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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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合卓
(? ~ 1025)
요나라의 인물. 자는 합노은(合魯隱). 소오고의 아버지.
돌려불부 사람으로 처음에는 소속 부족의 관리였고, 938년에 근면하고 유능하다고 해서 남원시랑이 되었으며, 1000년에는
한덕양의 추천으로 중승이 되었고,
예지황후의 유물을 전하기 위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 후 북원추밀부사가 되었다.
1014년에 좌이이필이 되었고 오랫동안 성종을 보좌하면서 법령에 밝아 질문에 대답을 잘했기에 총애를 받아서 북원추밀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여론은 그에게 큰 업적이 없어서 크게 써서는 안된다고 했으며, 왕계충이 연회에 참석해 소합탁의 단점을 지적해 성종이 불쾌하게 여겼다.
1017년에
고려를 정벌하러 갔지만 성과없이 돌아왔고, 소합탁이 성종의 총애를 받아 그에게 붙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재물을 물리치고 의복, 음식, 하인, 말도 이전처럼 검소하게 살았다. 성종이 소합탁의 청렴함을 높이 평가해 종실의 처녀를 소합탁의 아들과 결혼하게 했으며, 친구들에게 물품을 받아도 좋다고 허락하자 부호들이 소합탁의 집으로 갔다.
1025년에 병이 들어 성종이 문병을 오려고 하자 소합탁은 특별한 공을 세운 것이 없음에도 은총을 입었다면서 몰골이 매우 초췌해 폐하께서 보시면 마음 아프실까 걱정이라며 사양했고, 성종이 그 대신 북부재상 소박을 보냈다.
소박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대가 추밀사가 되어야 한다면서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보여도 천거하지 말라고 했는데, 소박이 밖으로 나와서 소합탁을 비루한 사람이라 했으며, 소합탁은 이 날 사망했다.
요사에서는 사관이 소박에게 남긴 유언에 대해 그가 나라를 그르친 죄는 참으로 크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