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A.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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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정치인으로 제33대 부통령이다.
2. 정치 활동[편집]
당대 미국에서 진보주의 정치인으로 유명했지만 정치활동은 공화당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공화당원이라고 해도 진보적인 스탠스에 있었고 특히 농업 관련 입법에서 맥너리-호겐 농장구호법(McNary–Haugen Farm Relief Bill)에 거부권을 행사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을 비판했다. 이미 1924년 대선에서 로버트 M. 라폴레트를 따라 진보당에 입당한 상황이었고, 1928년 대선에서 이 이유 때문에 앨 스미스를 지지했으며, 1932년 대선에서도 마찬가지로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지지하고, 여러 진보적인 정책 입안에 참여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통령일 때, 농무장관, 부통령, 상무장관 등을 지냈다. 부통령으로서 갖은 논란에 시달리는 것과 달리 농무장관 시절에는 미국 농업을 그야말로 되살려내는 업적을 세운다. 1940년 루즈벨트의 부통령 존 가너가 은퇴하자 후임자로서 부통령에 당선된 그는 맨하탄 계획에 깊게 관여했고, 또 민주당 내에서 대단히 진보적이었으며 소련에도 가장 우호적인 정치인이었다. 당시 민주당의 텃밭인 남부의 흑인 민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보수파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점차 루스벨트와 불화를 보였고 무엇보다 민주당 지도부 인사들로부터 "나이가 지긋해진 루스벨트가 계속 당선된다 해도 임기 중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세상을 뜬다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될 텐데, 그러면 너무 급진적이고 친소련적인 진보 성향으로 선회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와 비판을 받은 끝에 1944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지 못했다. 대신 해리 S. 트루먼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루스벨트의 네 번째 당선을 함께하게 되었는데, 유일무이한 4선 대기록을 세운 루스벨트가 네 번째 임기 시작 3개월여 만에 세상을 뜨면서 "부통령 후보로 재지명되어 다시 당선됐다면 정말 대통령이 되었겠구나" 하는 안팎의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이후 직을 승계받아 대통령이 된 해리 트루먼을 상대하여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트루먼 독트린을 비판하는 등, 해리 S. 트루먼과도 대립하였다.
주위에서 위험하다고 우려하고 경고할 정도로 소련에 친화적인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결과적으로 부통령 재선에 실패해 코 앞에서 대통령직 승계를 놓쳤고 이때문에 민주당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터지자 당시 파병 결사 반대를 외치던 진보당의 당론을 거스르고 미군 파병을 적극 지지하면서, 결국 당에서 제명된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 민간인으로 돌아가 사업을 벌였는데, 그게 또 성공해서 떼돈을 벌어 말년에 큰 행운을 맞기도 했다. 1965년 사망했다.
3. 평가[편집]
내치에 관해서는 예외 없이 호평이 자자하나 외교와 관련해 평가가 많이 깎인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월리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냉전 없이 평화로운 소련과 미국의 관계가 펼쳐졌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1]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정당은 많았지만 일관된 진보주의 정책을 지지했다.
5. 선거 이력[편집]
6. 대중매체[편집]
임기 중 병사한 FDR의 이전 부통령이었다는 점 때문에 2차 대전기를 다루는 대체역사물에서 트루먼을 대신해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으로 자주 등장한다. 대체로 소련에 우호적이며,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는 빨갱이라는 욕을 얻어먹는 포지션. 어느 진영이 주인공이냐에 따라서 사람 좋고 개념있는 지도자로 나오기도 하고 정치 감각이라고는 없는 답답한 인간으로도 나온다.
한국 대체역사 웹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등장, 원 역사에서의 4선과 달리 3선 대통령 임기 중 사망한 FDR의 지위를 승계하여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처참한 정치적 감각, 화려했던 전임자와 자신을 비교하며 느끼는 자괴감 등으로 똥볼을 차며 독자들의 혈압을 올렸지만, 유진 킴과 장성들의 반발로 자신감을 잃고 재선에도 실패하자 오히려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떠난다.
나, 스탈린이 되었다?!에서도 루즈벨트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하는데 여기서는 소련과 스탈린이 선역인 관계로 말이 잘 통하는 양심적인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주인공과 죽이 잘 맞아서 소아마비 백신 개발에 협력하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독립군 진영을 지지하는가 하면 공작정치에 반대하는 모습도 보인다. 맥아더와 매카시에게 패배해 재선은 실패하나 퇴임 후 개도국 집짓기 봉사활동에 참여한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다른 작품들처럼 FDR의 사망으로 승계하지 않고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다. 삼선에 실패한 FDR 이후 공화당의 웬델 윌키, 샤를 맥너리의 뒤를 이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다. 독일, 소련 등과 함께 국제연합(UN)을 창설했고 전후 수습을 잘 마쳤다고 언급된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FDR의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면서도 독일과의 전쟁을 멈추려고 하지 않다가 결국 영국이 패전하고 나서야 독일과 평화협정을 맺는다. 이후 2차 독소전쟁이 터지자 소련을 지원할 생각을 하지만 모든 측근들이 결사반대하여 시도도 하지 못하고 소련이 망하는 꼴을 지켜봐야 했다. 그 뒤 다가올 냉전에 대비해 독일처럼 핵무기 개발을 밀어붙이는 한편, 일본을 무너트리기 위해 고민하다 결국 그렇게 싫어하던 독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전쟁이 끝나고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여 백악관을 떠난다.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루즈벨트 재선 실패후 보수화 되어가는 민주당에 실망하여 1940년대선에 진보당을 이끌고 대선에 나가지만 오히려 민주당의 분열을 불러와 토마스 듀이의 재선에 한몫한다. 전쟁 후 연합국의 패배로 혼란스러운 미국 정치판에서 전쟁 영웅이라는 명성을 이용하여 딕시크랫을 이끌고 우익 정당인 국민당을 창당한 조지 S 패튼과 자신의 정당을 통합하여 국민진보동맹이라는 정당을 만든다.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 미국의 사회 민주주의 대통령 중 하나로 등장한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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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리스가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희망했어도 반공주의 열풍이 분 1946년 중간선거의 결과 때문에 마음대로 됐을 가능성은 적다.[2]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지지[3] 대통령 후보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