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스프링스틴
덤프버전 : (♥ 1)
1. 개요[편집]
'I saw rock & roll's future, and its name is Bruce Springsteen.'
나는 로큰롤의 미래를 보았다. 그 이름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다.
존 랜도[1]
"I'm the President, He's the Boss."
저는 대통령이지만, 그는 '보스'입니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별명은 'The Boss'.
2. 상세[편집]
미국의 록 씬을 넘어, 미국 대중문화 그 자체를 상징하는 전설의 음악가이자, 미국의 대표적인 국민 가수이다. 영국에 폴 매카트니가 있다면, 미국에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미국 노동 계급의 꿈, 고난, 좌절을 노래하는 시적인 가사와 폭발력 넘치는 무대 매너로 크게 사랑 받으며 가장 미국적인 록 가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모나 차림새도 타 인종이 흔히 생각하는 금발벽안의 덩치 크고 각진 북유럽계 백인이 아닌, 미국의 이미지를 좀 더 파고 들어가야 보이는 "미국 노동계급"[3] 의 이미지다.
전세계적으로 1억 2천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고, 2004년 롤링 스톤지가 선정한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에서 23위에 올랐으며, 스무 개의 그래미상과,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4] 까지 수상한, 그야말로 진짜 보스이자 미국 로큰롤계에서 모두의 존경의 대상이자, 끝판대장.
3. 생애[편집]
3.1. 유년기와 성년기[편집]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1949년 뉴저지의 롱브랜치에서 버스운전기사 아버지와 법률 비서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손자였으며, 모계의 먼 조상은 네덜란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이민자 출신이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그는 일찍이 가톨릭 학교로 보내졌지만, 보수적인 가톨릭 교육에 반항하면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5] 그는 같은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던 프랭크 시나트라와, 당시 가장 인기있던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즐겨들었다.
가톨릭 학교를 벗어난 이후 지역의 한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방황하며 음악을 제외한 나머지의 것에서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어찌 어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도 진학했지만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교육을 받는 것을 어려워하며 학교를 중퇴했다. 베트남 전쟁에 징집될 위기에 처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토바이 사고로 입은 뇌진탕 때문에 군면제를 받았다.
그러던 1964년 그는 비틀즈의 에드 설리반 쇼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아,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비틀즈의 공연을 보고난 후 바로 기타 가게로 달려가 18달러를 주고[6] 싸구려 기타를 구입하여 작곡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3.2. 음악 활동[편집]
1975년 발표한 <Born to Run>은 그를 처음 메인스트림에 올려놓은 앨범이다. 이전에 발표했던 두 앨범이 평단의 호평과 달리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반면, 이 앨범은 말 그대로 'breakthrough'. 평단과 대중 모두를 만족시키며 로큰롤의 역사를 새로 써내려 가는 시발점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27일 그가 미국의 양대 시사주간지 타임과 뉴스위크 표지를 동시에 장식한 사건은 당시 이 앨범이 미국을 얼마나 발칵 뒤집어 놓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Born to Run"은 롤링 스톤지가 선정한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곡에서 21위에 올랐다. 참고로 미국 뉴저지 주의 "unofficial youth anthem"으로 지정되기도 했는데,[7] 정작 본인은 그 결정을 의아해했다고 한다. 가사가 꿈을 찾아 뉴저지를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1978년작 "Darkness on the Edge of Town"로 300만장, 1980년작 "The River"로 500만장의 히트를 기록하고 전작들에 비해 차분한 포크 사운드를 담은 1982년작 "Nebraska"로 잠깐 주춤한 듯 보였으나[8] 그의 음악 인생 통틀어 가장 큰 한방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1984년에 발표한 "Born in the U.S.A."는 그의 대표곡 중 하나다. 얼핏 보면 국수주의적 내용인 듯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베트남 전쟁에 끌려가 죽을 고생을 하다 돌아왔는데 조국에서 제대로 된 대접 하나 해주지 않는 비참한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정부와 심지어 가족에게도 외면 받는 노동자들의 정신적인 위기"에 관한 곡이라고 밝혔고, 후렴구에 반복되는 "I was born in the U.S.A."는 과거의 진정한 애국심을 찾고 싶은 일종의 절규에 가깝다.
하지만 곡명만 보고 판단했는지, 발표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둔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측에서 이 곡을 캠페인에 사용하려 했고, 당연히 퇴짜를 맞았다. 그런데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언론플레이를 하다가 결국 전국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다. 아마 그의 대중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지지율을 올리고 싶었을 텐데, 그가 공화당 후보를 지지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망상이었다.[9] 그런데 문제는 레이건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었으며 의외로 후렴구만 듣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앨범 <Born in the U.S.A.> 역시 잭팟을 터뜨렸는데, 미국에서만 1,5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1985년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또한 싱글컷한 7곡 "Dancing in the Dark", "Cover Me", "Born in the U.S.A.", "I'm on Fire", "Glory Days", "I'm Goin' Down", "My Hometown" 전부 빌보드 핫 100 10위 안에 진입하는 대기록을 세웠다.[10] 2003년 롤링 스톤지는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이 앨범을 85위로 선정했다.[11]
1985년에는 마이클 잭슨과 라이오넬 리치가 주도하는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중간에 스티비 원더와 듀엣을 하는 부분은 둘의 음악적 성향, 보컬의 특징이 거의 완벽하게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조화를 보여줘 큰 호평을 받았다. 이 파트는 록과 R&B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만남으로 회자된다.[12]
기세를 이어 1986년에 발매한 라이브 앨범 "Live 1975–85"도 1,500만장이라는 엄청난 판매량으로 그를 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만들었다.
"E Street Band"와 결별하고 팝적인 사운드를 내세운 1987년작 "Tunnel of Love"은 300만장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음악성은 나쁘지 않다는 평가였다.
"E Street Band"와 재결합 후 발표한 2002년작 "The Rising"으로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락 앨범상을 수상하며 왕의 귀환을 알렸다. 이 앨범은 그가 9.11 테러를 목격한 이후 만들어낸 앨범으로 이른바 "포스트-9.11 아트"라 불리는 9.11. 테러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예술 작품에 속하며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답게 단순히 테러리스트에 대한 복수심이나 파괴의 슬픔을 노래하지 않고 참사에 연루된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묘사하며 재건의 희망과 평화에 대한 메세지를 전달하며 큰 호평을 받았다. 음악적으로도 본연의 록 사운드로 돌아가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었으며 그의 후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3.3. 2000년대 이후 근황[편집]
2009년 슈퍼볼/하프타임 쇼에 나서 "Tenth Avenue Freeze-Out", "Born to Run", "Working on a Dream", "Glory Days"를 차례로 불렀다. 국민 록 스타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이다. 참고로 이때 25년 만에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가졌다.
현재까지 빌보드 200에서 1위를 거머쥔 그의 음반은 11개로 통산 3위의 기록이다.[13] 더군다나 가장 최근에 발매된 <High Hopes>(2014) 역시 빌보드 200 1위에 올리며 여전히 국민 락스타임을 입증했다.
2019년에 발매된 <Western Stars>역시 메타크리틱에서 84점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의 백업 밴드는 바로 E 스트리트 밴드(E Street Band). 1972년부터 그와 함께 했다. 1989년부터 1999년까지 헤어져 있었지만 다시 재결합하여 2015년 현재까지도 그와 함께 하고 있다.[14] 밥 딜런, 보니 타일러, 아레사 프랭클린, 스티비 닉스, 스팅, 산타나 등과도 함께 음악 작업을 한 적이 있으며, 2014년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 스트리트 밴드와의 라이브 앨범은 참 많이도 발매했는데 특히 하이 레졸루션 오디오로 발매된 앨범은 너무 많아도 너무 많구나 할 정도.... 계속해서 나오다 보니 지칠정도이다. 더욱이 플레이 시간이 2~3시간되는 앨범들이여서 완주에 대한 각오를 다지지 않은 이상 힘들정도이다.
밴드 멤버 중 한 명이 그의 아내 패티 스캘파(Patti Scialfa)다. 1980년대 초반 뉴저지의 한 술집에서 공연을 하던 패티를 보고 그가 밴드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고 1984년 Born in the U.S.A. 투어 직전 합류하게 된다. 둘은 함께 활동하다 1991년 결혼한다. 1985년에 브루스가 다른 여성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15] 둘의 관계는 많은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아이 셋을 낳고 현재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16] 공연 영상을 보면 무대 위에 유일한 여성 멤버가 있는데, 그녀가 바로 패티다.
4. 음악적 특징[편집]
그는 로큰롤, 포크, 블루스, 컨트리 뮤직, 가스펠 등을 접목한, 지극히 미국적인 록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버디 홀리가 정립한 일반적인 록밴드의 구성이 아닌 오랜 음악적 동반자인 대형 백밴드 "E 스트리트 밴드(E Street Band)"와 함께 만들어내는 화려한 로큰롤 사운드가 특징으로, 1950년대에 엘비스 프레슬리나 리틀 리처드가 구사하던 고전 빅 밴드 로큰롤을 현대화해 계승했다고 평가받는다. E 스트리트 밴드의 면면도 화려해서, 팝 음악계 최고의 색소폰 주자로 불렸던 "빅 맨" 클라렌스 클레몬스나 배우로도 이름을 날린 스티븐 반 잔트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초기에는 밥 딜런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포크 록을 구사했으나, 1975년의 Born to Run을 기점으로 좀 더 대중적인 록 사운드를 구사하며 큰 인기를 얻는다. 그 뒤에도 80년대의 The River, Born in the U.S.A.에서는 신시사이저와 전자 악기를 도입하고, Nebraska와 같은 어쿠스틱 앨범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음악을 넘나들었다.
흔히 그의 음악을 'Heartland rock'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보통의 평범한 블루칼라 미국인들의 삶을 노래하며 단순한 유흥 이상의 공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록 음악을 가리키는 말이다.[17] 이러한 사회 참여적이고 깊이있는 가사로 미국 대중음악 최고의 리릭시스트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 마찬가지로 위대한 작사가인 밥 딜런과 자주 비교되며, 스프링스틴 본인도 딜런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만 둘의 문학적 성향은 꽤나 다르다. 둘 다 미국 전통 포크송에 기반했지만, 밥 딜런이 과거의 음유시인들과 비트 세대, 상징주의 문학에 영향받은 난해하고 은유적인 가사를 쓴다면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훨씬 더 직설적이고 사회적이며 민중들의 시선을 반영한 가사를 쓴다. 문호로 비유하자면 딜런은 잭 케루악이나 아르튀르 랭보에 가깝고, 스프링스틴은 존 스타인벡과 오 헨리를 합친 듯한 스타일을 구사한다.
제 노래들에서, 영적인 부분, 희망적인 부분은 후렴에 있습니다. 우울함과 일상적인 부분은 각 절의 세부적인 부분에 있습니다. 후렴의 영적인 부분은 가스펠 음악과 교회에서 얻은 것들입니다. 저는 미국의 음악을 만듭니다. 그리고 제가 살아가는 곳과 제 인생에 관해 씁니다. 그것들을 위해 제가 고군분투하고 싸우는 겁니다.
In my songs, the spiritual part, the hope part is in the choruses. The blues, and your daily realities are in the details of the verses. The spiritual comes out in the choruses, which I got from Gospel music and the church. I make American music, and I write about the place I live and who I am in my lifetime. Those are the things I'm going to struggle for and fight for.
브루스 스프링스틴
예나 지금이나 라이브는 전설이다. 역사상 최고의 프론트맨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 공연 2~3시간 내내 지속되는 강렬하고 열정적인 퍼포먼스와 E 스트리트 밴드와의 뛰어난 연주 궁합이 인상적이다. 현재의 라이브도 정상급이지만, 1970년대 중후반~80년대 전성기 시절의 라이브 공연은 그야말로 전설적으로 이 시기의 공연을 담은 "Live 1975–85" 앨범은 평론가들에게 록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앨범 중 하나로 평가된다. 따라서 빌보드 선정 25대 록 프론트맨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5.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정치[편집]
로저 워터스나 스팅 못지않게 정치적으로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Born in the U.S.A.가 대중음악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앨범 30위권 안에 들어가는지라, 그를 애국주의 우파 성향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18] 그러나 그는 미국 음악계를 대표하는 진보주의자이며, 단순한 입진보가 아닌 다양한 사회운동과 정치 활동에 뛰어들고 있다.[19]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백발 노인이 다 된 지금까지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당원이었으며, 민주당의 주요 선거때마다 유세에 참가하기도 하고, 민주당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 미국 민주당에게 큰 보탬이 되고 있다. 2008년 대선에서는 버락 오바마를 적극 지지하였으며 당선 후 축하 파티에서 처음 튼 곡이 그의 노래 "The Rising"이었다. 취임식에서도 이 곡을 공연했다.[20] 또 2020년 미국 대선에서는 도널드 트럼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조 바이든 후보를 지지했고, 선거 직전의 TV 광고에도 나레이션으로 참여해 바이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2021년 취임식에서는 더욱 격이 높은 취임식에 참여하여 Land of Hope and Dreams를 연주하였다.
이렇게까지만 보면 일반적인 민주당원으로 보이지만 버니 샌더스에 호의적인 등 실제로는 조금 더 사민주의쪽에 기울어진 급진 좌파에 가깝다.[21] 실제로 그는 관련 인터뷰에서 "미국은 더욱 혁명적이고, 좌파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라고 발언하였으며, 이러한 점을 보면 그는 민주당 내 사회주의 분파에 가까운 성향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주당 경선에서는 조 바이든을 지지했는데,[22] 스프링스틴은 이것에 대한 이유로 "샌더스나 워런도 좋지만 트럼프에 의해 망가진 미국의 정신을 되살리는데에는 바이든이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민주당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환경운동, 여성인권 운동, 성소수자 인권운동 등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나 성소수자 인권운동에는 매우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2017년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만약 출마한다면 유력 대권 주자[23] 였던 크리스 크리스티 당시 뉴저지 주지사를 정말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당선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그러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자신은 정치에 관심이 많을 뿐 실제 참가할 생각은 없다며 주지사직 출마를 직접 거부했다.
사실 스프링스틴의 고향인 뉴저지 자체가 미국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극 민주당 성향이다. 당장 스프링스틴과 동향인 존 본 조비, 잭 니콜슨은 모두 아예 공식적으로 민주당 소속[24] 이며, 거기다 다른 할리우드 종사자들처럼 입진보에서 그치지 않고 직접 당 내 정치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다만 스프링스틴이 이들에 비해서는 조금 더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다.[25]
6. 디스코그래피[편집]
7. 싱글[편집]
7.1. 빌보드 핫 100 2위 ~ 10위[편집]
- Hungry Heart (1980) 5위
- Dancing in the Dark (1984) 2위[26]
- Cover Me (1984) 7위[27]
- Born in the U.S.A. (1984) 9위
- I'm On Fire (1985) 6위
- Glory Days (1985) 5위
- I'm Going Down (1985) 9위
- My Hometown/Santa Claus Is Comin' to Town (1985) 6위
- War (1986) 8위
- Brilliant Disguise (1987) 5위
- Tunnel of Love (1987) 9위
- Streets of Philadelphia (1994) 9위[28]
7.2. 빌보드 핫 100 11위~50위[편집]
- Born to Run (1975) 23위
- Prove It All Night (1978) 33위
- Badlands (1978) 42위
- Fade Away (1980) 20위
- Fire (1987) 46위
- One Step Up (1988) 13위
- Human Touch (1992) 16위
- Better Days (1992) 16위
- Secret Garden (1997) 19위[29][30]
7.3. 빌보드 핫 100 51위~100위[편집]
- Tenth Avenue Freeze-Out (1975) 83위
- 57 Channels (And Nothin' On) (1992) 68위
- Secret Garden (1995) 63위
- The Rising (2002) 52위
- Devils & Dust (2005) 72위
- Girls in Their Summer Clothes (2008) 95위
- Working on a Dream (2008) 95위
8. 여담[편집]
- 미국 뉴저지 주가 낳은 대표적인 스타 중의 스타. 현재 아내인 패티 스캘파와 결혼한 뒤에 로스엔젤레스로 이사했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나이가 되자 다시 뉴저지로 귀향하는데 그 이유가 파파라치와 기자들이 득실거리지 않는 환경에서 평범하게 키우고 싶어서라고. 그리고 장남은 보스턴 칼리지 졸업, 둘째 딸은 듀크 대학교에서 승마팀으로 뛰다가 2014년에는 미국 국가대표팀으로도 발탁될 정도로 실력파이며 현재는 졸업했다. 2020 도쿄 올림픽 출전하여서 단체전 은메달을 획득했다.그리고 막내아들은 현재 소방관으로 일하는 중이다.
- 히피 문화로 대표되는 당시의 록 음악 씬에서[31] 드물게 과도한 치장 없이 청바지에 셔츠만 입고 공연했으며, 당시 뮤지션들에게 유행하던 마약도 하지 않은 모범생 이미지가 있다. 그나마 있는 구설수라면 80년대의 불륜 스캔들과 2020년의 음주운전 사건 정도로, 폴 매카트니와 함께 1970~80년대 유수의 록스타들과 비교하면 매우 깨끗한 사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 펑크의 대모 패티 스미스의 유일한 빌보드 핫 100 15위 권 진입곡 "Because the Night"과 R&B 여성 그룹인 포인터 시스터즈의 1979년 대히트곡 "Fire"는 원래 그의 정규 앨범에 수록될 뻔했던 곡들이다. 우선 "Because the Night"는 그가 4집 <Darkness on the Edge of Town>(1978)을 위해 녹음까지 했으나 "뻔한 사랑 노래"(another love song)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최종 트랙리스트에서 뺐다. 이후 프로듀서 지미 아이오빈을 통해 패티가 이 곡을 받았고 개작해 발표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녀의 음악 인생 중 가장 성공한 노래가 되었다. 정식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으나 브루스는 이 곡을 투어에서 종종 부르며 대형 페스티벌 무대에서는 거의 매번 부른다. 그래서 정규 앨범이 아닌 실황 앨범과 기획 앨범에서 그의 목소리로 부른 "Because the Night"을 들을 수 있다.[32]
- "Fire"는 본래 브루스가 우상인 엘비스 프레슬리를 위해 만든 곡이다. 하지만 데모 테이프를 받아보기도 전인 1977년 8월 16일 엘비스가 세상을 떠났고, 할 수 없이 본인의 앨범 <Darkness on the Edge of Town>을 위해 녹음했다.
또 이 앨범이네?!그러나 앨범의 전체적인 흐름과 조응하지 않아 넣지 않았고, 결국 남의 손에서 초대박을 터뜨렸다. 포인터 시스터즈의 "Fire"는 빌보드 핫 100 2위에 오르며, 당시 브루스의 어떠한 곡보다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33] 이후 역시 실황 앨범과 기획 앨범을 통해 그의 버젼이 공개되었다. 지금이야 웃어넘길 수 있는 일들이지만, 아직 자신의 입지를 굳히지 못했던 때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이 무척 속상했을 것이다. 아래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 2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그와 패티, U2가 함께한 공연.
- 1985년 6월 스웨덴 예테보리의 울레비 경기장[34] 에서 투어 공연을 진행했는데, 엄청난 수의 관객이 열광적으로 방방 뛴 탓에 구조물에 금이 가고 일부는 무너져 수리 비용만 수백만 불이 들었다고 한다. 흡사 지진의 피해와도 같았다고.
- 1999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과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각각 헌액되었다.
- 2009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받았다.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I may be the President, but he is 'The Boss'"라고 말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고, 헌정 공연 사회자로 나선 코미디언 존 스튜어트는 그를 "밥 딜런과 제임스 브라운의 아들"로 빗대 좌중을 뒤집어 놓았다.
"저는 음악평론가가 아니고, 음악역사학자도 아니고, 그 기록을 관리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 브루스의 노래가 미국의 방대한 노래책 안에 어디 있는지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의 음악에서 비쳐지는 이야기들과 우리 미국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밝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뉴저지 출신이라, 제가 믿는 것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밥 딜런과 제임스 브라운은...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내다버렸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당시에 서로 다른 인종 간의 동성 관계가 처한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말이죠. 그들은 이 아이를 뉴저지 고속도로 출구 8A와 9번 사이 길바닥에 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입니다."
I am not a music critic. Nor historian, nor archivist. I cannot tell you where Bruce Springsteen falls in the pantheon of the American songbook. I cannot illuminate the context of his work or his roots in the folk and oral history traditions of our great nation. But I am from New Jersey, and so I can tell you what I believe, and what I believe is this: I believe that Bob Dylan and James Brown had a baby. And they abandoned this child... as you can imagine at the time, interracial same sex relationships being what they were. They abandoned this child on the side of the road, between the exit interchanges of 8A and 9 on the New Jersey Turnpike. That child is Bruce Springsteen.
- 2012년 컨트리 뮤직 가수인 에릭 처치가 발표한 "Springsteen"[35] 은 그의 노래가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주된 가사 내용은 십대 때의 사랑 이야기지만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의 노래들이다. 실제로 가사에 "Born to Run", "Born in the U.S.A.", "Glory Days", "I'm on Fire"가 언급된다.
- 2013년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 2015년 존 스튜어트의 Daily Show 마지막회에 특별히 공연을 해 줬다. 둘다 뉴저지에 사는지라 서로 왕래가 잦은듯...
- 라이브 실황을 보면 대부분 Fender Telecaster를 메인기타로 쓰는데, 다른 기타리스트들과는 다르게 시그내쳐 모델 기타가 없다. 이는 스프링스틴이, 자신의 이름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웬만한 인지도를 가진 기타리스트들이라면 대부분 시그내쳐 모델이 발매되는데, 전국구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가진 아티스트로서는 드문 부분이기도 하다.
펜더가 마지막으로 시그내쳐가 정식발매 된게 존 메이어 였는데, 현재 그는 펜더 아티스트가 아닌 상태.[36]
- 프론트맨으로서의 강렬한 이미지에 더불어 그의 곡 중 기타가 부각되는 곡이 별로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사실은 꽤나 뛰어난 실력을 가진 기타리스트이기도 하다. 그의 기타 솜씨는 일부 기타가 주도하는 곡이나 몇몇 라이브 퍼포먼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헤비메탈 기타리스트처럼 엄청난 기교를 가진 비르투오소는 아니지만 곡 해석력이 뛰어나며 연주의 완급 조절을 잘 해내는 기타리스트로 평가받는다. 그 외에도 피아노, 하모니카, 만돌린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 가능한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이기도 하다.
- 2016년 바르셀로나 콘서트에서 관중들이 춤추며 생긴 초저주파를 500m 근방의 지진계가 포착했는데 곡이 바뀌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결과가 깔끔하게 나왔다.
- 2016년 9월 23일에 자서전 <Born To Run>을 발표한다고 한다.
- 수많은 히트곡을 보유하고 있지만 빌보드 핫 100 1위는 한 번도 올라본 적이 없다.
- 2020년 11월에 음주운전으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후 조 바이든의 취임식에서 공연을 하고, 슈퍼볼 기간에 방송되는 자동차 브랜드 지프의 광고에 출연했기 때문에 더욱 비판을 받고 있다. 음주운전 체포 기사는 2021년 2월에 보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