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도스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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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미의 로도스에 대한 내용은 로도스(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Hic Rhodus, hic saltus.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솝 우화, 허풍선이 이야기
1. 개요[편집]
그리스 남동쪽에 있는 작은 섬으로, 도데카니사 제도(Δωδεκάνησα)[4] 의 중심지이다. 이름의 유래는 포세이돈과 암피트리데의 딸인 로데(Rhode). 면적은 약 1400㎢로 제주도보다 약간 작으며 인구는 약 11만 5천 명으로, 북동쪽 끝에 있는 로도스 시에 인구의 절반 가까이 거주한다. 그리스 본토와는 363 km 떨어졌지만 튀르키예 본토와는 14 km밖에 안 된다. 그리스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섬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리스 국토의 최동단은 도데카니사 제도에서도 더 동쪽으로 떨어진 카스텔로리조(Καστελλόριζο)섬(면적 12 ㎢)이다.[5]
중세 십자군들의 근거지여서 그런지 관광객을 제외한 현지 그리스인 주민 중에서도 그리스 내 다른 지역에 비해 금발벽안이 훨씬 더 많은 편이다.[6]
2. 역사[편집]
2.1. 고대[편집]
기원전 190년경의 로도스 왕국 (붉은색)
고대, 특히 헬레니즘 시대에 동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작은 섬의 도시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부와 군사력[7] 을 자랑했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로도스의 거상(Colossus)을 세운 일도 이때이다.[8] 용병으로도 유명해서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슬링 전문인 로도스섬 투석병은 지중해에서 최강의 명성을 자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통해 육성했다고 하는 이들 용병들에 대해 그리스의 군인이자 문필가 크세노폰은 자신이 쓴 책 <페르시아 원정기>에서 납탄을 던지는 로도스 투석병의 사거리가 주먹만한 돌을 던지는 페르시아 투석병의 2배에 이른다고 기록했다. 어떤 기록에는 그들이 날리는 탄은 공중에서 불이 붙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
이렇듯 번성한 덕에 로도스섬에는 각종 교육 및 연구시설도 대거 들어섰고, 당대에 학문 분야에서 로도스섬의 명성은 그리스 본토의 아테네와 맞먹을 정도였다. 로마와 로도스 공화국이 기원전 164년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 로도스는 로마 귀족, 부자들의 자제들의 유학지이자 선호학교로 널리 명성을 떨쳤다. 따라서 로마에서 고위 귀족들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가정 교사의 출신을 따질 때, 아테네 출신 다음으로 높이 평가한 부류가 로도스섬 출신이었다. 이런 이유로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 로도스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도 황제가 되기 전 아내 대 율리아의 남성편력과 계속된 불륜,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아의 갈등 등으로 번아웃이 온 나머지 한때 모든 공직을 내놓고 가출할 때 자발적으로 로도스 섬으로 떠나, 무려 7년을 이곳에서 은거하며 유학생활을 했다.[9] 세계에서 인정받은 오파츠인 안티키테라 기계도 이곳에서 제작한 듯하다.
로도스 섬은 로마의 중요한 동맹국 중 하나가 되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로마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동맹국으로서 가진 특권들은 점차 박탈되면서 끝내 로마에 보호국으로 편입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로도스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다른 국가 간의 중계무역 등을 통해 번영을 유지했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침략받아 약탈되는 피해를 입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제정 시대에 이르러 사도 바울로의 기독교 선교활동이 있었다.
로마의 보호국이 된 이후, 직접 통치를 받지 않았지만 대개의 보호국처럼 쇠락을 거듭했다. 따라서 3세기 말이었던 서기 297년 이후부터는 로마 제국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됐다. 그리고 이런 흐름 속에 로마 제국이 분할된 이후에는 동로마 제국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된다.
2.2. 중세~근세[편집]
구호기사단장의 궁전. 1930년대 이탈리아 통치기에 대대적으로 복구되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 후 14세기경, 우트르메르에서 거점을 상실한 구호기사단이 와서 섬을 점령하여 거점으로 삼았다가 16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의 도전을 받고 결국 술레이만 1세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때 기사단이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나 오스만 제국군을 격퇴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기사단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배려 덕분에 몰타로 건너가 정착했고 거기서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받았지만 거기서는 끝까지 버텼다. 아무래도 전투종족. 구호기사단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으며 건재하고 있다. 아무튼 16세기부터 1910년대까지는 별다른 사건 없이 쭉 오스만 영토였다.
2.3. 이탈리아 통치기[편집]
총독 궁전. 지금은 로도스 현청으로 쓰인다.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로도스 섬이 속한 도데카니사 제도는 1912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의 결과 이탈리아 왕국에 점령당해 35년간 이탈리아령 에게해 제도로서 이탈리아의 영토였다. 처음에는 군정(軍政)이 실시되다가, 1923년 에게해 이탈리아령 군도(Isole italiane dell'Egeo)라는 지역이 정식 출범하면서 로디 섬(Rodi)으로 불렸다.
초대 총독 마리오 라고(Mario Lago: 재임 1922~1936)는 자유주의적 정치가로, 각 민족 공존 정책을 펼치는 한편 이탈리아인 거주자의 정착과 그리스인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불관용적이었는데, 정교회 세력을 억누르고 가톨릭 교회만을 공인했다. 반면 후임 총독인 체자레 마리아 데 베키(Cesare Maria De Vecchi, 재임 1936~1940) 치하에서는 이탈리아어가 필수과목이 되었고 그리스어는 선택과목으로 전락하는 등 섬의 이탈리아화(化)가 강경하게 추진되었다. 무솔리니 정권이 섬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시스트식 건축물들을 세우는 데 공을 들인 것도 이때였다. 당시의 건축물들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그리스 침공 및 크레타 섬 전투의 전초기지가 되었다가, 1943년 이탈리아가 항복한 뒤에는 독일 국방군의 점령하에 있었다.(명목상으로는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령) 이탈리아가 패전하고 모든 해외 식민지를 포기한 1947년에서야 그리스에 반환되었다. 8천 명 가까이 되던 이탈리아계 정착민들은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소수는 남았다.[10]
이 섬은 튀르키예 독립전쟁과 그로 인한 튀르키예인, 그리스인의 인구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은 섬이기 때문에 아직도 튀르키예계 그리스인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히오스 섬, 사모스 섬에선 튀르키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에 비하면 튀르키예어도 상당히 잘 통한다! 그러나 이 지역은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튀르키예 본토의 튀르키예인들 및 북키프로스인들과 다르게 이슬람이 아닌 정교회를 믿는 경우가 많으며[11] , 외관이나 생활상으로 현지 그리스인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상대적으로 소수일 뿐 로도스 섬에도 이슬람을 믿는 튀르키예계 주민들은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들은 로도스 섬의 쉴레이만 모스크 등지에서 예배를 드린다.
3. 이 섬에 있는 도시[편집]
그리스어: Ρόδος
로도스 섬 북동쪽 끝에 있는 그리스의 도시. 도데카니사 현의 현청 소재지이며 면적은 19.48㎢. 인구는 49,541명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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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4] 그리스어로 '열두 섬'이라는 뜻.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에게해 12도'.[5] 도데카니사 제도에 속한다.[6] 심지어 집시 중에서도 금발이 꽤 있는 편이다.[7] 해군과 투석병이 유명했다.[8] 마케도니아의 왕 폴리_오케르(공성자) 데메트리오스의 공격을 격퇴한 기념으로 세웠다.[9] 플라비우스 왕조~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사람으로,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듣는 수에토니우스의 책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에 있을 때 일화도 나온다. 이 믿기 힘든 이야기에 따르면, 어떤 저명한 철학자가 티베리우스의 집 근처에 살고 있어서 티베리우스가 그의 강의를 듣고 싶다고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철학자가 황제의 양자, 사위이며 로도스 섬에서 황제 대리인이자 황제의 아들 신분인 티베리우스가 권력에서 밀렸다고 생각해 면전에 대고, "지금은 자리가 없는데 어쩌나? 언젠가 자리가 남으면 그때 가서 부를 테니 시간 되면 오시던가"라고 비웃으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티베리우스가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허락 아래 로마로 복귀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되었는데, 그 철학자는 티베리우스의 소식을 듣자마자, 그를 찾아가서 공직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지금은 너한테 줄 자리가 없다. 언젠가 자리가 남으면 부를 테니 그때까지 기다리든지 마음대로 하라"며 돌려 보내는 것으로 복수했다고 한다.[10] 로도스 대교구가 여전히 있으며, 신자는 2천명 가량[11] 동마케도니아 트라키 주의 튀르키예계 주민들이 튀르키예 본토인들 및 북키프로스인들처럼 이슬람이 주류 종교인 것과는 대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