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a0522d><width=33%> 1·2권 「태조기(太祖紀)」 ||<width=33%> 3·4권 「태종기(太宗紀)」 ||<width=33%> 5권 「세종기(世宗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아보기 || 야율요골 || 야율올욕 || || 6·7권 「목종기(穆宗紀)」 || 8·9권 「경종기(景宗紀)」 || 10·11·12·13·14·15·16·17권 「성종기(成宗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술률 || 야율명의 || 야율문수노 || || 18·19·20권 「흥종기(興宗紀)」 || 21·22·23·24·25·26권 「도종기(道宗紀)」 || 27·28·29·30권 「천조제기(天祚帝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지골 || 야율사랄 || 야율아과 · 야율순 · 야율아리 · 야율대석 || ||<-3><width=1000> ||
※ 31권 ~ 62권은 志에 해당. 63권 ~ 70권은 表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 본기(本紀) ] ||<tablewidth=100%><tablebgcolor=#a0522d><width=33%> 1·2권 「태조기(太祖紀)」 ||<width=33%> 3·4권 「태종기(太宗紀)」 ||<width=33%> 5권 「세종기(世宗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아보기 || 야율요골 || 야율올욕 || || 6·7권 「목종기(穆宗紀)」 || 8·9권 「경종기(景宗紀)」 || 10·11·12·13·14·15·16·17권 「성종기(成宗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술률 || 야율명의 || 야율문수노 || || 18·19·20권 「흥종기(興宗紀)」 || 21·22·23·24·25·26권 「도종기(道宗紀)」 || 27·28·29·30권 「천조제기(天祚帝紀)」 || ||<rowbgcolor=#fff,#191919> 야율지골 || 야율사랄 || 야율아과 · 야율순 · 야율아리 · 야율대석 || ||<-3><width=1000> ||
※ 31권 ~ 62권은 志에 해당. 63권 ~ 70권은 表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116권은 國語解에 해당. 요사 문서 참고 |
耶律漚里思
(? ~ ?)
요나라의 인물. 육원이리근(六院夷離堇) 야율포고지(耶律蒲古只)의 후손이다.
회동(會同) 연간에
후진(後晉)을 정벌할 때 태종이 강에 올라 사냥을 해 꿩을 낚아챘는데 후진 사람들이 강을 사이에 두고 비둘기로 유인해 가져갔다. 태종이 누가 잡아올 것인지 묻자 야율구리사가 내구마(內廄馬)를 내어줄 것을 청하고 강을 건너 그를 붙잡고 그를 구하려는 모두를 죽이고 돌아왔다. 태종이 크게 기뻐해 후하게 포상하였다.
이윽고 후진의 장수 두중위(杜重威)와 망도(望都)에서 부딪치자 강을 거점으로 삼고 싸웠다. 야율구리사가 말을 타고 돌진하니 나머지 군사들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포위당하자 한 사람이 얇은 쪽 포위망을 치고 나갈 수 있다고 의견을 내자 야율구리사는 분명 저들의 계략일 것이라 의심하고 행하지 않았다.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오히려 포위가 굳센 곳을 돌파한 후 이전에 야율구리사가 지적했던 곳을 무리들이 바라보니 다 거대한 참호들이 파여 있었다.
이 해에 적열피실군(敵烈皮室軍)을 모두 이끌었으나 사사로운 일에 연루되어 군사를 해산하고 관직도 삭탈당하였다.
용맹함과 지략을 겸비하였으며 매 전투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철삭(鐵槊)을 휘두르니 가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