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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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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여성 피살 사건의 범인은 해당 문서로.
1. 개요[편집]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 본관은 신천(信川)#[1] , 호는 남주(南洲).
강보성 전 농림축산부장관의 장인이다.[2]
2. 생애[편집]
1890년 9월 8일 전라도 정의현 우면 법환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3] 에서 아버지 강안홍(康安弘)과 어머니 기계 유씨 유유생(兪酉生)[4]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7년에는 전라남도에 있는 통조림 공장의 이사로 취임했고, 1937년에는 전라남도 도회 의원으로 당선된다.[5][6]
1950년 5월 19일부터 1953년 9월 15일까지 3년 4개월간 남제주군수를 지냈다. 1956년에는 학교법인 남주학원(南洲學園)을 설립하여 초대 재단 이사장에 취임, 남주중학교와 남주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강경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친여 무소속 현오봉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제주도 남제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사회당 김성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지방선거에서는 제주도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는데 당시 공약으로 대제주 건설, 보수를 받지 않겠다, 쾌속선을 놓아 서울까지 한나절에 오가게 하겠다, 제주시와 목포시를 잇는 다리를 놓겠다(일명 제목대교 건설)고 공약하였다. 다른 공약은 다 지켰지만 마지막 제목대교 건설 공약은 지키지 못했다. 물론 당시로서는 130m나 되는 해저에 교각을 세울 기술도 해저터널을 뚫을 기술도 없었던 터라 실제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육지와 이어지고 싶다는 설문대할망 전설부터 내려오는 소망을 담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오늘날에도 제주 해저터널 떡밥으로 실제 논의중에 있다.
이후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지사직을 잃었으며 그 뒤 1968년 12월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3. 여담[편집]
- 남주중학교와 남주고등학교에서는 매년 강성익 기념 영상을 틀어준다.
4. 둘러보기[편집]
[1] 제주파(곡산계) 38세.#[2] 막내딸 강금희(康今熙)와 혼인하였음.[3] 인근의 서귀동, 보목동과 함께 신천 강씨의 집성촌이며 신효동, 하효동과 함께 곡산 강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신천 강씨인 강경옥과 곡산 강씨인 강용석 전 국회의원의 조부도 이 곳 출신이다.[4] 유여관(兪如寬)의 딸이다.[5] 이때는 제주도가 전라남도 제주도라는 행정구역이었다.[6] 다만 그 당시 도회는 세금을 일정 부분 내야 투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