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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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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편집]
16세기 초,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나온 복음주의 성향을 가진 기독교 교파들을 두루 일컫는 말.
개신교는 단일한 교파가 아니며, 각각의 교파 간에도 세부적인 교리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16세기부터 현재까지 매우 다양한 교파가 탄생하였는데, 어느 교파부터 어느 교파까지를 개신교로 간주할 것인가에 관한 명확하고 통일된 기준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천주교, 정교회와 분리되어 있는 복음주의적 교파들을 개신교로 분류하고 있다.
2. 특징[편집]
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주께 영광
Quinque Sola(Five Solas): 다섯 솔라.[4]
[5]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요도퀴스 판로덴스테인(Jodocus van Lodenstein, 1620–1677)
16세기 유럽에서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당시 가톨릭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지만,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의해 국교화된 4세기 이래 지배층들이 교계로 편입되면서부터 이러한 비판은 꾸준히 존재해 왔다. 천여년 간 가운데 르네상스 시기만이 특별히 교회의 타락상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보았으며, 면벌부나 사제, 수도원, 신자들의 타락상 같은 것은 그 부작용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의 순수했던 신학을 되찾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고 이러한 움직임이 점점 커지면서 개신교회가 탄생했다. 한편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당시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적법한 남계 후계자를 낳기 위한 재혼을 위해서[6] 잉글랜드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기도 했다. 종교개혁의 기원은 발도파까지 기원이 올라가기도 하는데, 주요한 교리에서 지금의 개신교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많아서 개신교 내부에서도 위의 세력을 '종교 개혁의 불씨'라고 하지 '종교 개혁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는다.[7] 마르틴 루터 이전 성서중심 신앙을 강조한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또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중세 가톨릭에서 교회의 타락만으로 개신교가 설립되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는 어느정도 설명은 되어도 완전히 그렇다고 할 수 없다. 16세기 독일 지역의 면죄부 판매로 인하여 마르틴 루터와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처음 성공한 것이지 그 이전부터 가톨릭 교회의 전례주의와 중앙집권을 비판하고 성경중심의 신앙을 강조한 움직임은 꾸준히 제기됐지만 루터 이전에는 가톨릭교회에 억눌려 큰 세력을 형성하진 못했다. 초기 교부시대 이후 중세 가톨릭 교회의 타락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으며[8]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와 식자층의 증가로 바티칸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조직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의지를 보여주고자, 오로지 성경에 모든 가치관의 기준을 둔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루터주의, 칼뱅주의, 재세례파 등은 선구자 루터의 영향은 받았으나 각자 서로 다른 정체성과 다른 신학방향으로 분화되었으며 앞서 서술하다시피 그들은 가톨릭교회와의 종교갈등으로 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9]
현재는 성경에 대한 해석 차이 및 가톨릭 전통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루터교회, 장로회, 성공회, 감리회, 구세군, 성결교회, 침례회 등의 많은 교파로 갈라졌으나 이들은 서로를 이단시 하지 않는다. 교회 제도나 강조하는 교리가 다를 뿐이지 같은 개신교로 보는 것. 이 교파들은, 가톨릭교회가 개신교를 향해 형제 교회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연대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앙의 색깔이 다소 차이가 나는 침례교/장로회에서 루터회/성공회로 교회를 옮겨도 개종이라 하지 않지만,[10]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옮기는 것을 개종(=개신교에 대한 배교)으로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11]
초기 종교개혁 시기에는 마르틴 루터 쪽에서 가장 성경의 원형에 맞게 살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노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개신교파끼리의 성만찬 논쟁인데, 마르틴 루터는 신약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빵을 나누어주며 이것이 자신의 살이라고 한 것, 포도주를 나누어주며 이것이 자신의 피라고 한 것을 두고 '빵에 예수의 몸이 내려오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이론은 가톨릭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을 바탕으로 한 화체설(化體說)과는 차이가 있다. 빵은 빵일 뿐이며 그것이 신성한 육체로 변하지 않는 것이 큰 차이. 이에 반해 츠빙글리는 '상징적인 것'으로, 후기로 갈수록 종교개혁자들은 루터파와 개혁주의 계통에서도 활발한 논쟁이 이어졌으며 루터 생전에도 루터파의 필리프 멜란히톤, 개혁주의에선 마르틴 부처 등이 둘 사이의 입장을 조절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발전시켜왔다. 한 세대 후 칼뱅주의에서는 둘 사이의 영적 임재설을 취한다. 현재까지도 루터주의와 칼뱅주의(개혁주의)의 차이점을 들자면 예정설과 더불어 성만찬 논쟁이다. 다만 현재에는 개신교 교파 내에서 그다지 심각한 신학적 차이점으로 여기진 않으며, 1973년 '로이엔부르그 합의서'에서 루터와 칼뱅의 성찬론은 같은 의미를 표현만 다르게 한 것이라는 데 합의하였다.[12]
삼성직[13] 을 인정하는 성공회까지도[14] 만인사제설을 일부 받아들였고, 나머지 교파에서는 사제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목사라는 지위는 목회를 이끄는 목회자에 해당하며, 교육자와 설교자의 역할을 할 뿐이다. 칼뱅주의 장로회에서의 목사는 평신도인 장로와 같으며 설교하는 장로일 뿐이다. 장로와 감독(주교)제에 반대하는 회중교회에서는 회중(대중)에 뽑힌 자가 설교자를 할 정도로 성직자 계급을 강하게 반대한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대체로 수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15] 종교개혁자들은 소명(Vocatio)을 강조하여 세속적인 하찮은 일이라도 하나님이 주신 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 수도자와 성직자의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했고 이신칭의에 따라 믿음 없는 수행과 수도행위는 우상숭배나 다름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또한 당시의 수도원들이 대부분 타락하여[16] 특권 집단화 되었기 때문에 영국, 독일 북부와 북유럽 국가들은 상당수의 수도원들을 폐쇄 및 파괴했다.
종교개혁시기 가톨릭 교회와 가장 큰 차이점을 일으킨 것은 루터가 재발견한 로마서의 이신칭의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성서의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핵심 문구[17] 이며 반복되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의 통설은 교부시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으로 가톨릭 교회에서도 정통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무슨 차이이냐 싶지만, 가톨릭에서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인간 공로가 불가능하지만 유비적(analogous) 의미에서는 가능하다'고 보며 아우구스티누스 해석에 있어서도 개신교와 이견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종교개혁가들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참된 해석자를 자처하게 된 것이다.[18] 유비적 의미에서의 공로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인간은 아무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많이 찾고, 또한 그로 인해 받은 은혜를 힘입어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해도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서 객관적으로 아무것도 아니어서 스스로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으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기특하게 여기신다는 주장이다. 개신교에는 자신도 모르게 유비적 의미에서의 공로의 존재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데, 대표적으로 믿음의 선행을 하면 그만큼 천국의 상급이 쌓인다고 믿는 케이스를 들 수 있다.
가톨릭교도들이 개신교도들에게 행위구원론이라 공격받는 것을 억울해 하듯이, 가톨릭에서 루터주의와 개신교의 이신칭의를 선행이 필요 없는 이상한 믿음이라 주장하는 것도 역시 무지에서 비롯된다. 루터에 따르면 신자들이 복음을 믿어서 구원 받는 것과 별개로 율법에서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 했기 때문에 선행은 그 결과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중세 교회에서 행위를 중요시하여 교회에서 정해 놓은 선행을 점수화하여 사소한 일에도 수백년 수천년, 교회에서 정한 악행에 대해선 천문학적 시간 동안 연옥에 갇히는 것으로 선전했고 그대신 교회에서 원하는 선행을 하면 (예: 헌금으로 받는 대사) 잠벌를 없애주는 걸로 선전해왔기 때문에 중세의 대중신심은 선행을 구원론의 대가처럼 취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중세시기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를 받으면 지옥에 가지 않는다 믿었고 별의별 악행을 다 저지르고 면죄부 사고 과거를 통째로 용서 받고 또 같은 생활로 돌아가는 짓을 종교 개혁자들은 용납하지 못했다. 죄의 용서는 고해성사같은 일시적 이벤트가 아니라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해야하는 것이라 가르쳤다. 그리하여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하여 세속적 윤리를 엄격하게 강조한다.[19] 선행(good works)의 개념도 다르다. 루터가 강조한 선행이란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한 성지순례, 고행, 금식 같은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 보기에 합당한 선행으로 교회 전통의 성경적 근거가 불확실한 선행은 인정하지 않았다. 농부처럼 가난하고 자식이나 부양 가족이 있는 자는 교회의 선행을 할 가망이 없고 사제 계급을 독점한 유력계층의 독점물로 여겨졌는데 루터와 칼뱅같은 종교개혁자들은 한낱 농부가 가족들을 부양 하는 것이나 농부의 아내가 그리스도인의 자녀를 교육하는 것을 사제들의 행위보다 더 가치가 높은 선행으로 여겼다.
이처럼 중세 가톨릭의 선행 개념은 몇 가지 오류를 범하기 쉬웠다. 당시 가톨릭 교회에서 인정하는 선행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것들이었고, 보속의 대가를 선행으로 여겼기에 그동안 여러성인들의 공덕이 축적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이러한 '선행의 보고'를 교회에서 독점적으로 관리하며, 신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에 창설된 여러 특수 수도회가 서구사회에서 자선단체의 모태가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은 교육을 하거나 의료활동을 하는 식으로 수도회 바깥에서 회칙에 따라 사도직 활동을 벌였다. 하늘나라에 가고는 싶으나 죄로 인한 보속은 받기 번거로운 귀족이나 부유한 평신도들이 이 수도회들을 돈으로 많이 후원하였는데, 선행처럼 어려운 일들을 사제계급에 위임하고, 때에 따라 선행에 동참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특히 흑사병 이후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가톨릭 교회에서 점점 손쉬운 보속수단[20] 을 점차 제공하기 시작했고, 면죄부는 상설적으로 팔리면서 기존의 이러한 선행들조차도 하려하지 않고, 죄와 구원에 대한 것이 선행이라는 삯으로 사고 파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이것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보았다. 마르틴 루터에 따르면 의인이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음으로 산다. 이를 반대로 보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곧 의인이다. 의인은 성경에 따르면 구원을 받는 사람이고 이 의인은 믿음과 구원의 약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대로 지상에서 실천한다. 즉 마르틴 루터에게 구원이란 믿음을 기반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었다.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선행과 구원이 약속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은 필연적으로 칭의 전에 예정과 소명이 논리적으로 필요했기에 예정설 논란을 내포했다.
그럼 '참된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어떻게 구분 가능한가?' 마르틴 루터는 이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바라는 대중들의 열망을 따르지 않았다.[21]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만이 안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성경에서 예수가 자신과 합한 자는 열매를 맺을 거라고 표현했기에, 마르틴 루터는 좋은 행위로 인해 구원을 얻는 것도 구원을 얻는 데에 믿음 이외의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좋은 행위는 '믿음의 증거'가 된다는 논리를 폈다.[22]
하지만 후에 이것을 가지고 장 칼뱅이 기독교 강요에서 이전 종교개혁가 선배들의 노고를 집대성하여 정리하며 답을 제시했다. 즉 어떤 사람이 구원받을지 여부는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나은 구원이 예정된 사람에게 그 모습을 참된 믿음으로 발현하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부정하고[23] ,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오직 구원이 예정된 사람을 위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개신교계에서 큰 파란을 일으켰다. 장 칼뱅 본인마저도 모질게 들릴 수 있다고 인정할 정도. 이에 반대해서 아르미니우스나 존 웨슬리, 드와이트 요크 등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인이다'[24] 성화(聖化, 믿음 이후 올바르게 사는 삶), 최종적인 구원이란 여정을 말하였다.[25]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이 주장한 것들을 바탕으로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개신교 신자를 흔히 볼 수 있다. 예수 천국 불신지옥 문구 자체는 일단 모든 개신교에서 틀리지는 않았으나 개신교의 구원론은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지옥불 속에 다이빙한다고 협박하여 강제개종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신칭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에 실패했기 때문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무슨 말이냐면 종교개혁 시기엔 전 유럽이 기독교 신자였고, 딱히 잘못된 믿음이라 생각하는 가톨릭에 맞서거나 신앙을 지키려는 측면이 강했지, 비종교인을 세뇌하여 개종하려는 시도는 18세기 유럽 개신교 신학계에서도 이단 취급을 받았다는 뜻이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문구는 사도시절에만 해당한다고 보는 게 통설이었기 때문.[26] 이 때문에 장로교회/개혁교회보다 상대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헤른후터(모라비아 형제회), 감리회, 침례회 등에서 선교 활동을 먼저 시작했으며, 공식적으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1793년 자 인도에 파송된 영국 침례교 선교사 윌리엄 캐리(William Carrey)로 보고 있다.
여기에 한국의 개신교에 대한 부가 설명이 필요한데, 장로회가 다수이고,[27] 장로회를 뺀 나머지 가운데도 감리회(약 150만)가 큰 비중을 차지하여, 종파가 생각보다 다양하지는 않다. 이는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장로회와 감리회 외에 침례회와 성결교회, 하나님의 성회(순복음교회) 등이 있다. 유럽에서 세가 강한 개신교의 맏형인 루터교회는 1950년대에 제일 늦게 들어온 데다 교회 수도 압도적으로 적어서 듣보잡 취급이고, 세계 개신교 최대 종파인 성공회도 역시 교세가 약하다. 루터교회와 성공회는 교리적으로는 이신칭의와 유일구원설을 믿고 마리아를 공경하지만 몽소승천, 무염시태, 평생동정 등의 교리들은 거부하며[28] , 마리아가 지상의 신자들을 대신해 중보기도를 한다거나 중보자 노릇을 한다는 가톨릭 교리에는 반대한다.[29] 그러나 예배 형태나 건축, 의복 등 하드웨어상으로는 가톨릭과 유사하며 특히 대한성공회는 고교회파여서 더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하드웨어 상의 이질감이 루터교회나 성공회가 아무래도 따로 노는 듯 보이는 분위기 형성에 기여했다.[30]
이 양대 종파가 서로를 이단으로 간주하여 헐뜯고 싸우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른 개신교 종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일이 잦은 상황에서 문제에 대한 책임의 소재를 밝힐 때에만 개신교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특정 교회 및 인물의 잘못이 전 종파의 잘못으로 치부되는 것은 옳지 않으나, 또한 절대 다수의 장로회가 다른 개신교 교단들과 다른 점을 아는 신자들도 적다. 장로회는 개교회중심주의라 교회에 따라 분위기가 다르다.
성공회와 일부 루터교를 제외한 개신교는 가톨릭의 '성모 마리아 공경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는데, 개신교 에큐메니컬 진영의 교단에서도 일단 이것은 성경과 거리가 먼 이단취급하는 교회도 있으며(물론 에큐메니컬 진영은 가톨릭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단'으로 낙인찍기보다는 '우리와 다른 전통을 고수하는 교회'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더 비판적인 교단(반 에큐메니컬)은 잘못된 전통을 넘어서 19세기에서 20세기에 선포된[31] 가톨릭의 마리아론 교리를 심각하게 보며 "이단도 아니라 이제 이교다" 라며 더더욱 부정적으로 본다.
이 문제는 종교개혁 당시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를 가로막는 커다른 장애물까지는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마리아 문서의 개신교 입장 문단 참고.
가톨릭의 개신교 비판 중에는 개신교가 가톨릭과는 달리 교리 해석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가톨릭은 교황과 교황청이 중심인 반면, 개신교는 읽는 이에 따라 성경의 해석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종파가 갈리게 된다. 단일한 권위체계가 존재하는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는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해석의 권위가 없어 분열이 필연적이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성서해석과 역사를 잘 모르는 의견일 뿐이다. 일단 성서 해석에 있어서 제멋대로 해석한다는 주장은 16세기 종교개혁시기에도 나왔는데 가톨릭 교회에서 공인한 신학박사과정을 나온 마르틴 루터는 물론이고 개혁주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장 칼뱅조차도 가톨릭 교회의 기존 성서해석이 명백히 틀리지 않은 이상 기존 해석을 인정했다. 당시 개혁자들의 성서 해석 문제 제기는 중세후기 스콜라 철학의 연구와 방법론은 물론, 14세기부터 제기된 인문주의의 연구성과를 이어 받은 것이고 구체적으로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나 에라스무스 등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전 연구가 뒷받침된 것이지 당시에도 이미 여러 연구성과로 인하여 이의제기가 된 내용을 바탕으로 기존 가톨릭 교회의 정본 불가타판의 오역과 필사본 전수시 오류나 첨삭과 그로 인한 잘못된 해석을 발견하여 원전연구를 재시도한 것이지 개인이 멋대로 해석한다는 주장은 비난에 불과하다.[32]
역사적으론 가톨릭 교회가 로마시대부터 현재까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비록 전승상은 그렇다고 주장하나) 것은 대단히 무리이며 착각이다. 로마교회는 이미 종교개혁 이전 동방교회와 격렬한 신학적 논쟁끝에 분열했었다. 기독교의 역사 초기만 좁게봐서도 교리상으로만 봐도 로마시대부터 영지주의, 도나투스파[33] , 펠라기우스 주의[34] 등으로 시작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었고, 한때 로마 교황조차 펠라기우스의 의견에 찬성하기도 하는 등 로마의 의견이 항상 교회 안에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니케아 공의회부터 아리우스파 단성론 등 초기 신학적 논쟁은 로마가 아닌 동방에서 주도했으며 훗날 동서 교회의 분열인 필리오케 문제와 성화상 문제 등 주장 자체가 옳고 그름을 떠나, 교회 내에서 다른 목소리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다.
동서 분열 이후 서방교회에서 조차 교부시대 때부터 다양한 의견들이 나뉘었고, 현재 가톨릭 교회에서(개신교에서도 인정하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대교부들의 입장이 통설로 정리되어 온 과정이 교회의 역사이다. 그리고 발도파처럼 개신교의 선구자급으로 가톨릭 교회의 내부 개혁을 주장하던 움직임과 목소리가 있으면 열심히 이단으로 사냥하여 태워 박멸한것이 성공한것이지[35] , 가톨릭 교회가 교황아래 한치의 의문점도 없이 2천년을 이어왔다는 것은 아니며, 꼭 옳은 점이라 여기지도 않는다.[36]
개신교에서는 오히려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여 초기 기독교와 멀어진 근본 원인이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 해석권한을 교황에 있다하여 (평신도에게 성경 금지, 성서 번역금지 등) 지식을 독점하다 인문주의와 그에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에 공격을 받은 것처럼 권력있는 이나 많은 이가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인문주의 모토인 ad fontes(근본으로 돌아감)을 통하여 일반사제는 물론 평신도까지 성경적 지식으로 무장하여 명백히 잘못된 가톨릭 전통주의와의 결별을 통해, '전통에 대한 맹종이 올바른 신앙인가'가 종교개혁시기 논제였고 "권위에 대한 믿음을 믿음의 권위로 대체하려는것이 당시 종교개혁 주의자들의 목표였다.
한국 개신교에 수백개의 교파들이 있음을 근거로 들면서 개신교의 분열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한국에 있는 수백개의 교단 중 인지도가 어느정도 있으며 사회에 영향력을 가지는 교단은 일반적으로 10-20개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장로회가 60% 이상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데, 장로회 내부에서도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부르크 신앙고백 등을 공통의 믿음으로 선언하는 교단만 같은 장로회 교단으로 인정하지 수백개의 교단이 나뉘어 삼국지 찍듯이 세력 다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가톨릭이나 정교회를 타교로 볼지언정[37] 같은 개신교인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등은 서로를 타교로 보지 않으며, 교회제도(감독제 등), 강조하는 교리(침례 등)등이 조금씩 다를 뿐 같은 믿음의 형제로 본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나뉘어서 반목 타령만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에서는 대체로 한국교회총연합, 한국교회연합,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교단이라면 신도들은 물론이고 목회자들간의 교류도 흔하게 이루어지고 이들 교단 중에서 소속 교회를 옮기는 것도 그냥 거기가 집에서 가까워서라고 말하는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닐 정도로 서로간의 거리감은 크지 않다.
장로회나 침례회와는 다르게, 전통적인 전례에 부정적이지 않은 (혹은 긍정적인) 루터교회와 성공회도 타교로 보지 않는다.[38] 이들 교파는 모두 '개신교'라는 이름 아래 연합하고 있다.
개신교 교파의 분열상 자체는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고 미국이나 영국, 서북유럽에서도 한참 때 일어났던 현상이다.[39] 당장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통일된 중앙권위가 없음을 아쉬워 하는 것도 일리가 있지만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중앙집권화된 역사 이래 수많은 오류와 범죄들을 보면 꼭 좋은 것만으로 보기 어려우며 개신교의 교회정치 시스템들이 무조건 나쁘다고 보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나치시대 가톨릭 교회는 교황청과 나치정권의 정교협약에 침묵을 지킬 것을 명령 받았으나[40] 개신교는 일원화된 구조가 아니라서 나치가 조직한 '독일인 교회'에 반발한 목사들이 고백교회를 만들어 반 나치 투쟁을 벌였고, 우리나라에선 선교사와 모국 교단 교회 내부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 끝에 신념에 따라 참배를 거부한 인물들이 현재까지 존경 받으나[41] 한국 가톨릭 교회는 로마와 일본 가톨릭 교회의 명령에 순응하여 일찌감치 모두 신사참배에 굴복했고 저항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부작용이 불거진 면도 없진 않으나 개신교는 의외로 기본이 민주주의와 자치주의이다. 장로제와 회중제가 바로 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것이고 개교회주의는 루터의 (지방자치적) 지역교회론에서부터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요소인데 이는 가톨릭의 권위주의, 중앙집권주의를 깡그리 부정하면서 나온 요소들이며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윗 문단처럼 일부 반가톨릭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은 가톨릭의 중앙집권적 교회론을 일종의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보편성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배타적) 민족주의와 결합하기 쉬운 구조이다.[42] '독일 민족'이라는 정체성부터가 종교개혁 시기를 통해 나온 것이다. 한국이나 미국처럼 헌법에 정교분리를 못 박아놓은 나라에서조차도 개신교는 내셔널리즘과 결합하는 경우가 잦고, 영국과 북유럽에서는 아예 국교회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기까지 했다. 특정한 문화를 배경으로 자생하여 유독 특정 지역에서만 교세가 강한 교파들은 역사적으로 민족주의/국가주의와 결합하려는 시도가 흔히 있어왔다. 대표적인 예로 잉글랜드의 성공회, 스코틀랜드의 장로회, 독일의 루터회 등을 들 수 있다. 현재의 성공회와 루터교회는 전세계에 퍼져 각 나라마다 관구 또는 교구를 두고 있고, 각 관구가 상하관계 없이 서로 평등하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이런 우려가 어느정도 해소된 상황이다. 비교적 최근에 분파되어 한 지역에서만 꽤 큰 교세를 유지하는 교파라면 다른 교파, 더 나아가 기독교 교단들의 연합 기구와의 교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도 한국 개신교 교회들은 국내에 몇 개의 대표성을 갖는 교회 연합 기구를 통해 소통하는 것 외에도 미국의 대형 개신교 교단들을 위주로 현재에도 끊임없이 국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개신교 신학의 세계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번창한 교세를 바탕으로 아시아 개신교 선교의 최전선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의무감 역시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아시아 선교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렇게 새로운 교단이 지역마다, 시대마다 지속적으로 탄생하더라도 교리가 끊임없이 분열을 거듭하기보다는 기본적인 원칙과 오피니언 리더들 간의 교류에 기반한 느슨한 국제적 연대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며 각 교단의 이견으로 인한 불화가 보편교회 측의 부정적인 전망과는 달리 무한히 확장되지는 않고 전 지구적 개신교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의견이 경쟁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다양성과 통일성 사이의 균형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시기 가톨릭의 금육 금식[43] 을 비판한 역사에, 오로지 성경만을 신조로 삼는 교리상 신약성서 바울의 서신에서 유대인의 율법 중에 음식에 대한 것은 지킬 이유가 없다고 명백히 밝혔기 때문에[44] 현재 개신교는 전 세계 종교들을 통틀어서 시크교와 함께 육식에 매우 관대한 종교이기도 하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도 개신교 문화권은 고기 요리가 발달한 경우가 많다.[45] 대표적으로 영국과 북유럽.[46] 그리고 장 칼뱅의 청부(淸富)사상이나 막스 베버의 영향으로 다른 종교 입장에서는 현세적, 속물적이라고 까이기도 하지만 이것도 교파마다 다르니 무조건적인 일반화는 하지 말자. 참고로 칼뱅은 루터를 우습게 여겼을 정도의 금욕주의자였다. 스위스 목사로 있을 때도 금욕주의를 설파했던 전력이 있다. 술이나 담배 같은 기호품에 대해선 종파마다 달라서 애매하지만 가급적 피하는 종파가 많다. 특히 미국이나 그 영향을 크게 받은[47]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목회자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술과 담배를 금지하는 경향이 강하다.[48] 구한말 시절 외국 선교사가 보기에 지나치게 술 담배 노름에 빠져있던 민중들에 거듭난 삶을 보여주길 바라는 측면에서 술담배를 금지했던 것이고 현재에는 이전보단 많이 풀렸다. 적어도 예나 지금이나 술 담배 한다고 지옥 간다고 하는 목사는 없다. 예수님도 와인을 즐기셨는데 이 분이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소릴 하는 사람은 없다. 성서에서는 술취하는 것을 죄악으로 규정했지만 술 마시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도로 규정하지 않았다.[49] 즉 성서대로라면 취하지 않을 정도로 마시는 건 괜찮지만 실제 그렇게 양 조절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금주령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설령 술 마시고 취했다고 한들 그런 걸로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는 목사도 없다.[50] 다만 장로회에선 목사들은 술 담배 금지 규정을 철저히 지키도록 한다.[51]
이 술과 관련된 문제는 지중해권 지역과 북유럽의 음식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식수를 마실 때 수인성 전염병을 방지하고 그 지역 식수에 석회질이 많아 이 역시 건강에 악영향을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술을 만들어 마시는 것이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던 시기가 매우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래서 이들 사회에서 술을 끊는다는 건 밥 숟가락을 놓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예수가 성찬에서 빵과 함께 와인을 거론한 것도 당시 식생활에서 와인은 한국인에게 있어서의 김치조차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식탁에서 빠지면 곤란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 사회에서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인의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대체로 그냥 술에 취해서 살았고 술 취한 삶을 매일 뉘우치는게 일상이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홍차와 커피가 이 지역에 도입되고 나서야 유럽, 지중해 주민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제정신을 가지고 생활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큰 과장은 없었던 셈이다. 이 시점이 되어서야 사회의 필요악이었던 술이 그냥 악이 되어버렸고 이슬람교 역시 술 대신 커피를 마시는게 가능해진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강력한 금주 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셈이다. 성서는 꾸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오래된 경전이기 때문에 꾸란 만큼 강한 금주의 메시지를 전달하긴 어려웠지만 술에 대한 관점이나 우려에 대한 취지는 그 당시부터 단지 대체재를 찾지 못했을 뿐인 별로 좋지 않은 것에 대한 적절한 대처 수준이었으니 현대 기독교에서 술이나 기타 정신활동에 영향을 주는 물질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성서적 취지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보기는 힘들다. 가톨릭 역시 개신교만큼 강하게 신도들에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는 것 뿐이지 몸에 좋지 않은 이런 것들에 대해 어지간하면 하지 마라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진보, 중도 성향의 교단은 성(性)에 관한 교리가 (이혼, 피임, 낙태를 절대 금지하는 등의) 가톨릭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하다. 다만 동성애의 경우, 진보 교단은 가톨릭보다 유연하고(일부 교단에서는 동성애자가 목회자/성직자가 되는 것도 허용할 정도), 보수 교단은 가톨릭보다도 빡빡하다.(예를 들면, 동성애자가 평신도로 입교하는 것도 금지.) 가톨릭의 공식 입장은 "동성 간 육체관계 및 동성결혼은 단호히 반대하나, 동성애자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존엄한 인간이므로, 사랑과 친절로서 대해야 한다." 라는 것인데 개신교의 보수교단의 입장도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톨릭과 보수 개신교 모두 동성애자는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상태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죄인이라고 해서 미워해선 안 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가르침이고 죄인을 정죄할 자격이 인간에게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인간이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애정을 가지고 도움을 주는 것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대하는 모든 기독교 종파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고 이 원칙에서 동성애 문제가 예외가 되지도 않는다.
개신교 교단 중 대부분은 성호긋기, 십자고상,[52] 제단에 촛불 놓는 것,[53] 성만찬의 성변화 등을 가톨릭의 잔재 혹은 비성경적인 행위라 하여 배척한다.[54][55] 또한 가톨릭의 교황 중심적 교회관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톨릭 신자에 대한 멸칭인 Papist(교황주의자, 교황숭배자)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것.
상술했듯 대체로 전통이나 인습에 대해서는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반면, 성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외관적인 면에서 당대의 최첨단 기술과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아예 자유민주주의(종교의 자유, 양심의 자유 포함)[56] 나 산업 혁명 등을 비롯한 현대 문명이 만들어지는 데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영향이 매우 강했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즉, 철저하게 'Semper Reformanda' 정신에 의거하여 종교개혁자의 의견이라도 현대 기준에서 성경에 어긋난다고 증명되면 비판하고 폐할 정도로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종교라 볼 수 있다.
개신교의 원리 중 만인사제설과 성경자유해석은 교파의 분열과 이단의 난립을 낳았다는 지적이 있지만, 탈권위주의적 교회론과 후기 자유주의 신학의 씨앗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한편 오직 성경은 현대 근본주의의 씨앗이 되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현대 개신교계가 성경신학, 성서비평학 등 성경에 대해서 굉장히 신중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세계에서 건물 크기가 가장 작은 교회는 크로스 아일랜드 채플.[57]
2.1. 개교회주의[편집]
베드로좌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를 하는 가톨릭과, 개신교이면서도 주교제를 실시하는 성공회와는 달리 성공회를 제외한 개신교는 철저하게 교회 단위로 쪼개지며 목사 중심의 개교회주의를 택하고 있다. 개교회란, 가톨릭이나 성공회처럼 중앙집권화되어 하나의 강한 중심을 바탕으로 산하의 교회가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하나 하나가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개신교 내부에서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으로 나뉘며 그 안에서조차 또 여러 개로 나뉘어 결국 교회마다 설교 내용과 봉독 성경 구절이 전부 달라진다. 이로 인해 예배의 형식이나 설교 말씀의 주제, 내용 및 방점을 찍는 포인트가 모두 다르다. 이는 종단별 스펙트럼(보수~진보)이 나타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채택한 가톨릭은 서울에 있는 신부나 시골에 있는 신부나 월급이 동일하다. 그러나 개신교는 모두 독립되어 있으므로 대형교회와 개척교회의 간극이 심하게 벌어진다. 이러다보니 개신교에서도 열악한 지역의 교회들은 대형 교회나 중앙집권조직인 총회나 노회 등에서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 사용되기도 한다.
3. 역사[편집]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는 개신교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 당시 1517년부터 나온것은 아니다. 당시 마르틴 루터는 돈을 받고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 판매에 대항하여 95개조 반박문을 교회 문에 붙이며 교회의 개혁을 주장했다가 1520년 가톨릭 교회의 파문, 1521년 제국의회의 추방령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도 가톨릭 교회는 물론 루터나 루터의 지지자들까지도 분열이 일시적인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몇 년후에야 실질적인 개신교회의 설립이 이어졌다. 가톨릭 교회 개혁을 주장한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은 기존의 교회를 개혁하는 입장에서 가톨릭교회의 전통에 성경적 의문을 제기하고 교회전통보다 성경을 우위에 놓으며 전통보다는 성경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자를 자처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로마교회의 전통으로 변질된 초기 기독교를 회복하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크리스천이라는 생각이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 자체는 1529년 신성 로마 제국의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부터 등장했는데 마르틴 루터의 복음주의에 찬성하고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6개 제후[58] 와 14개 제국도시[59] 의 대표들이 "Verbum Dei manet in æternum(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리라)"이라는 구호를 소매에 적으며 등장하자 이들을 제국의회에서 가리켜 라틴어 Protestantes에서 따와 항의자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이들의 주장은 기존 종교개혁 입장의 루터와 루터 지지자들이 가톨릭교회와 황제의 이단선고에 반발하여 1520년 루터와 지지자들에게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이 내려졌고, 세속적으로는 1521년 보름스에서 열린 신성로마제국회의에서 제국의회 구성원 400여 명의 대다수의 의사를 무시하고 가톨릭교회와 황제가 루터파에게 제국추방령을 내렸지만, 황제 카를 5세가 1526년 1차 슈파이어 제국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의 위협으로 대(對) 튀르크 전쟁협조와 과세를 위해 기존 추방령을 번복하고 새로운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 조치를 제한하며 공의회에서 루터파가 주장하는 교회 개혁 문제를 다루기로 하였는데, 카를 5세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끝나며 강화하자 다시 이전 결정을 번복하여 루터파에게 제국추방령을 다시 때렸고, 신교도 제후와 제국도시들은 이 결정에 항의했다. 루터파 제후들과 제국도시는 루터와 루터파에 내려진 제국 추방령도 적법절차에 따른 공소가 아니어서 무효이며[60] 후속 조치 또한 당연히 무효라고 항변한 것.
이들은 또한 자신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인으로 절대 이단이 아닐 뿐더러, 세속적으로 여전히 황제에게 충성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529년 2차 슈파이어 제국회의 직후, 1530년에는 루터파 교회에서 루터파 교리선언에 해당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을 제출하고, 기존 교회와 교인들에게도 공존을 요구하였지만 황제와 가톨릭교회 세력이 다수 의석을 장악한 제국의회에서 거부당했고, 교회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한편 14세기 중반 160여 년 전 현재 개신교와 유사한 기존 가톨릭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이 잉글랜드에서도 있었는데 존 위클리프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가톨릭 교회에선 롤라드파(Lollardy)라 불렀었다. 롤라드는 '중얼거리는 자'라는 뜻으로 이들이 성경을 외우고 다니는것을 미친놈 취급한 비하어였으며, 1517년부터 가톨릭 교회 개혁을 주장한 루터에 찬성한 세력들을 지칭하는 루터파란 용어도 이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며 루터를 믿는 이단이라 하여 'Lutheran' 즉 '루터 추종자'라 불렀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하에서 나온말은 맞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속된 말이다. 반대로 루터파에선 기존 가톨릭교회를 기독교가 아닌 로마추종자, 교황추종자(Papist)라고 비하했다.
개신교에서는 대체로 16세기 이후 가톨릭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며 제2경전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종파들을 통칭해서 개신교라고 부른다. 또한 개신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들도 역시 개신교라고 불린다.[61]
그러나 기원 자체가 서방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기독교 종파들의 집합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재에도 어디까지가 개신교 종파인가?"라는 합의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파[62] , 칼뱅파(츠빙글리)[63] , 재세례파[64] , 잉글랜드 국교회[65] 같이 현재는 아무런 문제 없이 개신교로 함께 구분되는 종파들 모두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서로를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로 여기지 않았고, (물론 가톨릭을 대하는 정도 만큼은 아니지만) 서로 반목했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의 표면적인 공통점이라면 로마 교회에서 이단 선고를 받았다는 점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 전체를 겨냥한 종교재판, 마녀사냥[66]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67] , 30년 전쟁 등을 겪으면서 루터파, 칼뱅파, 잉글랜드 국교회(잉글랜드 성공회)는 비로소 로마교회에 대항하는 공동의 신앙을 가졌다고 여기게 되어, 가톨릭에 대항한 일종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게 된다.[68]
결론적으로 개신교의 정체성은 16세기경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교회의 미신적 악습이라 보는 요소들을 극복하고, 성경에 충실한 '바른 교회'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도 개신교는 '오직 성경'을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삼으며 이는 교회조직의 전통과 성경을 동등한 위치에 놓는 가톨릭·정교회와의 큰 차이점이다.[69]
같은 개신교 내부에서도 전통에 대한 시각은 다르다. 루터회나 성공회는 기독교 전통 가운데 성서와 충돌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인정하는 반면에, 개혁주의 계통에선 성서에 언급되지 않는[70] 전통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측면이 강하다. 크게 기독교를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면,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서방에 속한다. 가톨릭과 사이는 둘째치고 서방교회에서 갈라져 나갔기 때문에 동방교회인 정교회보다 가톨릭 교회와의 신학적 공통점이 많다. 동서방 교회의 신학적 논점에 대해선 거의 모두 가톨릭 입장과 일치한다. 애초에 마르틴 루터가 신학적으로 교조로 삼은 성 아우구스티누스[71] 또한 서방교부로 가톨릭 교회에서 정통으로 여기지만 정교회에선 그다지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72]
4. 명칭[편집]
독일어로는 복음주의 교회(Evangelische Kirche)라고 불리기도 하며[73] , 종교 개혁 시기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자라는 의미에서 ‘Protestant’라 부른 데에서 유래하여 프로테스탄트라고도 칭한다.
개신교는 단일한 종파가 아니라, 기독교 내의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공유하는 여러 분파들의 총칭에 가깝다. 기독교에서 어디까지가 개신교인지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지만, 대개 종교 개혁 1세대 종파들로부터 거듭 파생된 종파들도 일반적으로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루터 이전의 후스파 등도 종교 개혁 0세대로 포함하기도 한다.
기독(基督)은 크리스토스, 즉 그리스도의 한자 음차[74] 이므로, 기독교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종교를 총칭한다. 즉 기독교와 개신교는 동의어가 아니며, 가톨릭, 정교회 등도 다 기독교의 일종이다. 개신교가 한국에서 흔히 '기독교'라고 불리지만, 개신교는 기독교의 전부를 대변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개신교의 동의어로 여겨지게 된 까닭은 꽤 다양하다. 전래 시기와 방식이 모두 달랐기에 천주교로 불린 가톨릭과는 별개로 취급된 경향이 크다. 가톨릭은 개항 이전의 조선에 서학이라는 이름의 학문 일종으로 전파된 케이스였으며, 개신교는 개항기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의 활동과, 해방 이후 한국의 재건과정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나라인 미국 때문이다.[75][76] 그렇게 국내에서 개신교가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기독교라고 하면 곧 개신교를 떠올리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가톨릭 교회에서는 스스로를 기독교라고 칭하는 경우가 비교적 적고 주로 '가톨릭', '천주교' 등의 용어를 쓰고 있다.
5. 교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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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직분[편집]
- 목회자
- 목사 - 만30세 이상으로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합격한 뒤 목사 안수를 받은 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전도사로 남는 사람도 있다. 몇몇 교단에서는 추가로 기혼자로서 자녀를 두고 있어야 안수 자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남자만 목사가 될 수 있는 교파도 있고, 남녀 모두 목사가 될 수 있는 교파도 있다. 천주교/정교회/성공회 신자들은 성직자 중 사제급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 담임목사(위임목사, 당회장) - 한 교회의 수장이다. 이 때문에 그 교회에서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위임목사는 장로들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소속교단 헌법이 정한 정년까지 자신의 교회에서 목사를 뜻하나 오늘날 담임목사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다. 당회장은 교회의 최고의결기관인 당회의 장을 의미하는데, 간혹 담임목사 표현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 부목사 - 담임목사와 직업과 계급이 같은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이쪽은 비정규직이나 다름없다. 언제 교회를 떠날 지 알 수 없는 운명이고 아무리 큰 교회의 부목사를 하다가도 따로 독립하여 교회 개척을 한다고 해도 확실히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 강도사/준목/수련목 - 몇몇 개신교단에서만 채택한 직위로, 전도사와 목사 사이의 위치에 있다. '준목사' 또는 '목사 후보자'라고 이해하면 쉽다. 강도사 고시를 합격해야 하며, 설교는 할 수 있으나 교회 운영에는 참여할 수 없다. 예장고신과 예장합동에서는 강도사, 기장에서는 준목이라 하고, 감리회에서는 수련목이라고 한다. 예장통합, 침례회, 성결교회에는 여기에 대응하는 직위가 없으며, 전도사에서 바로 목사가 된다. 대체로 주일 학교나 청년부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전도사와 비슷한 업무를 수행한다.
- 전도사 - 신학대학 혹은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에 목회활동을 하는 자 또는 목사고시 미이수자. 강도사와 같이 주일 학교나 청년부를 담당하거나 장년부의 교구를 담당하기도 한다.
- 목사 - 만30세 이상으로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합격한 뒤 목사 안수를 받은 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전도사로 남는 사람도 있다. 몇몇 교단에서는 추가로 기혼자로서 자녀를 두고 있어야 안수 자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남자만 목사가 될 수 있는 교파도 있고, 남녀 모두 목사가 될 수 있는 교파도 있다. 천주교/정교회/성공회 신자들은 성직자 중 사제급이라고 이해하면 쉽다.
- 평신도
- 장로 - 만 40세 이상으로 기혼에 10년 이상 같은 교회를 다닌 신도 가운데 선출한다. 대부분의 교단에선 남자만 가능하나 예장통합, 감리회 등 몇몇 교단은 여자도 장로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77]
- 권사 - 만 30세 이상으로 기혼에 5년 이상 같은 교회를 다닌 신도 가운데 선출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열 교단에서는 여자만이 가능하나, 한국기독교장로회와 감리회에서는 남자도 권사로 임명될 수 있다. 남자도 권사로 임명이 가능한 교단의 경우, 집사를 거쳐야 권사가 될 수 있고 권사를 거쳐야 장로가 될 수 있다.
- 집사 - 만 30세 이상으로 기혼에 세례교인인 신도 가운데 선출한다.[78] 장로회에서는 안수집사와 서리집사로 구분되는데, 서리집사는 앞의 조건에만 맞고 큰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으면 무난하게 임명된다. 안수집사부터는 선출이 까다롭다. 서리집사는 남녀 불문이지만, 안수집사는 남자만 가능하다.
- 기타
- 감독(총관) - 감리회의 직책으로, 한 연회를 관장하여 그 지역 내의 교회들을 치리한다. 천주교/정교회/성공회의 주교급.[79] 장로회나 침례회는 개교회주의가 강하기 때문에 감독/주교에 대응되는 직책이 없다. 대감독(대총관)은 몇 개의 교구를 묶어 관장한다. 천주교/정교회/성공회의 대주교급.[80]
- 감리사 - 역시 감리회의 직책이며, 감독 밑에서 한 지역/교구 내 교회들을 치리한다. 천주교/정교회/성공회의 보좌주교급.
- 노회장(지방회장) 및 교단 총회장(감독회장) - 아무리 개교회주의가 강한 교단들이라해도, 같은 지역 내에서 같은 교단의 교회들끼리 연합해야할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노회나 지방회라는 형식으로 연합을 하는데, 그 회의의 수장이 노회장(지방회장)이다. 장로교는 노회를, 다른교파는 지방회제이다. 지방회가 천주교나 정교회의 교구 같은 탄탄한 조직력을 보여주지는 못하기 때문에 지방회장도 주교와 같은 힘은 없다. 교단 총회장은 말 그대로 그 교단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굳이 들자면 천주교/정교회/성공회의 대주교 정도 되겠으나, 그 권위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 간사 - 주로 큰 교회에서 설교를 제외한, 특수한 업무를 맡기기 위해 두는 경우가 많다.
6.1. 성공회의 직제[편집]
- 사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