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대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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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조선
관련 문서: 조선/후궁
1. 개요[편집]
조선의 후궁을 설명하는 문서. 현종, 경종과 순종의 경우 후궁이 없다.
2. 태조[편집]
3. 정종[편집]
4. 태종[편집]
5. 세종[편집]
6. 문종[편집]
7. 단종[편집]
8. 세조[편집]
9. 예종[편집]
10. 성종[편집]
11. 연산군[편집]
12. 중종[편집]
13. 인종[편집]
14. 명종[편집]
15. 선조[편집]
16. 광해군[편집]
17. 인조[편집]
18. 효종[편집]
19. 현종[편집]
없음.
20. 숙종[편집]
21. 경종[편집]
없음.
22. 영조[편집]
23. 장조[편집]
24. 정조[편집]
25. 순조[편집]
26. 헌종[편집]
27. 철종[편집]
28. 고종[편집]
29. 순종[편집]
없음.
30. 여담[편집]
- 보통 비빈들은 본명이 알려지지 않으나 《조선왕조실록》[101] 이나 야사에 이름이 알려진 경우도 있다.
- 태조의 후궁 화의옹주 김씨(김칠점선)
- 정종의 후궁 숙의 기씨(기자재)
- 태종의 후궁 서경옹주(금영)[76] , 혜선옹주 홍씨(가희아)[77] , 신순궁주 이씨(이정민)[78]
- 단종의 후궁 숙의 권씨(권중비)
- 세조의 후궁 폐소용 박씨(박덕중)[79]
- 성종의 후궁 귀인 엄씨(엄은조이)[80] , 귀인 정씨(정금이)[81]
- 연산군의 후궁 폐숙의 이씨(이정이)[82] , 폐숙용 장씨(장녹수)[83] , 폐숙용 전씨(전전비)[84] , 폐숙원 김씨(김귀비)[85] , 폐숙원 최씨(최보비)[86]
- 선조의 후궁 폐소원 윤씨(윤희 or 윤귀희)[87] , 상궁 김씨(김개시)[88]
- 광해군의 후궁 폐수빈 허씨(허정순)[89] , 폐귀인 윤씨(윤영신)[90] , 폐소용 임씨(임애영)[91] , 폐숙원 한씨(한보향)[92]
- 인조의 후궁 상궁 이씨(이정민)
- 현종의 후궁 상궁 김씨(김상업)[93][94]
-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장옥정)[95]
- 장조의 후궁 숙빈 임씨(임유혜)[96] , 경빈 박씨(박빙애)[97]
-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성덕임)[98]
- 고종의 후궁 영보당 귀인 이씨(이순아), 광화당 귀인 이씨(이완덕)[99] , 복녕당 귀인 양씨(양춘기), 삼축당 김씨(김옥기)[100]
- 가장 장수한 후궁은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와 연산군의 후궁 폐숙의 윤씨로 88살 까지 살다 생을 마감했다.[103][104] 반대로 가장 단명한 후궁은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로 14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 자녀를 많이 낳은 후궁은 성종의 후궁 숙의 홍씨로 10명(7남3녀)을 낳았고 태종의 후궁 신빈 신씨도 10명(3남7녀)[105] 낳았다. 그 다음은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로 9명(4남5녀)를 낳았다.
- 간택후궁은 종2품 숙의부터, 승은후궁은 종4품 숙원부터 시작하는게 관례였지만 조선후기로 갈수록 이 관례가 다 지켜지지 않았다.(ex.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108] ,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109] ,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110] , 철종의 후궁들[111] , 무품 후궁들[112] 등)
31.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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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해의 관기출신으로 이름은 칠점선이다. 태조의 막내딸 숙신옹주의 어미이다[2] 조선초기 내명부 품계로 3품이었다.[3] 의령옹주의 친모. [4] 기생 출신이다.[5] 이름은 기자재. 4남5녀를 낳음[6] 아들 하나를 낳음[7] 4남1녀를 낳음[8] 아들 하나를 낳음[9] 기생 출신이다. 양녕대군이 큰아버지의 애첩인 것을 모르고 가까이했으며 알고도 가까이했던 여인이다.[10] 정종을 모시던 시녀로 환관 정사징과 내통하였다고 한다.[11] 궁에들어오기 전부터 첩이였다[12] 화산군 장사길(張思吉)과 관기 출신인 복덕(福德)의 딸. 아버지가 공이 많아 기녀 복덕이 낳은 자녀를 모두 면천시켜주었다[13] 그녀가 심온의 외손녀라는 설이있다.즉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의 조카라는 소리다. 심온의 둘째사위인 강석덕의 딸이라는것인데 강석덕의 아들인 강희안이 1419년 생이고 딸은 그보다 어리다는 기록도 있어, 생년의 기록이 잘 맞지 않아 그녀가 심온의 외손녀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14] 간택후궁으로 입궁하며 장의궁주에 봉해진다.[15] 간택후궁으로 입궁하며 명의궁주에 봉해진다.[16] 천민에다 궁녀출신이다. 어린나이에 세종의 아낌을 받아 오빠인 홍유근도 세도를 부리려했다. [17] 조선초기 내명부 정5품이었으나 후에 정6품으로 바뀌었다.[18] 세종의 서장녀 정현옹주의 생모이다. [19] 조선초기 내명부 정6품이었으나 후에 종6품 상기로 개칭되었다.[20] 1430년 옹주를 하나 낳았으나 봉작도 받기 이전에 사망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44년 음력 7월 10일에 벼락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21] 원래 귀인이었으나, 단종이 즉위하면서 빈으로 승격되었다.[22] 성종의 후궁인 귀인 권씨의 고모다.[23] 숙빈 홍씨의 외사촌 자매[24] 세자의 후궁에게 내리는 품계로 종3품.[25] 원래는 사칙의 품계를 받았었다. 사칙은 세자궁 내명부 종6품으로 후에 수칙(守則)으로 개칭되었다.[26] 이름은 권중비(權仲非).왕비간택시 참여하여 최종 간택에서 후궁에 낙점되었다. 다른 후궁인 숙의 김씨도 마찬가지이다. 단종의 폐위 이후 아버지 권완이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송현수와 단종 복위를 꾀하다 실패한 후 공신의 노비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 이후 세조 10년에 방면되었다.[27] 이쪽은 정순왕후나 숙의 권씨와는 다르게 아버지가 단종 복위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평온히 살았다고 한다. 게다가 병이 났을 때 무려 수양대군의 집에 피접을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수양대군과도 원만한 사이였던듯 하다.[28] 이름은 덕중으로, 임영대군의 아들인 구성군 이준에게 계속해 연서를 보냈고 구성군 이준은 그것을 세조에게 알렸다. 이로 인해 폐서인 되어 교형에 처해졌다.[29] 신숙주의 서녀이다.[30] 사헌 감찰(司憲監察) 이의생(李義生)의 첩(妾)의 딸을 뽑아서 동궁(東宮)에 들이었다. -《세조실록》세조 9년 12월 21일 을사 3번째기사[31] 《성종실록》성종 16년 5월 5일 갑인 1번째기사[32] 예종(睿宗)의 상궁(尙宮) 기씨(奇氏)가 졸(卒)하였다. 승정원에게 전교하기를,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 졸하였는데, 악(樂)을 듣는 것은 불가함이 없겠는가? 오는 17일 거둥 때에 고취(鼓吹)를 정지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후략) -《성종실록》성종 20년 3월 16일 3번째기사[33]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의 서조카[34] 경빈 박씨가 막내딸 혜정옹주 출산시기와 비슷하게 출산을 했다.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경빈의 눈치를 보던 궁안 사람들은 몸 상태가 좋지않은 나씨를 궁밖으로 빼냈고, 이에 나씨와 그녀가 임신중이던 왕자가 모두 사망한다[35] 덕양군의 어머니. 덕양군이 어릴 때 사망[36] 해안군의 어머니[37] 정순옹주, 효정옹주의 어머니. 드라마 대장금의 이연생의 모델이다.[38] 문정왕후의 둘째 오빠인 윤원량의 딸, 즉 문정왕후의 조카이다.[39]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사촌언니이다.[40] 임해군과 광해군의 어머니[41] 인조의 할머니로, 인조 이후의 모든 왕들은 인빈 김씨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42] 1619년에 옹주를 하나 낳았다. 하지만 이 옹주는 5살때 아버지 광해군이 폐위되는 바람에 정식으로 옹주에 봉작되지 못했다. 폐출된 뒤 외삼촌의 집에서 살다가 광해군이 죽고 3년상을 치른 후인 25살 때 혼인을 하였다. 박징원에게 시집을 가서 2남3녀를 낳았고 1664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3] 귀양간 광해군을 끝까지 귀양지에서 모셨다.[44] 교태를 잘 부리고 문서관리를 잘해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얼자출신으로 추정됨.[45] 인빈 김씨의 조카이다.[46] 인조 사후, 김자점의 옥사에 휘말려 폐서인 되어 죽었다.[47] 이름은 이정민. 귀인 조씨 무고사건으로 사사되었다.[48] 인열왕후의 미움을 받아 출궁해서 재혼까지 했다.[49] 조선 역사상 마지막 후궁 출신 왕비였으며, 희빈 장씨 사후 숙종은 후궁이 왕비가 될 수 없도록 법제화시켰다. 아들인 경종이 즉위한 후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었다.[50] 영조의 생모로 드라마 동이가 그녀의 일생을 다룬 드라마이다.[51] 숙종의 후궁들 중 유일한 간택 후궁.[52] 사도세자의 생모이자 정조의 할머니.[53] 2명의 딸을 낳았다[54] 사도세자와 관련하여 정조 즉위 이후 유배되어 사사되었다.[55] 1901년(고종 38년) 10월 11일 비(妃)로 추존되었다.[56] 본명은 성덕임, 정조의 첫사랑으로 알려져있으며 후궁들 중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를 15년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다.[57] 순조의 유일한 서녀인 영온옹주의 생모이다. 옹주는 건강치 못했고 그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해 이복오빠인 효명세자가 안타깝게 여겼다 한다.[58] 헌종이 사망했을 당시 그녀는 17살의 어린나이[59] 궁녀 출신. 1848년 딸을 하나 낳았지만 출산 당일 사망함. 1814년생으로 헌종보다 13살이나 연상.[60] 1854년 철종의 서장자를 낳음. [61] 1859년 서2남 출산, 1861년 서3남 출산 [62] 1862년 서4남 출산[63] 1851년 서장녀 출산, 1853년 서차녀 출산[64] 1856년 서3녀 출산[65] 서6, 7녀 출산[66] 서5녀 출산[67] 보통 '엄귀비'라 불리는데, 그녀는 '귀비'가 아니라 '황귀비'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잘못된 호칭이다.[68] 완화군 이선의 생모이나, 아들인 완화군은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69] 의친왕 이강의 생모이다. 생몰년도가 정확하지 않으나 궁인으로 있다가 아들 의친왕이 10살 때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1906년(광무 10년)에 귀인으로 봉작되었다. 아들도 낳았으나 당호를 받지 못했다. [70] 고종의 서4남인 이육을 낳았다. 왕자는 3살의 어린나이로 사망한다 [71] 고종의 막내아들 이우를 낳았다. 이우 왕자는 어린시절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72] 명성황후가 살아있던 시절 고종의 딸을 하나 낳는데 역시 어려서 사망한다. 딸은 낳은 그녀도 당호를 받았는데 의친왕의 생모인 귀인 장씨가 당호를 못받은 것은 견제라고 볼수 있다[73] 덕혜옹주의 생모이다.[74] 1890년 ~ 1970년. 마지막 승은 상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자식을 낳지는 못했지만 고종 사후 순종(당시 창덕궁 이왕)에 의해 삼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 받았다.[75] 인터넷을 찾아보면 고종의 후궁 중에 상궁 염씨가 기재되어 있는 정보가 많은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로 고종의 딸을 자처한 '문용옹주' 이문용이 생모라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염씨.[76] 이름이 금영인지 성이 김씨인지 금씨인지는 모름[77] 기생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이름은 본명이 아니라 기명(예명)일 가능성도 있다.[78]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79] 《조선왕조실록》[80] 《조선왕조실록》[81] 《조선왕조실록》[82] 《조선왕조실록》[83] 《조선왕조실록》[84] 《조선왕조실록》[85] 《조선왕조실록》[86] 《조선왕조실록》[87] 《조선왕조실록》[88] 《조선왕조실록》, 《계축일기》, 《공사견문록》, 《연려실기술》[89] 《선원록》[90] 《계해정사록》[9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92] 《한숙원전》[93] 《조선왕조실록》[94] 삼복과 간통했다는 혐의로 받아 유배를 갔다.(홍수의 변)[95] 《단암만록》[96] 《한중록》[97] 《한중록》[98] 《이재난고》[99] 《경향신문》[100] 《조선일보》[101] 실록에 후궁의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는 보통 후궁이 죄를 지어 언급 될 때가 많다.[102] 태조의 딸 의령옹주은 생년미상이지만 1379년 생인 남편과 동갑내기 혹은 나이차이가 많이나지않는다면 의령옹주가 가장 장수한 왕녀가 된다.[103] 왕비 중 가장 장수한 신정왕후(83살)와 왕녀 중 가장 장수한 정명공주(83살)[102] 와 비교해도 5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104] 다만, 후궁은 생몰년이 기록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 희빈 홍씨와 폐숙의 윤씨보다 더 오래산 후궁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두명과 비슷하거나 더 오래 살았던 것으로 추측되는 후궁 중 한명이 선조의 후궁인 순빈 김씨이다.[105] 정빈 고씨의 아들인 근녕군이 신빈 신씨의 아들이 아닌것이 밝혀져 신씨가 총 2남7녀를 낳은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태종신도비문》에서 신빈 신씨가 3남7녀를 낳았고 정빈 고씨가 1남을 낳았다고 기록되어있다. 함녕군과 온녕군 외에 봉작을 받은 신씨의 아들이 없는것으로 보아 일찍 사망한것으로 보인다.[106] 정현왕후, 장경왕후 등 후궁 출신 왕비들은 최종 지위가 왕비였음으로 제외[107] 공빈 김씨의 경우 생전에 왕비가 되지 못하고 사후 왕후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강등 당한 경우이므로 해당되지 않는다.[108] 승은궁녀에서 종2품 숙의로 시작[109] 승은궁녀에서 정3품 소용으로 시작[110] 승은궁녀에서 종2품 숙의로 시작[111] 승은궁녀에서 종1품 귀인 혹은 종2품 숙의로 시작[112] 입궁할 때부터 빈으로 책봉 *