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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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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1945년 9월 16일 결성된 미군정, 한국의 정당. 풀네임인 한국민주당보다 약칭인 한민당으로 유명하다. 김병로, 김준연, 백남훈, 송진우, 원세훈, 조병옥 등 국내에 남아있던 독립운동가들과 김성수, 윤치영, 장덕수 등 지주, 자본가가 결성한 정당이었다. 참고로 광복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정당은 아닌데, 한국민주당 창당 이전 안재홍의 조선국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원세훈의 고려민주당 등 많은 정당들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2. 창당 선언문[편집]
(중략)
일본 제국주의 철쇄는 끊어졌다. 혈한의 투쟁! 참으로 36년, 세계사의 대전환과 함께 우리는 드디어 광복의 대업을 완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반만 년의 빛나던 역사를 도로 밝혀 완벽무결한 자주독립의 국가로서 구원의 발전을 약속하게 되었다. 3천만 가슴에 뒤끓어 용솟음치는 오늘의 기쁨이여! 이 기쁨은 곧 혁명동지들에게 바치는 감사로 옮겨지고 더욱이 포한종천하신 순국제현에게 생각이 사무치매 도리어 몰래몰래 슬플 쁜이다. 참으로 이 크나큰 광복의 공훈은 해내.해외의 들입고 감추인 무수한 혁명동지들의 혈한의 결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머지않아 해외의 개선동지들을 맞이하려 한다. 더욱이 인방중경에서 고전역투하던 대한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한 혁명동지들을 생각건대 그들은 두 번 거듭나는 세계의 대풍운을 타서 안으로 국내의 혁명을 고동하며 밖으로 민족의 생맥을 국제간에 현양하면서 나중엔 군국주의 박멸의 일익으로 당당한 명분 아래 맹방 중,미,소,영 등 연합군에 끼어 빛나는 무훈까지 세웠다. 오늘의 기꺼운 광복 성취가 이 어찌 우연한 바이랴.
우리는 맹서한다.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는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약속한다. 군국주의의루(전쟁보루)를 폭멸하고 세계평화를 확립시키는 세기적 건설기를 당하여 자주독립을 회복한 우리는 맹방 제국에 최고의 사의를 표하는 한편 국제평화의 대헌장을 끝까지 준수 확충하려 한다.
나아가 우리 민족이 장래할 세계의 신문화 건설에 뚜렷한 공헌이 있기를 꾀할진대 무엇보다도 완벽결한 자주독립국가로서 힘차게 발전해야 될 것이다. 이는 오직 전제와 구속 없는 민족주의 제도 앞에 개로개학으로써 국민의 생활과 교양을 향상시키며 특히 근로대중의 복리를 증진시켜 호말의 차별도 중압도 없기를 기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전국민의 자반석 위에 두고 세계 신문화 건설에 매진하려 한다.
동지여, 모이라! 한국민주당의 깃발 아래로.
강령
● 조선민족의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기함
● 민주주의의 정체 수립을 기함
● 근로대중의 복리증진을 기함
● 민족문화를 앙양하여 세계문화에 공헌함
● 국제헌장을 준수하여 세계평화의 확립을 기함
정책
● 국민 기본생활의 확보
● 호혜평등의 외교정책 수립
●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의 자유
● 교육 및 보건의 기회균등
● 중공주의의 경제정책 수립
●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관리
●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 국방군의 창설
(하략)
- 출처
3. 역사[편집]
3.1. 창당과 세력 구축[편집]
1945년 광복 직후 좌익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빠르게 정치세력화에 성공한데 비해 우익-민족주의 인사들은 한동안 사태를 관망했다.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뿐더러 국내의 우익 인사 대부분은 일제 말 독립운동에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8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원세훈이 민족주의 진영에서 최초로 고려민주당을 창당했다. 참고로 고려민주당은 계보상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이자 의외라면 의외로 사민주의 노선을 내세운 진보 정당이였다. 8월 말, 38도선 이남으로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은 우익, 민족주의 인사들이 관망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정치 세력화하는 계기가 됐다. 이에 8월 28일 김병로와 이인이 조선민족당을 창당했고 이에 호응한 원세훈의 고려민주당을 합당시켰다. 유학 경험을 가지고 있던 국내 인사들도 정치세력화를 시도했는데, 김도연, 김성수, 송진우, 유억겸, 윤보선, 윤치영, 허정 등은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을 발기한 것이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친 공산주의 좌익과 달리 우익-민족주의 정당이 난립하자 내부에서 통합 요구가 거세졌다. 9월 4일 조선민족당과 한국국민당은 통합 발기회를 개최하고 9월 6일 경성부 종로구 낙원정의 협성실업학교에서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대회를 열었다. 주최측은 700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200 ~ 300명 정도 모였다고 한다. 반면, 같은 날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종로구 계동정의 경기여고 강당(당시 건준의 본부)에서 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렸는데 무려 1,000명이 모였다. 300명이나 1,000명이나 도찐개찐 같아 보여도 당시 참여 숫자는 굉장히 중요했는데, 참여 숫자는 곧 자신들의 세력을 의미했다. 그만큼 좌익~중도 성향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대중들로부터 인기가 많았고, 중도~우익 성향의 한국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9월 16일 정식으로 한국민주당은 창당대회를 열었다. 9월 21일 중앙부서를 확정해 총무제를 실시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전라북도의 백관수, 경상북도의 서상일, 경기도의 김도연, 경상남도의 허정, 충청남도의 조병옥, 황해도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 송진우는 수석 총무(당수), 김병로는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은 당무부장, 장덕수는 외무부장, 김약수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여담으로 한국민주당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던 장덕수가 발기문 및 성명서를 기초 작성했는데, 주 내용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대차게 까는 글이다.#
한국민주당은 미군정과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좌익 세력의 득세를 걱정했던 미군정은 반대 성향의 한국민주당을 환대했고, 한국민주당 인사들은 미군정의 고문관, 행정 관리로 대거 임용됐다. 미군정 군정장관의 고문직 11명 중 9명이 한국민주당 인사였을 정도였다. 면면을 보면 경무국장 조병옥, 경기도 경찰부장 장택상, 대법원장 김용무, 대법관 이인, 인사과장 대리 정일형, 학무국장 유억겸, 위생국장 이용설 등. 참고로 나머지 2명은 여운형, 조만식. 한국민주당 인사들은 미군정에게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비롯한 조선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여운형과 안재홍을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친일파(...)라고 주장하였다.[1] 10월 10일 미군정 군정장관 아치볼드 아놀드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사기꾼에 의한 괴뢰국"이라 비난하자 한국민주당은 자신들의 성과라며 자찬했다.
한국민주당의 최대 계파는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 동아일보 계열이었다. 동아일보 세력은 수양동우회[2] , 흥업구락부[3][4] 와 연합해 당을 장악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독립운동 경력이 있어도 1910년, 1920년대에 집중되었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는 친일 행위에 협력한 이들이 많았다. 때문에 시민으로부터의 지지기반이 약했다. 한국민주당은 독립운동가들도 있긴 했지만, 친일 출신의 지주 및 자본가들이 점차 주축이 되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인식이 당연히 그닥 좋진 않았다.
물론 초창기 한민당을 마냥 꼴통 친일 우익 정당으로 매도하기엔 김병로, 김약수, 원세훈 등 친일 경력이 없고 진보적이며 개혁적인 인물들도 제법 있었다. 이들 중 김약수, 원세훈 등은 당내 좌파 겸 사회주의 우파로 한민당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이들이 지지한 원세훈은 초대 수석총무(당수) 송진우가 암살 당한 이후 임시 수석총무에도 오르나 좌우합작과 토지개혁에 대한 한국민주당의 소극적 태도에 실망감을 느끼고 1946년 10월 무렵 탈당하고, 김규식 계열에 합류해 좌우합작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된다. 송남헌도 처음엔 한국민주당에 있다가 점차 실망감을 느껴 탈당한 이후부턴 김규식의 비서로 지낸다.
한민당 세력은 국내 독립운동 세력(건국준비위원회, 조선공산당 등)과는 대립하는 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해외에 있었던 독립운동 세력을 봉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 원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만을 정식정부로 봉대하고 기타 정부를 자칭하는 단체를 배격한다는 것이었다.[5] 한국민주당은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 임시정부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미군정에 임시정부 인사들의 조기 귀환을 여러 차례 요청하기도 했다.
한국민주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용하여 취약한 지지율을 보완하고 원로들의 이름을 빌려 세력을 결집하려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외의 해외에 있었던 다른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 지지도가 비교적 낮았고, 엄연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독립운동의 대표기관이 존재함에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자신들과 대등한 위치를 요구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아[6] 추대를 받아들이고 한국민주당과 협력하였다.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 인사들이 귀환하자 환영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 재편을 주문했다. 이승만이 자신이 만든 좌우통합 조직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우익 통합을 주장하자 임시정부 중심의 통합을 옹호하기도 했다. 12월 한국민주당은 임시정부개선환영대회를 개최하고 애국금헌성회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인사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덕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심이 된 '특별정치위원회'가 조직되어 정치 세력 재편을 시도한다. 한편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국내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관점에서 한국민주당은 친일 문제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3.2. 신탁통치 문제와 한국민주당의 성장[편집]
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었다. 그런데 이때 동아일보는 신탁통치안을 제기한 것이 소련이라 보도(실제로는 미국이 제의)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을 터뜨렸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그 해에 다시 타국의 지배 아래 놓인다는 이 결의안은 시민의 반발을 불러오기 충분했다. 한국민주당 역시 12월 2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해 신탁통치 배격을 결의했다. 신탁통치 오보 이후 국내 정치 세력은 찬탁론, 반탁론, 신중론으로 여론이 나뉘었으며, 특히 반탁론이 많은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이를 계기로 반탁을 주장한 한국민주당도 크게 성장했다.
임시정부는 신탁통치 문제를 군정청으로부터 곧장 정권을 접수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고, 이에 한국민주당 수석 총무이자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신중파 송진우는 12월 30일 경교장에서 반탁을 주장하던 김구에 대해 극렬한 반탁운동이 미군정에 의한 권력 이양으로 곧바로 이어질 공산이 거의 없으므로 반탁운동 방법 측면에서 신중히 접근해야한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날 새벽에 원서동 저택에서 한현우 등에게 총격을 맞고 암살당했다.[7] 신중론을 취하던 송진우가 암살당하자 한국민주당과 김구, 한국독립당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됐다. 대신 한국민주당은 이승만과 점차 가까워졌다.
1946년 1월 7일 한국민주당과 조선인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의 주요정당 대표가 회동한다. 한국민주당에서는 임시 수석총무 원세훈과 김병로가 대표로 참여한다.[8] 4당 대표는 "삼상회의에 대한 이해하에서 결의안의 조선 원조 정신을 적극 지지하고, 신탁 문제는 향후 수립될 임시정부를 통해 자주독립의 정신으로 해결한다"는 4당 코뮤니케를 발표한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당내에선 코뮤니케가 반탁 정신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파들이 나와 합의를 번복하고 원세훈을 임시 수석총무에서 끌어내린다. 그리고 당의 재정권을 무기로 김성수를 새 수석총무로 옹립한다. 당연히 이에 반대파들은 반발했지만, 당권을 먹은 지주층 중심의 우익 계열은 당을 점점 보수화시킨다.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한국민주당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공동위원회 참가는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신탁문제는 임시정부 수립 뒤 민족총의로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3일에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하자 한국민주당은 이를 지지하였으며, 이즈음하여 김구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단일 정부 수립 비난 성명이 잇따르자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이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대응하였다. 한편 미군정이 안재홍이나 김규식 같은 같은 중도파를 중요 자리에 임명하려하자 한국민주당은 안재홍을 겨냥해 "1개월이 넘지 않는 동안 이 자를 쫓아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이들 한국민주당은 안재홍을 친일파라느니 공산주의자라느니 말도 안되는 억지논리로 마구 공격하였고, 극우단체를 동원하여 삐라를 뿌리게 했으며, 민정장관에 임명된 안재홍이 내린 인사발령 지시까지 거부하였다.
1946년 7월 좌우합작운동이 진행되자 한국민주당은 신탁통치나 토지분배 문제 등을 들어 좌우합작위원회를 공격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민주당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한 원세훈을 비롯해 김병로, 김약수 등이 당을 떠난다. 탈당 사태로 인해 한국민주당은 김성수, 장덕수 등 지주 세력만의 정당으로 전락했으며 대중의 지지도 크게 이탈했다. 한국민주당은 10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를 반전의 계기로 삼았다. 이 선거에서 한국민주당은 45명의 민선의원 중 15석을 차지했다. 서울에서는 3석 중 3석을 얻었다. 그러나 부정선거로 인해 서울과 강원 지역에서 재선거가 실시됐다. 재선거에서 한국민주당의 얼굴인 김성수, 장덕수가 각각 한국독립당의 조소앙, 신익희에게 패배하면서 한국민주당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은 입법의원에서 반탁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등, 이승만 세력과 연합하여 단정수립운동을 전개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한국민주당은 독자노선을 시도한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자 불참을 선언한 이승만, 김구와 달리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선언한다. 한국민주당이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선언하자 다른 정파들도 이승만과 김구의 영향력에서 이탈해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선언한다. 이 즈음 이미 좌파는 미군정의 탄압으로 힘을 잃었고, 중도파 또한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상태가 되어버린다. 또한 미국과 소련은 한국 정부 수립에 대해 이미 안이 확연히 달라져 단일 정부 지지파들에게 더욱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한국민주당에게 정국의 무게가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정당 단체 수 문제와 신탁/반탁 문제로 위원회는 또다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양측 입장만 확인한 채 결렬됐다. 이 상황에서 정치부장 장덕수가 암살당하자 한국민주당은 위기에 몰렸고, 이에 한국민주당은 이승만과 다시 손을 잡았다. 반면 김구는 미군정에 의해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의심되어 재판에 소환되었고 한국민주당은 김구를 비난하였다. 이후 김구는 한국민주당, 미군과 완전히 결별하고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중도적 선택에 김구의 한국독립당 세력은 오히려 우익 측 지지세력을 잃고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떨어져 나간 지지층은 이승만 세력과 한국민주당 세력이 흡수하였다.
3.3.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편집]
1948년 5.10 총선거에서 한국민주당 세력은 29석을 차지하였다. 여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세력들을 흡수하여 나름 여당과 같이 활동할 수 있었다. 후에 반민특위가 발대하였으나 우익 주도파는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친일파 청산을 뒤로 미룰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부의 노골적인 압박 속에 좌초되었다.
한편,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정부 수립 초기만 해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협력하는 공생관계로 출발하였지만, 얼마 안가 제헌의회에서부터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한국민주당은 내각제를 바탕으로 김성수를 국무총리에 앉힘으로써 정국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헌법 제정 당시 이승만은 기존의 내각책임제 대신에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요구[9] 했고, 한국민주당은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내용 수정이 원체 졸속이었던 탓[10] 에 정부조직법상으로는 여전히 실권이 국무총리에게 있었다.
그래서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에 '김성수 총리, 그리고 내각의 절반(6인) 이상은 한국민주당계 안'을 내걸어 이승만과 합의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자 그런 거 없다는 듯 바지사장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했다. 이에 격분한 한국민주당[11] 이 이윤영안을 부결시키자, 이번에는 이범석을 지명했다. 이 과정에서 이범석은 자신을 총리로 만들어주면 한국민주당에게 내각에 6석 이상을 내주겠다고 딜을 걸었고, 더 이상 총리 지명을 질질 끌기도 뭣했던 한국민주당은 이 제안에 응한다. 하지만 이범석 총리 지명이 통과되기가 무섭게, 이승만은 이범석의 요청도 씹고 한국민주당계를 김도연 한 명만 내각에 임명해 버렸다.[12] 거기다가 이승만은 한국민주당의 재정적 기반이던 지주층을 한방에 박살 낼 결전병기를 꺼내게 되니 그것이 바로 '농지개혁법'이었다. 심지어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추진하려고 좌익 성향의 조봉암까지 데려와 농림부장관에 앉혔다. 이때 아무도 조봉암을 앉히리라 생각하지 못했고 심지어 조봉암조차 자기가 임명되리라 생각 못했을 정도의 파격적인 수였다.
이렇게 사이가 멀어지던 한민당의 자금줄인 지주층들을 대놓고 박살내버리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니 당연히 이승만과 한민당 관계는 파탄이 날 수밖에 없었고[13] , 2대 국회에서[14] 이승만 측의 세력이 약화되자 이승만은 대통령 권한 강화를 시도하였다. 한국민주당의 후신 세력은 이에 맞서 의원내각제 안을 제시하였다. 이런 대립 속에서 이승만은 1951년 자유당을 결성하고 1952년 이른바 발췌 개헌을 강행하면서 한국민주당 세력과 연을 사실상 끊었고, 이에 한국민주당 계열 인사들은 반이승만을 기치로 1949년 민주국민당을 거쳐 1955년 여러 반이승만 세력들이 연합하는 민주당까지 이어지게 된다.
4. 평가[편집]
한국민주당은 오늘날 인상과 달리 시작은 원세훈, 김약수 등도 참여한 좌우합작 형태로 시작한 빅텐트 성격의 정당이었다.[15] 원세훈, 김약수, 김병로[16] , 김준연, 백남훈, 송진우, 조병옥 등 독립운동가들도 다수 참여했다. 해방 정국에서는 친미군정 성향이었고[17] , 창당 선언문에도 보이듯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봉대하는 운동을 펼쳤다.[18] 그러나 점점 호남 지역을 위시한 지주층 중심의 우익 세력들이 당 주류를 점하기 시작하고, 당내 중도파들이 시도한 좌우합작운동에도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 탈당 사태를 초래하기도 한다. 지주, 자본가 세력이 중심축 중 하나였고 당내 좌파들도 공산주의에는 부정적이었기에 반공주의를 내세웠고, 이를 명분으로 이승만 정권과 협력해 반민특위 활동 무산에도 나서 당내 갈등과 친일정당 인식을 키웠다. 허나 제1공화국 시기에는 내각 약속을 어긴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져 반이승만을 내세운 야당으로 활동하였다.[19]
여기까지만 보면 보수를 넘어 수구정당화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의외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개혁적인 공약을 내세우기도 했다. 송진우 등 한국민주당 주류는 주요 산업 국유화, 계획경제, 경제통제, 토지 소유 제한-매매 금지, 8시간 노동제 등을 공약했다.[20] 원세훈, 김약수 등이 한국민주당의 경제-사회 공약을 입안했다.[21]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공감대도 여기에 반영돼 있다. 물론 지주들의 이익이 걸린 토지개혁 같은 문제에선 한국민주당의 각론은 좌파 정당들의 공약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긴 했다.
사실 어찌보면 미군정기 여러 국내 인사들이 이념 갈등에 암살당하고 그들을 따르던 무리가 해체되면서, 해방 정국에서 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운 좋게 세력이 유지되어 제1공화국 시기 이승만 세력 최대의 라이벌로 부상한 점도 있었다. 물론 반탁/찬탁 운동이 전개되면서 자체적으로 세력을 키운 점도 있지만. 1949년 당 해산 이후 정계에 남은 인물들은 후신격인 민주국민당으로 들어가거나 정치적 구심점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해 탈당한 김영삼, 민관식 등 자유당 탈당파 10여명과 함께 민주당 창당에 관여했고, 소수는 이승만의 자유당으로 넘어갔다.
민주당계 정당 계보에도 들어가는 정당 중 하나로[22] 청년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당하여 시당 상무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다만 상기했듯 여러 흑역사들이 있을 뿐더러 지금의 민주당계 인사들과는 큰 연관점도 없어서인지[23] 오늘날 더불어민주당에선 이 당을 원류로 보진 않고 있다. 애초에 민주당계 정당이 복잡한 이합집산을 많이 거쳐온 역사를 가지고 있어 한민당 세력 외 다른 세력들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더 그렇다. 다만 민주당의 정신적 구심점 중 하나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민주당을 거쳐 꾸준히 그 후신 정당을 따라 이어지는 정치 역정을 밟은건 사실[24][25] 이기 때문에, 정의당이나 민중당, 노동당, 녹색당 등의 진보정당들과 달리 한국민주당을 대놓고 비판하진 않는 편이다. 사실 진보정당에서도 오래 전에 존재했던 정당이라 언급하는 빈도는 드문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