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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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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야구인. 롯데 자이언츠의 최초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인물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전국구적인 관심을 받았고, 국가대표팀에도 꾸준히 차출되어 활약했으며, 프로야구 창립 후 여전한 실력과 투혼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기여한 프랜차이즈 선수이다. 특히 1984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내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던 시절 자이언츠=최동원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롯데 자이언츠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선수였으며, 같은 시기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선동열과의 라이벌 구도로도 유명했다.[13] 더불어 프로 초창기 미약했던 선수 권리의 신장을 위해 당대의 연봉 상한의 기준이기도 했던 고액 연봉자였음에도 궂은 일을 기꺼이 도맡아 했던 선수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야구계의 귀감이 되어 수많은 야구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시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회자되는 인물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상상을 초월하는[14] 혹사에 시달린 후 프로에 데뷔했음에도 통산 100승과 2번의 20승 시즌, 80완투를 비롯한 여러 기록들을 세웠다. 특히나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한국시리즈 4승 달성[15][16][17] 은 누구나 그를 '무쇠팔'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18]
이외에도 투구 전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지는 루틴으로도 유명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수상 내역[편집]
3. 주요 기록[편집]
3.1. 연속 및 기타 기록[편집]
- 5년연속 규정이닝 2배이상 투구
- 2년연속 225이닝-14완투-1점대 ERA-1점대 FIP
- 5년연속 208이닝-14완투-2점대이하 ERA-2점대이하 FIP
- 5년연속 전구단 상대 완투
- 6년연속 선발승 전경기 완투승
- 6년연속 선발등판경기 2/3이상 완투
- 3년 776.2이닝 66승 45완투 1.97ERA 1.86FIP (3년간 연평균 259이닝-22승-15완투)
- 4년 1000.2이닝 80승 60완투 2.16ERA 1.95FIP (4년간 연평균 250이닝-20승-15완투)
- 5년 1209.1이닝 89승 76완투 2.28ERA 2.05FIP (5년간 연평균 242이닝-18승-15완투)
- 1984년 324.2이닝 31승 6세 18완투 258탈삼진, 후기리그 우승, 한국시리즈 우승 (한국시리즈 40이닝 4승 4완투 포함)
- 단일 한국시리즈 8개 부분 1위 (이닝, 다승, 선발등판, 선발승, 완투, 완투승, 완봉승, 탈삼진)
통산 기록은 8시즌(248게임, 1414.2이닝)동안 103승 74패 26세이브, 평균자책점 2.46, WHIP 1.15, 1019탈삼진을 기록. 커리어하이는 1984년 시즌으로 27승(!)[21]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 WHIP 1.04, 223탈삼진[22] 을 기록했다.
특이한 기록은 1984년 8월 16일 MBC 청룡을 상대로 '4번 타자'로서 1사 만루 상황에 타자로 나선 일이다. 4번타자 1루수였던 김용철이 자신이 친 타구에 부상을 당하여 물러나자, 지명타자였던 김민호가 1루수로 들어오면서 김용철의 타순에 투수였던 최동원이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MBC 청룡의 투수 유종겸은 앞 타자를 고의사구로 보내고 최동원을 상대했으나, 최동원은 2볼 1스트라이크에서 우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를 터뜨렸다. 이것은 그대로 결승타가 되었으며, 유일한 프로에서의 타격 기록이다. 따라서 그는 통산 타율이 10할, 통산 OPS가 3.000이다.[23][24]
4. 플레이 스타일[편집]
경남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투수로서, 주 구종은 패스트볼과 커브였다. 당시 스피드건이 보급되지 않아 최고 구속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현역시절 최고구속에 대한 기사로 80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야구 선수권에서 최고구속 145km이다. 일본언론에서 쾌도난마의 공이라고 표현하며 관심을 가졌다.[26]
정확히 어떤어떤 변화구를 던졌는지 지금와서 확실히 알 순 없지만 주무기는 확실히 커브였다. 각이 크고 예리해 콜롬비아 전에서는 파인타르를 발라 부정투구를 했다는 의심을 사기도 할 정도였다. 당시기사 흔히 그의 커브를 폭포수 커브라고 부른다.[27] 그 외에도 슬라이더, 투심, 정체불명의 역회전 볼은 확실히 던졌다.
최동원을 지금의 최동원으로 만들어준 대표적인 특징이 바로 연투능력이다. 5선발 체제가 공고한 2020년대 현대야구와 달리 1980년대 투수의 연투는 흔한 일이었으나, 최동원은 그 중에서도 특별할 정도로 괴물 같은 연투능력의 보유자였다. "선발로 등판 → 불펜 등판 → 며칠 뒤 선발 등판"이 비일비재 했었다.
최동원의 투구폼은 용틀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역동적이었고, 그것은 일본의 선진 야구를 배우게 한 아버지의 덕이 컸었다.[28] 부산에서 시청 가능하던 일본프로야구 중계방송을 보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에이스 호리우치 츠네오의 투구폼을 아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최동원의 전매특허인 드롭[29] 이 바로 호리우치의 주무기였다.
최동원은 구위에도 큰 자신감을 가지고 공격적인 투구를 했다. 이는 인터뷰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홈런을 맞으면 다음 상대 때 다시 똑같은 코스에 던져서 "칠테면 쳐봐라. 이번에도 또 치면 넌 실력이었고 못 치면 운이 좋아서 네가 쳤을 뿐이다."라는 마인드를 가졌었던 게 나온다. 홈런을 허용하고도 호탕한 웃음을 보여주는 강철멘탈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적인 투구 성향으로 인해 피홈런율은 상당히 높았다. 더불어 통산 고의사구가 15개밖에 안 된다. 1년에 2개도 안 던진 셈. 정말로 공격적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다.
5. 평가 및 위상[편집]
롯데 역사에서 최초이자 현재 2개밖에 없는 영구 결번의 주인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상상을 초월하는[30] 혹사에 시달린 후 프로에 데뷔했음에도 KBO 리그 초창기를 대표하는 투수 중 한 명으로 남았을 정도의 대활약을 더욱 고평가받는다. 특히나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한국시리즈 4승 1패는는 그 누구나 그를 '무쇠팔'이라 불러도 될 정도의 역대급 퍼포먼스라는 평가를 받는다.#[31] 선동열과 함께 1980년대 한국프로야구의 태동기를 대표하는 대투수이자 이대호와 함께 롯데 자이언츠의 상징적인 레전드[32][33] 로, 단순히 성적 뿐만 아니라 프런트에 목소리를 내며[34] 선수들의 권리 향상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점을 인정받아 한국 야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사후 롯데 자이언츠로부터 KBO 영구 결번을 받았다.
아마추어 때부터 혹사를 달고 살았던 데다가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프로 입단 당시부터 부상을 달고 살아서 구속이 많이 느려지고 고생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진가가 드러나 몇 년간 선발 중간 마무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나와 이닝을 소화했다. 덕분에 장명부 다음으로 많은 단일 시즌 284.2이닝을 던졌으며, 역대 단일시즌 최다 탈삼진 3위 기록인 223K를 기록하는 무지막지한 임팩트를 남긴다. 이 기록은 2021 시즌 두산 베어스의 아리엘 미란다가 경신할 때까지 37시즌 동안이나 깨지지 않은 기록이었으며, 2022년에 안우진이 토종 투수 역대 최다인 224K를 기록하기 전까지 토종 투수 최다 기록이기도 했다. 안우진이 최동원의 기록을 깨기 전까지 최동원의 기록에 가장 근접했던 이는 1996년 221K를 기록한 팀 후배 주형광이었다. 류현진조차도 200K 시즌은 2번(2006년, 2012년)이나 있었지만 끝내 최동원의 기록을 넘지는 못했다.
6. 최동원과 선동열[편집]
전성기가 약간 지난 시점에서 프로데뷔를 했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크며, 전성기 때의 선동열과 비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일 것이다. 선동열은 최동원을 라이벌이자 존경하는 선배로 인식하였고 최동원 또한 선동열을 라이벌이자 인정하고 존중하는 후배로 인식했다고.
자세한 내용은 선동열 vs 최동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은퇴 후[편집]
자세한 내용은 최동원/은퇴 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 선거 이력[편집]
7.2. 소속 정당[편집]
8. 최동원 투수상[편집]
한국프로야구의 전설적인 투수였던 그를 기리기 위해 한 시즌 최고의 활약을 펼친 프로야구 투수와 고교야구 투수에게 주는 상이다.
자세한 내용은 최동원 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어록[편집]
별은 하늘에만 떠 있는다고 별이 아니에요.
누군가에게 길을 밝혀주고, 꿈이 돼줘야 그게 진짜 별이에요.
2011년 7월, 공식 석상에서의 마지막 인터뷰 中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젊음을 모두 쏟아부은 그라운드를 떠나 홀로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벽에 기댔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면 그 선수는 진정 야구를 사랑 했노라고.
'운동선수에게 은퇴란 어떤 의미던가?'라는 인터뷰 질문에 대한 최동원의 답변
어이! 덩치 큰 친구, 공 좋은데.
(감사합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별거 없어. 신인답게 겁 없이 던지면 돼.
"누군가가 앞장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 사실 제 생각만 한다면 선수회 만들 일 없습니다. 어려운 동료, 불우한 후배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저같이 연봉 많이 받고 여유있는 선수들이 앞장선 거죠."
1988년 선수협 결성 시도 당시 인터뷰 中
10. 최동원에 대한 말말말[편집]
그때 감독님이 그러더라고,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36]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37]
스포츠 2.0과의 인터뷰 중
11. 미디어 믹스[편집]
11.1. 영화[편집]
11.1.1. 퍼펙트 게임[편집]
자세한 내용은 퍼펙트 게임(2011)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11년 12월 22일에 개봉한 영화로, 최동원과 선동열의 3번의 선발 맞대결을 그렸다. 조승우·양동근, '퍼펙트게임'서 최동원·선동렬 변신 최동원 역은 조승우가, 선동열 역에는 양동근이 맡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영화 개봉 전 최동원이 세상을 떠나며 두 레전드가 나란히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보지 못하게 되었다.
11.1.2. 1984 최동원[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4 최동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021년 11월 1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11.2. 다큐멘터리 & 교양 프로그램[편집]
2011년 9월 25일 KBS 스페셜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편이 방송되었다.[38] 야구팬이라면 무조건 감상하자. 이 방송에 나온 바로는 영화 퍼펙트게임 제작진에게 '내 투구폼이 워낙 와일드하기 때문에 배우가 다칠 수도 있다. 꼭 정확하게 따라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 다큐에서는 민훈기, 박동희[39] , 강병철, 유두열, 김시진, 김일융, 한문연, 송승준 등의 인터뷰도 곁들여져 있다. 대본은 스포츠 다큐멘터리 작업을 많이 하는 민혜경 작가가 썼다.
MBC 스페셜 [538 회] 불멸의 투수, 최동원
2011년 11월 11일 밤 11시에[40] MBC 스페셜에서 불멸의 투수 최동원편이 방송되었다.[41] 직전에 만들어졌던 KBS보다 양이라든가 자료 면에서 풍부하니[42] 팬이라면 보는 것을 추천. 중간에 보면 은퇴 후에도 팬들이 편지를 보내거나 하면 빠짐없이 답장엽서를 보낸 장면이 나오는데 그곳에 '롯데 자이언츠 11번 최동원'이라는 문구가 있다. 자신을 그렇게 내팽개치고 조롱했던 구단임에도 그는 끝내 롯데 자이언츠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많은 롯데팬들이 눈물을 흘렸다.
사망 10주기인 2021년에는 KBS부산에서 다큐멘터리 '철완 최동원 시대와 승부하다'가 방영됐다.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구성으로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영상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2022년에는 그 해 포스트시즌이 한창이던 10월 20일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50번째 에피소드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이 에피소드의 핵심 이야기는 당연히 1984년 한국시리즈.
12. 가족오락관[편집]
- 1995년 1월 13일
- 1995년 4월 6일
- 1996년 6월 5일
- 1996년 9월 11일
- 1996년 12월 25일
- 1998년 2월 4일
- 1998년 7월 8일
13. 여담[편집]
13.1. 야구 관련[편집]
- 흔히 최동원이 기록한 한국시리즈 4승을 "다신 나올 수 없고, 다신 나와서도 안 되는 기록."이라고 부른다.
- 롯데의 계약금 미지급으로 시작된 최동원과 롯데의 갈등 역사는 연봉 협상 및 지급을 둘러싼 갈등, 선수협 창설 과정에서 보복성 트레이드 단행 등으로 뿌리가 깊다. 최동원의 팬들이 도저히 롯데를 좋아할 수 없게 만든 사건들이 많았는데 상세 내용은 롯데 자이언츠/논란 및 사건사고/구단 관련 문서 참조.
- 차가워보이는 이미지의 선수였지만 팬 서비스가 매우 좋았던 선수였다. 팬들의 열화와 같은 싸인 요청에도 절대 찡그리지 않고 싸인을 다 해줬고 자신의 앞으로 온 팬레터에는 한 장도 빼놓지 않고 사비를 털어서 만든 싸인 엽서에 감사 인사와 싸인을 해서 답장을 전했다고 한다.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삼성으로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한 후에도 자신에게 싸인을 요청하는 롯데 팬들에게 변함없이 친절하게 싸인을 해줬다고 한다.[43] 안타까운 것은 삼성 유니폼을 입고 롯데 팬에게 싸인을 해주던 최동원과 그에게 싸인을 받은 롯데 팬이 모두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렸다는 점이다. 팬들을 위한 최동원의 마음은 그의 사망 직후 방영된 MBC 스페셜에도 나오는데 프로그램 막바지에 모친 김정자 여사가 자택에 보관하던 싸인 엽서 뭉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최동원이 삼성으로 이적한 후는 물론 은퇴 후에도 팬레터에 대한 답장으로 써줬다는 그 싸인 엽서에는 롯데 자이언츠 11번 최동원이라는 글씨가 너무도 선명히 적혀 있었다. 자신을 매몰차게 버렸던 구단이었지만 끝까지 롯데를 잊지 않았던 최동원의 생전 모습에 많은 롯데 팬들이 눈물을 흘렸고 롯데 구단에 분노했다.
- 최동원이 쓰던 금테안경은 그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이다. 그래서 안경 에이스라고도 불린다.
- 1984년 한국시리즈의 임팩트가 매우 크고 프로 데뷔 이전이라 잘 알려져 있진 않으나, 이전에도 최동원은 시리즈를 홀로 책임지고 우승으로 이끈 적이 있는데 바로 1981년 코리안시리즈. 당시 실업 롯데 자이언트 소속이었던 최동원은 6경기 중 6경기에 전부 등판해 42⅓이닝 2승 1패 1세이브 방어율 2.32를 기록하는 괴력투를 선보였다.
- NC 다이노스 창단 당시 초대 감독 후보로 물망에 오른 사람들 중 1인이었다. 특히 NC의 김택진 구단주가 어린 시절부터 최동원의 오랜 팬이었기 때문에 영입이 강력하게 추진됐다. 당시에는 암 투병 중이었기 때문에 무산되고 그 대신 건강이 회복된 뒤에 프런트나 코칭스태프로 모셔올 계획이었다. 그러나 끝내 최동원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택진 구단주는 김경문 감독과 함께 최동원의 빈소를 찾았는데 조문 후 인터뷰에서 "최동원 선수는 제 마음 속에 영원한 별이십니다"라며 눈물을 쏟았다.
- 결국 NC 다이노스가 202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김택진 구단주가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가지고 고인의 봉안당을[46] 찾았다. 이에 최동원의 모친 김정자 여사가 김택진 구단주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2012년 9월 11일 사직 야구장 두산 베어스 vs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그의 아들인 최기호 군의 시구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는 못 속이는지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폼과 묵직한 구위를 선보이며 팬들을 아련하게 만들었다.[47] 타석에 있었던 이종욱이 놀랐을 정도.
- 2012년 10월 25일, 매니지먼트 게임인 프로야구매니저는 원년시즌까지의 선수카드를 업데이트 했으며 최동원이 활약했던 시즌의 카드를 업데이트했다. 특히 한국시리즈 4승의 역투로 기억되는 1984년 카드는 EX카드로 나와 최동원을 모르는 어린 야구팬들도 최동원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 영원우표가 발매되었다.
- 2015년 3월 28일, 최동원 모친 김정자 여사가 2015 한국 프로야구 kt wiz와 롯데 자이언츠의 개막전 경기에 앞서 시구를 했다. 최동원의 현역시절 투구폼을 그대로 재현한다고 해서 많은 롯데팬들의 기대를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비슷하게 투구폼을 소화해냈다. 투구폼 뿐만 아니라 생전 공을 던지기전에 버릇[48] 까지 똑같이 보여주면서 뭇 야구팬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 2015년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빅토르 메사가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그에 관해 언급했다.(위 멘트 참고)
- 최동원과 롯데에 대해 유명한 글이 있다.
제목: 우리아버지한테 기아는 왜 우승을 많이했어요? 라고 물었거든
아버지가 해태는 선동렬을 데리고 우승을 많이했다고해서 왜 롯데는 최동원데리고 1번입니까? 라고 물으니까 롯데가 최동원을 데리고 우승한게아니라 최동원이 롯데를 데리고우승했다.......라고 하심 개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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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는 과정에서는 당시 감독이었던 박영길의 인맥이 작용했었는데, 박영길은 최동원의 조부가 부산 충무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었을 때 만든 야구부에서 야구를 배웠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박영길 감독이 최동원을 롯데로 데려올 때 조부의 도움을 받았었다고.
- 조종규 전 심판위원장은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 5명을 뽑아 달라는 질문에 그 첫 번째로 서슴없이 최동원을 꼽았다. 카리스마 있는 피칭, 연투능력, 그리고 승리에 대해 투철했던 집념을 이유로 들었다. 나머지 4인은 선동열, 김시진, 송진우, 류현진 순으로 꼽았다.
-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허구연은 자신이 경험한 우리나라에서 빈볼을 가장 잘 던지는 투수로 최동원을 꼽았다. 최동원은 때리겠다고 하면 진짜로 때렸다고...최동원이 빈볼을 때릴 것 같은 조짐이 보이면 타석의 타자들이 멀찍이 물러서서 볼을 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을 할 정도였다고.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성한이 술회하기를 김성한이 유독 상대하기 힘들었던 투수가 최동원이었고 실제로 최동원의 투구에 손목을 맞아 골절상을 입고 한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대전적은 김성한이 괜찮았다고 한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이건열은 정해진 포지션 없이 땜빵으로 떠돌기만 하다가 김성한의 부상 당시 주전 1루수로 계속 출전기회를 얻으면서 괜찮은 타격성적을 기록했으나 김성한이 무려 2주만에 복귀하자 혀를 내둘렀다고 했다.
- 2022년 7월 16일 한국프로야구 40주년을 기념한 프로야구 레전드 40에 선정되었다.#
- 컴투스 프로야구 V22의 초대 광고모델로 선정되었다. 컴투스 측에서 CG로 최동원의 생전 선수시절 모습을 만들어내고 음성은 AI음성복원을 사용해 상당히 높은 퀄리티의 광고를 만들어내며 야구팬들의 호평을 받았다. 2022년 올스타전에서 레전드 40 선정 선수들의 특별 시구가 있을 때 광고 영상이 활용될 정도.
- 워낙 한국 야구계에서 전설적인 선수이기에 KBO에 온 외국인 선수들이나 외국인 감독들에게 최동원의 투구영상을 보여준 뒤 평가를 묻는 이벤트도 종종 진행한다.
13.2.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창시자[편집]
자세한 내용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 동료 선수들의 기본생계권을 보장하기 위해 선수협을 창단했던 것을 보면 야구 실력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정의감과 소명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력 뿐 아니라 인성까지 갖추었던 진정한 1인자.
13.3. 야구 외[편집]
-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 씨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이용사였고 모친 김정자 여사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교감으로 정년퇴직하였다. 특히 최윤식 씨는 생전 최동원의 실질적 에이전트를 자처하며[50] 연봉 협상 때도 롯데 프런트와 만나 협상에 나섰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1988년 초 연봉 협상 과정에서는 박종환 당시 롯데 전무와 갈등을 일으킨 적도 있다. 최동원 90만원 사건 참조.
- 김정자 여사는 교사 경력을 살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 강좌 등에도 나선다고 전해진다. 어머니 김정자씨가 자주 사직구장 광장에 있는 아들의 동상을 보러 가시는게 포착되어 팬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 평소 생활도 소탈했다고 한다. 오로지 야구밖에 몰랐던 그는 경기장 밖에서는 대부분 추리닝 차림새에 술,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고기조차 거의 안 먹었다고 한다.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모친 김정자 여사가 해주던 김치쌈이었는데, 실제로 1980년대 모 잡지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여름 보양식에 대해 인터뷰를 할 적에 다른 선수들은 보약, 장어, 홍삼 등 오만 보양식을 논했지만, 최동원은 찬 물에 밥 말아서 김치 싸먹으면 그게 보양식이라는 대답을 했다고... 물론 고기나 보약 같은 선물들이 들어올 때가 있긴 했지만 항상 지인들에게 나눠줬고, 특히 1958년 개띠라서 개에 대해 애착을 보였던지라 누군가 개소주를 보내주면 진심으로 화냈다는 일화가 있다. 유일하게 보양식으로 먹었던 것이 인삼과 대추를 달인 물. 그런데 정작 서구화된 식습관이 주 원인으로 지목받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라운드에서의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기까지한 이미지와는 달리 사적으로 만나면 겸손하고 수수했다고... 1990년대 모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습을 보면 구수한 말투에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 정치적 이유로 각종 데모와 시위가 많던 1980년대, 시위에 참여하는 군중 속에 끼어있던 최동원 선수에게 놀란 행인들이 혹시 야구선수 최동원 아니냐고 묻자, "예, 저 최동원 맞심더."라고 답하고 태연하게 시위를 계속하더라는 일화가 있다.(2011년 9월 방영된 KBS 스페셜 참조)
- 1980년대 말 노사분규가 극심했던 시기, 부산지역 언론노조에서 총파업을 했을 때 무기명 후원금을 기탁했다고 한다.(MBC 다큐스페셜 '불멸의 투수, 최동원' 참조)
- 2015년 2월 5일, 불법 소금물 관장 시술을 하던 목사 부부가 체포되었는데 이들이 진행한 9박 10일 캠프에 암 투병 중이던 최동원도 사기를 당했던 사실이 확인되었다.[52]
- 롯데 구단은 2016년 11월 1일자로 최동원의 아들 최기호 군을 육성팀 직원으로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2022년 올스타전에 참석할 때에는 일본에서 직장을 다닌다는 소식이 들리며 현재는 구단에서 직장을 옮긴 듯 보인다.
- 2017년 부산KBS의 '부네스코 위원회'라는 프로그램에서 부산을 상징하는 인물로 최동원을 다뤘다.
- 2019년 5월 14일 부산대학교 총학생회에서 최동원 동상을 발로 밟고 인증사진까지 찍어서 논란이 됐다. 이곳은 최동원의 노모가 자주 들리는 곳이기에 그야말로 고인은 물론 유족의 가슴에 피멍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나마 최근들어 팬들이 직접 쓰레기를 치우는 등 관리를 하고 있지만 일부 시민들의 행동이 롯데 팬들에게는 씁쓸한 역사로 남았다.
- 롯데 구단의 최동원 생전 푸대접이 심각했다. 삼성으로의 트레이드는 아무래도 최동원이 선수협을 만든 것부터 하여 정부에서 미운털이 박혀 압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에 구단 입장에선 어쩔수 없었다고 이해해보려 노력은 할 수 있지만, 롯데와 부산 야구팬들을 위해 말 그대로 자신의 수명과 건강을 대가로 이 악물고 강속구를 던진 전설이자 상징 그 자체인 투수의 장례식 비용을 타 구단 모기업인 한화에서 대줬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 부산광역시 수영구에 있는 고급 아파트인 남천 삼익비치아파트에 거주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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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남해면이 읍으로 승격된건 1979년이므로 최동원 출생 당시에는 면이었다. 그 후 국민학교 입학 직전에 부산으로 이사했다고 한다.[2] 지병인 대장암이 재발[3] 출처 [4] KBO 프로필[5]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선 아마추어 신분이어야 했기에 신분 유지를 위한 임시 이적.[6] ~6월 9일[7] 6월 10일~[8] ~7월 23일[9] 이 시기 최동원 코치는 스프링캠프에서 KBO와 한국 야구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덩치 큰 친구를 발굴해냈다.#[10] 7월 24일~[11] 영상[12]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준우승 출처[13] 이는 훗날 영화화까지 이루어졌다.[14] 일례로 실업야구 코리아시리즈 6경기에 모두 등판(선발로 세 번)하여 무려 42.1이닝을 던졌다. 경기당 평균 7이닝을 소화한 셈. 애당초 최동원은 경남고, 연세대, 실업팀 롯데 자이언트에서 뛰는 동안 혹사를 피할 수가 없었다.[15] 말이 4승이지 1 완봉승, 2 완투승, 1 구원승이다. 하나뿐인 구원승도 5이닝을 던졌고 저 사이에 완투패도 하나 껴 있다. 가히 무식함을 넘어 탈인간적인 혹사이다.[16] 사실 삼성 김일융도 2차전 9이닝 완투승, 4차전 8이닝 무실점, 5차전 3이닝 무실점으로 3승을 거둔 상황이었다. 7차전 7.1이닝 패배까지 합치면 이쪽도 어마어마한 대혹사. 다만 최동원의 5경기 등판에 40이닝 투구에 비하면 그 혹사 정도가 심하지 않고, 마지막 경기에서 끝내 무너졌기 때문에 조명이 안 되는 케이스. 만약 마지막 경기를 버텨냈다면 단일 시리즈 4승의 전설은 김일융이 됐을 거고, 최동원은 끝내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한 비운의 상징 정도가 됐을 것이다.[17] 그 해 최동원은 무려 284.2이닝을 던지고, 27승 13패 6세이브 방어율 2.40 탈삼진 223개를 기록했다. 지금보다 경기 수가 크게 적었고 전후기리그로 나뉘어 있던 리그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투구는 가히 압도적이었다.[18] '무쇠팔(철완)'이라는 별명이 제일 유명하지만, '불세출'이라는 별명도 존재하며 '불세출의 최동원'이라는 말도 알려져 있다.[19] 284⅔이닝-223탈삼진[20] 267이닝-208탈삼진[21] 1983년 장명부의 30승 다음으로 한국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승 2위 기록이다.[22] 이는 2020년까지 단일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이었다가 2021년 두산 베어스 아리엘 미란다에 의해 경신됐으며 2022년 키움 히어로즈 안우진이 깨기 전 까지는 토종 선발 단일시즌 최다 탈삼진이였다.[23] 출루율 1.000 + 장타율 2.000[24] 이를 wRC+로 계산하면 849.4이다.[25] 투심과 슬라이더의 영상은 지칠 대로 지쳐있던 한국시리즈 7차전 영상이다. 그래서 그런지 투구폼이 상당히 무너져 있는 것을 볼수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라이더는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저력을 선보였다. 심지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게 슬라이더야, 커브야?"라고 할 정도로 종으로 떨어지는 정도가 이미 한국프로야구 평균을 넘어섰다.[26] 당시 일본 프로야구 직구 평균구속이 130km대 중반 정도였음을 생각하면 대단한 강속구였다.[27] #[28] 최동원 선친은 본래 소싯적에 축구에 재능이 있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인해 꿈을 접어야 했고, 그 후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잃은 아픈 기억을 안은 사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아들의 재능을 발견한 뒤로는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아들의 성장을 위해 헌신했었고, 구설수에 휘말린다 싶으면 "모든 욕은 내가 먹겠다"고 하며 아들을 감쌌다.[29] 낙차 큰 커브.[30] 일례로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 6경기에 모두 등판(선발로 세 번)하여 무려 42.1이닝을 던졌다. 경기당 평균 7이닝을 소화한 셈.[31] '무쇠팔'이라는 별명이 제일 유명하지만, '불세출'이라는 별명도 존재하며 '불세출의 최동원'이라는 말도 알려져 있다.[32] 사실 1980년대 중반 롯데 자이언츠는 말 그대로 롯데 자이언츠=최동원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로 에이스의 상징성과 의존도가 높은 팀이었다. 물론 윤학길 등 다른 프랜차이즈 스타들도 많았으나, 최동원의 임팩트와 인지도가 그들을 전부 누르고도 남을 정도였으니.[33] 사실 최동원과 이대호 사이에 롯데 팬들의 어마어마한 지지를 받은 박정태도 있지만, 상습 음주운전에 버스기사 폭행 사실까지 밝혀지며 명예를 많이 잃었다.[34] 다만 최동원 90만원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이 과정에는 논란이 존재한다. 그래도 고대야구 특성상 선수의 권리가 극단적으로 제한되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그의 의견을 참작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많다.[35] 이 신인 투수는 최동원의 강력한 추천으로 데뷔 시즌부터 선발로 기용되었고, 최동원의 눈썰미는 정확했다.[36] 한국시리즈 전, 1/3/5/7 차전 선발을 준비하라는 강병철 감독의 얘기를 듣고 최동원선수가 "그건 너무 심한거 아니냐"는 얘기에 강병철 감독이 한 대답이다, 1/3 차전은 계획대로 승리투수가 되었으나, 5차전을 패배한 후 우승을 넘겨주게 생기자 6차전에도 등판했다, 결국 4승도 대단한데 1패까지 추가됐다.[37] 이 말은 롯데 자이언츠의 2017년 포스트시즌 캐치프레이즈가 됐다. 마 함 해 보입시다![38] 자세히 보면, 처음 최동원의 투구 자세를 재연하는 장면에서 공을 던졌는데 글러브 안에 공이 있다거나 우완투수였던 재연배우가 좌완으로 바뀌어있는 등(이 경우는 다른 영상일 가능성도 있다.) 눈에 거슬리는 장면이 있다. 마지막 최동원의 대사. "승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라운드에 들어와서 야구복을 입고 자기의 모든 것을 즐거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게임한다 그러면 그보다 더 보람된 것이 없을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39] 과거 노리타 전적이 있어서 까이긴 하지만, 원래 이 사람은 최동원을 존경했었다고 한다. 그 증거가 바로 자신의 아들 이름을 동원이라고 지은 것이다. 어?? 매년 기일에 참석하기도 한다.[40] 정확히는 2011년 11월 11일 밤 11시에 MBC의 채널 번호는 11번이다. 등번호 11번의 최동원을 기념하기 위한 너무나도 완벽한 숫자의 조합.[41] 그러나 그시간에 부산MBC에서는 자체방송을 하였다.[42] 다른 것은 몰라도 MBC의 1980년대 KBO 리그 영상자료 보유량은 타 방송사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회사 산하에 MBC 청룡이라는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매주 화요일이나 수요일 저녁 시간대에 지상파 프로야구 생중계를 반고정 편성할 정도로 야구를 자주 보여줬다. 각 구장의 경기 영상을 종합해서 보여주던 프로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도 MBC가 먼저였다. 그래서 영상자료가 많다. 이 때문에 유독 MBC에서 옛날 야구 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다만 그 방대한 영상자료를 인터넷 다시보기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게 단점.[43] 심지어 타 팀이자 라이벌 팀이었던 해태 팬들한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44] 1984년 당시 삼성 타격코치로 재직 중이었다.[45] 당시 삼성은 전후반기 통합 우승을 노렸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상대를 OB와 롯데 중 골라야 하는 상황이었다.[46] 경기도 고양시 청아공원.[47] 야구를 배우긴 했지만, 너무 늦게 시작한 탓인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만뒀다고 한다. 그 후 일본 도쿄의 데이쿄 대학교(帝京大学) 경영학과에서 스포츠 경영과 마케팅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라고[48] 투구 전 송진가루, 신발끈, 겉양말, 안경, 모자챙을 차례로 만지고 공을 던지는 버릇[49] #[50] 이 당시만 해도 한국프로야구 선수에 대한 에이전트 활동은 허가가 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51] 대장암의 주요 발병 원인 중 하나가 극심한 스트레스이다.[52] 최동원이 불법 시술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암 투병 중인 상태에서 시술을 받기 위해 캠프에 참여한 것. 캠프에 참여하면 9박 10일 동안 매일같이 소금물 관장만 한다. SBS에서 방영된 궁금한 이야기 Y에서도 이 소금물 관장에 관한 내용을 다루며 최동원의 자료를 인용하였다. 피해자 대부분이 병세가 심각해 병원에서 손쓸 도리가 없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캠프에 참가하였다. 실제로 방영된 영상의 최동원을 보면 야구팬들 입장에서는 씁쓸함이 절로 밀려올 정도다.[53] 문재인은 1968년, 최동원은 1974년 입학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경남고등학교 동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