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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영황후 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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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위 제8대 세종 선무제 원각의 추존 황후이자 북위 제9대 숙종 효명제 원후의 친어머니였다.
시호는 선무영황후(宣武靈皇后)[1] 였으며, 성씨는 호씨(胡氏)였다. 흔히 시호에서 따온 영태후(靈太后)나, 성씨에서 따온 호태후(胡太后)로 불린다.
젊었을 때는 제법 기개가 있었고 후궁 시절엔 악습의 피해자였지만, 정작 황태후로 권력을 잡고 섭정을 한 이후 특히 쿠데타를 한번 당했다 복권한 이후부턴 권력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해 친아들인 효명제랑도 권력 다툼을 하다 결국 친아들까지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으며, 결국 이 때문에 본인도 파멸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북위를 대혼란과 멸망으로 이끈 악녀였다.
2. 생애[편집]
안정군 임경 출신의 사도 호국진의 장녀로 이름은 호선진(胡仙眞)으로 알려져 있다. 관료 가문 출신의 그녀는 북위의 황실에 드나들던 여승의 조카로, 고모의 추천으로 세부(世婦)가 되어 입궁했다.
선무제의 후궁으로서 효명제 원후를 낳았다. 당시 북위에서는 태자가 된 황자의 친모를 죽이는 자귀모사(子貴母死)라는 냉혹한 제도가 있었는데, 주변에서 낳으면 죽을 테니 낳지 말라는 권유가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는 후덜덜한 말을 하고 끝내 원후를 낳았다. 이후 원후가 태자로 책봉될 무렵 중급사 유등과 지중령군 우충 등의 간언으로 선무제가 생모를 자결하게 하는 악습을 폐지하여 호씨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512. 10)"어찌 나라를 위해 본인을 아끼겠느냐."
515년 남편인 선무제가 33세로 붕어하고, 아들 효명제 원후가 6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호씨는 엄밀하게는 황후가 아니라 후궁이었기에 섭정권은 없었으나 선무황후 고씨[2] , 즉 고태후가 관습을 들어 호귀빈을 죽이려 하자 중서감 최광 등이 저지하여 막았다. 악습 폐지도 명분이었겠지만 이후의 상황을 보면 당시 북위의 황실 종친인 원씨들이 북위의 권력을 잡고 흔들던 고구려계를 쳐낼 생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고양왕 원옹과 임성왕 원징이 정치를 총괄했고, 마침 익주를 정벌하다 돌아온 권신 고조가 선무제를 조문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고양왕 원옹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후 고조는 자살했다고 발표되었다.(515. 2) 호귀빈은 황태비로 책봉되었고, 권신 고조의 조카였던 고태후는 종친 원씨 집단이 비구니로 만들어 낙양 금용(金墉)의 요광사(瑤光寺)에 유폐시켰다.(515. 3)[3] 이후 515년 7월에 황태비에서 황태후로 격상된 호태후가 9월부터 섭정을 시작했는데, 적어도 이 시절에는 아직 권력욕에 타락하기 전이라 제정신이었다. 젊었을 때는 활쏘기를 잘하고 독서 또한 좋아했으며, 누군가가 간언하면 받아들이고 무리한 조치를 취소하는 등 자제력은 있었다.
519년 2월 황실 근위군인 우림(羽林)군과 호분(虎賁)군이 무인 배척론을 펼친 장중우에 격분해 우림의 변을 일으켰다.[4] 이 사건은 훗날 벌어질 육진의 난의 전주곡이었다.
호태후는 점점 권력을 믿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시동생인 청하왕 원역(元譯)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5] 허나 호태후의 제부였던 통직산기시랑 원차[6] 가 이를 알고 원역을 죽인 후, 호태후를 북궁의 선광전에 감금시켰지만(519. 7) 이후 권신들이 폭주하며 서로 해치는 사이에 상식이 있는 신료층의 지지를 받고, 효명제를 회유해 원차를 축출하고(525) 조정에 복귀하여 섭정권을 회복했다. 그리고 이런 험난한 시기를 겪으면서 호태후는 제대로 흑화하게 되었다. 이후의 그녀는 양백화(楊白花), 정엄(鄭儼), 이신궤(李神軌) 등의 남총들을 거느리고 아들 효명제와 권력 다툼을 벌였다.
524년 북위에 육진의 대란이 발발하고, 이를 선비계 글호족 이주부의 추장 이주영이 토벌했다. 이런 혼란기에도 권력 투쟁을 하려는 모후 호태후의 전횡에 분개한 효명제는 여러 차례 태후에게 호통을 쳤지만 태후는 태도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효명제는 이주영을 끌어들여 호태후를 제거하려고 했는데, 이를 알아챈 정엄이 호태후를 부추겨 효명제를 독살했다.(528. 3)
즉, 아들이 반독립적인 군사세력을 끌어들여서 어머니를 죽이려다가, 어머니가 선수쳐서 아들을 죽이는 막장 상황이었다. 디테일은 좀 다르지만 크게 볼 때 어린 황제, 황태후, 반독립적인 군벌의 구도는 훨씬 더 익숙한 《삼국지연의》에서의 후한 후소제 유변, 동태후, 동탁의 구도와 같다.
그 후 1살짜리 효명제의 딸을 남자아이로 속여 황제로 옹립했지만 여자아이인게 들킬까 두려워 하루 만에 황제를 2살짜리 애기인 원조로 바꿨다. 그러나 미리 효명제의 밀지를 받고 군대를 몰고 온 이주영이 경종 효장제 원자유(제10대)를 옹립해서 수도 낙양으로 진군했고, 이에 막을 힘이 없었던 호태후는 손녀와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일단 되었으나 어머니가 아들을 죽인 패륜에 이주영 자신이 극도로 분개해 있었던 상황이었다.[7] 이에 이주영은 호태후와 원조를 불러 상황을 추궁했고, 호태후가 변명을 꽤 오랫동안 한 모양이었으나 다 들어준 다음 호태후와 원조를 황하에 쳐넣어 수장시켰다.(하음의 변)
이렇듯 막장 상황이 이어지면서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북위는 얼마 안가 나라가 절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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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호 작법에서 영(靈)이 붙게 되면 어리석고 무도하다는 뜻이었다.[2] 문소황후 고씨와 권신 고조의 조카로, 고구려계였다.[3] 이후 고태후는 쥐도새도 모르게 제거되었는데, 범인은 대강 누군지 알 수 있으나 정확히 어떤 경위로 제거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4] 519년, 한족 명문 가문 출신인 장중우가 엘리트 코스의 관직에 무인을 등용하지 말 것을 건의하자 이들 근위군의 불만이 폭발했다. 우림, 호분군 약 1,000여 명이 모여 상서성에 항의 시위를 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돌을 던진 뒤 장중우의 저택을 태워버렸고, 중상을 입은 장중우는 간신히 도망쳤지만 장중우의 아버지는 큰 화상을 입고 이틀 뒤에 사망했다. 이를 일컬어 우림의 변이라고 한다. 당시는 호태후가 섭정하던 시기였다. 조정은 일단 임시방편으로 상황을 무마하는 데 치중했다. 즉, 가장 흉포한 주동자 8명만을 골라 사형에 처한 후 나머지는 대사령을 내려 불문에 붙이고 이들 군대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무관의 지위에 따라 문관으로의 평행 이동을 승인한 것이었다. 이런 조치로 일단 근위군단의 불만을 해소하는 데 성공했다.[5] 태후의 권위는 선왕의 아내였다는 것에서 오는 건데 그걸 저버리고 간통을 하는 건 근데 한국사에도 고려 초 천추태후나 헌정왕후의 사례가 있으며 중국사에도 진 소양왕의 어머니이자 최초로 태후라 불린 선태후의 예가 있다.[6] 강양왕 원계의 아들로, 아내가 호태후의 여동생이었던 신평군 호씨였다.[7] 애초에 이주영의 입장에서는 화도 날만한 것이 일단 자신을 부른 사람이 효명제인 데다가 황제가 불러서 얼씨구나 하고 왔더니 호태후가 효명제를 죽인 상황이라면 까딱하다간 이주영 자신의 역모로도 비쳐질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황제의 성지를 호태후가 없었다고 뭉개 버리면 근왕군이 아니라 오히려 졸지에 군대를 함부로 끌고 수도 낙양에 온 역적으로 몰려버리기 때문에, 이미 거병한 이상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는 없었다. 태후를 시해했는지 군주를 시해했는지는 다르지만 이렇게 낙장불입의 상황에 몰린 것은 강조의 정변과 유사한 면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