입니다."
《인종실록》 인종 1년 3월 24일
임진왜란 이후 궁궐 공사에 병적이었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른다는 명분으로 인경궁, 경덕궁[8] 등과 함께 옛 자수궁 일대에 큰 궁궐을 짓고 이름도 그대로 자수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사용하지도 못한 채 쫓겨났고, 자수궁은 '자수원(慈壽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아예 이원(尼院), 즉 비구니들을 위한 전용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며 많을 때는 최대 5,000여명의 비구니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명나라 황실의 궁녀였던 굴씨(屈氏)도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들어와 이 곳에 머물렀다.
3. 최후[편집]
1661년(현종 2)에 비구니의 폐해가 심하다는 부제학 유계의 상소[10] 를 계기로 자수원을 폐지하여 없애고, 40세 이하인 경우 환속하여 시집가도록 하고, 40세가 넘은 노인들도 환속할 수 있도록 하되 성 밖으로 내보냈다.[11]
이 자리에 도성 내 5학 중 하나인 북학(北學)을 세웠으며 1663년(현종 4)에는 자수원 건물의 자재로 성균관 서쪽에 비천당(丕闡堂)과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