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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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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진주만 공습(眞珠灣攻襲, The Attack on Pearl Harbor)[9] 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하와이 현지 시각) 일본제국 해군의 항공모함 6척으로 편성된 연합함대가 미합중국 자치령 하와이 제도의 오아후섬[10] 북쪽 200마일 해상까지 접근, 400여 대의 일본 함재기가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
2. 서론[편집]
중일전쟁으로 대표되는 일본 제국의 과격한 군사적 행동에 대해 미국은 일본 제국을 대상으로 한 경제제재로 석유 금수 조치와 철강 수출 제한 조치를 시행했으며, 이와 같은 미국의 일본 제재는 진주만 공습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미국의 이같은 금수 조치에 대한 대응으로 전쟁을 택한 일본 제국은 1941년 12월 7일 아침, 항공모함 6척을 동원한 대함대를 이끌고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으며 이는 곧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Mr. Vice President, Mr. Speaker, Members of the senate,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중략)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부통령, 그리고 하원 의장과 상하원 의원 여러분.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의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중략) 본인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의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 이후 성립된 미합중국과 일본 제국 간의 전쟁 상태를 의회가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치욕의 날 연설문 중
일본 제국의 선전포고 없는 기습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하였고 2,334명의 미군 장병과 10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항구에 있지 않았던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과 진주만의 유류 보관소와 무기고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덕분에 미국은 이후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전력을 원상복구를 할 수 있었다. 이 공격을 계획한 것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이며 지휘는 나구모 주이치가 맡았다.
당시 진주만 공습이 미국에 불러온 충격은 매우 지대했다. 공습 전까지만 해도 미국 국익에 도움이 안되는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미국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은 이러한 추세를 꺾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기습 공격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12] 가결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진주만 공습은 역사상 최장거리의 기습작전이었으며, 또 전술적으로 완벽한 일본 제국의 승리였으나, 전략적으로 보았을 때 미국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만듦으로써 일본 제국, 더 나아가 동맹국 나치 독일 등 추축국 전체를 패망으로 이끈 결정적인 실책으로 평가된다. 더 나아가 일제 식민통치 해방에 기약이 없던 당대에 있어 한국과 대만의 해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도 하다.
3. 원인과 배경[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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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유[편집]
태평양 전쟁/배경 문서에 기술된 내용과 같은 이유로 일본 제국은 미국과의 전쟁을 결정한다. 이제 일본은 전쟁을 시작할 방법을 두고 논의를 벌이는데, 이때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쟁계획을 제안한다. 야마모토의 주장에 따르면 '그나마 현실적으로 미국과 싸울 방법'으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거기에 기지를 둔 태평양 최강의 함대인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 또는 최소한 괴멸 직전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이 힘을 회복하는 동안 일본에게 없는 석유를 얻을 수 있는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고 섬들을 전부 요새화해서 미국의 공세 의지를 꺾고, 가능하면 더 이상의 결전없이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고, 정 안 되면 태평양을 종심(縱深)[13] 이 깊은 전장으로 삼아 미국의 공세전력을 소모시켜 최종 결전에서 그들을 격멸하고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군부가 놓친 점이 있었는데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두 전쟁에서 패배한 결정적 계기인 전선이 이중화가 되어 확전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벌어진 원인 역시 중일전쟁을 벌인 육군이 제공한 것이다. 육군이 중국을 다 잡아먹겠다는 행동을 하자 당시 중국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던 미국과 영국, 프랑스, 특히 미국이 중재자로 나서서 일본에 더 이상의 침략 행위를 자제하라고 했는데, 이걸 일본이 무시한 것이 원인이었다. 더군다나 독일은 1차 대전 당시에는 육군만 따지면 세계 1위, 해군도 세계 2위에 드는 강국이었고 2차 대전 당시에도 탑3 안에는 항상 들었던 강력한 전력으로, 각각 전쟁 중반에 러시아(동부 전선), 전쟁 초반에 프랑스(서부 전선)를 정리하여 전선 축소까지 해버리고도 결국 패배했다. 그리고 1차 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 2차대전 때 헝가리,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이탈리아 같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위치에 비록 2차 대전 당시에는 유럽에선 제한적인 역할 이상은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들었으나, 동맹국이 충분히 존재했다.
어차피 둘 사이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미국은 유럽 전선의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곧바로 태평양 전선으로 모든 여력들을 돌릴 예정이었으며, 일본의 점령지는 절대로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한 태평양 함대의 건조도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유럽 전선이 결판나기 전에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뒤 적절히 협상하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럽 전선은 추축국이 매우 유리한 형세였으므로 그대로 종전된다면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일본은 미 대륙을 고립시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혹여라도 추축국이 패배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병력이 분산될 때 일찌감치 결판을 지어놔야 유리한 것은 자명하다. 즉, 미국과의 결전 자체는 충분히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소련이 모스크바까지 밀린 상태로 독일이 소련을 상대로 승리를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고, 미국의 경제력이 초반에 입은 타격을 전부 복구하고도 남아돌 것이라고 당시로서는 예상하기 힘들었다.
지형적 특성상 서로 간에 타격을 주려면 해군이 필수불가결했고, 반대로 이것만 없으면 일본은 상당한 기간 동안 식민지의 점령을 공고히 하고 국제 사회에서 이를 인정받을 기간을 벌 수 있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적어도 적이 준비를 끝마치기 전에 적이 본인을 공격할 유일한 수단을 미리 잘라놓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즉, 나를 공격할 도구인 적의 팔다리를 먼저 다 잘라놓고 회복되기 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기 위한 예방전쟁의 전략이었고, 일본의 진주만 공습도 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일본의 군부에서 이렇게까지 구상하는 전략은 어디까지나 추축국이 패배하지 않았어야 했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는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이런 선제 기습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재미를 봤던 전략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은 동네북이던 청나라나 내실이 부족하고 내부가 혼란했던 당시의 러시아 제국과는 비교도 안 되는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군은 그 특성상 큰 군함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괴멸 상태가 되면 당연히 복구에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소요된다. 따라서 미국이 주간 항공모함이라고 불릴 만큼의 배를 찍어내는 무시무시한 공업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였다면 태평양함대의 괴멸로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일본이 오래 가질 수 있었을 것이고,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그 동안 상황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 파악된 미국의 역량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어 있었으니 일본의 원래 의도대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와 거의 똑같은 사례가 독소전쟁인데, 이 경우도 독일은 소련을 아주 호구로 여겨서 허접한 소련군 따위는 10주면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일을 저질렀지만, 현실은 굳건히 버틴 소련에게 역으로 털리는 결말을 맞게 된다. 설사 적이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전면전에서 상대방의 전력을 줄여놓는 것은 초반 전세의 승기를 잡고 후에 교착상태가 되었을 때 좀 더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히라타 신사쿠 제독이 1930년에 출간한 '우리가 싸운다면'이란 책에서 일본이 먼저 미국의 하와이를 공습한다면 미군의 사기가 떨어져 미 해군이 괴멸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런 사례가 당시 일본 군부의 안일한 생각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구상의 전제 조건인,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일단 미국이 일본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으로 일본과 한 판 붙어보겠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미국 정치인들은 일본보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유럽-대서양에 더 관심이 있었고, 이는 심지어 진주만 공습을 당한 이후에도 비슷하여 유럽 전선을 우선한다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다.[14] 문제는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설치는 것을 미국이 계속 내버려둘 생각도 없었고 침략으로 먹은 이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경제적인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는데 땅맛을 본 일본 군부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는 것이다. 물론 일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이쯤에서 미국의 경고를 곱게 받아들이고 물러났겠지만, 당시 일본은 그렇게 멀쩡한 나라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일본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였다면 그 정도로 어그로를 끌지는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사전에 알아서 자제했을 가능성이 크긴 하다.
사실 미국이 독일과의 전쟁에도 주저없이 총력전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도[15]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 히틀러가 일본의 동맹국으로서 미국에다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인 것은 진주만 공습의 결과였다. 아무리 미국의 국력이 대단하더라도 총력전 태세 없이는 국력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있다.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국민 대부분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총력전 태세로 전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지만, 그 역할을 일본과 독일이 해낸 셈이다.
특히 적당히 유리한 상황을 조성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면 진주만 공습은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협상에 응할 것인가 여부는 물론 전세에도 좌우되지만, 국민 감정에 따른 여론에도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전쟁에서의 유불리만을 고려했을 뿐 미국의 일반 국민 및 정치인들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던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 능력이 없다면 진주만 공습과 같은 방식을 협상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었다.
러일전쟁이 결정적 승리가 상대를 협상 테이블로 끌고 나온 사례로 제시되기도 한다. 1904년 일본 제국은 국력이 3~5배 이상 차이가 나는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러일전쟁을 벌였다. 마침 전쟁의 시작을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제물포 해전에서 러시아에 선빵 날리고 시작한 것도 진주만 공습과 유사점이 있다. 여기서 일본은 철저한 준비와 여러 호재가 겹쳐 유리한 전장 상황과 1905년 미국의 중재에 힘입어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고 조선과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러일전쟁 당시 모스크바까지 공격할 계획은 전혀 없었고(물론 그럴 능력도 당연히 없었고), 일본 본토 인근인 블라디보스토크조차 전장이 아니었다. 주요 전장은 만주와 대한해협으로 국한되었다. 일본은 이 러일전쟁을 주목했고 그 대상이 미국과 태평양으로 변경되었으며, 목표는 아시아로 확대된 것이다.[16] 물론 이번 전쟁의 중재자도 정해놨는데, 그것은 진주만 공습 8개월 전인 1941년 4월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제국의 대동아 공영권 구상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실패하게 된다.
- 미국이 일본에 대한 무역봉쇄를 실시한 이유는 일제가 중국을 너무 깊숙이 치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즉, 일본은 중국 침략을 계속하기 위해 미국한테 선빵을 날린 것이다. 중국과의 전쟁은 당시 군국주의에 경도되어 버린 일본 군부가 정권을 몇 년 더 쥐는 데에 도움이 됐을 수는 있어도 국가적 관점에서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문제는 당시 일본 제국을 지배하던 세력이 일본 군부 중에서도 상식과 거리가 먼 파벌이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당시 일본인들 또한 여기에 동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존 군부가 실각할지언정 중국과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 가장 결정적인 패인은 바로 미국의 국력은 당시 일본 제국 혼자서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GDP는 일본 제국과 12배[17] 나 차이가 난다. 대영제국조차도 미국의 생산력에는 밀리는 상황이었는데, 가령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이 영연방과 타국에서 지원받은 수송선을 다 합쳐서 1,500만 톤의 수송선을 건조한 것과 비교해 미국은 단독으로 2,500만 톤을 생산했으며, 디트로이트에서 생산된 탱크 및 장갑차는 독일 전체에서 생산된 양보다 많았다. 이런 생산을 진행하는 동시에 주력함 수십 척을 포함한 수백 척의 군함을 건조해낸 것이다. 항공기와 전차 등등에, 병사 개인 장구의 생산량까지 들어가면 더 써야 손가락만 아파지니 논외.
-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가 입장을 굽혔던 가장 큰 이유는 쓰시마 해전의 패배가 아니라 러시아 내부의 정치 사정 때문이었다. 이 시기 러시아의 국내 사정은 미국으로 치면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남북전쟁이 벌어진 셈이다. 물론 1940년대의 미국은 그런 약점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서 미국의 전쟁 여론을 폭발적으로 자극하는 정치적 실책만을 벌였다. 이 덕분에 미국은 국력을 총동원한 총력전을 몇 년 동안 문제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 일본 제국은 점감요격작전을 세워 미국 해군을 상대하려 했다. 이 작전의 전제조건은 미국 해군이 수십 년 전 1905년의 러시아 해군처럼 전함 함대를 몰고 와야 했으나, 정작 미국은 전함 대신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해군을 운용했다.[18] 막상 당시 전함도 제대로 정찰조차 하지 않은 채 무모하게 진격하는 식으로 운용하지는 않았으며, 여기에 지리적으로도 러일전쟁 당시에는 러시아에 난점이 하나 있었으니 유럽에 있는 발트함대를 거의 세계일주를 하다시피 하며 쓰시마 섬까지 끌고 와야 했던 것이다.[19] 반면 태평양 전쟁 당시는 이미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 지 오래였으며, 때문에 미국 대서양의 함대들이 태평양으로 합류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
- 일본이 중재자로 지목한 소련은 항상 친미적인 국가는 아니었지만 냉전이 시작되기 전 2차대전기는 미국과 같은 연합국으로서 엄연히 동맹이었으며 일제와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소련 입장에서는 1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할힌골 전투를 치른 상태였고, 일본은 엄연히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다. 때문에 미국과 일본 간의 충돌이 발생할 때 일본 편을 서줄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소련은 독소전쟁이 격하게 벌어지는 와중에도 모스크바 전투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상당수의 병력을 극동 전선에 배치해 두었으며, 태평양 전쟁 말 일본군이 연합군에 의해 거의 격퇴되던 중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서의 내용과 같이 소련은 자신들이 서방과의 중재자 역할이 되어주길 희망하는 일본 제국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다가, 1945년 8월 8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사토 나오타케 일본 대사를 만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전달함과 동시에 소련 주재 일본 대사관의 모든 통신망을 끊어버렸다. 이후 소련군은 일본 제국의 관동군을 격퇴하고 한반도 북부까지 밀고 내려갔다.
5. 전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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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뒷이야기[편집]
6.1. 최선의 전략과 오판[편집]
기습을 통해 태평양의 미군을 빈사 상태로 만들어버린 뒤,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방향으로의 남하를 미국이 용인하게 하는 유리한 조건 하에 강화를 맺겠다는 전략이 당시 일본이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이었음에도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의 미국의 정치적 단결력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의 미군 함대는 과달카날 전역 초반까지 계속 수세에서 작전을 했어야 할 정도로 약화되었던 것도 사실이나, 일본군 대본영은 미 해군을 진주만에서 전멸 혹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고 이후 증원되는 미국 함대 역시 점감요격작전에 따라 차례차례 요격하여 미 해군에게 큰 성과 없이 지속적인 피해를 입게 한다면, 경제적 문제 및 정치적 문제로 인해 미국이 태평양에서 철수하고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을 용인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기습을 했던 일본의 행동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해군의 어니스트 킹이 중심이 되어서 주장하던, 이전까지 미국 내에서 소수파의 주장이었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이라는 엔진에 강력한 추진력을 넣어준 셈이 되어 버렸으며,[20] 당시 미국에서는 일본에 대한 인종차별적 사상도 만연해 있었던지라 진주만 공습은 전미적으로 큰 공분을 샀고 미국의 반전주의자들조차 소수의 극단적인 반전주의자[21] 들을 제외하고 일본에 대한 전쟁에는 찬성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일으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총력전 태세에 나선 미국과의 전면전을 강요당하는 역효과만 내고 일본이 당초 원했던 미국과의 강화는 아예 불가능해졌다.
둘째는 미 해군의 태평양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초반에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의 전함전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이후 이어진 자바 해전에서 USS 랭글리(CV-1)을 대파시켜 미군이 자침시키도록 하고 산호해 해전에서는 렉싱턴급 항공모함 USS 렉싱턴(CV-2)를 격침시키는 등 일본 해군은 미 해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였으나, 여전히 태평양 함대의 최후의 주요 전력인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3척이 끝까지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전멸시켜 미국의 태평양 전역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진주만 공습의 주역들인 카가, 아카기, 소류, 히류와 공고급 순양전함 2척까지 끌고와 미드웨이 해전을 벌였으나, 결과적으로 미 해군은 위 3척 중 1척을 잃으면서도 위 진주만의 주역들을 모조리 수장시켜버렸다. 거기다가 그 살아남은 2척 중 1척인 USS 엔터프라이즈(CV-6)는 미 해군이 항모를 지속적으로 1척씩 상실하는 동안에도 과달카날 해전까지 끈질기게 버티면서 일본 해군의 발목을 잡아 미 해군이 제해권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일본 해군은 과달카날 해전까지 미 해군에 비해 우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의 기동방어를 파쇄하지 못하여 끝내 태평양 전역에서 미 해군의 제해권을 상실시키지 못했고, 이후 미국의 물량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자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며 와해되었다.
셋째로 일본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은 태평양의 지배권을 일본과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경우처럼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영향력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주요 동맹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식민지를 일본군이 침략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 역시 당시 유럽전선에서 협력하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논외인 부분이었다.
이외에 결정적이라 볼 수는 없으나 진주만 공습 시 전술적 오판 중 하나로 언급된 항공모함과 유류창고 등 기반시설을 파괴하지 못했다는 점,[22] 공격하기로 한 일자가 하필 주말이라 상당수의 인원들이 외박 중이었어서 기지의 방어태세도 낮은 편이었지만 동시에 수병 전력의 인명피해가 기습적 공격에 비해 적었다는 점 때문에 미 해군은 우월한 본토의 공업력으로 배만 찍어내면 바로바로 전력을 복구할 수 있었던 점 등이 있다. 그로 인해 일본 해군은 공습 4개월 뒤 곧장 수도인 도쿄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 미군의 보복공습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23]
넷째로 장기전과 대영 요인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본 군령부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선 단순히 군사자산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취약점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로 식민지 및 동맹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았지만, 연합함대는 이와는 반대로 격전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잘못된 시각을 오랫동안 견지하여 주력함과 해군항공대를 무의미하게 소모하여 1944년의 대공세를 용인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또한 삼국동맹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이상 영국의 향방은 곧 일본의 협상에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므로 진주만 공습과 남방작전으로 약체화된 ABCD 함대를 격파한 뒤 재빨리 인도양과 남태평양에 공세를 가해 ANZAC와 인도 제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미-영 측의 전략적인 소모를 강요할 필요가 있었다. 일례로 당시 일본 해군 잠수함대 소속으로 남방작전에 참가한 함장 중 일부가 상부에서 명령만 내렸다면 얼마든지 남태평양 보급선단을 격멸할 수 있었다고 증언할 만큼 인식의 부족 탓에 주어진 기회를 이용하지도 못하였다.
진주만 공습은 당시 일본 해군 작전참모부가 낸 최선의 전략으로 당장은 큰 전략, 전술적 이득을 가져다 주고 시간도 벌어주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적인 의지와 국가의 역량를 지나치게 얕보았고 거듭되는 자만에 빠져 그 시간조차 유용하게 쓰지 못한 채 오판을 반복했기에 미국이 공습의 피해를 수습하고 전력을 회복하자마자 파멸하게 된 것이다.
6.2. 미국의 분노[편집]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어제, 1941년 12월 7일 — 치욕의 날로 기억될 날에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항공대에 의해 고의적이며 기습적인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의 첫 부분. 흔히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부른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항목 참조. 참고로 이 부분은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인트로 영상에도 나온다. 유튜브 자동재생
치욕의 날 연설문 전문 [펼치기 • 접기] Yesterday, December 7, 1941,
어제, 1941년 12월 7일,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치욕의 날로 기억될 이 날에,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미합중국은 일본제국의 해군과 항공대에게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with that nation,
미국은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and, at the solicitation of Japan,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was still in conversation with its government and its Emperor looking toward the maintenance of peace in the Pacific.
일본 정부, 일본 천황과 태평양의 평화 유지를 위한 담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Indeed, one hour after Japanese air squadrons had commenced bombing in the American island of Oahu,
사실대로 말하자면, 일본 항공대가 오아후 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이나 지나고서야,
The Japanese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his colleague delivered to our Secretary of State a formal reply to a recent American message.
주미 일본 대사는 최근 미국이 보낸 서한에 대해 우리의 국무부 장관에게 의례적인 답변을 보냈습니다.
And, while this reply stated that it seemed useless to continue the existing diplomatic negotiations,
그리고, 이는 양국간 외교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내용이였지만,
it contained no threat or hint of war or of armed attack.
전쟁이나 무력 사용에 대한 위협과 암시는 일절 없었습니다.
It will be recorded that the distance of Hawaii from Japan makes it obvious that the attack was deliberately planned many days or even weeks ago.
일본에서부터 하와이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본다면, 이 공격은 몇 일, 혹은 몇 주 전부터 신중히 계획된 것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During the intervening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has deliberately sought to deceive the United States by false statements and expressions of hope for continued peace.
양국 간의 화해 상태 동안 일본 정부는 평화 지속에 대한 거짓된 성명과 표현으로 미국을 기만하려 치밀한 노력을 했습니다.
The attack yesterday on the Hawaiian Islands has caused severe damage to American naval and military forces.
어제 일어난 하와이 제도를 향한 공격은 미 해군과 미 육군에 심각한 손실을 일으켰습니다.
I regret to tell you that very many American lives have been lost.
저는 여러분들께 유감스럽게도 많은 미국인들이 숨을 거뒀다는 것을 알립니다.
In addition, American ships have been reported torpedoed on the high seas between San Francisco and Honolulu.
더불어,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 상에서 미국 군함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Yesterday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lauunched an attack against Malaya.
일본 정부는 어제 말라야에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Hong Kong.
일본군은 어젯밤 홍콩을 공격했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Guam.
일본군은 어젯밤 괌을 공격했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the Philippine Islands.
일본군은 어젯밤 필리핀 제도를 공격했습니다.
Last night the Japanese attacked Wake Island.
일본군은 어젯밤 웨이크 섬을 공격했습니다.
And this morning, the Japanese attacked Midway Island.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군은 미드웨이섬을 공격했습니다.
Japan has therefore undertaken a surprise offensive extending throughout the Pacific area.
그 결과, 일본은 태평양 도처에 기습적이고 공격적인 확장을 시작했습니다.
The facts of yesterday and today speak for themselves.
어제와 오늘의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have already formed their opinions and well understand the implications to the very life and safety of our nation.
우리 국민들은 이미 그들의 의견을 형성하였고, 이 사태가 우리 국가의 생명과 안전에 미칠 영향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I have directed that all measures be taken for our defense,
육군과 해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써 나는 우리를 방어할 모든 방책을 지시했습니다.
that always will our whole nation remember the character of the onslaught against us.
이로 인해 우리 국가는 우리에 대한 공격의 성격을 항상 기억할 것입니다.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us to overcome this premeditated invasion,
수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사전에 계획된 이 공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면,
the American people, in their righteous might, will win through to absolute victory.
미국의 국민들은 정의의 힘으로 완전한 승리를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I believe that I interpret the will of the Congress and of the people when I assert that we will not only defend ourselves to the uttermost but will make it very certain that this form of treachery shall never again endanger us.
제가 우리들이 우리 스스로를 최대한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이러한 배신이 다신 우리를 위협에 빠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전 그것이 의회와 국민의 의지를 대변했다고 확신합니다.
Hostilities exist.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There is no blinking at the fact that our people, our territory and our interests are in grave danger.
우리의 국민과 영토, 이익들이 중대한 위협에 처했다는 것은 무시하지 못할 사실입니다.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
우리 군에 대한 확신과,
with the unbou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
우리 국민들의 결연한 의지로,
we will gain the inevitable triumph,
우리는 필연적인 승리를 얻을 것이고,
so help us God.
신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저는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의 부당하고 비겁한 공격에 대해,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의회가 미국과 일본 제국 간의 전쟁 상태가 되었음을 선언하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파일:Remember-Pearl-Harbor-1941-US-Flag.jpg
우리는 쓰러진 이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게 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12월 7일을 기억하라!
사건 이후 진주만 공습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발행된 포스터. 뒤의 배경은 불타는 진주만의 모습을, 찢어진 성조기는 미국이 입은 피해를, 그리고 조기로 걸린 국기는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군인들에 대한 추모를 뜻한다.
공습 직전까지만 해도 무의미한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미국 사회의 주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히틀러가 얼마나 또라이인지 아는 사람들은 추축국과 싸워야 한다는 의견을 폈지만, 다수의 미국인들은 20년 전 유럽의 지옥과 그 지옥불에 딸려온 연옥을 겪어봤기에 고립주의자의 의견에 더 동조하고 있었고[25][26] , 미국 전통의 외교 정책인 먼로 독트린에 따라 "우리한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괜히 끼어들 필요없다"라는 주장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러나 일본이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에 선빵을 날리면서 미국인들에게 제2차 세계 대전은 고립주의자들이 말하던 "무의미한 전쟁"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전쟁"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잠자던 거인을 '잠에서 깨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빡돌게 만든 셈. 아닌 게 아니라 공화당의 대표적 고립주의 정치인들조차 공습 소식을 듣자마자 어떻게든 백악관으로 연락을 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일종의 충성 맹세와 함께 전쟁 수행에 대한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역시 고립주의에 참전 반대파였던 한 의원은 기자들 앞에서 결연한 모습을 보이며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일본놈들을 철저하게 때려 눕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진주만 공습으로 미 정계의 고립주의 계열은 사실상 소멸, 와해되었다. 즉 이 시점에서 이미, 전쟁의 끝을 보기 위해서는 진주만에서 당한 이상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해 일본군과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밖에 없었다. 도쿄 대공습이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같은 대규모 민간인 피해나 일부 장병들의 시체 훼손 행위 따위는 "Remember Pearl Harbor!" 앞에 무용지물이었다.[27]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 가결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그리고 분노한 미국 국민들의 입대 러쉬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자진 입대율은 90%에 이르렀다는 말도 있는데, 특히 공수부대나 해병대 같은 일부 월급도 높은 특수전투병과는 지원율이 100%를 넘기며 경쟁적으로 입대했다고 한다.[28] 심지어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한 나머지 자살한 사건까지 있었다고 한다.[29] 자원입대한 사람들 중에는 배우나 운동선수 같은 유명인사들도 많았는데, 조 디마지오처럼 위문공연을 다녔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폭격기 승무원이였던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30] 나 해군 대공포 사수 밥 펠러처럼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심지어 국회의원 중에서도 몇 명이서 항해국[31] 장이던 니미츠 제독을 찾아와 해군에 입대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은 "해군을 위한다면 입대 대신 의사당으로 돌아가 우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해 달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다만 일부 국회의원들은 진짜 참전했는데[32] 대표적인 사람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린든 B. 존슨.[33] 고위정치가들의 아들들도 줄줄이 입대했는데, 대표적으론 존 F. 케네디가 있다. 다만 이쪽은 전후에 참전 경력이 유력할 수 있다고 계획적으로 입대한 것이긴 하다. 어뢰정이 격침돼서 죽다 살아나긴 했지만. 캡틴 아메리카가 괜히 군대에 가고 싶다고 그 난리를 친 것이 아니다. 반면 독일,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같은 백인인 것도 있지만 직접 맞은 것이 없어서 상대적으로 반감이 덜했다.
전쟁 참가법 표결에서 유일한 반대표는 공화당의 지넷 P. 랜킨(Jeannette P. Rankin) 의원이 던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반전주의자였던 랜킨은 이전 임기인 1917년 때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에 반대표를 던졌던 4명 중 하나였다. 1940년에도 이전 임기처럼 랜킨은 "여성이기 때문에 저는 전쟁에 나갈 수 없습니다. 허나 남자들을[34] 전쟁터에 보내는 것도 반대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전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는 말로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때는 국민적인 분노가 1차 세계대전에 비해 훨씬 컸던 상황이라[35]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서 신변보호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정치제도"라며 맞섰고[36]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 전 국민의 분노는 랜킨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혼자 반대표를 던진 탓에 미국인들의 분노가 그대로 집중되어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언론들이 사무실로 전화를 걸거나 찾아왔고 엄청난 반박과 위협들이 쏟아졌으며, 해당 공습으로 아들을 잃은 수많은 부모들의 전화와 랜킨에게 실망했다는 가족, 친구, 친척들의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랜킨은 결국 이에 굴복하여 이틀 후 하원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차례로 선전포고를 할 때는 찬성에 투표를 던졌으나 이미 때는 늦었으며 이로 인해 그녀의 의원 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다만 훗날엔 이런 의미 있는 반대도 기려져 사후 미국 국회의사당 입구에 랜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37]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니미츠 대장으로 교체되어 일본 해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전함들이 죄다 상실된 까닭에 항공모함을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진주만에서 너무 심하게 털려버려 쓸 수 있는 전력이 빈약한 데다 항공모함조차 상실하게 될까 봐 휘하 제독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니미츠 제독은 이들을 무마하고 작전을 입안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으며, 일본군의 대응도 거의 없어서 전과다운 전과는 거의 거두지 못했고 일본의 남방작전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아무 작전도 못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상당한데, 사실 없지는 않았다. 일본의 호주 침공 가능성을 없앤 산호해 해전이 당시 미 해군의 대표적인 활약이었다. 하여간 이때의 충격이 무척 강렬했던 탓인지 지금도 미 해군은 항공모함 중심 편제와 함께 강력한 대공망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주만 공습 이후 미 해군은 항공모함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으로 진주만이라는 대성과를 거두었던 일본군은 점점 항공모함의 활용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에서의 소모전을 거치면서 항공모함과 함재기들과 숙련병들이 다 수장되는 바람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분노는 일부 인종차별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났는데, 바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로 독일, 이태리, 헝가리,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로 몰아버린 사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피해를 많이 봤는데[38] ,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 중 진짜로 간첩 비슷하게 활동한 케이스도 있었고, 일본계 미국인 1세대는 물론 심지어 2세대들도 옛 고국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어서, 미국이 선빵을 맞은 와중에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병크짓을 하기도 했다. 물론 국적이나 사상적 문제 등으로 일본인의 삶을 잊고 미국인으로 살고 있던 이들도 있기야 했겠지만, 전쟁 와중에 온건 소수파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이런 기타 내용은 니하우 사건 문서도 참고.
한편 이승만은 1939년 11월에 집필을 시작하여 1941년 여름에 내놓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통해 '조만간 일본이 미국에 도전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출판 직후에는 무시당했으나[39]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은 재발굴돼 저자인 이승만 역시 미국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근데 사실 이미 1차 대전 직후부터 미국과 일본이 한 판 붙을 것이라는 예측은 난무했다.[40] 다만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면서 가십거리 정도로 전락한 얘기를 1930년대 후반 들어 웬 동양인 듣보잡 망명가가 해 봐야 "또 그 소리임? 제발 그만 좀 우려먹어라!" 하는 반응이 나오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나라들의 가상 전쟁 시나리오설은 돌지만, 현실에서 실현되는 건 극소수에 불과하니...[41]
6.2.1. 음모론[편집]
진주만 공습은 미국 정계에도 상당한 후폭풍을 남겼는데, 미국사 최초로 3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진주만 공습 이후 세계대전을 정리하겠다는 명분 하에 4선까지 도전하려 하자 정적들 사이에선 미국 정부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2차대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해 진주만을 방치했다는 식의 음모론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고립주의자이자 반 루스벨트 성향의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존 T. 플린(John T. Flynn)이었다. 그는 1944년 10월 17일 <Truth about Pearl Harbor>라는 46쪽짜리 소책자를 발간하여 루스벨트 행정부가 유럽 전쟁에 돌입하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한때 미국 정계에 큰 영향을 주었기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듀이의 캠프에서도 이러한 음모설을 들고 나올 것을 고려하기는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미군이 일본군을 감청한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암호체계를 전쟁 전부터 해독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기에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 장군이 직접 제동을 걸었다. 듀이 또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국익을 해칠 수 없다며 입을 다물기로 했다. 상식적으로 그가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44년에 진주만 음모설을 무리하게 논쟁화했다면 국민의 공감을 얻기는 커녕 전쟁 사기를 떨어뜨림은 물론이고 이적행위로 정치 생명이 끝났을 수 있다.
이걸 훗날 한도 가즈토시 같은 일본 학자들이 받아서 비슷하게 주장하기도 했으며, 데즈카 오사무의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도 정설인 양 등장했다 신나게 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모론을 놓지 못하는 집착인들도 있는데, 혹자는 당시 뉴딜 정책의 약빨이 떨어진 루스벨트 정부가 생산과잉 및 그에 따른 고용부족을 한방에 해결하고자 전쟁에 참여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건 팩트부터 틀린 게 루즈벨트 1기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던 뉴딜 정책이 집권 2기 초 2년간 이전보다 약빨이 떨어진 건 사실이긴 했지만[42] 하지만 1939년 들어 경기는 다시 호조세로 돌아섰고 1940년 나치의 프랑스 침공 등으로 서유럽이 대대적인 전쟁 상황에 들어가면서 미국은 오히려 호황을 맞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이 작살나든 말든 우리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고립주의도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선거 역시 대선, 상하원 가릴 것 없이 루스벨트 정부가 큰 격차로 연승하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이 와중에 FDR 정권이 굳이 전쟁 참가라는 무리수를 둘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일각에선 진주만의 급소였던 지상의 원유 공급 시설에는 거의 피해가 없었고, 많은 수의 전함들과 유조선 역시 살아남았다는 결과론적인 이유로 자꾸 이걸 정치적인 음모론으로 엮으려고 하는데 이에 대한 반론은 후술된 음모론에 대한 반론 항목 참조.
이원복 작가의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역사 편에 따르면 1941년 초 일본 주재 미국 대사인 조셉 그루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계획을 미국 정부에 알렸지만 "유럽의 전쟁에 관심이 쏠린" 미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43]
대놓고 노렸다기보다는 어느 정도 공격이 들어올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정확한 장소나 방법, 피해 규모는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실제 당시 미국은 중일전쟁을 벌이는 일본을 좋게 보지 않고 중국에서의 철수를 압박하며 석유 제한 조치 등 각종 딴지를 걸고 있었기에 미일 관계가 험악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협상으로 풀려는 와중에 선빵을 때린 건 결국 일본이었다.
6.2.2. 음모론에 대한 반론[편집]
진주만 음모론의 경우 한국에서 유명한 남침유도설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이용하여 현대시대의 관점으로 대충 끼워맞춘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진주만 및 해전과 당대 시대상황의 이해만 있어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음모론들이다.
먼저 자주 언급되는 주장으로 2차대전 해전의 핵심인 항공모함들을 미리 빼두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바뀐 주장으로 항공모함이 주력이 된 이유는 진주만에서 전함들이 다 털려서였다.[44]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항공모함은 해상작전의 보조격으로만 활동했고 해군력의 주력은 진주만에서 가라앉아 버린 전함들이었다. 즉 항공모함이 중요하니까 빼놓은 게 아니라, 비행기 수송이나, 수리를 이유로 당시 진주만에 항공모함이 없었고, 박살난 태평양 함대가 운용할 수 있는 게 항공모함뿐이라 급하게 항공모함만 가지고 운용했는데 의외로 항공모함이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전력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 천대받던 항공모함들이 항공기의 급속한 발전으로 성능이 올라갔고, 전함들이 전투 불능이 돼서 주전력이 될 기회를 얻자 실전을 치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군의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은 일부러 빠진 것도 아니고 전부 정비[45] 나 임무 중[46] 이라 각각 다른 곳에 흩어져 있었다. 거기다 진주만에 들어올 예정이던 엔터프라이즈는 예정대로라면 공습 전날에 들어왔어야 했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서 우회하느라 공습 당일에도 못 들어왔다. 만약 음모론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미국 대통령이 신에게 사주하여 진주만 공습 하루 전에 엔터프라이즈가 지나가야 할 항로에 태풍이라도 내린 것인가?[47]
무엇보다 항공모함의 중요성을 일찍 인지하여 각국이 항공모함을 최우선 자산으로 생각했다면 워싱턴 군축조약 및 런던 해군 군축조약에서 전함이 아니라 항공모함을 규제했을 것이 상식적으로 맞을 것이다. 심지어 조약국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함체를 버리기 아깝다고 하자 그 함체로 항공모함을 건조할 수 있는 조항도 존재한다. 하다못해 조약 폐지 이후에도 미국은 그렇게 중요한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게 아니라 사우스다코타급을 필두로 한 고속전함을 건조하고 있었다. 만약 미국이 진주만 이전에 항공모함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항공모함을 건조하기도 빠듯한 시간에 고속전함이나 만들며 놀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는 항공모함이 전함을 보조하는 편성이였으나, 태평양 전쟁 중반쯤 되면 전함들이 항공모함을 보조하고 호위하는 편제로 변화한다. 여담으로 일본 역시 야마토와 무사시 같은 대형 전함들을 아끼기 위해 꽁꽁 숨겨두고 항공모함을 들이밀었는데 훗날 미군은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전력을 모조리 털어먹고 강제로 전함 위주 교리를 하도록 해준다.
참전명분이 필요했다면 상식적으로 진주만 공습을 당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엄청난 피해를 입을 필요까지는 굳이 없는 것이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비록 미 해군의 군함들이 일본군함보다 속도 면에서 열세이기는 했지만[48] 당시 진주만의 미 해군전력은 전함 8척에 순양함 6척. 구축함 29척 등 일본군 전력과 비등한 규모였고 전투기도 400여 대 정도로 상당한 전력이었다. 게다가 해당 작전은 해상전이 아니라 항구방어이니 당연히 육상 대공포대와 비행장 등의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즉 진주만 공습 직전에 초계를 하고 방어태세를 갖추기만 했더라도 피해를 엄청나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기습 선빵을 맞는다는 시점에서 전쟁 명분은 충분히 서기 때문에 미리 공습 사실을 알았더라면 우주방어를 하면 되었지 루즈벨트 입장에서는 굳이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감수하면서 반대로 적들을 온전하게 돌려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자뻑과 아전인수의 달인인 일본군조차도 족히 절반 정도는 피해를 감수했던 작전인데 미군이 굳이 연합함대를 거의 온존시켜 돌려보내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거기다 참전명분이 필요했다는 것도 애매한 것이 당시 미국 선적의 배들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물자를 실어나르고 있었고, 당연히 독일 U보트의 공격에 격침된 미국 국적 함선들도 존재했다. 미국 입장에선 이미 1940년부터 참전 명분은 충분했다. 미국이 참전하지 못했던 것도 미국 내의 고립주의 성향과 괜히 참전해서 피보지 말자는 입장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먼로 독트린을 필두로 한 고립주의 성향을 보이는 국가였고 최근에 겪은 전쟁이 하필이면 인류 역사 최악의 전쟁 중 하나인 1차 세계대전이였으며 그 후유증으로 대공황과 보너스 군대 사건까지 겪으면서 가뜩이나 국민여론도 안 좋은 데다 1940년에는 대선까지 있었던지라 참전하고 싶어도 여론에 밀려 참전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훗날 미군은 통킹만에서 미군 구축함이 공격받아 경미한 피해를 입은 것을 과장해서 베트남전에 참전할 명분으로 삼았으며, 1차대전 참전 명분 중 하나도 루시타니아 호격침으로 인한 자국민 사망 및 독일계 미국인들의 사보타지, 치머만 전보다. 심지어 루시타이나 호는 영국 상선이고 루시타이나 호의 공격 자체도 위법이 아니였다.[49] 그런데도 미국은 참전할 수 있었다는 점 하나만 보고 굳이 커다란 피해를 감소하면서까지 참전명분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무엇보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가 박살나버려서 태평양 섬들이 일본의 공격을 받을 때 아무것도 못하고 6개월간 신명나게 털려야만 했다. 필리핀, 괌, 웨이크 등지에 지어놓았던 요새, 장비, 병력을 신나게 날려먹었으며 이 시기 너무 패전만 하자 백악관에서도 군의 사기가 말이 아니고 국민여론도 시들해진다며 벌린 깜짝쇼가 둘리틀 특공대이다. 미국이 다시 기세를 잡은 건 그 6개월 뒤인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공세를 겨우 저지시킨 때이고, 음모론자의 주장대로 미국이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한 것은 1년 뒤인 과달카날 점령 이후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국력을 총동원했는데도 일본군에게 반격을 시작하기까지 1년은 걸렸는데 루즈벨트가 아무리 명분이 필요했어도 이런 도박을 했을 이유는 없다. 음모론대로면 새러토가는 공창에 들어가있고 요크타운은 대서양으로 돌려놓은 상태에서 6개월 넘게 고생할 필요도 없이 둘을 만반의 준비상태로 만들어놓고 진주만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묵사발내 준 뒤에 곧바로 항모 4척의 드림팀(?)을 결성해 일본해군을 조져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음모론의 근거들도 설득력이 떨어지는데, 첫째로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정말로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던 드라이 독이나 원유 공급 시설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해군의 지휘관들이 지원시설의 전략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공습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50] 만약 이런 시설의 공습이 이뤄졌다면 태평양 함대는 더 오랜 시간 진주만에 발이 묶였을 수도 있고, 추가 공습에 의해 궤멸당할 위기에 빠졌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연합군은 동남아시아에 가지고 있던 교두보들은 물론 무방비 상태였던 호주와 뉴질랜드도 모두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최악의 경우에는 미드웨이 사수도 실패하여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이 일본군의 공격에 노출될 수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어떤 지도자도 전쟁에 참전하자고 이런 심각한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진주만에서 가라앉거나 손상을 입은 전함들이 1차 대전부터 사용되던 구형 전함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워싱턴 군축조약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신형함이 귀했던 시절이다. 당장 동시대 해군 강국인 영국도 전간기에 만든 후드가 최고의 함이였으며 신형함이였던 킹 조지 5세급 전함이나 넬슨급 전함 모두 조약에 묶여 하자가 있는 상태로 건조되었으며, 가장 빡세게 구른 전함이자 최고의 수운함들 대부분이 1차대전 시기에 만들어진 퀸엘리자베스급이나 리나운급이었다. 적군인 일본도 상황은 비슷해서 공고급 순양전함이 마르고 닳도록 구르며 활약했고, 1920년대에 만들어진 아오바급 중순양함이 활약했던 시대이다. 당연히 미 해군도 다를 게 없어서 격침당한 전함들도 오래되긴 했지만 미해군의 주력함들이었다. 심지어 격침된 함선 중에는 미군도 아니고 전 세계에 7대밖에 없는 16인치 전함인 콜로라도급의 3번함 웨스트버지니아(전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주만이 공습당했을 때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은 건조 중[51] 이었고 노스캐롤라이나급은 취역했으나 함체의 진동이 문제가 돼서 실전 투입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가라앉은 전함들이 정말로 쓸모가 없었으면 비싼 돈과 인력을 들여가며 굳이 인양해서 수리+개장해서 다시 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전함만 공격하고 보급시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이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하되 하와이의 보급시설은 공격하지 않는다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합의를 하고, 더불어 보급시설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루즈벨트가 일본제국에 하와이와 태평양 함대의 정밀 지도 및 작전계획 같은 중요정보를 넘겨줬다고 봐야하는데 상식 선에서만 봐도 이해하기 힘든 음모론이다.
둘째로 일본이 위협적인 행동을 거듭하자 미국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은 미국 정부도 이미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선전포고 이전부터 일본 본토에 가까운 섬들의 방어태세를 강화한 것도 그런 이유다.[52] 미국이 한 '실수'는 전쟁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설마 일본이 국제법을 위반하면서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점과, 첫 공격을 일본에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미군 기지를 놔두고 일본에서 한참 떨어진 태평양 한복판의 하와이 진주만에 가할 것, 그리고 공격 이후에야 선전포고문같지도 않은 날림 선전포고문을 들이밀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점이다. 진주만 공습은 '쟤들이 설마 여길 때리겠어' 라고 모두가 상식적으로 생각했고, 그 상식이 열심히 박살나 있던 일본군이 저지른 완벽한 기습이었기에 해전사에 길이 남을 작전이 될 수 있었다. 만약 진주만 공습이 항공모함만을 이용한 평범한 기지공습이었다면 현대 해전의 상식을 뒤바꾼 작전이라는 평가를 받겠는가?
마지막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이 참전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진주만 공습을 사전에 알았으면서도 일부러 '묵과했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공허한 주장이라는 점이다. 현실 정치나 군사는 게임이 아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진주만 공습을 알았다면 이는 대통령에게 바로 보고되는 게 아니라 정보기관이나 외교관을 거쳐 국무장관과 국무회의라는 복잡한 정식 절차에 따라 해당 부처에 보고된다. 보고 과정에서 사실을 알게된 모든 중간 관료들의 입을 대통령 혼자서 막을 수 있을까? 또는 적의 공습이 예상된다는 '설득력 있는' 정보를 듣고도 대응하지 말라고 막을 수 있을까? 둘 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MK 울트라 프로젝트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소수인력에게 돈을 쏟아부어준다 해도 결국 정보는 어디선가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심지어 냉전의 절정기라 평가받는 60-70년 사이에도 이런 식으로 정보가 새고 대중들에게 알려질 정도인데, 1940년 전후의 평화로운 미국에서 대통령과 여당이 겨우 임기 연장하겠다고 자신들의 정치생명은 물론이고 관련된 인사들의 현직은 물론 목숨[53] 을 걸고 할 만한 도박인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올 것이다.
6.3. 일본의 동남아 침공과 대전략[편집]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의 견제가 사라진 일본은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의 미국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연합국 식민지를 점령했다. 이후 미국에게 충격을 선사했다고 본 일본은 향후 전략에 대해서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부터 일본 외무성에서는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대한 준비작업을 시작했고, 이에 대본영, 육군, 해군, 야마모토 제독 모두 평화협상을 일본이 먼저 제안하는 건 체면이 서지 않는다며 반대했으나, 미국이 평화협상을 제안해오면 받아줘야 한다는 헛된 망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본 대로 미국은 역사상 전례가 없던 분노 속에서 칼을 갈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 정계와 군부는 이보다 더 큰 충격을 줘서 미국이 협상장에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건 동의했으나 그 방법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우선 일본 육군은 자기들이 점령한 동남아의 방어를 굳히고 지배를 공고히 하면, 동남아 점령으로 막강해진 일본제국의 힘을 상대하기 부담스러워진 미국이 협상하러 나올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고,[54] 해군은 호주 점령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점감요격 따위 때려치고 하와이를 바로 점령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호주는 처음부터 점령을 위한 병력 및 물자가 모자랐고 하와이는 보급선 유지가 안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육군, 해군, 야마모토 제독이 각각 자기들 주장을 내세우며 옥신각신하고 있는 와중에 미국의 항공모함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공습을 하고 있었고[55] 이 모습을 본 야마모토 제독은 미 항공모함이 가장 큰 적이라 결론을 내리고 미국의 항공모함을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미드웨이를 공격하지만...
6.4. 추축국의 대미 선전포고[편집]
일본과 동맹 관계이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4일 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러한 선전포고가 추축국 최대이자 최후의 삽질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선전포고가 없었다고 해도 미국은 참전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무기 지원, 경제 원조 등을 넘는 수준의 대대적인 참전은 나치 독일이 미국에 먼저 선빵을 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치욕의 날 연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미국은 진주만 공습 직후 추축국 전체가 아닌 오로지 일본 단 한 나라에게만 선전 포고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진주만 공습이 있는 상황에서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가 없었다면, 미국의 유럽 전선 참전이 늦어졌으리라는 분석이 있다.[56]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 하루 뒤, 독일의 영향력 아래 있던 불가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도 독일을 따라서 연달아 선전포고를 했고 이와 별개로 둘의 동맹국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의 헝가리 왕국 역시 1941년 12월 15일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57]
하지만 미국인들이 진주만 공습 이후에도 여전히 대일전이 아닌 대독전 개전에 회의적이었으리라는 오해와 달리 독일의 대미 선전포고 직전과 직후에 각각 집계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의 90~91%가 대독전 개전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오직 7% 정도만 이를 반대했다.[58] 또한 12월 7일 이전에도 미국은 영국에 전쟁 물자를 암암리에 지원했고, 미국 국적의 상선들이 독일의 공격을 받고 미국 군함이 독일 잠수함을 공격하는 등 미국과 독일은 사실상 준전시 상태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루스벨트는 본래 진주만 공습 이전부터 대독전 수행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으나 먼로주의 이후 고립주의 관성에 젖은 미국인들의 반전 여론으로 인해 영국에 대한 물자 지원을 제외하면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쩔 수 없이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그 국민 여론이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루스벨트에게는 대독전 수행이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선전포고가 없었더라도 루스벨트에게 차라리 의회 설득이 어려우면 더 어려웠지 대국민 설득은 사실상 필요가 없었다. 다만 독일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면 의회 설득을 비롯한 여러가지 절차 때문에 1942년에 바로 독일전선에 개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진주만 공습이 터지고, 아돌프 히틀러는 환호작약하며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독일이 나서서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히틀러는 곧바로 카이텔과 요들에게 달려가서 환호하면서 소리쳤다.
아래는 존 톨랜드의 책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에 나오는 내용이다.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59]
ㅡ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360P
전시 본부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오토 디트리히였다. 그는 12월 7일 오후 늦게 히틀러의 벙커를 찾아 매우 중요한 전갈이 있다고 알렸다. 히틀러는 방금 러시아 전선으로부터 좋지 않은 소식을 받고 우울했는데, 디트리히가 더욱 나쁜 소식을 가지고 왔을까 걱정했다. 디트리히 공보처장이 급하게 메시지를 읽자 그의 표정은 정말로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는 밝아졌다. 그러고는 매우 흥분해서 "이 보고가 정확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디트리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확인 전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보고서를 낚아채더니 코트와 모자도 두르지 않고 군사 벙커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카이텔과 요들 장군은 히틀러가 상기된 얼굴로 전문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카이텔에게는 일본과 미국과의 전쟁이 히틀러의 악몽을 떨쳐내준 것처럼 보였다. 지도자는 헤벨과 함께 목소리에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는 전쟁을 질 수 없다고 외쳤다. 우리는 지난 3천 년간 패배한 적이 없는 파트너가 생겼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2 p.336
위에 적힌 것만 보면 히틀러가 이때다 싶어서 자발적으로 대미 선전포고를 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이 독일에 대해 대미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일본의 입장에선 미국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독일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으며, 독일도 독소전쟁의 역전을 위해 일본의 도움을 필요로 했는데, 일본이 독일에 "독일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면 일본도 독소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일본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며, 히틀러는 일본의 달콤한 제안만 믿고 덜컥 대미선전포고를 질렀다가 뒤로는 일본의 통수를 맞고, 앞으로는 미군의 공세를 맞이하며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게 되었다. 상세는 후술된 문단을 참고.
히틀러의 반응과 별개로 일선에서 소련군과 영국군을 맞아 싸우고 있던 상당수의 독일 육/공군 상급장교들이나 하급 장교들을 비롯한 일반 사병들은 공식 방송이 나오고 나서야 깨달았을 정도로 정황이 없었고, 그만큼 구체적인 반응 역시 기록되어 있지 않다. 41년 12월 당시 최대 공방전이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 모스크바 공방전이 진행 중이었고, 그 외에도 독일군의 빈약한 동계전투 준비로 소련군의 전 전선으로부터 반격을 받고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독일은 일본이 소련 뒤를 쳐서 극동 소련 정예군을 붙들어주기를 바랐으나 일본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소련은 이 겨울 동안 긴급수송으로 극동 정예군을 투입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만큼 당시 동부전선은 급박하게 전투가 전개 중이었기 때문에 상급 장교들은 일본이 동쪽에서 무슨 짓거리를 하든 신경 쓸 상황이 되지 않았다.
반면에 독일 해군은 이전부터 미국과 싸움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찬성하는 편이었는데, 이미 대서양에서 미국과 독일 해군 간의 대립이 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60] 그리고 추가적으로 일본이 극동의 영국군을 공격해 영국 해군의 시선을 인도양으로 끌어주어 고전을 하고 있던 독일 해군의 상황을 개선해 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오히려 일본은 극동 영국 해군을 박살내긴 했지만 미국의 반격으로 인해 태평양 방면으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양 방면의 극동 영국 해군은 살아남았으며, 미국이 일본 해군을 상대하는 동안 영국은 안심하고 이미 노르웨이에서 상당수의 구축함을 잃어버리고 독일 해군의 자존심 비스마르크까지 침몰당해 껍데기만 남아 있던 지중해의 크릭스마리네+이탈리아 해군을 심해 끝까지 털었다. 그리고 그 덕에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북아프리카 전역의 북아프리카 군단은 연료 및 물자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더하여 선전포고 이후 미국은 어느 정도 상황이 나아질 때마다 꼬박꼬박 U보트를 사냥하러 해군을 지원했다.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이제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Deutsche-Amerikanische petroleum (DAPG) 등 독일의 기술에 미국의 자본이 결합한, 미국 회사의 독일 자회사들이 당시 독일에 많았는데 이들의 상당수는 독일의 전쟁수행에 크게 도움을 주던 중이었다. 즉 공습 이전까지 이들 미국계 독일 회사를 이용,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 미국 기업들의 계획이 진주만 공격으로 틀어지게 되고 결국 독일의 전쟁수행까지 방해받게 된다.
6.4.1. 추축국간의 동상이몽과 서로 엿먹이기[편집]
독일은 이 선전포고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해주기를 바랐지만, 일본은 1945년 8월에 소련이 소-일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시작할 때까지 계속 평화를 유지했다. 웃긴 것은 독일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무기를 팔았고, 일본 또한 폴란드 망명정부를 지원하며 서로에 빅엿을 먹였다는 것이다. 물론 독일의 의도는 중국 공산당을 국민당을 이용하여 없애기 위해 지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일본을 더 위협적인 적으로 봤었기 때문에 문제. 아예 장제스 휘하 부대는 중일전쟁 전부터 독일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군사고문관으로 한스 폰 젝트 장군까지 파견된 판이었다.[61]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문제는 독일이 통수친 게 아닌 일본이 먼저 통수쳤던 것에 가깝다.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보다 훨씬 더 이전인 1926년에 이미 독일과 중국 국민당은 협력 관계에 있었고,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한참 전의 일이니 공산당을 때려잡기 위함이니 뭐니와는 처음부터 별 관계가 없었다. 이 협력은 독일에 있어서는 경제적 협력이었으며, 군사적인 지원은 장제스가 공산당을 포함해 여러 군벌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이후인 1933년이 되어서 한스 폰 젝트가 군사고문으로 파견되는 등 중국과의 관계를 가속화 시키긴 했는데 젝트 역시 중일전쟁과는 별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후임자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과 교대하면서 귀국하여 1936년 사망했기 때문. 여튼 이 역시 공산당 때려잡으려고 가속시킨 것이 아닌 희소자원을 위해서였다. 애초에 더욱 거대한 공산주의의 위협인 소련을 놔두고 아시아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중국 공산당 따위를 견제한답시고 국민정부에 군사적 지원을 할 정도로 히틀러가 한가하진 않았다.
이후 1936년, 방공협정으로 일본과의 접점이 생기지만 동맹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고, 중일전쟁이 터지기 전인 1937년 5월 경, 쿵샹시가 외교적인 목적으로 독일을 순방하며 나치 고관들과 회동했을 때만 해도 히틀러는 소련과 동유럽 문제가 더 크다고 직접 말했을 정도이며, 방공국가인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이 전쟁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고도 말했다.
물론 실제로는 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히틀러는 방공 파트너로 군사적 능력이 월등한 일본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8월 채결된 중소 불가침 조약으로 히틀러는 마음을 더욱 굳히게 된다.
다만 아예 포기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독일 입장에서는 중일 양국이 싸우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고, 여기에 중재의 실질적인 계획안도 존재했다. 하지만 12월, 난징이 함락되며 이 중재안은 허공으로 날아가버렸고, 다음 해 4월, 독일이 만주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해버리며 사실상 중화민국을 포기함을 선언해버렸다.
이후 독일은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무역 거래를 끊고, 일본의 요청으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과 군사고문단을 소환했다.
아시아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 저하로 외교관계는 사실상 끊겼지만 유지 자체는 되고 있었기에 중화민국은 지속적으로 재협력 협상을 진행시켰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 후 히틀러는 대미 선전포고를 하며 왕징웨이 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중화민국은 연합국에 공식적으로 가입,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중국-독일 관계는 끝장나버린다.
이렇듯 일본이 먼저 중국의 뒤를 봐 주던 독일의 통수를 치긴 했지만, 대소참전을 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방공협정의 당사자이던 일본에는 한마디 말도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한 조약이었기 때문이다. 즉, 서로 통수치는 사이였고 상호 신뢰가 거의 없었다. 이럼에도 독소전 개전에 일본의 참전을 기대하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게다가 다른 쪽으로 일본이 뒤통수 친 것도 있었는데,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을 사실상 묵인한 것. 일본은 비전투물자를 소련 선박이 운송한다는 조건으로 극동 지역을 통한 랜드리스 지원을 허가했다. 이를 통해 소련은 전체 랜드리스 물자의 거의 절반을 극동 지역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군사 동맹은 동맹국이 3자로부터 공격받았을 경우 원조의 의무가 부여되지만, 동맹국이 3자를 공격했을 때 원조의 의무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각자 선제공격했기 때문이지 주축의 동맹이 연합에 비해 특별히 약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소련의 경우에는 폴란드 분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독일의 우호국이었으니…. 즉, '동맹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군사와 외교가 따로 놀았다는 것이 문제. 거기다 6호 전차 티거 문서를 봐도 알겠지만, 유럽의 추축국과 완전히 반대편인 아시아에 있던 일본 제국 사이에는 소련이라는 장애물이 있어 어떻게 상호 지원을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바다로 가자니 보급 문제도 문제인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연합국의 해상 세력에 완전히 궤멸될 판이었다.[62] 그리고 일본은 이전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일본은 독일과 달리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에서 쳐들어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일본이 착해서는 당연히 아니고 소련군한테 한 번 크게 데인 적이 있어서 기본적으로 소련에게 상당히 쫄아있었던 데다, 이미 세계에서 인구수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중국, 미국과 동시에 싸우는 상황에서 나머지 하나인 소련과의 전선을 늘릴 상황도 아니었던 것이 크다. 그래도 양국은 동맹국이랍시고 어떻게든 기술지원을 해 주었지만[63] 양쪽 다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히틀러는 소련이라는 강적을 상대하는 데 생각만큼 잘 안 풀려서 힘들어 죽을려는 상황에다가 이탈리아의 관종짓으로 강제 참전하게 된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 세력을 다 축출하지도 못했는데 아무 생각 없이 루즈벨트가 바라던 대로[64] 선전포고를 하면서 파멸을 앞당겼다.[65]
6.5. 관련 인물들의 후일담[편집]
6.5.1. 미군 측 인물[편집]
아무리 기습이었다고는 하나 다수의 전함을 포함하여 막대한 피해를 눈 뜨고 당했기에 책임자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먼저, 태평양함대 사령관이었던 허즈번드 킴멜 대장은 소장으로 2계급이 강등되고 퇴역 처리되었다. 또한, 월터 쇼트 육군 중장도 1계급 강등되어 소장이 되며 퇴역되었다. 두 장성이 가졌던 해군대장과 육군중장 계급은 정규 계급이 아닌 전시 진급[66] 한 임시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처분한 수뇌부에서도 크게 부담을 가진 건 아니었다. 또한, 전역과는 달리 퇴역 처리되며 예비역 소집 대상에서조차 제외당했다. 판단 미스로 기습을 불러 경계에 실패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징계로 2계급 강등한 뒤 나이가 있어서 어차피 예비역 소집은 불가능한 상태라 그냥 강등 후 강제전역시킨 것인데, 이게 진주만 공습 대처 미스라는 배경과 겹쳐서 사실상 불명예 전역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퇴역군인으로써의 혜택은 제대로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계급 강등 후 전역당한 것 자체가 오명인지라 본인들 스스로 명예회복에 힘썼고, 그들 사후에 유족들 또한 명예를 회복해달라며 계속 대통령에게 청원을 냈다. 이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면 무죄가 되어 명예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단, 킴멜 제독은 본래 소장 계급이었고 대장이 부임하는 자리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부임시키기 위해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시킨 것이고 그의 전임자들도 많은 경우가 임시로 대장을 달았다 임기 종료 후 정규 계급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은 미국 건국부터 상비군을 소규모로 뒀던 미군의 전통 상 고위 계급의 상설화가 어려웠던 여건(그 해소 시점이 바로 2차대전으로 그 영향은 현재까지 작용하고 있다)에서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었고 평시 상황이라면 킴멜 또한 동일했겠지만 킴멜이 재직할 당시엔 미국이 전쟁에 대비해 군비를 막 팽창시키던 시점으로 만약 진주만 기습을 잘 방어하고 개전 이후의 성과가 괜찮았다면 대장 계급을 정식으로 달았을지도 모르나 결과론적 제기일 뿐이다. 후임인 니미츠 제독 역시 소장 계급이었는데,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물론 니미츠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이후 정식으로 대장 계급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수까지 달았다.[67]
진주만 공습을 허용한 것에 킴멜 제독과 쇼트 장군에게만 책임을 몽땅 전가하는 것은 확실히 과한 감이 없잖아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논란이 존재한다. 헐 노트가 거부당한 시점에서 미국은 일본과의 개전이 임박했음을 인지하고 있었고, 일본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기습으로 개전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일본군이 과연 어디를 공격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미국의 전략가와 정책 결정자 중에 진주만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국무부 장관 헐은 마닐라나 괌을 예측했고 해군참모총장 스타크 대장은 동남아시아에 일본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관련글
이 둘도 억울했는지 군사재판을 자진해서 신청하는 걸로 시작해서 거절당하고 전역한 뒤에도 계속 회고록을 펴내서 자신들을 스스로 변호했고 이들이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르포 작가들의 책도 자주 나왔다. 특히, 킴멜의 자식들 중 1944년에 잠수함 USS 로발로(Robalo) 함의 함장으로 재직 중 함을 잃고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사망한 장남 매닝 킴멜 소령을 제외하고 차남 토마스 K. 킴멜(해군 대령 퇴역)과 삼남 매닝 킴멜 3세는 부친이 작고한 이후로도 부친의 명예회복 운동을 주도해나갔다. 킴멜 소령 역시 살아생전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킴멜 소령은 복무 시절 무리하게 교전에 임한 경우가 많아서 상부에서도 이를 우려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 전공에 매달린 것으로 추정한다.
매닝 킴멜 소령은 해군 내에서 자식에게까지 패장의 자식이라고 욕하거나 하진 않고, 도리어 연좌제 같은 거 없으니 제발 좀 자제하라고 할 정도로 의욕있게 복무했다. 함을 잃고 포로가 된 이유도 전공을 세우기 위해 무리하게 공격하려다가 역습을 당했다는 해석이 많다. 차남인 토마스 킴멜도 형과 마찬가지로 잠수함 장교로 복무했는데, 매닝이 전사하자 어니스트 킹 참모총장의 직권으로 함선 근무에서 강제로 배제되어 후방 지상 근무를 해야 하자 격렬히 반대했으나 결국 명령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역시 연좌제가 아니라 오히려 토마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킹의 결단이었다. 토마스까지 사망하면 킴멜은 자식을 모두 잃게 되기 때문에 킹이 이런 결단을 내린 것.(삼남인 매닝 킴멜 3세는 전쟁이 끝난 뒤에 출생)
이러한 청을 받아들여 1999년 미국 상원은 투표에 부쳤는데 찬성 52 반대 47이라는 아슬아슬한 결과가 나와 이들의 계급을 회복시켜주도록 대통령에 권고했으나 당시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물론 후임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도 거절했다. 물론 유족들은 승복하지 않고 계속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일단 현재까지는 되지 않았으며 이들은 따라서 퇴역(retired) 소장 신분으로 되어 있다.
두 척의 갑표적 잠수함을 격침한 USS 워드 함의 함장 아우터브리지 소령은 구축함 함장으로 근무한 지는 며칠 되지 않았으나, 갑표적을 발견해 격침시킨 공로로 능력을 인정받아 해군 십자장을 수훈했다. 이듬해엔 워싱턴 DC의 해군수송사령부에 배치되었다가 알렌 M. 섬너급 구축함 DD-725 오브라이언(O'brien) 함의 함장으로 다시 바다에 나갔고, 이 구축함은 태평양이 아닌 대서양으로 배치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여했다. 오브라이언은 다시 태평양으로 돌아와 레이테 해전에도 참가했으며, 이 때 가미카제의 공격으로 손상을 입는다. 공교롭게도 그가 첫 함장을 맡았던 구축함 워드 역시, 진주만 공습 3년 뒤인 1944년 12월 7일에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종전 후 해군대학 교장 및 구축함 전대장 등 구축함 관련 업무를 맡다 소장으로 1957년 퇴역, 1986년 9월 20일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본 해군 항공기들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도 제대로 경보하지 않아 재판에 회부되었던 당직사관 커밋 타일러 육군 대위는 무죄를 선고받아 계속 근무했다. 무죄판결의 가장 결정적 사유는, B-17 폭격기들의 비행일정을 통보받은 이후이기 때문에 레이더의 항적을 적기가 아닌 본토에서 오는 B-17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지극히 합리적이라는 것.[68] 이후의 경력도 딱히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미합중국 공군 창설 후엔 공군으로 전군해 중령으로 퇴역했다. 후일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의 판단을 후회하고 여러 번 악몽에 시달리긴 하였다. 또한 당시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편지들이 종종 오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 때의 판단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2010년 1월 23일, 96세로 샌디에이고에서 사망했다. 커밋 타일러의 부고 기사
위의 유명한 전문을 보냈던 램지 소령은 미드웨이 주둔 부대의 작전관으로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전했고, 항공모함 CVE-21 USS 블록 아일랜드(Block Island) 함의 함장을 지내며 항모가 격침됐을 때 생존한 50명 중 한 명이 되기도 했다. 이후 소장 계급으로 퇴역한 뒤 1972년 9월 26일, 73세로 사망했다.
도리스 밀러는 항모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직접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았고,[69] 이는 최초의 흑인 수병 출신 훈장 서훈기록이다. 또한 그는 전쟁영웅으로서 전쟁채권 판매홍보에도 동원되고, 해군 모병 포스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후 호위항공모함 CVE-56 USS 리스컴 베이에 배치되어 근무하다, 타라와 전투가 끝난 직후 길버트 제도에서 이 항모가 일본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격침될 때 실종 및 전사 처리되었다.[70] 최종 계급은 조리하사였다. 2015년에는 오바마 정부 때 밀러 하사의 훈장을 명예 훈장으로 승격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2020년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제럴드 R. 포드급 항공모함 4번함(CVN-81)의 함명이 도리스 밀러로 확정되었다. 전통적으로 미해군 항공모함에는 미해군에 대한 업적이 있는 전직 대통령, 전직 장관, 전직 제독 또는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함선의 이름이 붙었다. 도리스 밀러는 사병 및 흑인 최초로 미해군 항공모함의 이름이 될 파격적인 사례다.
6.5.1.1. 진주만의 명예훈장 수훈자들[편집]
공습 이후 여러 사후평가들을 통해 12월 7일 개전 당시의 공훈을 사 진주만에서 총 15명의 명예훈장 수훈자가 탄생했고, 그중 10명이 사후 수훈이었다.
아래는 사후 수훈자 명단이다.
- 아이작 C. 키드(Isaac C. Kidd): 공습 당시 해군 소장으로 제1전함전대 사령관이었다. 공습 당시에는 함에 머물지 않았지만, 공습을 인지하자마자 기함 애리조나로 복귀하고 함대를 수습하는 데 최선을 다했으나 진주만 비극의 상징이 된 애리조나 탄약고 유폭과 동시에 실종, 사실상 전사했다.[71]
- 프랭클린 반 발켄버그(Franklin Van Valkenburgh): 공습 당시 해군 대령으로 전함 애리조나의 함장이었다. 키드 제독과 마찬가지로 애리조나에서 최후까지 지휘를 하다가 역시 실종, 사실상 전사했다. 키드 제독과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수습된건 해사 임관 반지가 전부였다고 한다.
- 머빈 S. 베니언(Mervyn S. Bennion): 공습 당시 해군 대령으로 전함 웨스트버지니아의 함장이었다. 공습으로 USS 테네시에서 날아온 파편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자신의 치료보다는 최후까지 함과 부하들의 안위를 생각하며 죽는 순간까지 지휘에 전념하다가 부상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전사했다.
- 프랜시스 C. 플래허티(Francis C. Flaherty): 공습 당시 해군 소위로 전함 오클라호마에서 근무 중이었다. 연거푸 어뢰를 맞은 오클라호마가 전복하고 전원 퇴함명령이 내려졌을 때, 플래허티는 전우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스스로의 탈출을 포기하고 정전으로 암흑이 된 포탑 속에서 손전등으로 탈출로를 알려주어 수많은 장병들을 살렸다. 플래허티는 끝내 탈출하지 못해 실종되었고, 그의 헌신 덕에 살아난 이들의 증언으로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플래허티의 시신은 2019년이 되어서야 확인되었다.[72]
- 제임스 R. 워드(James R. Ward): 전함 오클라호마 소속 수병. 플래허티와 함께 포탑 속에서 다른 동료들의 탈출을 끝까지 돕다가 정작 본인은 탈출하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워드의 시신은 2021년에 확인되었다.
- 에드윈 J. 힐(Edwin J. Hill): 전함 네바다의 갑판사관. 공습이 시작되자 도끼를 들고 바다로 다이빙하여 부두로 헤엄쳐 올라간 뒤 그 도끼로 정박 중인 네바다를 묶고 있던 훗줄들을 모조리 내리찍어 네바다가 항해에 나서는 데 1등 공신이 되었다. 공습 당시 전함들 중 조금이라도 항해한 함선은 네바다가 유일하다. 그렇게 훗줄을 다 끊은 후 네바다가 출항하자 다시 바다로 다이빙하여 헤엄쳐 함에 복귀, 원래 업무로 복귀하여 네바다를 노리는 일본군의 공습에 맞서다가 전사했다.
- 허버트 C. 존스(Herbert C. Jones): 전함 캘리포니아의 소위. 캘리포니아에 대한 첫 공격 직후 연기 속으로 들어가 질식 위험에 처한 전우들을 구해냈으며, 이후 자신의 보직이 아님에도 주인 없이 방치되어 있던 대공포를 붙잡고 공격해오는 일본기들에 맞섰다. 탄약이 떨어지자 자원하여 탄약고로 내려가 탄약들을 옮기기 시작하다 공습에 피탄되어 탈출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그를 어떻게든 데리고 탈출하려던 전우에게 배가 언제 침몰할지 모르니 나까지 살리려 하지 말고 어서 탈출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 토머스 J. 리브스(Thomas J. Reeves): 전함 캘리포니아 소속 통신부사관으로 위의 허버트 C. 존스와 함께 불길과 연기 속에서도 죽을 때까지 탄약고에서 손으로 탄약을 대공포좌로 옮겼다.
- 로버트 R. 스콧(Robert_R. Scott): 전함 캘리포니아 소속 기관부사관. 캘리포니아가 피격되어 침수되기 시작할 때 그의 업무구역인 에어 컴프레셔가 있는 곳도 침수되어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모두들 탈출하자고 외쳤지만 스콧은 이곳은 내 관할이다. 전우들에게 끝까지 공기를 공급해야 한다.며 탈출을 거부했다.
- 피터 토미치(Peter Tomich): 전함 유타 소속 기관부사관. 유타가 침몰하기 시작하자 그는 다른 기관실 요원들을 모두 탈출시킨 후 최후의 순간까지 함에 전력을 공급하는 작업을 계속하다가 전사했다. 피터 토미치의 명예 훈장은 1942년에 수여되었지만, 토미치가 미혼에다가 홀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유족을 찾지 못해서 전달되지 못하고 미 해군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수여 된지 64년 만인 2006년에 크로아티아에 거주하고 있는 사촌 형제가 대리로 수여했다.[73]
- 존 W. 핀(John W. Finn): 미 해군항공대 카네오헤 만 비행장에서 근무하던 항공병기사. 기습으로 주기된 기체들이 모두 파괴당했음에도, 멀쩡한 기관총들을 꺼내어 긴급 거치, 2시간여에 걸쳐 일본군들과 필사의 사투를 벌였다.[74] 치열한 교전으로 왼팔 어깨 등에 심각한 총상을 입고 공습이 끝난 후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응급치료만 한 후 당일 저녁에 기지에 복귀하여 기지를 정비하는 데 합세, 모두를 놀라게 했다. 1942년 9월 항모 엔터프라이즈 함상에서 니미츠로부터 직접 명예훈장을 수훈받았다. 2010년 타계했는데, 진주만의 명예훈장 수훈자 중 가장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 새뮤얼 G. 퓨콰(Samuel G. Fuqua): 해군 소령으로 전함 애리조나에 소속되어 있었다. 애리조나 탄약고 유폭 이후 살아남은 최선임 장교로서 잔존 인원들을 지휘하여 화재확산을 막고 생존자 구출 및 퇴함을 지휘하여 추가 피해를 막은 공로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대서양 방면에 배치되었다가 1945년에 태평양으로 돌아와 필리핀, 보르네오 전역에 종군하였고 1987년 타계했다.
- 잭슨 C. 패리스(Jackson C. Pharris): 전함 캘리포니아에 배속된 병기사로, 대공사격을 위한 탄약이 부족하자 침수된 구역을 잠수해 들어가 탄약고에서 탄약을 꺼낸 후 다시 침수된 구역을 잠수해 통과하여 탄약을 전달했다. 이하 반복. 그 와중에도 침수구역 때문에 탈출을 못하는 동료들 몇 명을 탈출시키는 공로를 세웠다. 그러나 잠수 과정에서 유출된 기름을 흡입하는 바람에 폐에 기름이 들어가 약 2년여를 병원에 있었다. 퇴원 후 일선에 복귀하여 순양함 세인트 폴에서 복무했으나 이번에는 가미카제 공격으로 등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1948년에 소령으로 전역했고, 1966년에 명예 훈장 수여식 행사에 참석했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인근 군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다음날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 도널드 K. 로스(Donald K. Ross): 전함 네바다의 기관장교. 상술한 에드윈 J. 힐의 공로로 네바다가 출항한 이후 함에 지속적으로 동력을 공급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그가 근무하던 전방 발전기실이 열기와 연기로 가득차자 부하들을 모두 탈출시킨 후 홀로 남아 모든 작업을 수행하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다행히 그가 걱정되어 온 전우에 의해 구조되어 의식을 차렸으나 이번에는 후방 발전기실로 가서 네바다가 좌초할 때까지 동력공급 업무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시력을 일시적으로나마 거의 잃었다. 치료 이후로도 계속 네바다에서 근무하여 주로 유럽 전역에서 종군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 용기병 작전에 참여했으며, 1956년에 소령으로 전역했고, 1992년에 타계했다. 유해는 네바다가 침몰한 해역에 뿌려졌다.
- 캐신 영(Cassin Young): 수리함 USS 베스탈의 함장. 일본군의 공습으로부터 배를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싸웠으며, 애리조나가 탄약고 폭발로 침몰하면서 베스탈에 그 여파가 미치는 바람에 바다에 빠졌지만 자력으로 수영을 해서 베스탈에 복귀한 후, 베스탈을 구하기 위해 애리조나로부터 떨어질 것을 명령했고 그 조치로 함을 구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훈장을 받았으며, 공습 이후 1942년 2월에 대령으로 진급했다. 1942년 11월 9일에 중순양함 샌프란시스코의 함장이 되었으며 11월 13일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에서 전사하고 해군십자훈장을 추서받았다. 진주만 공습 때 생존한 명예 훈장 수훈자 중 유일하게 종전 이전에 죽은 인물.
6.5.2. 일본군 측 인물[편집]
나구모 제독은 진주만 공격과 연이은 남방작전에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한 공을 세웠지만, 야마모토와 달리 일본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6개월여 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를 거두면서 나구모는 항공모함 부대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시 복귀하여 과달카날 전역에 참가했지만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상처뿐인 승리[75] 를 거둔 끝에 결국 항공모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수상함대 사령관직을 이어가다가 사이판 전투에서 자살했다.
- 이 이면에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과의 불편한 관계가 있었다. 애초부터 나구모는 전함을 중시하는 함대파의 핵심 인물중 하나였던 터라 조약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야마모토와는 이전부터 대립하던 사이였다. 항공모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연공서열 때문에 앉게 된 것[76] 이어서 나구모 스스로도 이 자리를 불편해했고, 나구모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야마모토 역시 이런 상황을 그리 내켜하지 않았지만 연공서열이 지배하는 당시 일본 해군내에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진주만 공습을 전후로 더욱 심해졌다. 진주만 공습을 강하게 반대했던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나구모였으며, 이후 진주만에서 3차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온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졌다. 진주만 공습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야마모토의 불만이 반영되면서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공은 격하되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야마모토는 나구모를 바로 해임해버리고 싶었지만 승리한 장수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가는 커다란 후폭풍이 닥칠게 뻔했고, 이후 남방작전의 공이 더해지자 나구모를 끌어내릴 명분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속사정 때문에 연합함대 내에서 나구모의 발언권은 사실상 없는 셈이었으며, 남방작전 이후의 전략적 행보에 대해 육군에서 주장하는 수세적인 전략을 지지했다가 연합함대 내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나구모가 항공전 분야에 무지했던게 역으로 야마모토의 명령에 달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으로 이어지자 야마모토도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선에서 만족하던 터였지만...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와 진주만 공격을 공중에서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후치다 미쓰오 중좌[77] 는 모두 전후까지 살아남았다. 둘은 해군병학교 동기였고 매우 친한 친구로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이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둘 다 진주만 공습 직전인 10월 15일자로 중좌로 승진하였다. 이들은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다가 아카기가 격침될 때도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두 사람 모두 대좌까지 진급했고, 겐다는 항공자위대의 막료장(참모총장)까지 지냈고 후에 자민당 일본 참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록히드 사건 당시 수뢰혐의로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후치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고 이후 종전 때까지 지상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 보도를 하는 한편 귀환한 부상병들에게 연금생활을 강요했으며 이에 후치다는 전쟁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한다. 패전 후 진주한 미군 조종사에 의해 기독교를 접하고, 선교사가 되어서 간증하러 1970년대 한국도 방문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하는 연설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회고록을 펴내면서 태평양 해전사 연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한 <진주만 공격 총대장의 회심>이라는 회고록을 내어 진주만 공습의 준비와 전투 과정을 잘 증언해 놓았다.[78]
한편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입안한 연합함대 참모장 쿠로지마 카메오 대좌는 소장으로 전쟁을 마쳤고 전후 기업가로 변신했다.
6.6.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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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지금도 정신 나간 극우파들이나 역사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일부 일본인들은 진주만 공습을 일본이 미국에 타격을 가했다는 것만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5ch 등에서는 넷 우익들이 "우린 세계 초강대국과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을 치른
그러나 겉보기에는 이 진주만 공습의 화려해보이는 전과와는 달리 역사와 군사사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전사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아는 자들은 '진주만 공습이 일본제국의 패배, 더 나아가 일본제국을 포함한 추축국들의 패망으로 향하는 시발점이었다.'는 역사적 분석에 의의를 둔다. 이는 후대인들뿐 아니라 야마모토 이소로쿠와도 같은 당대의 일본 식자들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바였다. 결국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80] 선제 공격은 미국인들을 격분하게 만들었으며, 초강대국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인 결과, 일본은 압도적인 미국의 힘에 결국 밀려 처참하게 허덕이다가 패하여 몰락하기에 이른다.
왜 일본 연합합대 사령부가 이 완벽한 기습공습에 대해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을지를 생각해보자. 진주만은 미국의 가장 중요한 해군 군사시설임에 틀림없었고 이곳에 대한 선제공격은 바로 미국과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즉 진주만 자체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태평양 함대 자체를 괴멸 직전까지 몰고간 후 최대한 복구 시간을 지연시켰어야 했는데, 일본군이 비록 미 태평양 함대에 큰 타격을 주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을 한 척도 잡지 못했고[81] 유류시설 파괴도 하지 못했다. 일본 입장에서는 이미 함대를 다 격침시켰으니 석유만으로는 할 수 있는게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함대 공격보다는 유류시설을 전부 파괴하는 데에 집중했다면 미국은 공습 이후 연료부족 문제에 시달리며 단기간에 태평양 함대를 복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82] 즉 미국이 가장 해결하기 쉬운 부분에 모든 공격을 집중했으니 태평양 함대에 대한 일시적 복구가 가능했고 결국 미드웨이 해전에 결과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미국이 전통적인 고립주의에서 벗어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진주만 공습 이전의 미국은 먼로주의의 영향으로 국제 분쟁에서 자국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는 이상 개입을 가급적 자제해 왔다. 게다가 국제적 질서 구축에 대한 참여에도 소극적이었다. 일례로, 1차대전 이후 국제연맹 창설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안한 것이었지만, 정작 미국은 고립주의가 강했던 미 의회의 반대로 참여하지 못 한 바 있다. 그러나 최초로 대규모 선빵을 당한 진주만 공습을 겪은 이후로, 미국은 현대에는 먼 나라의 분쟁이 곧 자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전후 미국은 국제연합 창설을 주도하였고, 예방전쟁(preventive war) 차원에서 타국의 분쟁에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개입을 하는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전쟁 등이다. 즉, 진주만 공습은 오늘날 세계 질서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6.7. 소련[편집]
흥미로운 점으로는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가 소련으로 새어나갔다는 사실이 있다.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를 알아내 소련에 보냈기 때문. 조르게는 독일 침공도 미리 알고 보고했었던 성과가 있으니 보고 자체는 믿었겠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진주만 공습과 미국 참전의 시작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불명이다. 당시 미국이 유럽의 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소련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바로 앞까지 진격하는 등, 제 코가 석자라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혹은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해서 자신들의 랜드리스 보급선을 막는 것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르게가 빼낸 일본군 남방작전은 소련에 큰 도움이 됐다. 조르게는 "모스크바가 함락되지 않는 한은 일본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타전했다. 소련은 그 정보를 접하고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정예사단 중 일부[83] 를 열차로 실어 와서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였고 이들은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일본은 독일이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소련을 후방에서 공격하겠다고 독일에게 알렸었는데 일본의 행동으로 결국 독일의 모스크바 공략이 더 어렵게 됐으니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의 팀웍은커녕 팀킬도 이런 팀킬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동맹이랍시고 할힌골 전투 직후의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과,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소련과 일본의 불가침 조약을 생각해보면 애초에 팀워크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
7. 창작물에서 묘사한 진주만 공습[편집]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공습이어서, 태평양 전쟁을 다루는 창작물에선 직간접적으로 1번 이상은 언급하는 편이다. 진주만 공습 자체를 묘사한 창작물로는 다음의 예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미국의 고립주의를 깨트린 중요한 분기였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에서 분기하는 대체역사의 가능성들에서 중요한 트리거중 하나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 하와이 말레이 충해전: 1942년에 만들어진 일본 전쟁 영화로 일종의 해군 입대를 권유하는 홍보 영화에 가깝지만 후반부의 진주만 공습신은 볼만했다.
- 태평양의 폭풍: 1960년 당시 일본 명 배우들이 다수 동원된 영화로 초반부에 진주만 공습하는 씬이 잠깐 나오는데 마치 하와이 말레이 충해전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 도라 도라 도라: 철저한 고증을 거쳐서 창작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수준으로 상세하게 묘사했다.
- 벽람항로: 2차 세계 대전을 소재로 한 함선 모에화 게임답게 도입부인 1장이 진주만 공습을 모티브로 했다. 아예 1장 챕터 이름이 일섭은 '도라 도라 도라'고, 진주만 공습을 당한 미국에 서비스하고 있는 글섭에서마저 'TORA! TORA! TORA!'로 나온다. 그 외의 서비스 국가들에서는 '진주만을 기억하라'로 나온다. 참고로 여기 중국 회사다. 그래서 일본 눈치를 안본다.
- 진주만: 마이클 베이 감독의 영화. 공습 장면은 매우 화려하고
퇴역 구축함까지 시밤쾅시키며고증에 맞게 잘 표현했으나 빈약하고 지루한 분위기의 스토리 때문에 영화 자체는 혹평을 받았다.
- 미드웨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미드웨이 해전이 중심인 영화라 길게 다뤄지지는 않지만, 미드웨이 해전까지 이어지는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알리고 주요 인물들의 전투 의지를 불사르는 계기가 되게 한다. 20년 전에 개봉했던 영화 진주만에 비해 할리우드씬을 많이 줄이고,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할 수 있는게 영화 진주만과는 달리 한 사람이 여러 대의 일본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씬이 등장하지 않는다. 확실히 현실고증을 맞추려는 각고한 노력을 보인 셈.[84]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둘리틀 특공대까지 같이 나온다.(엔터프라이즈가 호넷을 호위했기 때문)
- 패러독스 사의 2차 대전 배경 대전략 게임인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선 역사 재현 테크 트리인 국가 중점 트리에서 진주만 도박(Pear Harbour Gambit)이라는 이름으로 묘사했다.
진주만의 해군 기지는 일본에겐 손쉬운 타겟입니다. 함대를 주둔 시킴으로서 태평양의 우리 군사력을 과시할 것입니다. 일본이 이런 과감한 조치에 도전 할 수 있을까요?연구 조건이 국가 중점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일본에 대한 무역 차단) 완료. 하와이에 주력함 7척 이하 주둔시 실행가능으로 사실상 일부러 취약한 해군 기지에 주전력처럼 보이지만 잃어도 치명적인 타격은 아닌 함대를 방치시킴으로써 일본의 공격을 유도하는 도박을 했다고 위의 음모론을 차용했다.
다만 맨더건 DLC와 패치에서는 '일본에 대한 금수조치'와 '진주만 도박' 중점이 사라지고 디시전 발동시 대동아공영권 상대로 전투력이 오르거나 일본의 미국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는 '전쟁 계획 주황'과 태평양 섬들의 방어력과 해군기지를 늘려주는 '태평양 방어' 중점이 기존 대일 국가중점들을 대채했다. 아마 미국이 진주만 공습을 유도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음모론이 설득이 없어서 그런듯 하다.
그리고 해당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의 배경 스토리에 의하면 진주만 기습이 원역사보다 더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미해군의 유류저장고가 파괴되고 엔터프라이즈와 렉싱턴 까지 격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반부터 심각한 타격을 입은 미해군은 조지프 케네디 대통령[85] 의 삽질까지 힘입어 원 역사처럼 일본 해군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했고 결국 전쟁 말기 일본 항모에서 이륙한 독일군 폭격기가 진주만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미해군 태평양함대 전력을 소멸시키면서 미국의 참패로 끝난다. [86]
DLC로 있는 연합군 연설 팩에서는 항목 위에 있는 루즈벨트의 치욕의 날 연설을 들어볼 수 있는데,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을 개시했을 때 해당 연설이 등장하게 된다. 대부분, 일본의 역사루트 중점인 필리핀 공격 달성 이후 필리핀에 선전포고를 하면 미국이 자연스레 참전하게 때문에 자주 듣게 되는 연설.
- 메달 오브 아너: 퍼시픽 어썰트에서도 초반에 등장한다. 미션 시작 전 항공모함에서 일본 전투기가 출격하는 장면이 나오며, 이후 애리조나함에 배치받기 위해 지프를 타고 이동하다 마주친 야한잡지를 보던 수병 무리와 만담을 나누던 도중 일본 전투기가 나타난다. 맨처음 일본 전투기를 발견한 수병하나가 자국 육군측 전투기인줄 알고 육군을 욕하지만, 이후 다른 수병이 일본측 전투기임을 알아챈 순간 일본 전투기들의 기총소사가 시작되며 진주만은 혼돈의 아수라장이 된다. 이후 부두로 가서 PT 보트에 올라타 전투기와 싸우다가 어뢰를 맞고 옆구리에 구멍이 난 전함에 올라타는데 그게 바로 웨스트버지니아.
- 코에이의 전략 시뮬레이션인 제독의 결단 시리즈에서는 단기 캠페인으로 항상 등장하며, 장기 캠페인인 개전 직전 시나리오에서도 항모기동부대가 공습을 위해 태평양에 진출해 있는 상태로 등장한다. 항모는 해상에 빠져나가 있고 전함을 잡는게 고작이기 때문에 기습에 성공해 봐야 그다지 좋을게 없다. 차라리 진주만 대신 해상의 미 항모를 찾아내서 섬멸하는 편이 낫다. 미국 측으로 개전 직전 시나리오를 플레이할 경우 매우 높은 확률로 일본 기동함대가 진주만을 공습하는데, 이걸 사전에 찾아내 섬멸하면 게임 진행이 매우 쉬워진다.
- 에이스 컴뱃 7 Skies Unknown의 DLC 2번 임무 〈Anchorhead Raid〉는 구도와 중간 무전 내용이 진주만 공습을 오마주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의 기타 문단 참조.
- 워 썬더에선 가상 시나리오로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상륙을 시도 한다.
- 장군의 영광 태평양 전쟁 편 연합국 첫 번째 미션이 진주만 공습을 다룬다.
- 세계 정복자 3 추축국 7번 미션이 진주만 공습을 다루며, 연합국 2번 미션은 이때 일본이 진주만에 상륙해 하와이 일대를 점령한 상태에서 미국이 탈환을 시도하는 미션이다.
- 세계정복자 4편에선 아시아 연합국 1편, 추축국 1편이 진주만 공습을 다룬다.
- 나루토 질풍전 극장판 인연에서 비행부대가 모함에서 사출되어 나뭇잎 마을을 공격하는 장면은 진주만 공습에서 따온 것이다.
- 도미네이션즈에서 이벤트 에피소드와 할인 이벤트 중 하나의 추가 정보에서 등장한다.
8. 여담[편집]
- 야사에 의하면 독일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는 "이런 게 바로 전쟁이다. 우선 공격부터 하고 선전포고는 나중에 하면 된다"고 크게 기뻐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런데 히틀러는 정작 선전포고를 나중에 한 수준이 아니라 불가침조약이나 평화협정 같은 것도 다 무시하고 쳐들어갔다. 아니, 애초부터 나치 독일이 선전포고하고 쳐들어갔던 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폴란드 침공도 자작극을 일으키며 공격했으며, 노르웨이 침공과 그 중간에 있던 덴마크는 최후통첩에 응답하기도 전에 공격했다. 독소전쟁에서도 침공을 시작 한 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저지대 침공, 유고슬라비아 침공 역시 모두 기습이었으며, 심지어는 안슐루스마저 무단으로 군을 진군시켰다. 그나마 프랑스 침공의 경우 프랑스와 영국이 폴란드 침공에 응답해 먼저 선전포고를 때린 경우. 애초에 국제법 따위는 쌈싸먹은 막가파스런 집단이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진주만 공습보다 먼저이므로 저 야사가 사실일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다.
- 진주만 공습 뒤로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의해 캐나다나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용소에 강제 격리되었다.[88]
- 한편 진주만 공습이 알려지자, 일본 전 국토는 흥분과 열광의 도가니에 휩싸였고, 일본 젊은이들은 앞다투어 일본 해군에 자원 입대를 하러 몰려들었다. 이는 일본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지지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일본 국민들은 전쟁도 원치 않았는데 군부의 협박으로 어쩔 수 없이 따른 희생양이라는 주장은 이 증거에 비추어 보건대 추잡한 변명에 불과하다.[89]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수훈함으로 꼽히는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는 원래 12월 6일에 진주만에 기항할 예정이었으나, 태풍을 만나 12월 7일로 입항이 미뤄진 덕분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 2022년 3월 16일에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화상 연설에서 진주만 공습과 9.11 테러를 기억하라는 말을 했다. 이로 인해서 웃지 못할 상황이 일어났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의용군 지원 의사까지 밝히며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던 일본인들이 진주만 공습 언급이 나오자 불쾌감을 표하며 우크라이나 지지를 철회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행위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정작 과거 본인들이 행했던 악행인 진주만 공습이 언급되자 불쾌감을 표하며 내로남불을 하고 있는 것이다. 편향된 교육과정을 통해서 객관적인 역사를 교육 받지 못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현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겠다.[90] 정작 러시아는 며칠 뒤에 일본과의 평화협정 협상을 중단해 버리면서 제대로 일본 극우에게 통수를 후려쳤다.
- 2022년 기준 진주만 공습 생존자의 총 수는 1,500명 미만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
8.1. 이후 태평양 전선의 규모[편집]
일부에선 "진주만 공습에 격노한 미 정부가 국력의 10%를 태평양 전선에 썼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져있기도 한데, 물론 미국이 일본보다 독일을 때려잡는데 더 많은 국력을 쏟아부은 것은 사실이다.[91] 이는 독일이 일본보다 더 위험한 적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중국을 제외하면 타국의 식민지를 공격하던 일본과 달리 독일은 국제외교의 중심이던 유럽 본토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또한 진주만 공습과 독일의 선전포고 이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이 즉각 미국으로 달려가 유럽 전선이 우선이라는 약속을 받아냈으며 미국이 대독전선에 집중한 것도 이러한 약속의 일환이기도 했다.[92]
그러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국력 10% 설은 거짓이다. 당시 일본해군은 ABDA 연합해군을 격파하고 아시아 쪽에선 꽤나 선전하고 있었고, 미 해군이 실제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르고 나서 당시 일본군이 절대 만만히 볼 세력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사실상 태평양 전쟁의 기세를 빼앗아오자 미 육군 쪽에서 "미드웨이에서 이겼으니까 이제 유럽 쪽에 집중해도 되지?"라는 식의 뉘앙스로 보급 우선권을 주장했다. 이에 열받은 미 해군이 1942년 12월 카사블랑카 회담에서 유럽으로 보내지만 말고 태평양 전선에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근거로 댔던 게 연합군의 전체 전쟁자산 중 15% 정도만 태평양 방면에 투입된다는 것인데 이것도 정확한 산출이 아닌 왜곡이 들어간 수치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당시 미 육군은 지중해 방면에 군을 집중하려 했던 처칠에게 반감을 가진 상태였고[93] , 이 말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직설적으로 하질 못하니 걍 해군 보고서를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모색했다고 한다. 결국 보급권을 가지고 갈등하던 미 육해군이 처칠이라는 공공의 적(?) 앞에선 한데 힘을 모은 셈. 그런데 그것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더니 작금에 와선 10%로 변질되어서 사실인 양 통용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100% 전력이 아닌 미국에게 일본이 패한 것은 사실이지만, 미 해군의 주력함들은 거의 태평양 쪽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전쟁 발발 이후 해군은 오히려 대서양 방면의 전력을 태평양으로 차출하기도 했으니[94] 적어도 해군의 경우에는 오히려 태평양이 주전장이니 주전력(특히 주력함)의 거의 100%[95] 가 일본을 상대하는 데 투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대서양에는 크릭스마리네가 잠수함을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상대인 데다가 동맹인 영국 해군이 크릭스마리네를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 해군 전사를 봐도 2차대전 내내 대서양에서는 이렇다 할 주력함간 대규모 해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9. 관련 어록[편집]
우리는 진주만을 향해 진격했고, 나는 암호를 크게 외쳤다. 도라, 도라, 도라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 일전에 달려 있다.
우리는 잠자던 거인을 깨우고, 결기를 불어넣었다.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한 독백.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 히틀러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인의 경우는 가루가 되어버리겠지."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진주만 공습을 부관으로부터 보고 받은 어니스트 킹 제독의 반응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우리는 3000년 동안 결코 패배한 적이 없는 국가를 동맹국으로 두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의 소식을 듣고 아돌프 히틀러가 한 말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10. 관련 문서[편집]
- 일본 제국정부 대미통첩각서: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 제국이 미국에 전달한 (사실상의) 선전포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