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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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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 입문 전[편집]
1.1. 출생 및 유년 시절[편집]
노무현은 미군정이 한반도 남반부를 통치하던 1946년 9월 1일(음력 8월 6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아버지 노판석(盧判石, 1900 ~ 1976)[1] 과 어머니 성산 이씨 이순례(李順禮, 1914 ~ 1998)[2] 사이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3] 노판석은 재혼이고 이순례는 삼혼이었던 탓에 이복누나 노명자와 이부누나 김선밀(金仙密)[4] 이 손위에 있었다. 노무현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 노판석은 나이가 46세였으니, 노무현은 늦둥이인 것이다.
아버지 노판석은 일제강점기에 타이어 제조 관련 사업가였으나 사기를 당해 재산을 잃었고, 노무현이 태어난 시점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여 어머니 이순례가 갖가지 일을 하여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형제로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일찍이 뜬 큰형 노영현(盧英鉉, 1932 ~ 1973)과 작은형 노건평(盧健平, 1942 ~ )이 있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큰형 노영현은 아버지 노판석이 사기를 당해 무기력에 빠지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며 노무현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학업에 도움을 준 아버지 같은 존재라고 언급되어 있다. 세간에는 노무현이 작은형 노건평을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여겼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실제 노건평은 노무현이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번번이 동생의 발목을 잡던 인물이었음에도 노건평이 노무현의 정계 입문 이후 큰형 노영현의 공을 자신의 공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다.
1.2. 학창 시절: 1953년 ~ 1964년[편집]
1953년, 진영대창국민학교 입학을 시작으로 학창시절이 시작되었고, 6학년 당시인 1958년에 전교 학생회장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1959년에 진영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돈이 없어 외상 입학을 했다. 1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이승만 생일 기념 글짓기 대회가 열리자 '백지 동맹'을 일으켜 정학을 당했다고 한다. 2학년 때 부산에서 시험을 통해서 당시 부산일보의 사장 김지태가 만든 장학회인 부일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 졸업 후 5급 공무원(지금의 9급 공무원) 시험[5] 을 준비했는데,[6] 첫째 형의 권유로 당시 부산에서 꽤 좋은 학교였던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도 어려운 경제적 사정으로 공부만 하지 못하고 방황도 하고, 숙소도 제대로 없었고, 졸업도 21살 즈음에야 뒤늦게 했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은 하지 못한 채 학력이 고졸로 마무리되었다.[7][8][9]
1.3. 청년기: 1965년 ~ 1974년[편집]
고등학교 졸업 즈음 농협 입사 시험을 쳤으나, 탈락했다. 한 달 반쯤 개인 회사를 다녔으나, 너무 적은 월급으로는 생활도 되지 않아 퇴사하고 고시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집 근처의 산자락에 토담집을 만들어 공부했지만[10] 시험에 필요한 책을 살 돈이 없어 울산에 가서 막노동을 했다. 이때 잠시 이가 부러지고 입술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예비시험에 합격한 소식을 병상에서 듣게 된다. 당시 고졸 출신이 사법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해야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그런데 또 반전이 생겼는데, 합격 후 사법시험 학력 제한이 없어져 버렸다. 예비시험 합격의 보람이 없어진 것이다.[11] 그 후에는 계속 고시에 매달렸다.
중간에 34개월(2년 10개월) 쯤 현역병(상병 전역)으로 12사단에서 군 복무를 마쳤다. 복무 기간은 1968년 3월 ~ 1971년 1월. 2023년 현재 현역 일반병 출신 대통령은 노무현과 문재인 단 둘 뿐이다.[12] 최종 계급은 상등병으로, 병장을 달지 못한 이유는 베트남 전쟁에서 귀환한 병장이 많았기 때문인 데다가 노무현은 분대장을 하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병장은 분대장에게만 주는 계급이었는데, 파병 문제로 인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면 특별 케이스로 병장 계급을 달아줬다. 지금은 이 시기 상병 만기 전역자들을 병장으로 병적 기록 변경이 가능한 제도가 생겨서 노무현 대통령도 유가족이 신청하면 병장 제대로 변경이 가능하다.
전역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법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1973년 즈음, 약혼자가 결혼 적령기를 넘어 고시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영부인 권양숙 여사와 결혼하였고, 아이(노건호)도 낳았다.[13] 이때는 둘째 형 노건평이 세무 공무원으로 취직한 이후라 경제적 사정이 나아졌다고 한다.[14]
1973년부터 사법시험을 보기 시작해 3번째인 1975년, 만 30세의 나이에 사법시험(17회)에 합격하였다. 당시 사법시험 합격자 중 안대희 전 대법관과 더불어 단 둘뿐인 고졸 출신이었다. 다만 안대희는 말이 고졸이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중퇴 학력이라 이미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었으므로[15] 사람들은 노무현만을 당시의 유일한 고졸 법조인으로 기억하곤 한다.[16]
파일:노무현 사법시험2.jpg
매일경제 1975년 3월 27일자 7면에 실린 17회 사법시험 합격자 명단이다. 붉은 동그라미 표시가 노무현.
위에서도 언급되었듯 서울대 법대를 자퇴한 안대희의 경우 고졸이 아니라 서울대 법대출신으로 분류되었다. 이는 다른 신문에서도 마찬가지.
1.4. 법조인 시절: 1975년 ~ 1988년[편집]
대전지방법원에서 7개월간의 판사 생활을 하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사임했다. 이는 1992년의 명예훼손과 관련되어 서울민사지방법원 판결을 통해 사실임이 인정되었다. "원고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관되었으나, 7개월만에 판사직을 사임한 주된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
1978년 5월, 부산광역시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조세 전문 변호사로, 소위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한 마디로 승률이 높아 돈을 잘 벌었다는 이야기다.[17] 다른 변호사들과는 달리 상고(현 개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부산상업고등학교) 출신이라 세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법은 회계에 대한 지식을 요구하기에, 일반 변호사들이 파고들기에는 수월하지 않은 분야이다.[18]
개업 초기에는 형사사건을 조금 맡다가 이후 민사사건을 주로 맡았으며, 그 와중에 등기업무도 취급하여 부산지역 사법서사들의 반발을 샀다고 한다. 부산에 개업한 변호사가 거의 없던, 심지어 노무현까지 불과 3명에 불과했다는 설까지 있던 시절에 법무사들의 밥줄인 등기업무를 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미웠을 것이다.[19] 변호사가 법무사의 상위호환이라 변호사도 등기업무가 가능하므로 법무사들 입장에서는 밥줄 뺏기는 꼴이었다.[20]
그러던 와중 1981년, 우연히 김광일 변호사의 부탁으로 변론을 맡게 된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김광일 변호사는 경상도를 대표하는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는데, 이 사건을 위해 그는 무료 변호인단을 구성한다. 하지만 담당 검사 최병국이 변호에 참가하면 공범으로 함께 기소해 변호사 자격을 정지시키겠다고 협박하자 변호인단에서 빠졌고, 자신을 대신해 노무현에게 변호인단 참여를 부탁한다. 당시 변호인단 명단은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까지 총 5명이었다. 이는 노무현이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참고로 동지 문재인은 사법 연수원을 1982년 8월 수료했으므로 부림사건 변호에는 참여한 적이 없다.
이때 선배 변호사 김광일의 권유로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려 두기는 했으나, 재판에 들어가기 전까진 치기 어린 젊은이들이 사고를 친 것 쯤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해자 중 한 명을 면회하는 과정에서 고문 흔적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이 사건에 미친듯이 매달렸다고 한다.
재판에서도 변호인단 중 가장 서열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부림 사건 피해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거의 본인도 피고인인마냥 열성으로 나서서 변호를 했고, 고문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피고인들과 그 가족들도 재판 초반에는 변호사가 저렇게 흥분해서 변론을 해도 되나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와 고마움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영상. 그리고 일부 피고인들이 완전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재야의 스타가 된다.[21]
이후 해고 노동자들을 위해 법률 상담을 해 주거나 무료 법률 상담소를 개설하여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무료 혹은 담배 몇 갑에 소송을 대리해주기도 한다. 각종 민주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노무현 변호사의 집은 늘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유명했던 표현 중 아스팔트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노무현이 당시 만든 말이라 한다. 그는 연설을 하다가 전경의 최루탄을 맞고 기절하는 일까지 겪었지만 마이크를 놓지 않고 시종일관 꾸짖는 연설을 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와 관련된 이미지는 지금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검찰은 그를 구속하였고, 안기부(안기부는 국정원의 전신)는 변협에 압력을 넣어서 그의 변호사 면허를 강제 정지시키고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등 불법으로 수시로 감시를 했지만, 직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변호사 시절 부산 서구에 노동 법률 사무소를 열어 운영할 때 만나서 의기투합한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문재인이다. 노무현의 고시공부 동지이자 연수원 동기 박정규가 문재인을 노무현에게 소개시켜준 것이 인연이다. 이 둘이 훗날 모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말 그대로 기연 중 상기연.[22]
2. 정치 입문 후[편집]
2.1. 국회의원 및 야인 시절: 1988년 ~ 2000년[편집]
인권 변호사 활동을 주목한 김영삼의 제의로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1988년 4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직할시 동구에 출마해 당시 실세였던 민주정의당 허삼수 후보를 꺾고 당선된다.[23] 일설에는 이 때 노무현이 김영삼에게 쎈놈과 붙게 해 달라 해서 허삼수와 붙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팩트라면 진짜로 노무현은 간이 큰 셈이며, 어찌 보면 가장 노무현다운 선택인 셈.
이후 대한민국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 위원회(5공청문회) 위원으로 선정되었고, 5공 청문회 때 발의자로 등장해 증인으로 참석한 정주영을 상대로 질의에 앞서 한 말이 매우 유명해졌다. 정주영은 대한민국 최대 재벌인 현대그룹의 수장이라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자타공인 대한민국 대표 기업가였다.[24] 게다가 특유의 뚝심있는 성격으로 유명했기에 정치권에서도 결코 함부로 대하기도 힘든 인물이었는데, 그런 정 회장이 일개 초선 의원, 그것도 겨우 40대 초반의 정치 신인 앞에서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뚝심 어디 안 가서 여타 증인들과는 달리 곧 지지 않고 잘 맞받아쳐서 노무현의 "의회는 바지저고리에 불과하고요?" 라고 물으니 "뭐 그런 것도 있죠." 식으로 대담하게 답했다.
"그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부에는 5년 동안에 34억 5,000만원이라는 돈을 널름널름 갖다 주면서 내 공장에서 내 돈 벌어 주려고 일하다가 죽었던 이 노동자에 대해서 4,000만원을 주느냐, 8,000만원을 주느냐를 가지고 그렇게 싸워야 합니까? 그것이 인도적입니까? 그것이 기업이 할 일입니까? 답변하십시오!"
- 노무현 당시 초선의원 시절 제5공화국 비리 청문회 中에서.[25]
전두환과의 청문회 이후 "그럼 국민의 비난은 누가 책임질 겁니까? 본 의원은 풀리지 않은 의혹이 엄청나게 남아있습니다." 라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명패를 내던진 것도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노무현 명패 사건을 참조하면 된다.
이 청문회에서 5공 시절 억눌려 지내던 국민들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통쾌한 추궁으로 유명해지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거듭나게 되었고, 이 유명세로 인해 시간이 흘러서 대통령 선거까지 도전할 수 있도록 평가를 받게 되는 큰 자산이 되었다. 이러한 활약상으로 이 무렵에 김영삼은 노무현을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게 회의입니까?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
그리고 당시 무명의 초선 의원이었던 노무현은 5공 비리 청문회를 비롯해 3당 합당을 야합이라 비판하며 거부하고 정치 인생의 길을 열어주었던 김영삼의 곁을 떠나면서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꼬마민주당으로 입당하면서 대변인과 부총재를 지냈다. 이 시점을 통해 동교동계 쪽으로 붙었다.
제13대 국회의원 임기 종료 후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부산 동구에 재출마했으나 4선년에 본인이 꺾었던 허삼수와 리턴매치에서 재선에 실패하면서 낙선하였고,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했지만, 3당 합당하기 이전에 같은 야당이었던 민주자유당 문정수에게 밀리며 이 역시 낙선했다. 또한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했지만, 현역 전국구 의원 이었던 신한국당의 이명박, 당시 이 지역 현역 4선 중진인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28] 등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29] 이 후 김원기, 김정길, 이부영, 이철, 유인태, 박계동, 김부겸 등의 민주당 내 반 이기택 성향 지구당위원장들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일명 '통추')를 결성했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통추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 여부를 놓고 분열되자 한나라당행을 선택한 이부영, 김부겸 등과 달리 쿠데타와 3당 합당의 원죄가 있는 당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며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맡으며,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에 공을 세운다. 1997년 대선 당시 노무현의 TV 찬조연설
이후 이명박 의원이 1998년 초, 선거법 위반 시비에 휘말려서 국회의원직을 자진사임했고[30] 노무현은 그 해 7월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장직에 출마 선언을 한 상태였지만[31] , 김대중 대통령의 고건 전 총리[32] 영입에 따라 출마를 포기하고 대신 종로구에 공천된 것이다. 이 때 역시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했던 동교동계 한광옥과 달리 노무현이 시장 후보 자리를 쿨하게 포기하자, DJ는 "정치는 노무현이처럼 해야 한다"면서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했지만, 2년 뒤인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다시 부산에 출마한다. 보좌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내와 자녀들까지 전부 반대했다. 총선 이후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노무현을 취재했는데, 권양숙 여사와 딸 노정연씨가 "종로에서 한 번만 더 해서 인지도를 높이고 부산에 내려가자고 얘기했다."는 언급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고집은 확고했다. 참고로 출마한 선거구는 북구·강서구 을이었는데, 선거운동 초반에는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를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이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결국 막판 한나라당 표심이 결집하며 허태열[33] 에게 밀려 35.69%의 득표율로 낙선한다. 하지만 지역주의를 깨기 위한 도전을 계속 이어갔던 이력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오히려 주목을 받는 낙선자가 되었고, 바로 이때부터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낙선 후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낙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2.2.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2000년 ~ 2001년[편집]
"많은 일을 하고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러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해양수산부는 현재보다 미래가 있는 부처입니다. 우리 어깨 위에 한국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감히 다시 한 번 저와 함께 노력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쏟아지는 매는 제가 맞겠습니다. 일하십시오. 자신 있게 일하십시오. 일을 추진하다 생긴 실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으면 그 모든 책임은 여러분이 져야 할 것입니다. 진실을 이야기하십시오. 반대의견이 있으면 직을 걸고 반대하십시오. 현장에 가서 보고 판단하십시오. 이제부터 여러분과 저는 한 팀입니다."
- 2000년 8월 7일, 노무현의 해양수산부장관 취임사.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낙선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8월부터 해양수산부장관을 8개월 동안 역임했다.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재직하던 당시, 직원들과 같이 이메일로 대화를 하고 수평적 토론 문화를 새로이 정립했고, 다면평가를 비롯한 인사평가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공직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공무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34] 그리고, 장관직 재임 시절에는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탈권위주의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특유의 성격답게 장관에게 주어지는 특별 대접 같은 의전도 모두 없앴다고 한다. 장관 출근시간에 맞춰서 현관에 수위장과 비서진이 대기하고 있다가 관용차가 도착하면 수위장이 거수경례를 하고 차문을 열어주던 관행도 중단시켰다고 한다. 또한, 지방 출장에서 지역공관장이 좋은 차를 빌려서 마중을 나오던 관행도 못 하게 했다고 한다. #1, #2
노무현 스스로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를 저술해서 장관으로서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해양수산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재직하며 MBC 100분 토론 등 여러 정치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활동했다.
2.3. 기적적인 대통령 당선: 2002년[편집]
2001년 12월, 16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선 레이스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때 노무현은 행정 능력이 검증된 정치인은 아니었고, 당 내의 다른 대권주자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지지율은 미미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민주당 내 '영남후보론'과, 가장 강력한 후보였던 이인제의 당적 정체성을 공격하면서 이른바 노풍을 불러일으키면서 역전승에 성공, 경선을 통과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35] 새천년민주당의 경선 과정에 대해서는 제16대 대통령 선거 문서에서 다룬다.
이때 처음으로 유시민을 비롯해 훗날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비서관 및 실장으로 근무하게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당 대선후보가 되었을 당시 노무현은 지역주의가 타파되고 새 시대가 찾아올 것 같기는 한데, 그 때가 되면 자신은 없을 것 같다 말했다고 한다. 그걸 들은 유시민은 새 시대의 첫 파도에 올라탄 거라서 자신이 거기까지 못 갈 수도 있지만 그 시대는 분명 온다 말했고, 노무현은 "새 시대가 오기만 한다면 내가 없어도 어때"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노무현 본인도 자신이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하게 될지는 전혀 몰랐겠지만, 시대가 지나고 난 뒤에 보면 굉장히 섬뜩하게 들릴 지경.
본선에서는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와 맞붙게 되었다. 노무현 측은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회창 측은 부패 정권 심판, 정권교체 등의 공약을 내세워 치열한 접전 양상을 보였다. 이회창은 DJP연합, 이인제의 독자 출마, 아들의 병풍 사건 등 각종 악재를 안고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1.5% 차이로 석패했고, 이 후 5년동안 야당 생활을 하며 쌓은 정치적 자산을 바탕으로 사실상 16대 대통령 당선이 매우 유력시되는 상황이었던지라 노무현의 상황은 그다지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는 지난 대선에서도 제기되었던 아들 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이것이 재차 인터넷에 퍼져나가자, 그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회창은 이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후에 이정연 씨의 병역비리 의혹은 의혹에 불과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결국은 정치 공세에 불과했던 셈.[36]
초반 기선은 노무현이 앞서는 듯했지만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앞두고 나서 선거 악재가 터진데다가 그 월드컵에 관심이 왕창 쏠리면서 투표율이 낮게 나왔고, 결국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하며 노무현은 큰 타격을 입은 반면 이회창은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이회창의 지지율이 높아졌다고 해도 당시 제3후보로 떠오르던 정몽준과 노무현을 완전히 압도할 기세는 아니었고, 이미 1987년 대선의 선례도 있었기 때문에 노무현 후보는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인기가 올라간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하기로 했고,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 후보로 추대되었다. 단일화 진행 후에는 이회창 후보를 여유있게 앞섰지만 대선 전날 갑자기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노무현은 그날 밤 정몽준의 자택을 직접 찾아갔으나, 정몽준은 자택의 문을 열어주지 않고 문전박대했고 이를 계기로 정몽준과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이 TV로 생중계되면서, 유권자들을 자극하여 적극적으로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불러모으는 효과를 낳았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선거 결과 70.8%의 투표율로 노무현 후보가 48.91%[37] 를 얻으면서 46.58%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2.33%(57만여 표) 차이로 근소한 차이로 꺾고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38] 이회창은 대선 낙선 후 정계를 은퇴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에서 최초의 영남 출신, 즉 지역주의를 타파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특히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이 거쳐왔던 과정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정치 레이스로 회자되고 있으며, 노무현 이후 많은 대권주자들이 2002년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자신의 모티브로 삼는 듯한 발언을 여러차례 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3.1. 관련 문서[편집]
2.4.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시절: 2003년 ~ 2008년[편집]
참여정부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출범한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당 분당이란 초유의 사태 속에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소추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뒤이은 17대 총선 결과 헌정 사상 최초로 진보 진영이 의회권력을 장악한 상황이 연출되며 기대를 모았다.[39]
한미 FTA를 강행 추진하였으며, 2007년 10월 2일 ~ 4일까지 북한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2차 남북정상회담에 참석하였다. 2007년 12월 11일에는 태안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서 서둘러 대처를 했으며, 대일독트린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독도는 방문하지 못했다.
재임 기간 내(2003년 ~ 2008년)에 있던 업적과 실책 그리고 사건사고를 자세히 알아보려면 대한민국 대통령 문단 및 이하 문단과 참여정부를 참조하길 바란다.
정부의 명칭은 참여정부이다. 정부 출범시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참여정부의 주요 정책들로는 아래와 같다.
- 사법제도 개혁
- 행정중심복합도시(이 복합도시는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건설
- 공공기관 지방이전과 혁신도시 건설
-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개혁
- 한나라당에게 대연정 제안: 지지율이 떨어져 총리임면권 양도하였으나, 한나라당은 노대통령의 제안 거부.
- 테러방지법: 출처
- 신용불량자 구제
- 지방분권
- 한미 FTA
- 비정규직 확대정책
- NIS(국가안전비상회의) 구축
- IT839 전략
- 교원평가제 도입
- 호주제 폐지 → 주민등록제 실시
- NEIS 구축
- 청남대 충청북도에 반환
- 기초생활수급자, 아동, 노인, 장애인, 여성 정책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설립
- 아시아문화중심도시
- 독립운동가 서훈: 2005년 3.1절 여운형 선생 등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 서훈에 이어 같은 해 8월 3일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이 추서되었다.
- 국방개혁 2020
- 질병관리본부 설립
- 햇볕정책: 국민의 정부 정책을 계승하였다.
- 이라크 첫 파병
- 지문날인폐지
- 법학전문대학원제도 도입
- 대학입시제도 개편: 수시 확대/정시 점차 축소.
- 수능 등급제 시행
- 호주제 폐지(2008년)
- 국민참여재판 도입(2008년)
재임 기간 중 일어난 사건사고는 사회에 영향을 끼쳤거나 매우 큰 사건들만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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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하철 참사: 사실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작 정확히 1주일 전인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말기인 2003년 2월 18일 일어난 사건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하기 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임기가 절묘하게 낀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여론에서는 김대중 대통령뿐만 아닌 노무현 대통령까지 싸늘한 시선으로 대했으며, 공식 석상으로 사과하는 모습도 보였다. 마치 2008년의 숭례문 방화 사건과 비슷한 케이스. 사후 처리는 대부분 참여정부 시기 진행되었다. - 이라크 전쟁 : 미국의 이라크전 발발에 맞춰 파병을 결정하였는데, 이 시기 노무현을 지지했던 진보층의 강한 반발에 부딫치며 취임 초부터 국정운영은 크게 순탄치 않았다.
- 한미 FTA 사태: 임기 내내 농민 및 노동자들과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극렬 대립을 하게 된 원인 중 하나. 노동자들은 분신자살, 음독자살까지 택하면서 "한미 FTA 절대 반대!"를 외쳤으며 농민들은 해외 원정 시위에 나섰다. 시위로 인해 부산 APEC에선 명박산성의 원조인 무현산성이 등장하였으며 여의도 농민 집회에선 강제 해산 과정 중에 두 명의 농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협상 장소 중 하나였던 제주도에선 4.3 사건 이후로 최대 규모의 공권력이 투입되기도 했다.
- 전염병 사스 유입: 2003년 4월 23일, 관계차관 대책회의를 열어 보건복지부는 국립보건원을 중심으로 사스방역대책본부를 가동시키겠다고 보고 하였다. 보건원의 사스 전담 인력은 4~5명에 불과하였지만 현장 간호사에게 그 당시 국무총리인 고건 총리가 사무실 팩스로 직보하면 바로 처리하는 빠른 대응책과 이 뿐만이 아니라 상위 부처인 국무조정실이 나서 국방부, 행정자치부 등 관련 부처를 총동원하고 사스방역도 국가방어하는일이 아니겠냐는 이야기로 군의관과 군 간호 인력이 공항 사스 방력에 투입되었으며 민간에도 협력을 구하여 대한병원협회장, 대한의사협회장, 대한병원감염관리학회장 등 민간 의료단체 대표를 초청해 의견을 들었다. 그렇게 사스방역은 전쟁처럼 치뤄졌으며 의심 환자는 있었지만 확진 환자는 1명도 내지 않고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WHO는 우리나라가 사스 예방 모범국이란 평가를 내놨으며 2003년 7월 31일, 노무현 대통령과의 주례 오찬에서 '한국판 CDC(미국의 질병통제예방센터)'가 필요하다는 김문식 국립보건원장의 건의를 전달했는데 받아들여져 다음 해인 2004년 1월 19일 질병관리본부가 정부 직속산하로 정식 출범하였다. 링크
- 김선일 이라크 피살 사건
- 부안사태
- 530GP 사건
- 유영철 사건
-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 대한민국 방송사•음악사에 최대 흑역사로 남게 될 방송사고가 2005년 7월 30일 MBC에서 일어났다.
-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
- 태안 기름 유출 사고: 2007년 12월
- 이천 냉동창고 화재 사고: 2008년 1월 7일
- 재임중 마지막 대형 사건사고 / 숭례문 방화 사건: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40]
- 바다이야기
- 대추리 사태
- 매미(태풍)
- 홈에버 사태: 노무현 정권 당시 비정규직 문제의 민낯이 드러난 사건. 영화 카트와 웹툰 송곳의 소재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3. 퇴임 후[편집]
2008년 9월 11일, 손녀 노서은과 자전거를 타고 봉하들판을 산책하는 노무현. 이는 귀향 후 노무현의 서민적인 모습을 상징하는 사진이 되었으며 이 후 노무현재단 로고에도 이 모습이 들어갔다.
내 인생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일 뿐...
진보의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내 인생의 좌절도 노무현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와 진보를 추구하는 분들은 노무현을 버려야 한다.[41]
나의 실패가 모두의 실패가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발췌-
2008년 2월 25일, 청와대에서 직원들과 작별인사를 한 뒤 10시 30분에 청와대를 떠났다.[42] 별도의 퇴임 연설이나 퇴임식은 가지지 않았고, 후임자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한 뒤 서울역으로 이동해 KTX를 타고 퇴임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서울특별시가 아닌 고향 경상남도 김해시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퇴임 대통령이 서울이 아닌 고향으로 귀향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김경수, 양정철, 김정호 등은 노무현과 함께 귀농해서 그가 죽기 직전까지 함께 있었다. 또한 문재인이나 유시민, 전해철 등의 참여정부 시절 참모들도 자주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을 접견하고 그의 농사일을 같이 돕기도 했다. 노무현은 주변 사람들을 버리지 못하는 좋은 성격과 따뜻함 덕분에 비서 및 측근들의 충성심이 매우 두터웠다고 한다.
이후 사람사는세상 사이트와 민주주의 2.0 사이트[43] 를 운영하며, 봉하마을 명예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중들과 교류를 추구하였다. 노무현은 공장폐수로 오염된 화포천을 살리기 위해 봉하마을 주민 및 지지자들과 함께 직접 하천에 나가 쓰레기를 주우며 정화를 위해 노력했고, 화포천에 쓰레기를 무단투기하거나 불법낚시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화포천 지킴이'를 신설하여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죽은 하천이라 불리던 화포천은 2009년 2월, 국토해양부로부터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관광지로 완전히 탈바꿈하였으며, 멸종위기의 동·식물을 포함하여 600여 종의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학습의 장이 되었다. 훗날 노무현이 세상을 떠나고 수 년 뒤 이 화포천에 국내에선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황새가 일본 도요요카 시에서 건너와 정착하여 큰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참조.
친환경 농법인 '오리 농법'을 도입하고자 외국에서 전문가를 초청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직접 비법을 전수받기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초기엔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오리 농법이 성공을 거두자 현재는 거의 모든 봉하 마을의 가구들이 친환경 농법을 이용한 농사에 참여하고 있다.
장군차를 재배하여 마을의 특산물로 만들었고, 늘어나는 마을 방문객들을 위해 작은 도서관 및 동물원의 건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을에 볼거리가 부족하다는 방문객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마을 앞에 생태 공원을 조성하여 연꽃 등 각종 수생 식물을 심기도 하였다.
전국에서 오는 관광객들과 소통하고자 일주일에 6일씩 만남의 시간을 정하여 관광객들과 격의없는 대화의 시간을 갖기도 하였다. 당시의 관광객들과의 대화를 보면 아들뻘인 30대 초반의 한 남성이 60대 나이의 부친뻘인 전직 대통령에게 “나이도 저보다 훨씬 많으시니 형님 합시다”고 제안하자 “형님 하려면 내 말 잘 들어야 하는데…”라며 유머로 응수하거나 “여기 좀 봐주세요”라며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에게 “(그 카메라는) 줌이 안 되네요. 그럼 그쪽으로 가서 서비스 할게요.”라고 응답하는 등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었음을 알 수 있다. # 또한 노무현은 관광객들과의 만남에서 이런저런 근황을 전하거나 즉석에서 노래를 열창하여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영상 1, 영상 2, 영상 3, 노래 영상.
사실 전직 대통령들은 퇴임한 이후에는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노무현처럼 자신의 측근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과 주기적으로 나와 인사를 하거나, 같이 농사를 짓고 어울리는 건 역대 다른 전직 대통령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김대중이나 김영삼처럼 자신들의 재단을 만들어 강연 활동을 하거나, 전두환처럼 종종 골프를 치거나 만찬 등에 나오며 얼굴을 비추는 경우는 종종 있긴 했었지만, 이는 철저히 제한적인 참석 범위에서 이루어졌기에 일반 시민들이 전직 대통령과 직접적인 소통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노무현 쪽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방문할 거라고 생각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 시절에는 욕하던 사람들이..."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실제로 노무현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통령 시절에는
전직 대통령이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환경운동을 하며 주민, 관광객들과 소통하는 모습은 외신에도 신선하게 비쳤는지 뉴욕타임즈에서는 노무현이 봉하마을로 낙향한 이후 인기를 끌며 새로운 전직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장문의 기사를 내보내기도 하였다. #
중국의 관영 신화통신 및 주요 매체들도 노무현이 하천에 나가 직접 쓰레기를 청소하는 사진을 게재하며 "버젓한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중국의 네티즌들도 "중국에서는 퇴직 후 몇 채의 호화 주택과 몇 백만 위안의 주식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면서 "한국의 대통령과 우리(중국)의 관리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하였다. #
귀향한 노무현을 보러온 관광객들 덕분에 김해시는 300억원 가량의 이익을 보았다. 봉하마을 인근의 주유소, 식당 등의 매출이 급증했고, 김수로 왕릉, 김해미술관, 김해박물관 등의 관광지들을 찾은 관광객들의 숫자도 덩달아 22% 이상 증가하였다. # 이 같은 관광객 증가 현상은 전국에서 노무현의 사저와 생가를 보러 온 관광객이 봉하마을을 둘러본 뒤 다른 관광지도 둘러보는 이른바 ‘전 대통령 특수’ 때문인 것으로 김해시는 분석하였다.
그를 찾으러 김해를 찾는 관광객은 평일에는 하루 3천명, 주말에는 1만명에 이르렀고,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노무현은 평일엔 6번 정도, 주말엔 10번 정도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봉하마을을 찾아 왔는데, 무턱대고 일자리를 구해달라고 찾아온 여성부터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노무현이 해결해 주지 않으면 극단적인 방법도 불사하겠다며 협박하는 남성들까지 찾아오는 등, 봉하마을이 '국민 하소연' 장소가 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다. #
물론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노무현의 인간적이고 신선한 모습에 호감을 느껴 찾아온 것이다. # 노무현의 홈페이지엔 2008년 4월 15일까지 3만 6천건이나 되는 네티즌들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으며, 대부분이 응원과 격려의 글이었다.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서 당시 노무현이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을 아카이브에 보존하고 있다. # 또한 이 사이트에서 노무현이 퇴임 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홈페이지에 올린 글들과 당시 네티즌들이 단 댓글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를 하나하나씩 보다 보면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송철호가 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된 후의 방송 출연 중의 언급에 의하면 노무현은 아직 지역주의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면서,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본인이 다시 총선에 나갈 생각이 있다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퇴임 대통령들은 정치인으로서 최종 목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므로 정치에서 은퇴하는 게 보통이지만, 대통령만 다시 못할 뿐 그 외의 선거들에 출마하지 못한다는 규정은 따로 없다.[44] 또한 당시 나이도 60대 초반으로써 정치인으로서는 고령이 아니었고, 이 주장에 따르면 퇴임 후 서울 사저가 아닌 봉하마을로 귀향한 것도 부울경, 그 중에서도 낙동강 벨트 지역구 다지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아무튼 정말로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나갈 생각을 노무현 본인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후술할 수사와 일련의 사건으로 그가 자살하면서 그의 계획은 영구히 이뤄지지 못했다.
3.1.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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