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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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관료, 정치인이다. 종교는 불교다.
2. 생애[편집]
1922년 1월 23일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에서 태어났다. 춘천공립중학교(14회), 국민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춘천공립중학교 졸업 후 강릉측우소에서 근무했다. 그러던 1943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국의 '한국말 방송'을 통해 태평양 전쟁의 상황, 철도 폭파, 강제 징용 및 징병 반대 등의 내용을 듣던 중 강릉경찰서에 연행되었다. 8.15 광복 후에는 주천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국민대학교 졸업 후 체신부 공무원으로 입직했다. 1949년 체신부 경리국 결산계장,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체신부 경리국 자재과 사무관 및 우정국 국내우편과 사무관, 1955년 서울저금관리국 국고과 사무관, 1956년 서울중앙전신국 수배과장, 1957년 체신부 경리국 관리과 사무관 등으로 근무했고, 이후 서기관으로 승진한 뒤 1958년 체신부 우정국 국제우편과장을 거쳐 같은 해 동남아시아 지역에 우정 행정 시찰을 다녀왔다. 1959년 체신부 경리국 자재과장 및 서울보험관리국 총무과장 등을 지냈다. 이후 이사관에까지 승진했고, 체신부 중앙전화국장을 거쳐 1964년 7월 15일부터 1966년 8월 30일까지 제3대 체신공무원교육원장을 지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강원도 영월군·정선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강원도 영월군·정선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국회 교통체신위원장이 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우현 국회의원과 민주공화당 복수공천을 받아 강원도 영월군·정선군·평창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엄영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4년 9월 18일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에 따른 내각 개편으로 체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 임명되어 1975년 12월 18일까지 재임하였다. 1965년 국회 예산결산위원장이 되었다.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강원도 영월군·평창군·정선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역시 신민당 엄영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국회 재무위원장이 되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할 때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입법의원이 되었다.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였으나 해당 지역구 공천은 한국일보 기자 출신의 심명보에게 밀렸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구 공천도 탈락하였다. 1981년 6월부터 1987년 6월까지 제25대 생명보험협회장을 지냈고, 이후 영월 석정여자중학교 및 석정여자고등학교의 학교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2019년 2월 8일 향년 9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3. 선거이력[편집]
4.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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