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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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八哥
생몰년도 미상
요나라의 인물. 자는 오고린(烏古鄰).
오원부 사람으로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워 책 하나를 보고 외울 정도였으며, 통화 연간에 가업으로 오원부의 관리가 되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서 갑살월, 추밀원시어를 지냈으며, 986년에 송나라에서 조빈, 미신 등이 연 지역을 공격하자 출진해 공을 세우고 상경유수가 되었다. 1015년에는 북원추밀부사, 동경유수를 지냈으며, 1018년에 요성종이 소배압에게 명령해 고려를 공격하도록 하자 야율팔가는 도감이 되어 개경까지 가서 약탈했다.
다하와 타하를 건너 고려의 군사들이 추격하자 여러 장수들이 고려군이 두 강을 건넌 후에 공격하려 했는데, 야율팔가는 고려군이 두 강을 건너면 배수진을 친 격이라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니 위험하다면서 두 강 사이에서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소배압이 그 말을 듣고 싸웠지만 패배했다.
귀주 대첩에서의 패전으로 관직이 강등되었으며, 1019년에 동경으로 돌아와서 발해 승봉관에도 통령이 있다고 아뢰어 요성종이 그 말에 따라 도지압반을 두었다. 서북로도감이 되었다가 사망했다.
- 고려거란전쟁에서는 배우 반상윤이 연기했다. 평화전쟁 1019와 동일하게 소배압의 부장 포지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