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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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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팬 여러분 이제 저는 떠나가지만, 영원히 여러분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팬 여러분 사랑합니다."[11]
대한민국의 前 야구선수이자, OB 베어스에서만 뛰었던 투수. KBO 리그 원년부터 활약했고 OB-두산 베어스의 첫 번째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며 한국프로야구 원년을 빛낸 선수로 베어스의 첫 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그가 기록한 단일 시즌 22연승은 백인천의 시즌 타율 0.412와 더불어 4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프로야구 원년의 화려한 대기록이기도 하다.
소위 'OB 아재'로 불리는 베어스 올드 팬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으며, 박철순에 매료돼 야구에 빠져들고 골수 베어스 팬이 됐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12] 오죽하면 "박철순의 OB, OB의 박철순"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붙을 정도였다. 다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박철순을 기억하는 팬들의 숫자는 다른 베어스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팬덤보다 줄고 있지만[13][14] 그래도 베어스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슈퍼스타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사실 박철순의 성적은 원년에만 화려했을 뿐 나머지는 보통 이하의 수준인 적이 많았고 심지어 부상으로 1년을 통으로 쉰 기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은 원년부터 그를 괴롭혔던 수많은 부상들을 불사조처럼 스스로 이겨내며 끝내 재기에 성공하는 인간승리의 모습을 여러번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얻은 현역 시절 별명도 '불사조'였다. 그는 베어스의 맏형으로서 두 번째 우승까지 함께 하고 1996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KBO 리그 통산 네 번째로 영구 결번된 선수이자 영구 결번식과 은퇴식을 모두 경험한 최초의 KBO 리그 선수이기도 하다.[15][16] 더불어 그는 한국프로야구 원년부터 21번을 등번호로 사용했으니 베어스 역사상 유일하게 21번을 단 선수가 되었다.
전용 응원가는 권인하의 '에이스를 위하여'. 이 노래가 나오면서 노장 박철순이 마운드 위에 오르는 순간의 감동은 OB 팬들에게 추억으로 남아있다. 은퇴식에서 울려퍼진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도 그를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수상 내역[편집]
3. 플레이 스타일[편집]
데뷔 시즌의 임팩트만 놓고 보면 최동원이나 선동열의 아성에 견줄 만한 수준이었다. sWAR 기준 데뷔 시즌 성적 2위이자 국내 선수로는 1위이다.[18] 불꽃같은 첫 해 임팩트에 선수생활의 모든 것을 갈아넣었던 투수.
프로야구 초창기엔 스피드건이 드물었기 때문에 정확한 구속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전성기에는 최고 150km/h 초반의 빠른 패스트볼을 던졌다는 증언이 많다. 또한 커브, 슬라이더, 역회전 볼도 잘 던졌다고 한다.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굉장히 좋아서 당시 해설자들은 그의 몸쪽 패스트볼을 역회전 공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철순이 던졌던 구질에 관해서는 아직도 상당히 말이 많은데 80 ~ 90년대에는 너클볼을 최초로 던진 투수로도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은 마이너리거시절 배워온 팜볼이었다. 본인의 회고에 의해서도 팜볼이었다고 밝혀졌다.[19] 박철순 이후로 KBO 리그에서 팜볼을 던진 투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20] 감안하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한국 야구에서는 더더욱 생소했던 구질들을 던졌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흔히 너클볼이 희귀구종의 대명사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 KBO에서 간간히 너클볼을 던진 투수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팜볼쪽이 더 희귀구종이라고 할 수 있다. 팜볼은 손바닥 전체로 공을 감싸고 던져야 하는데 제구가 매우 어려운 구종으로 알려져 있어 일본[21] 이나 미국에서도 잘 구사하지 않는 구종이다.
다만 이 무브먼트와 스피드를 위해 상당한 하이키킹의 투구폼을 구사했는데 이것이 만성적인 허리 부상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은퇴할 때까지 투구폼을 거의 수정하지 않고 이 폼을 고수했다.
특이사항으로 부상이 잦았던 데 비해 신기할 정도로 선수 커리어 내내 구속은 잘 유지된 편이다. 선수 생활 내내 허리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아킬레스건 부상은 수술을 한다고 해도 고질병처럼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부상을 내내 달고 다니면서도 구속이 유지되었다는 것은[22] 이 선수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훈련을 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4. 은퇴 이후[편집]
4.1. 야구 외 활동[편집]
은퇴한 이후에는 OB 베어스에서 투수코치를 맡기도 했으나, 1998년 시즌 중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사임하고 1999년 이후로는 야구계를 떠나 '알룩스포츠'라는 스포츠 용품 회사와 '모든테크'라는 디스플레이 장치 제조사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한때 연매출 100억 가량의 우량기업으로 성공적인 사업가로 자리잡았으나, 2007년도 대장암으로 투병중이라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이 암 투병이 계기가 되어 건강상의 문제로 사업가 생활도 정리하고 완전히 은퇴하여 요양과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듯.
사업가로 활동할 당시 사업을 경기도 의왕시에서 했던 인연으로 박철순을 의왕시 홍보대사로 위촉한 적이 있었다.
4.2. 방송 및 코치 활동[편집]
그 후로는 인터넷 방송이나 olleh TV에서 야구 해설을 맡는 등의 소일거리 정도를 하며 지내고 있다. 기아자동차의 광고 나레이션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다만 예전 2군 코치 시절의 흑역사 때문인지 지도자로 나설 생각은 없다고 한다.
KBS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유소년 야구 코치도 하고 있는 듯.
하지만 본인이 몸 담았던 두산 구단이 초청하는 시구는 꾸준히 수락하고 있다. 2007년과 2009년 시구로 모습을 비추었으며, 2011 시즌 개막전에서는 팀의 레전드인 김우열, 김경문과 함께 시구 시타 시포를 하여 명장면을 연출했다.
그러다가 2015년 3월말에 갑자기 스리랑카 야구 코치가 되었다. 5월에 열린 동아시안컵 야구대회에서 3승 2패를 기록했다. 당초 대한야구협회에서 스리랑카 야구협회에 감독을 보내주기로 했으나 박철순의 젊은 후배 감독들이 모두 거절해서 박철순에게 까지 제의가 들어온 것이었고 협회의 제안을 박철순이 받아들여 이루어졌다. 경비나 체류비 지원이 있는게 아니라서 어려운 자리임에도 응했고 실질적으로 재능기부 형태로 스리랑카에 가는 것이었다. 코치로 부임한다고 되어 있으나 현지 일본인 코치들에 비해 경력이나 스펙으로 보나 월등하기 때문에 사실상 총감독으로 갔다. 이때 스리랑카 대표팀은 2015년 동아시안컵 야구대회를 겨냥한 것이라서 그 대회만 코치로 활동하는 한달여 정도의 단기간 지도였다.
2017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두산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시구를 했다. 공교롭게도 3루 덕아웃에서 그의 시구를 지켜본 사람이 원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 했던 동료 포수 김경문 감독. 김경문 감독이 두산 베어스 감독이던 시절인 2007년 6월 박철순이 시구, 김경문 감독이 시포를 한 뒤 마운드에서 서로 포옹한 적이 있다.시구영상 참고로 이날 경기는 두산이 패했지만 2, 3, 4차전을 전부 이겨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니퍼트는 박철순 본인이 "니퍼트라면 기꺼이 21번을 양보하겠다" 라는 말까지 꺼낸 선수다. 그런 선수의 데뷔전과 두산에서의 마지막 가을야구 무대의 시작에서 시구자가 모두 박철순이었다는 점이 뭉클함을 자아낸다.
그 후 이제 나이로 인해 건강상의 문제에 유의하며 유소년 야구 지도나 각종 사회인야구 행사 등등에 참석하여 사인회 및 팬들과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후, 두산 베어스에서 팀 창단 40주년을 기념으로 2022년 4월 2일 개막전에서 80년대 박철순, 90년대 김형석, 00년대 홍성흔[24] , 10년대 니퍼트 등의 레전드를 전부 초정하여 시구를 갖게 됨으로써 다시 오랜만에 잠실 야구장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함께 최동원 구타사건이 재발굴, 재평가되며 후에 후배 위대한, 안우진, 김유성 등과 엮여 비판하는 여론이 늘어났다. 2022년 스톡킹 채널 출연논란은 덤. 시대상을 감안하더라도 그 당시에 중징계를 받을 정도면 오죽했을까 하는 반응. 그래서 스톡킹 동영상 중에 어느정도 실드 댓글이라도 있는 안경현 편과는 달리 실드 조차도 거의 없이 반응은 굉장히 험악한 편이다. 또한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에 상당히 높은 순위인 11위에 선정되었을 때에도 여론은 싸늘했으며, 더 나아가서 1982년 이후의 성적이 이전보다 못하고 통산 기록도 대단한 수준까진 아니라는 점을 들어 두산이면 모를까 KBO 레전드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5. 어록[편집]
그 당시에는 그 때 그 순간이 제일 중요했었어요. OB 베어스라는 팀. 1년 동안 같이 동고동락하고 고생했던 팀. 선수 전원.. 꼭 우승해서 팀 선수들하고 기쁨을 나누고 싶었죠. 그런 욕심 밖에 없었어요.
1982 한국시리즈 허리 부상투혼 당시를 되돌아보며
그래도 오랫동안 잊지 않고 사랑해주시고 기억해주시는 팬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놈이죠. 행복한 야구선수였죠.
첫사랑이고 목숨 바쳐 사랑했던 여인하고의 첫 키스보다 더 진하게 했다면 상상이 가시겠어요?
1997년 본인의 은퇴식에서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입맞춤 한 당시를 회고하며
6. 박철순에 대한 말말말[편집]
당시 미국 야구는 TV에서나 볼 수 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들이 야구하는 것이다. 이런것으로만 상상했을 때에요. 그런데 그 미국에 박철순 선수가 혼자, 그것도 최초로 진출해서 선수생활을 했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이병훈 해설위원.
특히 박철순 선배는 작은 것이라도 본인이 마운드에 섰을 때 야수들이 도움을 줬다면 항상 야수들한테 와서 행동이나 말로 고맙다는 표현을 했던 선수였어요.
김광수 코치
단순히 야구에 소질이 있거나, 야구의 주무기나 구질만 가지고 연승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22연승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정신력이 뒷받침이 안된다면 안 되는 것이죠.
하일성 해설위원.
철순이가 아픈데도 진통제를 맞고 나가는 것을 선수들 다 압니다. '우리 한 번 해보자! 이기자!' 이렇게 팀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철순이가 아픈데도 던져준 것에 선수들이 감동했기 때문이었고..
1982년 당시 김영덕 OB 베어스 초대 감독.
박철순 선배가 얼마나 팀에서 비중을 차지하시고, 존경받는 선배님이셨는지는 목말을 태워드린 그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죠. 누가 하랄 것도 없이 자동으로 그게 된 거에요.
1995 한국시리즈 우승 후 박철순을 목마를 태운 세리머니가 어떻게 나올 수 있었냐는 질문에 당시 OB 선수 김상호
다른 선배님들이 열 마디 하는 것보다 박철순 선배님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솔선수범해주셨기 때문에 그냥 옆에 계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힘이 됐습니다. 저희 후배들한테.
1995년 당시 OB 베어스 선수 이도형
박철순 선배님, 저희 선수들에게 항상 우상이자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7. 논란 및 사건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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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똥군기가 횡횡하던 20세기 한국에서도 똥군기와 관련해서는 가해자 입장이나 피해자 입장에서나 급이 달랐던 인물중 하나로 [25] 과거 행적때문에 박철순이라면 이를가는 야구팬도 상당히 많다.[26]
박철순은 이 같은 내용들에 대해 한 마디의 사과, 반성 등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선배가 후배를 좀 때릴 수 있는 거 아니냐?” 등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 팬을 상대로 욕질을 했던 과거도 있다.[27] 원년 OB 우승을 이끈 박철순의 업적은 KBO 레전드로 부족함이 없으나 선후배 얼차려 사건에 대한 부분은 어느 정도 악습이 정리되어 가는 지금 세대에 하나의 커다란 반면교사 사례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8. 여담[편집]
- 대학생 시절(호적상 나이 20세)에 결혼을 했지만 1986년 이혼한 경력이 있다. 이혼의 이유가 박철순의 잘못이 아니라 전 부인의 빚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전처의 빚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통에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를 보다못한 당시 OB 베어스 감독이던 김성근이 어느 날 무작정 박철순을 데리고 은행으로 가서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금인 2천만원을 자신의 명의로 대출받아 빌려주고 추가로 본인 통장에서 2천만원을 인출하여 도합 4천만원을 주면서 "철순아, 이걸로 빚 갚아라" 라고 했다 한다. 참고로 그 당시 9급 공무원 초봉이 20만원 조금 넘던 시절이다. 그래서 박철순은 김성근을 인생의 큰 스승님이자 은인으로 존경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 일찍 결혼한 덕분에 50대 중반 나이에 손자를 둘이나 본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상을 극복한 사연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지금의 부인인 채수정 씨와의 만남과 그녀의 도움도 컸다.
- 선발 22연승 기록에 대해, 박철순 본인은 자신의 기록이 아닌 팀의 기록으로 생각하며 자신의 선발경기에 야수들의 득점지원 호수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기록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최동원이 그때 자신 대신 던졌다면 22연승보다 훨씬 높은 기록을 찍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 투수 출신임에 불구하고 야구는 타자놀음이라고 생각하는 케이스다. 전술한 22연승 기록과 맞물려 말하길, 투수가 아무리 잘해봤자 퍼펙트 게임, 노히트 노런에 불과하며 이걸 평생에 몇 번이나 해볼 수 있냐고 반문하며 완봉승도 야수가 점수를 내주지 않으면 할 수 없다고 한다. 박철순 본인의 생각으로는 결국 야구는 타자놀음, 야수놀음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선동열 감독 등 대부분의 야구인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대조적이다.
- 1988년 속옷광고 빅맨의 모델로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한강 둔치에서 CF를 찍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시즌 아웃을 당했다.박철순 빅맨 광고
- 1989년 이광환 감독 재임 당시 1년동안 1군 투수코치(플레잉코치)로 활약했는데 구동우, 김동현 등의 신인투수들을 육성하고 팀 방어율 역시 중상위권을 기록하면서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여 주었다. 1997~1998년 리빌딩기에도 이혜천, 김유봉, 최용호 등의 신인투수들을 지도한 경력으로 볼 때 투수코치로는 의외로 괜찮은 능력자였을지도. 이미 야구계를 떠난 지 10년이 넘은지라 별 의미없는 가정이긴 하다.
- 던진 구종중 무회전 체인지업때문에 유난히 이야기가 자주 회자되는 편이다. 왜 무회전 체인지업이라고 애매모호하게 적냐면 박철순선수 본인이 너클볼이라고도 할때도 있고 팜볼이라고 할때도 있기 때문. # 같은 인터뷰를 하고 적은 기사들을 보면 너클볼이라고 언급되는데, 인터뷰 기사인 # 에서만 봐도 팜볼이라고 언급하고, 두 기사를 근거로 정리하면 81년 당시 미국에서 직접 인터뷰했을 때는 너클볼이라 밝혔지만 근래엔 팜볼이라고 하는 듯. 두 변화구 다 구질이 비슷한 무회전 계통인데 박철순 본인의 사용 방식이 체인지업과 같았기 때문에 팜볼이라 정의한 것 같다. 마구마구나 프로야구 매니저에선 박철순 카드가 팜볼과 너클볼 둘 다 가지고 있으며, 마구매니저에서는 너클볼설을 채택하였다. 나무위키에서도 근래 인터뷰를 따라 체인지업의 팜볼 문단에 박철순이 팜볼을 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6 넥센 히어로즈 용병인 로버트 코엘로만 봐도 포크볼을 팜볼형태로 무회전에 가깝게 던지는 등 던지는 방식이나 그립, 구질명을 떠나 무회전에 가까운 공을 던졌다 자체가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고.
- 젊은 시절 굉장한 장발 미남이었다. 지금의 이대형이나 심수창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 요즘처럼 열광적이지는 않았지만 박철순 좋아서 야구 본다는 젊은 여성팬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30대 들어서 조금 일찍 탈모가 찾아왔고 세월의 풍파와 암투병, 탈모의 영향으로 그 외모를 오래 유지하진 못했다.
- 선동열이 1989년 시즌 후 결혼을 위해 나간 맞선 자리에서, 상대방 아가씨가 나는 이름을 아는 야구선수가 박철순밖에 없다고 말해서 선동열이 무척 무안해했다고 한다.[28] 그렇지만 선동열은 결국 그 아가씨와 결혼에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